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掠奪 (108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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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掠奪 (1084年) 은 1084年 5月 24日, 이탈리아 南部 나폴리 시칠리아 의 征服者 로베르 기스카르 (1015-1085)가 이끄는 軍隊가 로마에 入城한후 掠奪을 恣行한 事件을 말한다. 로베르의 軍隊가 로마로 進擊한 理由는 敎皇의 救援要請에 따른것이였다. 카노사의 屈辱 [1] 에 對해 復讐하고자 獨逸王 하인리히 4世가 로마를 侵攻하여 占領하자 敎皇 그레고리오 7世는 山탄젤로性 [2] 으로 避身한후 로베르에게 救援要請을 보내게 되었다. 로베르의 軍隊가 다가오자 하인리히 4世는 戰勢가 不利하다고 判斷하여 로마를 비우고 獨逸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로베르 軍隊는, 로마進入을 反對하는 抵抗勢力을 鎭壓하며 敎皇 救出作戰을 벌이다가 掠奪을 恣行하고 말았다.

사흘間 進行된 掠奪로 많은 建物들이 불타고 都心 곳곳이 破壞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는 過去에 반달族(AD 455年)이나 코트族(AD 546年)에게 掠奪 當했을때보다 더 큰 被害가 發生했다. 掠奪이 發生하게 된 根本原因은 皇帝와 敎皇間에 벌어진 權力다툼에 있다 할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 다툼으로 因한 被害는 고스란히 로마市民들에게 돌아갔다. 또한 今番 掠奪의 特徵中에 하나는 放火로 인한 被害가 매우 크게 發生했다는 點이다. 그리고 救援軍이 占領軍(暴徒)으로 突變하여 掠奪을 恣行하였다는 것이다.

敎皇 救出作戰은 成功的이였으나 노르만族에 依한 掠奪로 因해 怨聲이 높아지자 敎皇은 로마를 떠나 亡命길에 올랐다. 敎皇 그레고리오 7世는 敎會改革에 앞장서기는 했으나 지나치게 急進的인 改革으로 民心離叛을 惹起하였고 敍任權 鬪爭으로 敎皇權을 濫發하여 今番災殃을 招來했다. 末年에는 로마를 떠나 亡命地에서 쓸쓸하게 客死하였다.

背景 [ 編輯 ]

이탈리아의 政治狀況 [ 編輯 ]

476年 오토아케르가 서로마를 멸망시킨후 이탈리아를 統治하지만 비잔틴(東로마) 帝國과 사이가 좋치 못했다. 동고트족을 이끌던 테오道릭(在位 474~526)은 비잔틴 皇帝의 討伐要請을 받아들여 493年 自身의 不足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侵攻하였다. 오토아케르 勢力을 殲滅한후 테오도릭이 이탈리아를 代理 統治하였다. 그가 統治하는 33年間 이탈리아는 平和로웠다. 그러나 526年 테오도릭이 死亡하자 동고트족은 王位繼承을 놓고 分裂하였다. 混亂이 持續되자 비잔틴 皇帝는 이탈리아를 直接 統治하기 위해 535年에 征服戰爭을 始作한다. 553年에 비잔틴이 이탈리아 征服에 成功하지만 18年間 이어진 戰爭으로 半島는 荒廢해졌다.

征服以後 비잔틴(東로마)에 依한 統治는 順坦치 못했고 그 混亂한 틈을 타고 568年에 롬바르드族이 侵入하여 北部 이탈리아를 占領하였다. 롬바르드族이 漸次 中南部地域으로 勢力을 擴張하며 威脅的인 勢力이 되자 敎皇이 프랑크왕국의 介入을 要請한다. 774年 프랑크 王國이 北部와 中部 이탈리아를 占領하며 롬바르드族은 南部로 밀려났고 비잔틴 領土는 漸次 縮小되어갔다. 이탈리아 南部地域은 롬바르드,프랑크,비잔틴 勢力이 뒤섞여 있을뿐 主導的인 統治勢力이 不在한 가운데 中小 都市國家들이 亂立하여 混亂스러웠다.

