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크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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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크 (Bar?q, ? ~ 1271年 )은 차가타이 韓國 의 第 8代 칸(在位: 1266年 ~ 1271年 )이다. 칭기즈칸 次男 차가타이 의 長男인 무투겐의 三南 이슨 屠兒의 次男이다.

生涯 [ 編輯 ]

칭기즈칸의 4代孫이며 차가타이 의 曾孫子가 된다. 1266年 알루區 가 죽고 알루區에 依해 쫓겨났던 무바라크 샤 가 暫時 칸位를 차지했다가 곧 바라크로 交替됐다. 1266年 , 알루區의 뒤를 이어 칸위에 오른 바라크(Baraq)도 下吏讀 와의 戰鬪를 繼續했다. 차가타이의 칸이 바라크로 交替되자 카이두는 다시 遠征에 나섰다. 카이두는 킵차크 칸國의 만그 티무르의 支援을 받아 차가타이 칸國을 侵入하여 시르다라江 近處와 코잔트 에서 벌어진 두 番의 戰鬪를 勝利로 이끌었다.

이 두 番의 戰鬪에서 敗한 바라크는 트란俗詩아나로 도망친 뒤 사마르칸트 부하라 를 掠奪하여 軍隊를 다시 모았다. 바라크의 激烈한 抵抗으로 戰爭이 長期化될 幾微를 보이자 카이두는 背後의 쿠빌라이가 侵入해올 것을 念慮해 바라크와 1269年 에 强化를 締結하고 本國으로 돌아갔다.

强化 의 結果 카이두와 만그 티무르가 트란속시아나의 3分의 1을 차지하게 됐으며 카이두는 차가타이 칸國이 所有하고 있던 투르키스탄 大部分을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카이두는 强化대로 이 땅을 만그 티무르에게 주지 않고 自身의 領土로 倂合시켰다. 强化는 締結되었지만 바라크는 이 强化에 滿足하지 못했다. 그는 부하라 를 再征服하려 했으며 사마르칸트를 掠奪하려고도 했다.

카이두는 바라크의 이러한 不滿을 利用하여 바라크에게 아바카 가 다스리고 있는 日 韓國 을 攻擊할 것을 慫慂했다. 바라크는 이 提議에 쉽게 應하여 日 韓國을 攻擊할 準備에 나섰다. 이에 카이두는 自身의 아들인 車파르 가 이끄는 軍隊를 支援했으며 킵차크 韓國 亦是 軍隊를 支援했다.

1270年 바라크는 이 提案에 넘어가 먼저 日 韓國 을 攻擊했지만 下吏讀의 支援軍이 그를 背信하면서 日 韓國의 軍隊에게 大敗를 當하고 말았다. 킵차크 칸國과 카이두의 支援을 받은 바라크는 아바카 麾下의 장수인 테구데르에게 叛亂을 일으키게 한 뒤 軍隊를 일으켜 호라산에서 一 칸國의 軍隊를 擊破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國과 카이두는 바라크의 成功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킵차크 韓國 軍隊는 바라크 麾下의 將軍인 잘라이르타이(Jalayirtai)와의 言爭을 口實삼아 軍隊를 退却시켰다. 바라크는 자라일타이를 보내 킵차크 韓國 軍隊에 容恕를 求하고 復歸할 것을 說得했지만 虛事였다. 킵차크 韓國의 軍隊가 떠나자 카이두가 보낸 車파르 亦是 自身의 軍隊를 버리고 本國으로 도망가버렸다.

車파르 가 逃亡誤字 카이두는 아예 바라크와의 關係를 끊고 아바카 와 友好關係를 맺었다. 雪上加霜으로 1270年, 바라크의 軍隊는 아바카와의 戰鬪에서 大敗를 當했고 바라크는 負傷을 입었다.

엄청난 損害를 본 채 本國으로 돌아온 바라크는 카이두에게 支援을 要請하는 便紙를 보냈지만 카이두는 軍隊를 보내는 것으로 應答했다. 結局 1271年, 바라크는 카이두의 軍隊에 둘러싸인 채 幕舍에서 死亡했으며 카이두는 죽은 바라크 代身 이름뿐인 칸 네具베이 (Negubei)를 차가타이 칸으로 세웠다. 차가타이 韓國 오고타이 韓國 의 屬國으로 轉落해버리고 말았다. 그 以後 下吏讀 는 차가타이 韓國을 完全히 掌握했다.

前任
再從兄 무바라크 샤
第8代 차가타이 韓國 의 칸
1266年 ~ 1271年
後任
四寸 네具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