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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의 (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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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의 (樂毅, ?~?)는 中國 戰國時代 燕나라 (燕)의 將軍이다.

戰國時代의 代表的인 名匠 中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人物로, 年 소왕 (昭王)을 도와 조나라 (趙) · 楚나라 (楚) · 한나라 (韓) · 위나라 (魏) 聯合軍을 이끌고 齊나라 (齊)를 懲罰하여 거와 卽묵을 除外한 70女性을 陷落시켜 齊나라를 滅亡 直前에 達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나라 側의 離間策으로 失脚하자 曹나라로 亡命하여 그곳에서 末年을 보냈다.

齊나라를 征伐한 공으로 인하여 燕나라로부터는 창국군(昌國君) 의 稱號를 받았고, 조나라에 亡命한 後에는 亡帝群(望諸君) 의 稱號를 받았다.

生涯 [ 編輯 ]

조나라에서 [ 編輯 ]

惡意의 宣祖는 위나라 (魏)의 名匠 岳陽 (樂羊)이다. 岳陽은 紀元前 408年 , 位 問候 (文侯) 때에 將軍이 되어 中産 (中山)을 征服하였으며 그 功勞로 領袖(靈壽)에 封해졌고 以後 그 後孫인 惡氏 家門 또한 영수에 居住하였다. [1] 때문에 惡의 또한 本來는 영수에 居住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惡意는 賢明하고 兵法을 좋아했기 때문에 조나라 (趙)에 登用되어 벼슬을 지냈다. 以後 紀元前 316年 , 燕나라 (燕)가 相國 자지 (子之)의 叛亂으로 混亂에 處하자 齊나라 (齊)가 燕나라를 攻擊하였다. 當時 趙나라의 王이었던 兆 武寧王 은 제나라를 攻擊하여 燕나라를 救援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惡意는 이에 反對하며 只今 별다른 理由없이 제나라를 攻擊하면 不必要한 怨恨만 사게 될 뿐이니 그 代身에 齊나라가 燕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趙나라의 河東(河東) 땅과 交換하여 齊나라와 燕나라 兩側과의 友好를 維持할 것을 勸하였다. 武寧王은 惡意의 見解를 따랐다. [2]

以後 武寧王은 아들인 兆 혜문왕 에게 王位를 물려주고 그 自身은 兵權을 掌握한채 週報(主父)라 稱하였다. 그러나 紀元前 295年 , 沙丘(沙丘)에서 政變이 일어나 혜문왕이 武寧王을 죽이고 말았다. 이에 岳陽은 조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들어갔고, 以後로 位 소왕 (昭王)을 爲해 일하였다. [3]

燕나라에서 [ 編輯 ]

한便 燕나라에서는 相國 자지의 叛亂으로 나라가 混亂해진 渦中에 齊나라의 侵攻을 當하여 연왕 快 (?)가 自決하고 太子 坪(平) 마저 죽는 等 莫大한 被害를 입었다. 이로부터 2年 後인 紀元前 312年 , 연왕 快意 아들인 年 소왕 이 卽位하였다. 年 소왕은 齊나라에 復讐를 하고 싶었으나 작고 弱한 燕나라의 國力으로는 뜻을 이루기 어려웠다. 이에 年 소왕이 臣下인 郭外 (郭?)의 計策에 따라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禮遇하며 有能한 人材를 불러모으고자 했다. [4]

이 무렵에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惡意는 일부러 燕나라에 使臣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연 소왕으로부터 厚한 禮遇를 받았다. 惡意는 처음에는 이를 辭讓하였으나 結局은 年 소왕에게 몸을 맡기고 그의 臣下가 될 것을 約束했다. 이에 年 소왕은 惡意를 登用하여 賓客으로 맞아들였으며 代身들과의 相議도 据置치 않고 亞卿(亞卿)으로 삼는 等 破格的인 待遇를 베풀었다. [5]

聯合軍 結成 [ 編輯 ]

當時 齊나라의 君主였던 第 민왕 (?王)은 紀元前 286年 에는 宋나라 (宋)를 攻擊하여 멸망시켰고 及其也는 周나라 (周)까지 滅하려 하였으며, [6] 또한 秦나라 (秦)와 더불어 "第(帝)"의 稱號를 놓고 霸權을 競爭하는 等 强盛한 勢力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漸次 교만해져서 百姓들이 견디지 못할 地境이 되었다. [7]

