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南아시아의 美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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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東南아시아의 美術 에 關한 說明이다.

東洋에 있어서의 2大文明(二大文明)의 中心地인 印度와 中國 사이의 架橋(架橋)로서는 陸地인 西域(西域) 以外에, 海洋에서는 南海帝國(南海諸國), 남만(南蠻)의 圖書帝國(島嶼諸國)李 存在하고 있다. 이러한 地域들은 벵골灣(灣)의 실론섬(島)을 爲始하여, 수마트라·자바·보르네오의 여러 섬과, 大陸 東南(大陸東南) 便(邊)의 미얀마·타이 말레이 半島 (半島), 캄보디아 , 베트남, 또는 南支那海(南支那海)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런 地域의 美術現象을 볼 때에 印度文化·美術의 膨脹 波及(膨脹波及), 또는 힌두콜러니의 展開社(展開史)로서 把握하는 것이 理解를 容易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各地(各地)의 原住民(原住民)들은 印度美術을 受容하여도 積極的인 創造活動을 통해 그것을 再生시킨다기보다는 그것이 그 고장이나 民族 속에 混入(混入)되어 樣式的(樣式的)으로 創造 傾向이 衰退一路(衰退一路)의 樣相을 나타내는 수가 많았다. 個中에는 크메르 民族과 같이 뛰어난 創造的인 天分(天分)을 發揮하여, 앙코르 第 遺跡(諸遺跡)을 남긴 例外도 있다. 그러나 普通 原住民들이 受容한 印度美術은 宗敎美術과 같은 形式을 取해, 한便으로는 自由와 博愛(博愛)·平等을 敎義(敎義)로 謳歌하며, 呪術儀禮(呪術儀禮)나 고장의 民間信仰을 許容하면서 支配者나 浮遊 商工業者의 布施(布施)가 오도(悟道)나 舊怨(救援)과 相통(相通)된다는 紀元 3世紀 以後의 佛敎美術이 農耕社會 속에서 流布되고, 또한 多神敎(多神敎)로 自然現象을 神格化(神格化)韓 힌두敎가 呪術祈禱의 現世 利益(現世利益)의 卽效性(卽效性)을 가지고 亦是 東南아시아 農耕臺(農耕帶) 속으로 展開되어 갔다. 이러한 宗敎美術이었으므로 調査造佛(造寺造佛)이나 壯大한 神殿 建築이 그 大部分을 차지하여, 恒久的(恒久的)인 石造 遺構만이 殘存되어 있어, 當時의 美術活動을 엿볼 수가 있다. 起源 4世紀∼8世紀에 印度 古典美術(古典美術)인 굽타조(朝) 美術이 開花(開花)하여 그 後 技巧(技巧)나 工藝感覺(工藝感覺)李 剛하게 作用하여, 頹廢 衰退의 傾向을 걷게 된 것을 反映하여 東南아시아 美術에는 起源 5世紀 以後의 作品이 많으며, 더욱이 受容 以後 漸漸 造形的으로 下降現象(下降現象)을 보이는 것이 特色이다.

실론섬의 美術 [ 編輯 ]

