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次라 收容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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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年의 오브次라 農場.

오브次라 ( 크로아티아어 : Ov?ara )는 크로아티아 獨立 戰爭 期間인 1991年 10月부터 12月까지 運用된 세르비아의 크로아티아人 砲로 臨時收容所이자 오브次라 虐殺 이 일어난 곳이다.

捕虜收容所 [ 編輯 ]

오브次라(현 그라보보 )는 부코바르 에서 東南쪽으로 5km 떨어져 있다. 이 地域은 第2次 世界 大戰 以後 부코바르 地域의 農業 大企業이 家畜 飼育施設을 建設한 荒蕪地이다. 飼育施設은 格納庫 같은 建物들에 울타리로 둘러져 있어 保護하기 좋은 곳이었다. 格納庫는 甓돌로 지어졌으며 커다란 미닫이 正門에 작은 門이 딸려 있다.

세르비아軍은 1991年 10月 初부터 오브차라를 强制收容所 로 改造하였다. 虐殺을 除外하고선 收容所에 3-4千名의 男性 捕虜들이 一時的으로 머무르다가 스렘스카미트로비차 監獄 으로 옮겨지거나 地域 軍部隊로 移送되어 다시 스타例體步 , 베게이치 等 세르비아 內의 强制收容所로 옮겨졌다. [1]

부코바르 戰鬪 가 끝나고 부코바르 虐殺 이 始作되기 直前, 負傷을 입은 患者, 病院 職員 및 그들의 家族, 부코바르 防禦를 맡았던 兵士들, 크로아티아의 政治 指導者들, 記者 및 其他 民間人들이 부코바르에서 오브차라로 끌려왔다. [2] [3] 베오그라드의 卽決處刑 犯罪 裁判에서 起訴되었던 사람들 中 한 名은 "捕虜들 中에는 妊産婦를 包含한 相當數의 民間人과 傷處입고 繃帶를 감은 患者들이 있었다"고 證言했다. [4] 裁判에서 證言한 前 유고슬라비아 人民軍 兵士를 包含한 여러 目擊者들은 오브차라에 民間人이 있었다는 것은 確實하다고 말했다.

부코바르 市政府의 記錄物엔 오브次라 捕虜에 關한 여러 證言이 있다. 格納庫 內에선 銃聲이 繼續 울러퍼졌으며, 最小 2名이 毆打를 當해 死亡했다고 證言했다. [5] 오브次라 收容所는 1991年 12月 25日 閉鎖되었다. 이 收容所에서만 2百名이 死亡하고 64名이 失踪되었다. [6]

虐殺 [ 編輯 ]

1991年 11月 18日 부코바르 戰鬪가 끝나자 세르비아軍은 부코바르 病院을 占領했다. 세르비아軍은 부상당한 兵士들, 民間人, 病院 職員을 버스에 태우고는 오브차라로 싣었다. 捕虜들은 한데 모여 銃器로 처형당해 虐殺당하고 集團的으로 塹壕에 묻혔다.

오브次라 集團무덤 은 오브次라-그라보로 道路에서 1km 程度 떨어진 東北쪽의 한 施設 옆에 줄지어 있다. 이 集團墓地는 墓地 바로 近處 或은 그 자리에서 戰爭 捕虜와 民間人이 처형당한 後 그 자리에서 묻혀 遺骨이 드러난 形態이다.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