이탈리아에 나타난 노르만族 [ 編輯 ]

8世紀頃부터 프랑스 西쪽海岸을 끓임없이 侵略해온 바이킹족은 西프랑크의 골치거리였다. 카롤링거 王朝의 單純王 샤를 3歲(在位 898-922)는 생클레르쉬렙트 條約(911)을 통해 바이킹 頭目 롤로에게 노르만 地方을 讓渡하여 事態를 收拾하였다. 基督敎로 改宗한후 西프랑크의 封建諸侯國을 建設한 노르만族은 크게 蕃盛하였고 6代 노르망디公 윌리엄은 1066年에 잉글랜드를 征服하여 노르만 王朝의 創始者가 되었다. 11世紀 들어 積極的으로 海外開拓을 試圖한 노르만族은 이탈리아에도 進出하였다.

7世紀에 發興한 이슬람 勢力이 이집트와 北아프리카를 占領한후 北아프리카 出身 海賊들이 地中海를 휩쓸고 다녔다. 이탈리아 南部의 海岸과 內陸까지 海賊들에 依한 掠奪이 恣行되며 民生은 疲弊해져갔다. 이런 混亂속에 沒落한 南部이탈리아 貴族勢力과 노르만 傭兵 技士들이 提携하여 南部地域에서 비잔틴과 사라센 [3] 勢力을 몰아내기 始作했다. 11世紀初부터 始作된 이런 흐름은 11世紀 中盤以後에 노르만族이 新興勢力으로 急浮上하며 南部地域을 統合해나갔다. 그中에 가장 뛰어난 能力을 發揮한 者는 로베르 기스카르였다.  

로베르 기스카르 [ 編輯 ]

로베르 기스카르(生沒1015-1085)는 노르망디 出身의 뛰어난 傭兵 指導者였다. 11世紀 中盤에 兄弟들과 이탈리아로 건너와 征服戰爭에서 活躍하며 頭角을 나타냈다. 敎皇 니콜라오 2世는 그를 아풀리아, 시칠리아, 칼라브리아의 工作에 임명하여 봉신으로 삼았다. 敎皇의 作爲 授與로 인해 그는 合法的으로 이탈리아 南部地域의 統治者가 되었다. 敎皇은 軍事的 援助者를 두어 비잔틴과 獨逸皇帝의 干涉을 牽制하며 敎皇權을 높일수 있었다.

敎皇과 로베르가 서로 손을 잡은 것은 이런 相互間에 利害關係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로베르는 1071年 비잔틴 帝國의 마지막 이탈리아 據點인 바리를 征服하였고 1072年에 시칠리아에서 사라센을 完全히 몰아내었다. 1076年에는 롬바르드 王國의 地術抛 2世로부터 살레르노를 빼앗아 公國의 首都로 삼았다. 이로써 이탈리아 南部 全域의 支配權을 完全히 掌握하였다.

敎皇權 上昇 [ 編輯 ]

로마主敎의 首位權 確保를 위한 努力은 4世紀 國交化 以後부터 數世紀에 걸쳐 꾸준히 進行되었다. 敎皇權은 8世紀 들어 프랑크 카롤링거 王朝와 蜜月關係를 形成하며 同伴 成長하게 된다. 751年 피핀이 武力으로 王位를 簒奪했으나 敎皇 字카리아는 이를 承認하였고 이에 對한 報答으로 피핀은 756年 敎皇領을 寄贈하였다. 敎皇 레오 3歲가 곤란한 處地에 놓이자 샤를 1歲(生沒742-814)는 事態에 介入하여 圓滿하게 收拾하며 敎皇의 權威를 세워 주었다. 이에 對해 敎皇은 800年 12月에 샤를 1歲를 서로마 皇帝로 봉하며 戴冠式을 올려 報答하였다. 이와 같이 中世 교황권 上昇은 世俗權力과의 相互補完的 蜜月關係 形成을 통한 精巧癒着(政敎癒着)으로 이루어졌다.

混濁한 로마政局 [ 編輯 ]

分割相續에 依해 프랑크 王國이 分裂되며 衰弱해지자 이탈리아에 對한 影響力도 弱해졌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는 政局混亂이 惹起되었고 아울러 로마에서도 極甚한 政爭과 黨派싸움이 發生하였다. 10世紀 들어서 敎皇職이 로마貴族들間에 鬪爭의 目標가 되어버렸다. 교황권이 剛해지며 世俗化되었기 때문이다. 敎會가 政爭에 휘말리자 쉽게 腐敗하기 始作했다. 이러한 敎會腐敗의 根本原因中 하나는 로마의 聖職者들과 貴族들에 依해 敎皇이 선춛되었기 때문이였다.(추기경단에 依해 敎皇이 選出되는 制度는 1059年이 되어서야 制定되었다.)

