顔之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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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之推 (顔之推, 531年 ∼ 591年)는 凉나라·北齊·북위·北周· 隋나라 等 5個國 황조 時代를 거쳐간 中國의 畫家, 音樂家, 作家, 政治人이다.

生涯 [ 編輯 ]

量 無題 重大桶 3年(531) 江陵(江陵)에서 태어나, 수 文帝 개황 11年(591) 60歲를 一期로 世上을 떠났다. 낭야任期(琅?臨沂)의 名門大家의 子弟로서, 9歲 때 父親을 여의었으나 두 兄의 애틋한 보살핌과 嚴한 家風 속에서 자라났다. 孔子의 愛弟子인 安蛔가 그의 먼 祖上이라 할 수 있으며, 9代祖 安含(顔含) 때 私馬氏 政權을 따라 江南으로 내려왔다. 祖父 安堅원(顔見遠)은 博學多識해 齊나라의 主要 官職을 지내다가, 第·量 交替期에 소연(蕭衍)의 反逆을 反對하고 齊나라에 對한 節義를 主張하며 斷食하다가 死亡했다. 父親 안협(顔?)은 凉나라 상동王 小疫의 진서부자의참군을 지냈으며, 여러 書籍을 두루 涉獵하고 草書와 隸書에 뛰어나 兄初 地域의 非文 가운데는 그가 쓴 것이 많다. 父親의 뛰어난 書藝 才能을 물려받아서인지 顔之推 亦是 어릴 때부터 書藝에 남다른 關心을 보였으나 雜穢에 지나치게 沒頭해 世上의 부름을 받는 것을 그다지 重視하지 않고 留學에 힘써 精進하는 것을 重要하게 생각했다.

顔之推는 오랜 加虐을 이어받아, ≪主觀(周官)≫, ≪左氏傳(左氏傳)≫에 精通했다. 12歲에 일찍이 小疫의 門徒가 되기도 했지만, 노장(老莊)의 玄談을 別로 좋아하지 않아 바로 돌아와 다시 加虐에 깊이 沒頭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剝蝕했으며, 特히 文字學에 밝아서 여러 書籍을 交感(校勘)하는 데에도 相當히 造詣가 깊었다. ≪顔氏家訓≫의 第17張 <書證(書證)> 便은 校勘學에 對한 그의 이런 執念을 보여 준다. 그 外 音訓學에도 많은 關心을 기울여 各種 器物의 이름 및 發音 等을 細心하게 考證했다. 그의 性格은 大體로 豪宕하고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節度가 있었던 듯하다. 술을 좋아했지만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20歲가 되기 前에는 容貌에도 별다른 神經을 쓰지 않았다 하니 疏脫하게 成長한 것으로 보인다.

顔之推는 처음 凉나라에 벼슬해 상동王 小疫의 坐局常時를 始作으로 眞書墨詔參軍을 지내고 山기시랑의 官職에까지 올랐다. 侯景(侯景)의 난 때는 約 4年間 捕虜 生活을 하다가 풀려났으며, 승성 3年(554) 西魏가 侵攻하자 다시 捕虜가 되어 北方으로 移送되었다. 그 後 凉나라가 滅亡했다는 消息을 接하고서는 北齊에서 벼슬해 中書舍人, 皇門侍郞 等의 主要 官職에 올랐다. 그러나 北齊는 다시 北周에 依해 滅亡했고, 그는 또 한 番의 捕虜 生活을 겪은 뒤 北朝의 政權에서 어사상社의 벼슬을 지냈다. 이러한 그의 끊임없는 政治的 浮沈은 隋나라 良犬이 北朝를 멸망시키고 天下를 統一하면서 一段落되고, 그는 太子의 學事로 부름을 받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病으로 生을 마감했다. 이렇게 그는 一生 동안 세 次例의 捕虜 生活과 세 次例의 亡國을 經驗하면서 無慮 네 王朝에 나아가 벼슬했다. 그는 어지럽고 混亂한 時代를 살면서도 怨望하거나 不平하지 않고 그 속에서 올바른 옛 道理를 찾으려고 努力했다. 그의 이러한 고된 經驗은 隋나라의 全國 統一 以後 南北의 서로 다른 文風을 融合해 발전시키는 데에 重要한 바탕이 되었다.

顔之推는 生前에 ≪文集(文集)≫ 30卷을 남겼으나 現在 傳하지 않는다. 現存하는 것으로는 ≪家訓≫ 20篇 外에 ≪還元地(還寃志)≫ 3卷이 있으며, ≪北齊書(北齊書)≫와 ≪北史(北史)≫에 그의 電氣가 記錄되어 있다. 宋代 무월(繆鉞)의 ≪顔之推 年報(顔之推年譜)≫에 따르면, 顔之推는 社로, 民草, 有進이라는 세 名의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에게 根本을 잊지 말고 學業에 힘쓸 것을 일깨우고자 ≪顔氏家訓≫을 남겼다. 사로의 아들이자 顔之推의 孫子 顔師古(顔師古)는 唐나라 初期의 이름난 學者로 文字學과 經學에 두루 精通해 ≪五經正義(五經正義)≫ 編纂에 參與했다. 唐나라 中期의 著名한 書藝家 顔眞卿(顔眞卿)은 그의 5代孫이다.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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