利潤
(伊尹, 生沒年 未詳)은
하나라
末期부터
商나라
初期에 걸친 政治家이다. 商 王朝 成立에 큰 役割을 하였다. 이름은 지(摯)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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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說에 依하면, 이윤의 어머니는 大洪水에 휩쓸려가 뽕나무가 되었고 그 줄기에서 利潤이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利潤은 洪水의 神으로 보는 說이 存在한다.
成人이 된 後에는 料理人으로서 어느 貴族을 시중들었고 主人의 딸이 相議 君主인 자리(後날의
湯王
)에게 시집갈 때에 그 심부름꾼으로서 자리를 시중들었다. 이 때 그 才能을 자리에게 認定받아 上의 國政에 參與해 重責을 맡기에 이른다.
床이 下를 滅할 때에도 活躍했고 商 王朝 成立에 큰 役割을 하였으며 亞型(阿衡)으로서 湯王을 補佐해 數 百年동안 이어지는 商 王朝의 基礎를 굳혔다.
湯王의 事後에 그 아들인
外兵
과
重任
의 두 名의 王을 補佐한 後 重任이 世上을 뜨자 利潤은 태정의 아들 胎甲(太甲)을 擁立했다. 湯王의 孫子
胎甲
이 卽位한 後에도 利潤은 繼續해 이를 補佐하였다. 그러나 태甲이 卽位 3年 동안 暴惡해져 湯의 法을 지키지 않고 放蕩하여 國政을 어지럽혔으므로 利潤은 胎甲을 東宮(桐宮)으로 追放했고 攝政으로서 胎甲을 代身했다. 3年 後 태甲이 東宮에서 3年을 지내며 自身의 잘못을 뉘우치고 善하게 돌아왔다. 이에 利潤은 胎甲을 맞이하여 政權을 돌려주었다. 태甲이 德을 닦으니 諸侯가 모두 銀으로 되돌아오고 百姓은 安寧을 되찾았다. 利潤이 이를 가쁘게 여겨 「胎甲勳(太甲訓)」 세 篇을 3篇을 지어 胎甲을 稱頌하고 太宗(太宗)이라 불렀다.
利潤은 胎甲의 아들
玉庭
의 時代에 죽었다고 한다. 利潤을 泊에 葬事지내고 고단(咎單)은 利潤의 私的을 가르치기 위해 「옥정(沃丁)」을 지었다.
公安局
에 따르면
이척
(伊陟)은 이윤의 아들이라고 한다.
利潤은 「이훈(伊訓)」, 「使命(肆命)」, 「조후(?后)」를 지었다.
評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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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世에 利潤은 名臣(名臣)으로서 評價받고 있지만 胎甲의 追放한 일에 對해서는 有力한 臣下가 中間에 主君을 追放했다는 多少 否定的인 評價를 받기도 한다. 또 胎甲의 追放은
傳한
의
霍光
과 함께 後世에 自身과 사이가 좋지 않은 君主를 追放하고 싶은 有力者가 追放의 典據로 삼기도 하였다.
한便 《
竹書紀年
》에 伊尹이 胎甲을 追放한 後 스스로 王이 되었지만 7年 後에 胎甲에 依해 討伐되었다는 記事가 傳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