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하영
(禹夏永, 1741∼1812)은 朝鮮 後期의 學者이다. 本貫은
丹陽
, 字는 대유(大猶), 號는 취석실(醉石室), 水原 出身이다. 儒生으로 過去에 及第했으나, 會試(會試)에는 끝내 失敗, 一生 동안 學問에만 精進하던 中, 正祖 20年 王의 丘言綸音(求言綸音)에 응지(應旨)하여 時務策(時務策)을 上疏했다. 順調 4年에는 純祖의 丘言綸音에 응지하여 <천일록(千日錄)>을 바쳤는데, 그는 여기에서 重農主義的(重農主義的) 經濟觀을 堅持하면서도 商業的 農業을 主張했다. 또한 그는 中世的 身分秩序의 崩壞는 反對했으나 經濟的으로 實力있는 사람의 身分移動은 肯定하는 等으로 18世紀 後半과 19世紀 初의 社會的 現實을 反映하는 思想을 展開했다.
우하영墓域은
京畿道
華城市
매송면
숙곡리에 있다. 2003年 4月 21日
京畿道의 文化財資料
第121號로 指定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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