이 消息을 들은 연 소왕은 惡意와 더불어 齊나라 征伐을 議論하였다. 그러자 惡意는 燕나라의 힘만으로는 제나라를 攻擊하기 어려우니, 조나라 · 楚나라 · 위나라 等과 聯合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以後 惡意는 年 소왕의 命을 받들어 直接 曺 혜문왕을 찾아가 盟約을 맺었으며, 楚나라와 魏나라에도 따로 사람을 보내서 聯合을 맺도록 하였고, 마지막으로 秦나라에도 함께 제나라를 討伐하도록 說得하였다. 第 민왕의 교만함과 暴惡함을 憎惡하던 諸侯國들은 燕나라와 손을 잡고 제나라를 치기로 約束했다. [8]

惡意가 燕나라로 돌아와서 成果를 報告하자 年 소왕은 惡意를 燕나라의 上將軍(上將軍)으로 임명하였고, 조 혜문왕은 惡意를 趙나라의 相國(相國)으로 임명하였다. [9] 그리고 紀元前 285年 , 惡意는 조나라 · 秦나라 · 한나라 · 위나라 · 燕나라의 聯合軍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攻擊하여 永久(靈丘)를 빼앗았다. [10]

齊나라 征伐 [ 編輯 ]

紀元前 284年 , 이때에 이르러 燕나라는 富裕해졌으며 軍士들 또한 사기가 올라 있었다. [11] 燕나라의 上將軍이 된 惡意는 조나라 · 楚나라 · 한나라 · 위나라 · 燕나라 等의 聯合軍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攻擊하였으며, 祭需(濟水) 西쪽에서 齊나라 軍隊를 크게 擊破하였다. 以後 다른 諸侯國들은 撤收하였으나 惡意는 燕나라 軍隊를 거느리고 敗走하는 齊나라 軍隊를 繼續 追擊하여 마침내 齊나라의 首都인 任置(臨?)에 到達했다. [12]

惡意는 任置를 攻擊하여 陷落시키고는 寶物과 提起를 掠奪하여 燕나라로 보냈으며, [13] 齊나라의 宮室과 宗廟를 불태워버렸다. [14] 年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親히 祭需로 가서 燕나라 軍隊를 慰勞하고 賞을 내리며 잔치를 베풀었고, 惡意를 창국(昌國)에 봉하여 창국군(昌國君)으로 불렀다. 또한 齊나라에서 掠奪한 物資를 모두 燕나라로 옮기고는 惡意를 남겨두어 齊나라의 남은 城들을 平定하도록 하였다. [15]

한便 惡意에게 크게 敗한 第 민왕은 小國인 위나라 (衛)로 달아났다. 위나라의 軍(君)은 第 민왕에게 自身의 宮을 넘겨주고 臣下라 稱하며 極盡히 禮遇했으나, 第 민왕은 不遜한 性格을 고치지 못한 탓에 憤怒한 魏나라 사람들에게 攻擊당해 쫓겨났다. 이에 제 민왕은 또다른 小國인 鄒나라 (鄒) · 魯나라 (魯)로 달아났으나 그 곳에서도 교만한 性格을 고치지 않아서 또다시 쫓겨나 거(?)로 달아났다. 이때 楚나라에서 療治(?齒)를 보내 第 민왕을 救援하게 하였다. 第 민왕은 療治를 齊나라의 宰相으로 삼았으나, 療治는 結局 제 민왕을 죽여버리고 齊나라로부터 掠奪한 땅과 器物을 燕나라와 나누었다. [16]

以後 惡意는 5年 동안 제나라를 攻擊하여 齊나라의 70餘 城을 빼앗아 燕나라의 郡縣으로 삼고는 거(?)와 卽묵(卽墨)의 2星 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17] 또한 紀元前 282年 에는 趙나라의 軍隊를 거느리고 위나라(魏)의 백양(伯陽)을 攻擊하였다. [18]

조나라 亡命 [ 編輯 ]

紀元前 279年 , 年 소왕이 죽고 그 아들인 年 혜왕 이 卽位했다. [19] 이때 卽묵(卽墨)을 지키고 있었던 齊나라의 將軍 傳單 (田單)은 일부러 "惡意가 아직도 卽묵을 陷落시키지 않은 것은 事實 齊나라의 王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齊나라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다른 장수가 와서 卽묵을 무너뜨리는 것 뿐이다."라는 所聞을 퍼뜨렸다. [20]