墮落하는 로마 카톨릭 [ 編輯 ]

貴族들의 權力다툼을 통해 資質이 不足한 敎皇이 選出되자 서로마 敎會는 本格的인 墮落의 길을 걸었다. 貴族家門 出身 마로齒牙(890-937)로 因해 倡夫政治가 始作되었고, 10世紀 로마의 政局은 混濁해져 '暗黑의 世紀'에 접어들었다. 963年 오토 大帝(生沒 912-973)의 介入으로 淨化되는듯 하던 敎會는 敎皇 베네딕토 9歲(生沒1012-1056)에 이르러 敎皇職을 賣却하는 前無後無한 事件이 發生한다. 敎會의 混亂은 여기에서 끄치지 않고 同時에 3名의 敎皇이 이탈리아에 存在하는 初有의 事態가 벌어진다. 改革의 要求가 거세게 일어났으며 改革派 樞機卿들도 自體改革의 限界를 切感하며 獨逸王 하인리히 3歲(生沒1017-56)의 介入을 要請할 수 밖에 없었다.

하인리히 3歲의 介入 [ 編輯 ]

1046年 하인리히 3歲가 軍隊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들어와 3名의 敎皇을 모두 廢位 시킨후 獨逸出身 클레멘스 2歲(在位 1046-47)를 敎皇으로 推薦한다. 以後에도 연이어 3名의 敎皇에 對해 事實上 任命權을 行使하며 敎會를 改革하고 로마政局의 安定을 圖謀하였다. 하인리히 3歲의 努力은 肯定的인 結果가 發生하기도 하였으나 한便으로는 世俗權力에 依해 敎權이 지나치게 干涉받는 結果를 招來하여 敎會 內部의 反撥을 불러 일으켰다. 1056年 皇帝 하인리히 3世가 죽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 4歲가 6살의 어린나이로 卽位하자 로마敎會는 이를 機會로 삼아 世俗權力으로부터 獨立을 試圖했다. 가장 먼저 敎皇選出은 樞機卿團의 選擧로 決定하는 法令을 만들어서 敎皇選出에 對한 皇帝의 影響力을 遮斷하였다.(1059년) 敎會改革의 努力들은 1073年 그레고리오 7世가 敎皇으로 卽位한후에 지나치게 過激하고 急進的 形態로 進行되었다.

그레고리오 7歲의 登場 [ 編輯 ]

힐데브란트는 樞機卿 時節부터 改革派의 中心人物이였으며 1073年 높은 支持率속에 敎皇으로 卽位했다. 그는 敎會改革에 對한 自己確信과 信念이 지나치게 確固한 나머지 急進的인 改革을 推進하였다. 1075年에 世俗君主에 依한 聖職者 任命을 禁하는 敎令을 頒布하였다. 또한 '敎皇의 統治權에 關한 敎令'을 통해 敎皇至上主義를 標榜하였다. 特히 敎皇은 皇帝를 廢位시킬수 있다는 條項을 包含시켜서 平信徒에 依한 敍任權 禁止 法令과 더불어 聖俗間에 權力다툼에 불씨를 만들었다.

敍任權 鬪爭 [ 編輯 ]

敍任權(敍任權)은 中世 初期부터 慣例上 世俗權力者가 行使해왔다. 敎會領地가 주어지는 高位 聖職者는 世俗職務도 遂行하였으며 公式的으로는 獨身이였기에 世襲이 不可能했다. 事後(死後)에 封土(封土)가 皇室에 되돌아오는 長點도 있기 때문에 皇帝에게 있어서 敍任權은 聖職賣買와 側近起用을 통한 權力强化의 手段이였다. 敎皇은 父王의 急死(急死)로 6살이라는 어린나이에 하인리히 4世가 卽位한후 王權이 弱해지자 機會를 놓치지 않고 敎會改革을 빌미로 皇帝의 敎皇任命權과 敍任權 剝奪을 試圖하였다. 樞機卿時節 獨逸을 數次例 訪問했었고 長期間 滯留한 經驗이 있었던 그레고리오 7稅銀 獨逸情勢에 밝았다. 그래서 果敢하게 밀어붙일수 있었고 迅速한 初期 對應으로 敍任權 鬪爭 初盤에 勝機를 잡을 수 있었다.

