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식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윤한식 (尹漢殖, 1929~2008)은 韓國科學技術硏究院 名譽 夕座硏究員을 歷任한 大韓民國 의 科學者다.

學歷 [ 編輯 ]

  • 1949~1955 서울大學校 纖維工學科 (學事)
  • 1978∼1980 서울대학교 大學院 纖維工學科 (碩士)
  • 1980~1984 서울대학교 大學院 纖維工學科 (博士)

經歷 [ 編輯 ]

  • 1955~1961 釜山師範學校 物理敎師
  • 1961∼1964 釜山 (舊)隊員染料工業社 硏究室長
  • 1964~1967 釜山 (舊)凡兒合成化學工業社 技術常務
  • 1967~1979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先任硏究員
  • 1974~1974 美國 노스캐롤라이나 大學校 訪問科學者
  • 1979~1989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責任 · 夕座硏究員
  • 1994~1999 KIST 名譽硏究院, 호서대학교 碩座敎授

褒賞 [ 編輯 ]

  • 1976 國務總理 表彰
  • 1984 國民勳章 목련장
  • 1985 科學記者클럽, 第1回 올해의 科學者賞
  • 1987 大寒纖維工學回 技術上
  • 1992 科學技術者 功勞年金 第1號 終身 受惠者
  • 2022 大韓民國 科學技術有功者

生涯 및 業績 [ 編輯 ]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硏究에 매달렸던 天生 科學者였다. 實驗室에 偏光顯微鏡 하나 놓지 못하는 어려운 環境에서도 施設과 돈이 없어 硏究를 못 한다는 것은 핑계에 不過하다고 一鍼했던 그는 自身이 한 말처럼 한平生을 硏究에 바쳐 奇跡의 纖維라 불리는 아라미드 펄프를 開發하며 世界的인 科學者로 1等의 자리에 우뚝 올라섰다. 停年退任 後에도 "只今부터야말로 眞짜 硏究를 해볼 때"라고 意欲을 보였던 眞짜 科學者 윤한식. 누구의 硏究를 踏襲하는 것이 아닌, 世上에 없는 自身만의 硏究를 만들어갔던 그의 삶은 只今도 硏究 現場에서 膾炙되고 있다.

윤한식 博士는 1929年 慶尙南道 咸陽에서 태어났다. 서울 中央中高等學校와 서울대학교 工科大學 纖維學科를 卒業한 後 釜山師範學校에서 6年間 物理 敎師로 勤務했던 그는 技術을 開發하고 싶다는 熱望을 이기지 못하고 釜山의 隊員染料工業社의 硏究室長으로 자리를 옮겨 일했다. 1965年에는 釜山의 凡兒合成化學工業社에서 일했다. 會社의 設立에 積極的으로 參與했던 그는 技術上無로서 일했지만, 會社는 資金難 等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門을 닫게 되었다.

會社의 廢業으로 갈 곳이 없어진 그에게 새로운 機會가 찾아온 것은 이듬해였다. 1966年 設立된 韓國 最初의 政府出捐硏究所인 KIST는 産業技術 硏究開發을 目標로 人材들을 迎入했다. 多年間 企業 現場에서의 硏究開發 經驗을 인정받았던 그 亦是 KIST 硏究員이 될 수 있었다. 入社 後 그는 産業 現場에서의 技術 問題 解決을 위해 不撤晝夜 努力했다. 特히 平生을 纖維工學 硏究에 바쳤던 만큼 그의 纖維에 對한 硏究 熱情은 남달랐다. 그의 最高 硏究 業績인 高强度 아라미드 펄프 開發 亦是 그의 忍耐와 끈氣가 뒷받침 됐기에 可能한 成功이었다.

아라미드는 400∼500℃의 高溫에서도 타거나 녹지 않으며, 5㎜ 程度 굵기의 가는 실로 2t의 무게를 들어 올릴 程度로 强해 奇跡의 纖維로 불린다. 自動車用 타이어코드, 防彈조끼나 헬멧, 미사일 發射用 總桐, 旅客機 胴體, 自動車用 補强材 等 用途가 無限히 넓다. 1973年 美國 듀폰이 처음 商用化에 成功했다. 1970年代 當時 世界市場은 듀폰의 아라미드 纖維인 케블라(Kevlar)가 席卷하고 있었다. 이에 尹 博士는 아라미드 纖維의 國産化를 위한 硏究를 推進했고, 마침내 아라미드 纖維用 高分子 物質 合成에 成功한다.

硏究 途中 뜻하지 않은 어려움도 많았다. 硏究費 不足으로 硏究를 持續할 수 없게 된 것. 그때 코오롱이 그의 硏究를 本格 支援하기 始作했고, 아라미드 開發 프로젝트가 國策産業으로도 指定되며 硏究는 彈力을 받기 始作했다. 1982年 尹 博士와 硏究팀은 3年間의 硏究 끝에 獨自的인 製造工程을 開發해 아라미드 펄프를 生産하는 데 成功했다. 그가 開發한 製造工程은 放射 過程이 必要했던 旣存의 公正과 달리 純粹한 化學反應만으로 纖維를 만들 수 있게 한 것으로, 듀폰의 케블라 纖維의 生産 工程보다 單純하며 生産效率이 높고 生産 費用이 낮다는 强點이 있었다.