年 혜왕은 本來 太子 時節부터 惡意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惡意에게 疑心을 품었다. 때문에 惡意를 本國으로 召喚하고 代身 氣怯(騎劫)을 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惡意는 年 혜왕에게 죽임을 當할까 두려워서 曹나라로 亡命하였다. 조나라에서는 惡意를 關津(觀津)에 봉하였으며 亡帝群(望諸君)의 稱號를 주었다. [21] 한便 惡의 代身 燕나라의 上將軍이 된 氣怯은 傳單에게 慘敗하였고, 以後 齊나라는 反擊에 나서 燕나라에게 잃어버렸던 70個 性을 모두 回復하였다. [22]

末年과 죽음 [ 編輯 ]

年 혜왕은 齊나라로부터 慘敗를 當한 後 惡意를 失脚시킨 것을 크게 後悔하였으며, 또한 惡意가 自身에게 報復할까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年 혜왕은 惡意에게 사람을 보내 謝罪하는 한便, "將軍은 先王의 恩惠를 입은 몸으로 過人을 誤解하여 燕나라를 버리고 조나라에 歸順하였으니, 先王의 恩惠를 어찌 갚으려 하는가?"라 말하였다. [23]

그러자 惡의 또한 연 혜왕에게 書信을 보내 "禍를 當하지 않고 功을 세워 先王의 뜻을 밝히는 것이 神(臣)의 가장 큰 所望이고, 恥辱과 誹謗을 當해 先王의 名聲을 墜落시키는 것이 神(臣)의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豫測하지 못한 罪를 當했는데 僥倖을 바라는 것은 義理上 敢히 할 수 없습니다. 듣건대, 君子는 親舊와 絶交할 때 그의 惡談을 늘어놓지 않으며, 忠臣이 떠날 때는 그 임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神이 비록 愚鈍하나 자주 君子들에게 들은 바가 있습니다.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親한 左右 大臣들의 말만 듣고 疏遠한 사람의 行動을 살피지 못할까 念慮되어 敢히 書信으로 答하오니 임금께서는 留念하시기를 바랍니다."라 答하였다. [24] 이 書信을 이른바 《 보연왕서 》라 한다.

그러자 年 혜왕은 惡의 아들인 嶽干(樂間)을 창국군(昌國君)으로 삼았고, 惡意는 다시 燕나라를 오가게 되었다. 以後 惡意는 燕나라와 조나라 兩國에서 客卿을 지내다가 結局 조나라에서 죽었다. [25] 그가 죽은 時期는 正確히 알 수 없다.

各州 [ 編輯 ]

  1. 《詐欺》 卷44 威勢가 ; 《詐欺》 卷80 惡意列傳
  2. 《戰國策》 卷20 詔冊3 〈第罷宴〉
  3. 《詐欺》 卷80 惡意列傳
  4. 《詐欺》 卷34 年少攻勢가 ; 《戰國策》 卷29 年策1 〈燕소왕首帕鳶後卽位〉
  5. 《詐欺》 卷80 惡意列傳
  6. 《詐欺》 卷46 前景中浣世가
  7. 《詐欺》 卷80 惡意列傳
  8. 《詐欺》 卷80 惡意列傳
  9. 《詐欺》 卷80 惡意列傳
  10. 《詐欺》 卷43 租稅가
  11. 《詐欺》 卷34 年少攻勢가
  12. 《詐欺》 卷80 惡意列傳
  13. 《詐欺》 卷80 惡意列傳
  14. 《詐欺》 卷34 年少攻勢가
  15. 《詐欺》 卷80 惡意列傳
  16. 《詐欺》 卷46 前景中浣世가
  17. 《詐欺》 卷80 惡意列傳
  18. 《詐欺》 卷43 租稅가
  19. 《詐欺》 卷34 年少攻勢가
  20. 《詐欺》 卷80 惡意列傳 ; 《詐欺》 卷82 傳單列傳
  21. 《詐欺》 卷80 惡意列傳
  22. 《詐欺》 卷34 年少攻勢가 ; 《詐欺》 卷46 前景中浣世가 ; 《詐欺》 卷80 惡意列傳 ; 《詐欺》 卷82 傳單列傳
  23. 《詐欺》 卷80 惡意列傳  ; 《戰國策》 卷30 年策2 〈창국군惡의〉
  24. 《詐欺》 卷80 惡意列傳 ; 《戰國策》 卷30 年策2 〈창국군惡의〉
  25. 《詐欺》 卷80 惡意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