敎皇 그레고리오 7世와 하인리히 4世間에 敍任權 鬪爭은 밀라노 大主敎 任命을 놓고 本格的으로 表面化되었다. 롬바르디아가 位置한 북이탈리아는 地理的인 利點 때문에 地中海 貿易을 통해 많은 附加 創出되었다. 交通의 要衝地이기도 하였던 이 地域은 當時 유럽에서 가장 富裕한 곳이었다. 特히 밀라노는 이탈리아 第2의 都市로서 商工業과 國際貿易이 發達한 經濟中心地였다. 로마가 가장 큰 都市였지만 政治와 宗敎의 中心地였을 뿐이다. 따라서 밀라노의 主敎가 되는 것은 북이탈리아에서 産出되는 莫大한 富를 얻을 機會이기도 했다.

掠奪 [ 編輯 ]

카노사의 屈辱 [ 編輯 ]

敎皇 그레고리오 7歲의 急進的인 改革에 하인리히 4世가 크게 反撥하자 敎皇은 1076年에 그를 破門하였다. 이는 前代未聞의 措置였다. [4] [5] 그 어떠한 敎皇도 世俗君主를 直接的으로 波紋韓 先例가 없었다. 아울러 敎皇은 하인리히 4世를 도와주는 貴族이나 司祭도 波紋하겠다고 警告하였다. 하인리히 4世는 繼續 對敵하고자 했으나 貴族들이 등을 돌리며 새로운 皇帝 推戴 움직임을 보였다. 權力 掌握力이 弱했던 時節이라 狀況이 갑자기 하인리히 4世에게 매우 不利하게 돌아갔다. 立地가 좁아진 하인리히 4世는 어쩔 수 없이 敎皇에게 屈服할수 밖에 없었다. 使節團을 보내 容恕를 救했으나 거절당하자 直接 敎皇을 만나고자 이탈리아로 向했다.

그레고리오 7世는 막상 하인리히 4世를 破門하였으나 前例없던 措置를 取했던 터라 內心 不安해 하고 있었다. 이런 狀況에 하인리히 4世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消息을 接하자 軍隊를 이끌고 오는것으로 判斷하고 카노사 性 [6] 으로 遑急히 逃避 [7] 하였다. 利害關係에 따라 處身이 急變하며 權力다툼에 눈먼 로마의 土着貴族들을 믿을 수 없었기에 避身하는게 이롭다는 判斷이 들었다. 카노사 城은 海拔 600m 山꼭대기에 位置하여 있는 難攻不落의 性이였고 이런 地形에서 겨울철 攻城戰은 不可能했기에 가장 安全한 場所라 볼 수 있었다.

1077年 1月 25日 皇帝 하인리히 4世가 敎皇이 避身한 이탈리아 北部 카노사 城門밖에서 나타났으나 豫想科달리 懺悔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추운 城밖에서 敎皇에게 3日동안 容恕를 빌었다. 敎皇은 側近들의 仲裁에 떠밀리듯 容恕를 하고 波紋을 撤回하였다. 艱辛히 赦免을 받은 하인리히 4世는 獨逸로 歸國한후 反對派 領主들과의 오랜 權力다툼에서도 勝利하여 1080年 權力掌握에 成功한다. 以後 하인리히 4世는 敎皇에 對한 復讐의 칼날을 갈며 機會를 엿보게 되었다.

獨逸의 로마 侵攻 [ 編輯 ]

1080年 하인리히 4世는 이탈리아로 遠征을 통해 카노사의 星州 마틸다를 敗退시켰다. 後方에 껄끄러운 마틸다를 남겨두고 로마에서 攻城戰을 펼칠수는 없었기에 優先的으로 整理를 하였던 것이다. 1081年에 드디어 하인리히 4歲(在位1056-1105)가 復讐를 위하여 로마에 到着하였다. 이番 遠征은 비잔틴 皇帝의 支援도 있었다. [8] 當時 노르만族人 로베르가 이탈리아 南部에서 비잔틴(東로마) 勢力을 몰아낸후 비잔틴 領土인 발칸반도를 侵攻해 들어갔다. 비잔틴 皇帝는 로베르의 힘을 分散시키기 위해 하인리히 4世에게 이탈리아 攻擊을 要請하였다. 하인리히 4世가 敎皇과 怏宿임을 利用한 것으로 莫大한 支援金을 보내며 攻擊時 追加的으로 많은 報償을 約束했다. [8]

하인리히 4歲의 로마 征服은 豫想 밖으로 쉽지 않았다. 로마에는 튼튼한 아우렐리아누스 城壁이 버티고 있었으며 南部 이탈리아의 노르만族들로부터 軍事的 支援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包圍攻擊과 懷柔, 로마貴族들을 買收하는등 [8] 3年에 걸친 努力끝에 1084年 3月 21日 征服에 成功한다. 라테라노궁에 居處를 마련한 하인리히 4世가 가장 먼저 한일은 로마議會를 召集하여 敎皇 그레고리오 7歲를 廢位 시키는 일이였다. 또한 라벤나의 主敎 귀베르트를 새로운 敎皇 클레멘스 3世로 擁立한후 1084年 3月 31日에 神聖로마帝國 皇帝로서 戴冠式을 올렸다.

