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骨堤

金堤 碧骨堤
(金堤 碧骨堤)
(Byeokgolje Reservoir, Gimje)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種目 私的 第111號
( 1963年 1月 21日 指定)
面積 187,473m 2
時代 三國時代
位置
김제 벽골제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金堤 碧骨堤(大韓民國)
住所 全北特別自治道 金堤市 부량면 월승리 119番地
座標 北緯 35° 45′ 16″ 東經 126° 51′ 16″  /  北緯 35.75444° 東京 126.85444°  / 35.75444; 126.85444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碧骨堤 (碧骨堤)는 全北特別自治道 金堤市 부량면 에 位置한 貯水池 大韓民國 貯水池의 嚆矢이다. 古代 水利施設 中 規模도 가장 크다. 1963年 1月 21日 大韓民國의 史跡 第111號로 指定되었다.

槪要 [ 編輯 ]

築造 時期는 百濟 比流王 27年(330年) 으로 推定된다. 湖南 地方 (湖南地方)의 號(湖)가 바로 碧骨堤를 가리킨다. 「三國史記(三國史記)」 新羅本紀 訖解王 21年條에 ‘시개벽골지안장일천팔백보(始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라고 記錄되어 있다. 그 뒤 790年(元聖王 6)에 增築한 事實이 있었고, 高麗 人種 때 修築하였다가 人種 24年(1146年) 이 碧骨堤 收縮 때문이라는 무당의 말로 一部를 破壞한 일이 있다. 太宗 15年(1415年) 國家 敵人 大規模 收縮工事를 일으켜, 軍政 萬 名이 2個月 동안 周圍 7萬 7,406報, 높이 17隻의 堤防을 修築하여 몽리 수전은 忠淸道 , 全羅道 에 걸친 厖大한 地域으로 9,800結에 達했다고 한다. 壬辰倭亂 때 管理, 維持가 全廢된 以來 農民의 暮景으로 只今은 거의 耕地化되고 말았다. 이때의 石造水門과 記念碑 等의 遺物이 남아 있다.

堤防은 布敎마을에서 始作하여 南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平地에 約 3.3km에 達하며, 堤防 높이는 5.6m이다. 댐形式은 흙댐(筆댐)이다. 灌漑面積은 10,000ha로 推定된다.

長生거 [ 編輯 ]

新增東國輿地勝覽 의 記錄에 따르면 碧骨堤에는 總 5個의 水門이 있었고, 水門 名稱은 授與거, 長生거, 中心거, 警長거, 流通거라고 한다. 그 中 現在 堤防과 함께 남아있는 水門은 두 開所로 團地 內 長生거와 團地 밖 碧骨堤 堤防을 따라 南쪽으로 約 2km에 位置한 警長거이다. 1980年代 水門 一部 復元 工事로 只今의 모습을 갖추었다. [1]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린 碧骨堤중수비 의 記錄에 地方의 斷面과 水門構造가 다음과 같이 記述되어 있다. [1]

둑의 아래 넓이는 70者料, 위의 넓이는 30字이며, 높이가 17者이고 水門은 마치 丘壟(九壟)처럼 보였다. ···또 (水門) 兩쪽의 席主審(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內外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板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水門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요, 돌기둥의 높이는 15字이며, 땅속으로 5者나 들어가 있다. ···이것이 碧骨堤의 大略이니 때는 영락 (永樂) 13年(名醫 年號 太宗 15年, 書記 1415年)이다.

貯水池냐 防潮堤냐 論爭 [ 編輯 ]

李榮薰 前 敎授는 2007年 季刊誌 '時代精神' 여름號에 小說家 趙廷來 의 大河小說 ' 아리랑 '을 批判하는 글을 실으면서 小說의 舞臺인 金堤·만경平野와 碧骨堤 關聯 敍述이 잘못됐다고 主張했다. 李 敎授는 이 글에서 "碧骨堤는 農業用 貯水池가 아니라 바닷물의 侵入을 막는 防潮堤였다"며 "金堤·만경平野 地帶는 1900年代까지도 大部分 荒凉한 不毛의 땅이었으며, 러·日戰爭 以後 들어온 日帝가 干拓事業과 水利事業을 展開하면서 農業地帶로 變貌하기 始作했다"고 主張했다. [2] 이에 對해 허수열 前 忠南大 敎授가 2012年 1月 自身의 著書 '日帝 初期 朝鮮의 農業-植民地近代化論의 農業開發論을 批判한다'에서 『三國遺事』 『朝鮮王朝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等의 記錄과 金堤 一帶 水利組合·土地改良·河川改修 關聯 史料 等을 提示하며 "碧骨堤는 貯水池로 設立됐으나 貯水池로 기능한 것은 極히 一部 期間에 不過했고 世宗大 以來 日帝 初까지 堤防 一部가 破壞된 채 放置됐다", "金堤·만경平野 地帶는 日帝의 開發 以前에 이미 潮水의 侵入에서 比較的 安全한 農業地帶였으며, 日帝의 開發에 依해 비로소 農業地帶로 變貌한 곳이 아니었다"며 "碧骨堤가 큰 規模의 貯水池였다"고 主張했다. 이에 對해 이 前 敎授는 2013年 '經濟史學'(53號)에 發表한 論文 '混亂과 幻想의 歷史的 施工-허수열의 『日帝 初期 朝鮮의 農業』에 答한다'에서 "『三國遺事』 等의 記錄을 바탕으로 碧骨堤를 貯水池로 본다면, 오늘날 春川 昭陽江댐보다 10倍는 더 큰 面積이 나오는데, 4世紀 初盤에 그런 貯水池를 만들어 大規模 干拓事業을 벌이는 것은 不可能하다. 유럽에서도 干拓事業이 活性化되는 것은 13世紀에 와서다"라며 "近代 以前 記錄을 史料批判 없이 盲信해선 안 된다. 4世紀 初 韓半島 人口는 200萬∼300萬 名 水準이고, 아직 石器를 使用하고 움집에서 살던 것으로 推定되는데 大規模 農業用 貯水池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反駁했다. 李 前 敎授는 사람들이 碧骨堤를 貯水池라고 생각하게 된 理由로 1000餘 年의 歲月이 흐르는 동안 土壤이 쌓이는 沖積 作用을 들며 "碧骨堤의 正體는 向後 考古學·地理學·土木工學·水利工學 分野의 硏究成果를 受容하며 풀어갈 問題다. 그럼에도 330年頃에 海岸을 막고 그 같은 防潮堤를 만든 事實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3]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現地 案內文 認容
  2. 中央日報, 2013年 1月11日, '金堤 碧骨堤 미스터리…三國時代 貯水池 맞나, https://www.joongang.co.kr/article/10392376
  3. 中央日報, 2013年 1月11日, '金堤 碧骨堤 미스터리…三國時代 貯水池 맞나, https://www.joongang.co.kr/article/10392376

參考 資料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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