이미 아소카王(王) 時代(紀元前 3世紀)에 佛敎가 流布(流布)되고, 首都 아누라다프라 近處에 투派라마라는 佛塔(佛塔)李 처음으로 세워졌다. 舍利(舍利)나 塔婆 崇拜(塔婆崇拜)를 中心으로 하였으나, 長老部(長老部) 等의 소승부派(小乘部派)가 得勢(得勢)하여 造形活動은 別로 活潑치 못하였고, 遺構遺品(遺構遺品)이 그리 많지 못하다. 勿論 塔婆(塔婆)나 石窟僧院(石窟僧院)·塔院(塔院) 等도 만들어져 8∼9世紀에 적으나마 大乘佛敎 (大乘佛敎)의 造佛活動도 進行되고 있었다. 실론의 佛塔은 一般的으로 '多價바'라고 불리는 3層의 原形期待(圓形基台) 위에 半球形復發(半球形覆鉢), 또는 坪두(平頭)·산석(傘石)이 頂上에 만들어지는 構造를 갖고 있어, 印度 스투파의 基本形을 模倣한 것이었다. 더구나 소승부派(小乘部派)의 保守性(保守性)을 뒷받침이나 하는 듯이 스투파의 基本形을 언제까지나 保存하며 固形(古形)을 踏襲하고 있다. 佛像의 祠堂(祠堂)인 金堂 建築(金堂建築)李 必要치 않았기 때문에 多價바의 規模形式(規模形式)李 대단히 크게 만들어져 있는 것도 그 特色의 하나일 것이다. 아누라다프라 의 4大塔(四大塔), 그 中에서도 壘班에리탑(기원전 2世紀 末 建立)은 復發(覆鉢)의 直徑이 77m나 되며, 제타바나라마塔(塔) 等과 더불어 작은 山 같은 印象조차 주고 있다. 復發部分(覆鉢部分)은 煉瓦築造(煉瓦築造)로 基壇(基壇)에 와하르카다라고 불리는 石臺(石臺)가 있으며, 거기에 建築 裝飾으로 賞두(象頭)·마카라어(魚) 等의 彫刻이 있다. 실론 壁畫로 有名한 것은 시기리야 石窟壁畫(石窟壁畵)이다. 5世紀 末에 그려진 풀가사리 모르타르 壁畫(壁畵)로 운중夫人供養도(雲中婦人供養圖)라는 主題아래 下半身(下半身)李 雲霧 속에 묻혀 있고, 上半身 나형(上半身裸形)의 肉感的인 女性이 연화(蓮華)를 酸化(散華)하는 瞬間을 描寫하고 있다. 流動감(流動感)李 넘쳐 흐르는 듯한 거침없는 살결의 輪廓과 媚態(媚態)를 머금은 魅惑的인 큰 눈매는 黃色 바탕에 赤褐色 皮膚色의 彩色 效果(彩色效果) 等과 더불어 優秀한 作品으로서 注目을 받으며, 印度式(式) 古畫(古畵)의 一例(一例)라고 알려져 있다. 佛像類例(佛像遺例)도 시기리야에서 石佛두(石佛頭)가 出土되고 그것은 실론섬(島)에 가까운 引渡의 크리슈나江 (江)의 안드라兆(朝) 後記 벤氣波(派)의 遺品과 類似하다. 그리고 아누라다프라 出土의 靑銅製불入賞(靑銅製佛立像, 6世紀)을 爲始하여 各地에서 비슷한 石造(石造)·同調(銅造)의 遺品도 出土되어, 南(南)印度 벤氣波(派)의 影響下에 組立되었음이 밝혀졌다. 재미있는 것은 8世紀∼9世紀 아누라다프라 에 三鈷杵나 방울(鈴) 等의 密敎法區(密敎法具)가 出土되어 이 고장에 密敎(密敎)가 行해졌던 것과, 그리고 힌두敎 祠堂(祠堂)도 만들어져 印度의 힌두敎 建築의 模倣이 行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남(南)印度의 힌두敎 靑銅消詳(靑銅小像)도 이 고장에 박재(舶載)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론섬 各地에서 出土되고 있다. 12世紀에 제2의 首都가 되었던 곳인 포론나르와에도 佛敎遺跡이 많고 佛像이나 佛殿도(佛傳圖)·열반상(涅槃像) 等이 만들어졌으나 조형상으로는 衰退해 있었다.