로베르의 軍事介入 [ 編輯 ]

山탄젤로 城으로 避身한 敎皇 그레고리오 7歲(在位 1073-85)는 로베르에게 救援要請을 보냈다. 노르만族人 로베르는 敎皇의 安慰 따위에는 큰 關心이 없었다. 다만 獨逸이 로마를 占領하며 自身에게 威脅的인 勢力으로 다가오자 介入에 必要性이 생긴것이다. 로베르는 敎皇과 皇帝間에 敍任權 鬪爭中에 皇帝의 便을 들었으며 여러 가지 다른 일들로 인해 破門당한적이 있었다. 敎皇의 波紋은 하인리히 4世와는 달리 로베르의 政治的 立地 弱化나 權力漏水를 惹起시키지 못했기에 크게 神經쓸일은 못되었다. 波紋 當한후 數年만에 敎皇과 和解를 하였고 그로인해 波紋은 取消되었으나 關係는 줄곧 과히 圓滿치 못했다.

敎皇 救出作戰과 로마掠奪 [ 編輯 ]

1084年 5月에 3萬 6,000名의 軍士를 이끌고 로베르가 로마로 進擊했다. 消息을 接한 皇帝 하인리히 4世는 戰勢가 不利하다고 判斷하여 로베르가 到着하기 3日前에 退却해버렸다. 한便 反敎皇派(飯 그레고리오) 勢力은 로베르 軍隊의 로마進入을 反對하며 城門을 걸어잠구고 籠城戰에 突入하였다. 이들은 敎皇 그레고리오 7歲의 지나치게 急進的인 改革에 對해 反撥을 너머 敵愾心을 품고있었다. 더욱이 敎皇權을 濫用하여 敍任權 紛爭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獨逸軍隊가 로마를 3年동안 包圍,攻擊함에 따라 外部와 交流가 斷絶되며 民生經濟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러나 敎皇은 끌까지 固執을 부리며 責任있는 措置를 取하지 않았다.

로베르는 軍隊의 本陣을 로마시 東쪽 로렌초 城門 밖에 駐屯시켜서 로마軍의 注意를 묶어두었다. 그리고 夜陰을 틈타 約 1,500名 規模의 兵力을 이끌고 라티나 城門쪽을 奇襲攻擊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 城壁中에 가장 防禦가 허술한 地點을 공략한것은 奏效했다. 都城안으로 進入에 成功한 兵士들은 都心 곳곳에 불을 질러 騷亂을 피우고 注意力을 分散시켰다. 混亂한 틈을 利用하여 로베르의 軍隊는 都心을 빠르게 가로질러 山탄젤로 城으로 進入한후 敎皇을 救出하였다. 救出 作戰中에 抵抗軍과 市街戰이 벌어졌고 이 過程中에 掠奪도 恣行되었다.

掠奪이 終了된후 都市 로마는 滿身瘡痍가 되었다. 今番 掠奪의 特徵은 都市 곳곳 불을 질러서 建物들이 많이 消失되었다는 點이다. 特히 聖堂들에 불을 많이 질렀는데 이는 當代의 聖堂들이 軍事的 機能도 遂行했기 때문이다. 聖堂은 堅固한 石造建物로서 天然要塞 役割을 했다. 聖堂 放火는 그곳에 숨어있는 抵抗軍을 制壓 或은 沒殺시키기 爲한 措置였다.

