審 (性理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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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은 性理學 에서 認識, 知覺, 判斷 機能을 가진 思考의 主管機關을 意味한다.

槪要 [ 編輯 ]

性理學者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頭腦의 機能을 모두 沈이 遂行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人間이 對象世界에 對하여 생각하고 느끼며 어떻게 行動할지 決定하는 것은 모두 沈이 하는 일이다. 그런 面에서 審은 人間에게 自然的으로 附與된 性(性)과 比較할 때 ‘主體’로서의 意味가 剛하다. 또한 성이 萬物에게 同等하게 갖추어진 것과 달리 심은 오로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人間이 다른 存在와 差別化되는 特徵은 性이 아니라 審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朱熹는 人間만이 갖춘 審議 특별한 能力이 氣의 差異에서 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사람을 이루는 氣 가운데서도 가장 精密하고 맑은 部分[氣之精爽]李 모여 심이 된다.

草創期 新儒學者들은 審과 性의 關係 또는 審?性?正義 關係를 두고 複雜한 論爭을 벌였다. 이에 關한 朱熹의 最終立場은 ‘心통性情(心統性情)’이라는 말로 要約된다. ‘心통性情’은 本來 장재의 語錄에 나오는 句節인데 朱熹는 이 말을 獨自的으로 解釋하여 心性論의 核心命題로 삼았다. 朱熹는 젊은 時節 性과 심을 本體와 作用의 關係로 把握하는 好上學의 觀點을 受容하였으나 後에 ‘聖體심용(性體心用)’의 立場을 버리고 ‘心통性情’을 종지로 하는 心性論 體系를 樹立한다. 朱熹의 ‘心통性情’ 命題에서 桶(統)이라는 글字는 ‘主宰한다’와 ‘包括한다’는 두 가지 意味를 가진다. 다시 말해 ‘心통性情’은 ‘마음이 性과 情을 主宰한다’는 뜻과 ‘마음은 性과 情을 包含한다’는 뜻을 同時에 含意하고 있다.

‘마음이 性情을 主宰한다’는 말은 審議 機能的 側面에 焦點을 맞춘 것으로, 本性이 外物과 接하여 情感으로 드러나는 過程을 心이 主管하고 統率한다는 뜻이다. 이는 ‘性發爲政(性發爲情)’의 메커니즘에 關與하는 審議 主體로서의 力量을 强調하는 것이다. ‘마음은 性情을 包含한다’는 말은 審議 構造的 側面에 焦點을 둔 것으로, 審 以外에 別途로 性과 情이 있는 것이 아니라 性과 情이 곧 審議 體用(體用)이 됨을 强調하는 것이다. 이는 超越的인 性이 現象化된 것을 審이라고 規定해 審과 性을 連續線上에 理解한 護喪學에 對한 反論이다. 朱熹는 ‘審이란 性의 現象化된 樣態’라는 好上學의 主張을 批判하고 ‘심은 性을 그 안에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새로운 觀點을 提示함으로써 이른바 ‘中華新設(中和新說)’을 定立하게 된다.

性理學에서 심은 理氣論 의 構圖 속에서 理解된다. 그런데 人間의 審을 리와 氣 가운데 어떤 範疇에 놓아야 하는지에 對해서는 論難의 餘地가 있다. 朱熹 自身이 심을 ‘氣의 頂上(精爽)’이라고 明示했다는 點에서 본다면 人間의 심은 리가 아니라 氣에 屬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兄異常者인 成果 形而下者인 情을 包括한다는 點을 미루어 볼 때 심은 成分上 리와 氣의 結合으로 理解될 수도 있다. 朱熹의 審論에는 이 두 가지 解釋의 可能性이 共存한다. 審을 오로지 基로 이루어진 存在로 보느냐 아니면 리와 氣의 結合體로 보느냐의 問題는 後에 朝鮮 性理學에서 學派의 分期를 결정짓는 重要한 爭點으로 浮刻된다. [1]

參考 [ 編輯 ]

  1. 이선열 저, 17世紀 朝鮮, 마음의 哲學에서 拔萃 (著者와의 協議를 거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