미얀마·타이의 美術 [ 編輯 ]

國家的 規模로 造形活動에 들어가 遺品을 남기게 된 것은 比較的 後의 일이다. 미얀마에서는 票族(驃族)李 11世紀에 파간 王朝(王朝)를 創建한 以後, 佛敎와 힌두敎 美術·文化의 影響을 받았다. 이 王朝는 特히 실론의 小乘佛敎(小乘佛敎)를 받아들여 熱烈한 佛敎信者가 되었으므로 調査組불을 行하여 건사王朝(建寺王朝)라고 할 程度였다. 有名한 寺院에는 難破야, 슈에다곤, 아난다 寺院 等 11世紀에 建立된 것과 13世紀의 밍가라제디 寺院 等이 있다. 아난다社(寺)는 引渡의 佛塔形式(佛塔形式)을 뒤섞어 버마風(風)으로 再構成한 構造形式으로 알려져 있다. 近世에 再建한 郎君에 있는 슈에다곤社(寺)에는 約 110m의 塔이 있다. 조각 遺品으로는 굽타 樣式을 描寫한 金은(金銀)의 小祥(小像)李 出土되고, 파간조(朝) 時代에는 아난다社(寺)의 본존 4不(本尊四佛), 佛殿(佛傳)·本生圖(本生圖)가 만들어져, 爬羅兆(朝) 美術의 影響이 나타나 있으나 13世紀 以後의 嘲笑美術(彫塑美術)에는 볼 만한 것이 거의 없다. 타이국(國)에는 船主(先住) 몬族(族)의 드바라바티 美術(6世紀∼9世紀)이 있으며, 于先 印度의 굽타조(朝) 佛敎 美術, 特히 사르나트派(派)의 얇은 옷에 肉體가 비치어 보이는 造形을 受容하여 表現한 뛰어난 遺品을 남겼다. 다음에 말레이 半島部(半島部)를 領有(領有)韓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가 侵入하여 美術影響을 남기고, 差異야 出土의 靑銅製觀音像 等의 傑作을 낳았다. 또한 東쪽 이웃인 크메르族이 타이를 支配하고(10∼13세기), 크메르 美術을 이 땅에 남겼다. 몬·크메르 祖上(彫像)이 그에 該當되는데 얼굴, 特히 눈의 形式에서 民族的 特色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美術傳統을 南下(南下)하여 온 타이족(族)李 繼承하여 所謂 타이美術을 形成하고 첸센파(12∼14世紀), 스코타이派(13∼14世紀), 亞유티아파(15∼18세기) 等 次例로 造佛活動을 行하였으나 藝術的 天分이 뛰어나지 못하였으므로 類型的(類型的)이며 優秀한 作品은 많지 않은 듯하다. 建築도 寺院建築이 行해져 버마界(系)와 실론界(系)의 古塔形式의 遺構(遺構)가 주된 것으로, 크메르系(系) 砲彈型古塔(砲彈形高塔)도 있다. 이런 要素를 建築物에 投入한 結果 複雜한 構成과 形態가 되고, 또는 濃厚한 彩色이 베풀어져 있어서 타이人(人) 美意識의 一面을 보여주고 있다.

캄보디아의 美術 [ 編輯 ]

