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윤탁 한글營婢
(李允濯 한글靈碑)는 묵재 이문건이
1535年
태릉
造成敷地
에 있던 아버지
이윤탁
의 墓를 移轉하여 어머니 高齡 申氏의 墓와 合掌하면서 直接 글을 쓰고 글씨를 새겨
1536年
墓 앞에 세운 비이다. 1974年
서울特別市의 有形文化財
第27號
한글고비
로 指定되었다가, 2007年
大韓民國의 寶物
第1524號로 指定되면서 指定名稱度
이윤탁 한글 營婢
로 變更되었다.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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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碑石은 묵재(?齋) 이문건(李文楗)李 父親인 이윤탁(李允濯)의 墓를 母親인 高齡(高靈) 신氏(申氏)의 墓와 合掌하면서 1536年(中宗 36年)에 墓 앞에 세운 墓碑이다. 이 墓碑에는 앞面과 뒷面에 各各 墓主의 이름과 그 一代記가 새겨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漢文으로 境界門이 새겨져 있다.
이윤탁은 中宗 때 承文院 副正字를 지냈다. 元來 墓는 1535年에
태릉
자리에 있었으나, 國家가 그 地域을 收復하면서 移葬을 해야 했다. 里長을 하면서 아들 이문건이 父母의 墓가 다시 파헤쳐지는 일이 없도록 碑石에 警戒門을 새긴 것이다.
비는 四角의 받침돌 위에 非몸만을 세워둔 簡潔한 構造로, 非몸의 윗邊 兩쪽을 비스듬하게 다듬었다. 西쪽面에는 한글 30者가 記錄되어 있는데, 이윤탁의 셋째 아들인 이문건이 글을 짓고 글씨를 새긴 것으로, 墓의 毁損을 警戒하는 內容이다.
녕ㅎㆍㄴ非라거雲師ㄹㆍㅁㆍㄴㅈㆎ화ㄹㆍㄹ니브리라
이ㄴㆍㄴ글모ㄹㆍㄴㆍㄴ사ㄹㆍㅁㄷㆍ려알위노라
‘英(靈)韓 비(碑)라. 거운 사람은 財貨(災禍)를 입으리라. 이는 글(漢文) 모르는 사람더러 알리노라.’
이 碑石은 1968年에 다시 發見되었다.
[2]
1974年
서울特別市의 有形文化財
로 指定되었다.
1989年
大韓住宅公社
는 中繼2地區 宅地開發事業을 進行하였는데, 往復 6車線 道路가 이 묫자리를 지나가게 되어, 墓地와 墓碑를 옮기 위한 要請을 했다. 그러나 서울市 文化財委員會와 星州 李氏 宗中이 反對하여 甁목이 생긴 채로 道路를 個通해서 쓰다가, 1998年 墓를 道路 바깥으로 15m 옮기기로 合意하여 墓碑와 함께 移葬을 했다.
[3]
2007年
大韓民國의 寶物
로 格上되었다.
[4]
2012年
道路名 住所
를 導入하면서 묫자리 옆을 지나가는 6車線 道路에 ‘
한글碑石로
’라는 이름이 붙었다.
意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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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를 세운 1536年은
訓民正音
이 頒布된 지 90年이 지난 後의 일이다. 글씨는 한글創製 當時와 똑같은 글씨에 庶民的인 文體로 쓰여져 있다. 남아있는 ‘한글非’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評價되고 있으며, 아직 한글이 널리 使用되지 못했던 時期에 果敢히 ‘한글墓碑’를 세웠다는 點에서 그 價値는 더욱 돋보이며 國語史에 重要한 資料가 된다.
이 ‘한글營婢’는 國語生活社에서 다음과 같은 重要한 價値를 지닌다. 첫째, 中宗 31年(1536) 當時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證明해주는 資料이다. 둘째, ‘한글營婢’에 새겨진 한글의 書體는 訓民正音이 創製된 直後의 書體, 卽 <訓民正音 解例本>의 書體와 <龍飛御天歌> 書體의 中間兄의 性格을 지닌다. 셋째, 이 碑石의 글은 碑石의 이름인 ‘營婢(靈碑)’를 除外하고는 局限 混用이 아닌 純 國文으로 쓰여 있다. 本格的으로 한글로만 쓴 文獻은 18世紀에나 登場하나 이 ‘한글營婢’는 16世紀에 이미 巡國文으로만 쓰인 文章이라 할 수 있다. 넷째, ‘한글營婢’는 諺解文이 아닌 원 國文 文章이다. 15世紀 以後 漢文 原文을 飜譯한 諺解文이 한글資料의 主宗을 이루었으나 이 ‘한글營婢’는 짧은 文章이긴 하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文章으로, 한글이 漢文 飜譯道具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直接 傳達하는 道具로 變化하였음을 證明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글營婢’에 쓰인 國語 現象은 이 當時의 言語를 잘 反映하여 當時 國語를 理解하는 데 도움을 준다.
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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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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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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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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