影響 [ 編輯 ]

로베르가 이끄는 軍隊로 인해 하인리히 4世가 물러나자 敎皇은 다시 自由의 몸이 되었지만, 그와 提携한 로베르 軍隊의 掠奪行爲에 對해 로마 市民들이 憤慨하며 로마를 떠나라고 壓迫을 加하였다. 어쩔수 없이 敎皇 그레고리오 7世는 亡命길에 올랐다. 로베르는 敎皇을 護衛하여 南쪽 살레르노로 撤收했다. 事實上 축출당한 敎皇은 亡命地에서 末年을 지내다 1085年 5月 25日에 그곳에서 客死했다. [9]

敎皇은 숨을 거두면서 “나는 正義를 사랑하고 不義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亡命地에서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레고리오 7世는 腺腫하기 3日 前에 하인리히 4世와 對立 敎皇 클레멘스 3世로 卽位한 라벤나의 귀베르트를 除外하고 그가 波紋을 宣告한 모든 사람을 赦免하였다.

出處 [ 編輯 ]

  • 敎皇事前

各州 [ 編輯 ]

  1. 카노사의 屈辱事件은 敎皇權의 全盛期에 있었던 事件이 아니다. 그레고리오 7歲가 1080年에 하인리히 4歲를 두番째 破門하였으나 全혀 效力이 없었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7世는 1084年에는 强制廢位當한후 로마市民들로부터 버림받아 로마에서 事實上 追放當下다. 교황권과 皇帝權이 逆轉되는 轉換期이자 敎皇權力이 全盛期로 나아가기 위한 初盤 過渡期에 벌어진 事件이다.
  2. 山탄젤로姓은 베드로 廣場에서 約 800m 떨어진 테베레 江邊에 位置해 있다. 로마 市內에 位置해 있기에 決코 외딴城이 아니다. 要塞化되어 있는 작은 城이며 베드로 聖堂에서부터 祕密通路가 놓여있어 敎皇에게 危急한 일이 發生하면 이 通路를 통하여 山탄젤로性으로 迅速히 待避할 수 있게 되어 있다.
  3. 시오노 나나미 <로마 滅亡以後의 地中海 世界> 한길사 p28~30...古代 그리스어 '사라케노이(Sarakenoi)'에서 由來되었다. 當時 이탈리아人들은 이말을 아랍人에게 征服되어 이슬람敎徒가 된 北아프리카 人들을 指稱하는 말로 使用하였다. 사라센인들은 地中海內에서 海賊질을 많이 일삼았고 시칠리아나 이탈리아 南部에 移住,定着하여 살기도 했다.
  4. 존 줄리어스 노리치 <敎皇年代記> 바다出版 p229
  5. 300年前 751年에 敎皇 자카리아(741-751)가 메로빙거 王朝의 마지막 君主 힐데리히 3歲의 廢位와 피핀 3世의 卽位를 承認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敎皇이 直接 波紋을 한 것이 아니라 피핀이 廢位를 시키자 이를 承認한 것이다. 承認의 名分도 不足한 狀況이였기에 直接 波紋시킬 名分이 있을 수 없었다. 修道院에 있던 힐데리히 3歲를 貴族들이 推戴하여 王으로 卽位시킨후 必要性이 사라지자 廢位시킨 事件이였다. 卽 合法的으로 卽位한 王의 王位를 武力으로 簒奪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波紋은 피핀에게 내렸어야 할일이였다. 그 當時 서로마 敎會는 東로마 帝國과 聖像파괴령으로 인해 葛藤이 생기자 새로운 政治 後援者가 必要한 狀況이였기에 新興勢力인 프랑크 王國과 손을 잡기 위해서 取한 拙劣한 措置일뿐이지 이를 世俗君主 廢位의 先例하고 볼수는 없다.
  6. 카노사의 姓은 이탈리아 北部 에밀리아로마냐(州) 레조에밀리아縣(縣)의 카노사에 있다. 아펜니노 山脈의 北東쪽 方向에 位置해 있다. 2017年 이탈리아 考古學者들의 努力으로 遺跡이 發掘되었으며 星州 餘伯爵 마틸다는 敎皇의 熱烈한 支持者였다. 敎皇 그레고리오 7世와 스캔들 關聯 루머가 퍼질 程度였다. 마틸다는 不幸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그 原因이 皇帝 하인리히 3歲(生沒 1017-1056)의 措置때문이였다. 그래서 獨逸王에 對한 敵愾心을 恒常 품고 있었다. 1077年 敎皇이 곤란한 處地에 놓이자 카노사 性을 避身處로 提供하였다.
  7. 호르스트 푸어만 <敎皇의 歷史> 圖書出版 길 p140
  8. 에드워드 기번 <로마帝國 쇠망사 10卷> 대광書林 p50~51
  9. 후지사와 미치오 <이야기 이탈리아社> 圖書出版 일빛, 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