캄보디아의 메콩江(江)과 톤레 사프號(湖)를 中心으로 한 풍요한 農耕社會가 일찍이 發達되어, 이미 부남국(扶南國)과 진랍국(眞臘國) 等이 中國의 사서(史書)에 登場되고 있다. 宗敎面에서 본다면 于先 起源 1世紀∼2世紀 小乘佛敎가 실론섬(島)을 經由하여 傳해지고, 5世紀 以後 大乘佛敎와 힌두敎가 流入되어 왔다. 크메르 電氣(前期)의 美術遺品은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그 實態도 알려져 있지 않다. 크메르族의 起源(起源)·出身地도 수수께끼에 묻혀 있으나 7世紀 캄보디아에 登場하여 프레 앙코르 時代(6∼7世紀)의 創造活動에 들어갔다. 프論 다 樣式(6∼7世紀)代表作 派라슈라馬上(像)과, 프라社트 안디드 樣式(7世紀 後半∼8世紀)의 하리하라上(像) 等 印度의 굽타 사르나트派(派) 彫刻의 影響을 받으면서, 相當히 事實的인 人間味가 造形表現의 여러 開所(個所)에서 엿보여 크메르인(人)의 美術的 才能의 一面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人의 美術表現의 本領(本領)은 建築學的 構成能力과, 建築 細部를 裝飾하는 工藝感覺으로 立證되는 扶助(浮彫)의 裝飾美의 創造能力에 있다고 하겠다. 石造 建築의 훌륭하고 强烈한 迫力(迫力)과 巨大한 構想力(構想力)의 所産이 볼 만한 것이다. 9世紀 末, 野쇼바르만 1歲가 톤레 사프號(湖)의 西北(西北)구석에 該當하는 고장에 야쇼다라프라, 卽 대도성(大都城)으로서 앙코르톰(大王城이란 뜻)을 建設했다. 以後 大建築 時代가 現出된다. 特히 12世紀 初 修理아바 르만 2歲가 앙코르 와트(王城寺)를 建立함에 이르러 크메르 建築은 發達의 頂點에 達하였다. 13世紀 建立(建立)의 바이욘은 佛敎寺院 建築으로 앙코르 와트와 類似한 構造를 갖고 있으나 古塔一面(高塔一面)에 奇怪할 程度로 큰 微笑를 머금은 人面(人面)을 表現한 議長(意匠) 等은 그 騎撥(奇拔)韓 面에서 日頃(一驚)을 禁할 수 없다. 바이욘 回廊(回廊)의 프리즈 彫刻(彫刻)도 興味를 끈다. 建築裝飾이 지나쳐 눈을 眩惑시키는 듯한 反테아이 스레이의 朴公, 프論 바겐, 프라 코 等의 寺院 等에도 볼 만한 것이 많다. 彫刻은 建築의 多彩로운 構成에 壓倒되고 있는 듯이 보이나 굽타 古典조각의 影響과 벤氣波(派) 彫刻의 長點을 受容하면서 크메르인(人)의 表情을 反映하여 冥想的(暝想的)인 눈매의 表現과, 입술이 크게 굽이치는 微笑의 造形이 魅力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앙코르 와트 [ 編輯 ]

앙코르 와트는 東南아시아 最大의 石彫 建築物로서 방형기團(方形基壇) 위에 中央과 네 구석에 5個의 古塔建築을 세우고, 3重(重)의 回廊을 漸漸 中央部(中央部)가 높아지도록 設計하여, 第3回廊(第三回廊) 가운데에 十字形(十字型)의 熱柱廊(列柱廊)이 있고, 그 中心에 中央祠堂(中央祠堂)의 塔을 構築하였다. 크메르人은 힌두敎의 敎義나 佛敎式 思考方式을 그들의 生活感情에 맞추어서 變容(變容)시키면서, 建築形式과 配置 플랜 等의 面에서도 兩者의 要素를 綜合하여, 그들 特有의 훌륭한 造形美를 創造하였다고 할 수 있다. 回廊 內壁(回廊內璧)은 엷은 浮彫로 힌두敎의 神話도(神話圖)가 大畵面構成(大畵面構成)으로 表現되어 있으나 姿態(姿態)의 躍動에 있어서의 조형상의 墓(妙)와, 裝飾美를 노린 工藝感覺이 나타나 있어 繪畫的 造形의 印象이 짙다.

