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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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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욱 (李旭, 本名: 이장원(李章源), 1907年 ∼ 1984年)은 日帝 植民地 時期 肝도 文學의 代表者이다.

解放 以後 中國 朝鮮族 文學의 土臺를 일군 理욱[李旭, 本名은 이장원(李章源), 1907∼1984]은 中國 朝鮮族 文段을 代表하는 詩人이다. 兒名은 리수룡이었고, 解放 前까지는 鶴聲(鶴城), 월촌(月村), 단림(丹林), 山金(汕琴), 越波(月波) 等의 筆名을 使用하다가 解放 以後 리욱이란 이름으로 活動했다. 中國 朝鮮族 文學의 土臺를 닦고 발전시켜 온 그는 抒情詩와 敍事詩, 漢詩를 비롯해 小說, 隨筆, 文學 理論, 飜譯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創作物을 남겼다.

1907年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高麗村)에서 태어난 리욱은 1910年에 지린省(吉林省)으로 移住해 幼年 時節을 보냈다. 滿洲 一帶에서 著名한 漢文學者인 祖父와 父親의 影響을 받아 어린 時節에 中國과 朝鮮의 古典을 익히며 成長했다. 中學校 2學年에 다니던 中, 生活苦로 學業을 中退하고 詩 創作에 邁進했던 그는 1924年 17歲 되던 해에 처음으로 抒情詩 <生命의 禮物>을 ≪間島日報≫에 發表하면서 本格的으로 作家의 隊列에 合流했다. 그 後 間島 地域의 進步的 新聞 ≪閔聖寶≫의 記者로 일하다가 日帝의 彈壓이 거세지면서 記者 生活을 그만두고 夜學에서 農民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啓蒙思想을 일깨우고자 했다. 1937年부터는 ≪조선일보≫의 間島 特派員으로 있었고, ≪趙匡≫, ≪朝鮮之光≫ 等의 新聞과 雜誌에 活潑히 詩를 發表해 文壇의 注目을 받았다.

리욱은 是認 김조규와 함께 當時 滿洲에서 活動하던 詩人들의 作品을 모아 ≪재만朝鮮詩人集≫을 刊行하는 等 中國 朝鮮族 文段의 結集을 圖謀하는 데 寄與한 바 있다. 解放 以後에는 <間道例文協會>의 文學 部長, <銅鑼文人同盟>의 詩文學 分科 責任者, <옌지(延吉)中小한문회協會> 文學 國葬, 文藝誌 ≪불꽃≫의 編輯 等을 맡아 藝術 團體를 整備하고 中國 朝鮮族 文段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努力했다. 社會的으로 旺盛한 活動을 하면서도 創作에도 힘을 기울였고, 그 結果 1947年에는 첫 詩集 ≪北斗星≫을, 1949年에는 ≪北六의 抒情≫을 出刊했다.

敎育者로서의 召命 意識 또한 높았던 그는 옌볜大學 건교 事業에 參加했고, 옌볜師範學校에서 敎職 生活을 하다가 1951年 末부터는 옌볜大學 敎授로 지냈다. 베이징師範大學에서 蘇聯 文學과 마르크스주의 文藝 理論, 革命的 寫實主義 創作論을 習得하며 文學 硏究가, 學者로서도 充實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中國 朝鮮族 文人으로서 리욱이 이룩한 重要한 業績 中 하나는 1956年, 朝鮮族 作家로서는 처음으로 中國作家協會에 加入해 中國作家協會 옌볜 粉灰 理事로 活動했던 것이다. 리욱은 中國 文學과 交流하며 中國 朝鮮族 文學이 中國 文學의 一部로 認定받는 同時에 獨自的인 文學을 構築할 수 있도록 架橋 役割을 했다. 그러한 課業의 一部로서 中國語로 된 作品을 創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6年부터 1976年 文化大革命 時期에는 反動 文人으로 몰려 政治的 彈壓을 받으며 創作의 權利를 박탈당하고 壁紙로 추방당하는 等 試鍊을 겪기도 했다. 混沌의 時期가 끝나자 政治 陋名을 벗은 리욱은 다시금 詩 創作에 힘을 쏟아 1980年 73歲의 나이로 ≪理욱 詩選集≫과 함께 長篇 敍事詩 ≪風雲記≫ 1部를 發表했다. 그리고 ≪風雲記≫ 2部를 執筆하는 途中 1984年 77歲를 一期로 生을 마감했다.

리욱의 生涯는 말 그대로 中國 朝鮮族 文學의 形成과 成長 過程을 보여 주는 歷史다. 日帝의 植民地 彈壓과 解放 以後 中國의 政權 樹立 그리고 文化大革命 等 社會·政治的 試鍊 속에서도 生의 마지막 瞬間까지 時代와 歷史를 形象化하고자 한 리욱의 詩 世界는 中國 朝鮮族의 삶과 歷史를 보여 주는 同時에 文學을 통해 社會와 歷史 속에서 人間의 삶을 高揚하고자 하는 進取的 精神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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