纖維 生産에서 放射 過程이 차지하는 費用 負擔은 90% 程度에 肉薄하기 때문에 그의 硏究가 産業 現場에 미칠 影響은 클 것으로 豫想됐다. 그는 開發한 아라미드 펄프와 製造 工程을 各各 美國에 特許 出願했고, 1985年 4月 特許를 獲得했다. 美國 以外에도 英國, 日本, 獨逸 等 7個國에 特許를 出願하며 開發에 對한 權利를 認定받았다. 케블라를 商用化하는 데 成功했던 듀폰度 그의 硏究成果에 關心을 보이며 購買 意思를 여러 番 打診했지만, 그의 決心으로 1984年 硏究를 持續的으로 支援해 준 코오롱이 技術을 넘겨받게 됐다. 以後 코오롱과 硏究팀은 共同硏究를 통해 파일럿 設備를 設置하고, 國內 最初로 아라미드 纖維의 필라멘트사를 詩生産하는 데 成功하게 된다.

技術 購買에 失敗한 듀폰은 그가 開發한 아라미드 펄프를 自身들의 技術을 盜用해 開發을 했다는 理由로 特許 訴訟을 提起했다. 高附加價値 技術開發을 막기 爲한 橫暴와 다름없었다. 1986年부터 5年間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온 이 事件은 1991年 12月 6日 유럽特許廳이 尹 博士 硏究의 獨創性을 認定하면서 마무리됐다. 그는 事件 解決을 위해 東奔西走했다. 直接 유럽特許廳 抗訴審判所 裁判에 出頭해 通譯도 어려워하는 硏究 內容을 英語로 說明하며 硏究의 獨創性을 이해시키려 努力 했다. 裁判 勝訴의 背景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抛棄하지 않았던 그의 끈氣와 忍耐, 뚝심이 있었다.

아라미드 펄프 開發에 對한 論文은 1987年 國內 最初로 世界的 學術誌인 『네이처 (vol.326 no.6113)』에 실렸다. 아라미드 纖維가 形成되는 過程이 自然 속의 纖維 形成 過程과 同一하다는 理論은 當時 全 世界的으로 큰 反響을 일으켰다. “내 硏究는 實用的 意味보다 科學的 意味가 크다는 評價를 받고 있습니다. 纖維를 만드는 方法 自體를 完全히 바꾸어 놓는 것이지요. 이것은 人體의 皮膚 머리털 等 纖維質이 生成 되는 過程을 實驗室에서 再現해 놓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世界에서 가장 權威있는 國際 學術 저널이 내 硏究를 取扱해 준 것도 完全히 새로운 分野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윤한식, 韓國經濟, “[書齋한담] KIST 윤한식 博士..奇跡醫纖維 아라미드펄프 開發”中)

아라미드 펄프 開發에 對한 論文은 1987年 國內 最初로 世界的 學術誌인 『네이처 (vol.326 no.6113)』에 실렸다. 아라미드 纖維가 形成되는 過程이 自然 속의 纖維 形成 過程과 同一하다는 理論은 當時 全 世界的으로 큰 反響을 일으켰다. “내 硏究는 實用的 意味보다 科學的 意味가 크다는 評價를 받고 있습니다. 纖維를 만드는 方法 自體를 完全히 바꾸어 놓는 것이지요. 이것은 人體의 皮膚 머리털 等 纖維質이 生成 되는 過程을 實驗室에서 再現해 놓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世界에서 가장 權威있는 國際 學術 저널이 내 硏究를 取扱해 준 것도 完全히 새로운 分野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윤한식, 韓國經濟, “[書齋한담] KIST 윤한식 博士..奇跡醫纖維 아라미드펄프 開發”中)

그의 座右銘은 ‘쉬지 않고 하면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진다’였다. 尹 博士는 무엇인가에 끈氣 있게 매달리면 반드시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信念을 지키며 率先垂範 實踐했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硏究를 뒤따르는 것이 아닌, 스스로 定立한 理論에 根據해 硏究를 進行하는 創造의 過程을 즐겼다.

本格的으로 硏究를 始作한 것은 남들보다 늦었지만, 그의 硏究成果는 늘 앞서 있었다. 그런 理由로 그에겐 많은 床이 뒤따랐다. 尹 博士는 1984年에 國民勳章 목련장을 받았고, 1985年에는 科學記者클럽이 주는 第1回 올해의 科學者賞 을 받았으며, 1992年에는 뉴욕科學아카데미 會員에 推戴됐다. 그리고 政府는 1992年에 新設된 科學技術者 功勞年金의 제1호 終身 受惠者로 그를 選定하며 纖維工學 硏究에 一生을 바친 그의 功勞를 認定했다.

“科學은 머리 좋은 사람만이 하는 學問이 아닙니다. 거의 누구나 平生을 投資해 끈질기게 매달리면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놓게 되어있습니다. 科學的 成就는 머리나 韻과는 關係가 없습니다. 勿論 젊은이들이 끈氣 있게 硏究에 沒頭하지 못하는 것은 周邊 與件이 나쁜 탓도 있지만 本人들의 姿勢에도 問題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一鍼은 後學들의 硏究 人生에 方向舵가 되어 그들이 앎의 地平을 크게 擴張하는 土臺가 됐다. 우리나라 纖維工學을 世界的 水準으로 끌어올린 世界的인 硏究者, 윤한식 博士. 뜨겁게 타올랐던 그의 硏究 熱情은 現在까지도 現場에 남아 後學들에게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