앙코르톰 [ 編輯 ]

캄보디아 톤레사프湖(湖) 北方에 있는 앙코르文化의 遺跡. 앙코르는 王都(王都)를 톰은 큰(大)이라는 뜻을 나타내므로 앙코르톰은 '大王도'라는 뜻이다. 現存하는 遺構(遺構)는 자야바르만 7歲가 王國의 首都로서 1200年頃에 造營(造營)한 것이다. 1辯 3km인 城壁의 正四角形으로 周圍를 둘러싸고, 中央에는 世界의 中心으로 보이게 한 바이온墓(廟)가 높이 솟고, 그 東西南北으로 2樞軸대로(樞軸大路)가 都市를 4扮하며 2樞軸이 城壁과 만나는 곳에 王道의 門이 4個, 王宮에서 東으로 뻗은 대로 위에 1個, 모두 5個의 門이 있다. 이 5個의 門은 앞面에 돌의 커다란 뱀을 껴안은 巨人像(巨人像)의 熱(列)을 欄干으로 한 陸橋를 끼고 있으며, 門 自體는 巨大한 4面의 얼굴을 한 塔門으로 되어 있다. 陸橋의 兩側에는 7個의 머리를 가진 큰 뱀의 몸으로 줄다리기를 하는 54體의 擧上(巨像)李 늘어서 있고 神들의 줄과 阿修羅(阿修羅)의 줄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城門의 높이는 23m이고, 윗部分 4面의 菩薩의 얼굴이 蓮꽃 王冠을 쓰고 四方을 노려보고 있다. 바이온社員은 須彌山을 象徵化한 것이고 城壁은 히말라야 靈峯을, 歡呼는 大洋(大洋)을 의미하며, 이것들은 王權의 神格化와 結付된 크메르적 宇宙觀에 기초한 것이다. 바이온寺院, 破壞된 王宮, 그곳에 있는 天上의 宮殿 波尾아나카스사원이 있고, 改善한 群團이 지나가는 勝利의 門(城門의 하나)이 있다. 이 밖에 佛敎寺院 프리아파리라이, 節, 테프프라남, 10世紀 末에서 12世紀 初에 걸쳐서 建立된 社員과 祠堂 等이 있다. 特히 이 遺跡의 中心部에 이 中心部에 있는 바이온墓는, 그보다 半世紀 程度 앞서 세워진 앙코르 와트와 함께 앙코르文化의 雙璧을 이룬다.

인도네시아의 美術 [ 編輯 ]

美術史的(美術史的)으로 注目하여야 할 것은 수마트라·자바·발리 等 3個 섬인데, 여기서는 佛敎寺院 보로부두르의 遺構(遺構)를 中心으로 紹介하기로 한다. 힌두 膨脹 現象의 하나로서, 中部(中部) 자바의 디엔 高原(高原)에 7世紀∼8世紀의 힌두敎 祠堂 몇 個가 있다. 보로부두르는 8世紀∼9世紀頃 建立(建立)된 것으로서 全高(全高) 31.5m, 最下層의 一邊(一邊)의 길이 111.5m의 方形基壇(方形基壇) 위에 쌓아 올린 一種의 스투파 建築이다. 屈曲(屈曲) 많은 複雜한 5層基壇(五層基壇)에 各其 지붕이 없는 回廊을 만들고, 그 위에 原形層(圓形層)을 三重(三重)으로 쌓아 頂上에 從兄(鍾形)의 스투파를 붙이고 있다. 中央의 臺(大)스투파를 中心으로 建築 排置와 構成은 幾何學的 均齊(均齊)와 정연(整然)의 美(美)를 보여, 極히 主導(周到)韓 設計 計算에 依해 만들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複雜한 建築 細部에도 不拘하고 統一原理(統一原理)를 갖는 듯한 이 建物은 曼陀羅(曼茶羅)의 立體的 造形化나 蓮華藏世界(蓮華藏世界)의 具體的 表現의 第 설(諸說)이 있으나 수수께끼에 싸여 解決을 못 보고 있다. 方形斷(方形壇)의 네 구석에 不感(佛龕)이 있고, 原形層(圓形層)에 나란히 이어진 小塔形 空間(小塔形空間)에도 佛像이 安置되어 있으며, 回廊壁(回廊壁)에는 佛殿(佛傳)과 本生譚(本生譚)의 浮彫(浮彫)가 있어 굽타 古典조각의 造形을 踏襲(踏襲)韓 뛰어난 表現이 나타나 있다.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