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 國防部 中央情報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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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國防部 中央情報部 (大韓民國國防部中央情報部) 또는 國防部 79號室 (國防部79號室)은 1958年 創設된 大韓民國 國防部 의 隸下 情報機關이었다. 美國 中央情報局 과의 情報 交流 및 對應을 위해 設置된 機關이었으며 國防部 長官 直轄이었다. 79部隊 (79部隊)라는 別稱으로도 불렸다. 김정렬 國防部 長官은 美國 CIA 韓國支部長 要請으로 3軍 情報要員을 差出해 假稱 中央情報部 라는 統合部隊를 創設하였다. 김정렬은 이 部隊長에 이후락 准將을 앉혔고 이후락 准將은 自身의 軍番을 따서 '第79部隊'라고 이름지었다. [1]

機關長은 大韓民國 國防部 長官 김정렬 이었지만 實質的인 責任者는 이후락 이었다. 이후락 은 '79 號室' 의 創設과 함께 이 組織의 責任者로 任命되었다. [2] 1960年 4月 19日 3.15 不正 選擧 에 對한 責任으로 軍事, 警察 特務機關들이 解體될 때 함께 사라졌다. 國防部 中央情報部의 別稱은 79部隊 , 79號室 이라는 別稱은 이후락 에 依해 붙여졌는데 79는 自身의 軍番 10079에서 따온 것이었다. 國防情報本部 의 電信이며 中央情報部 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設立 背景 [ 編輯 ]

1959年 어느날 美國 CIA 主要 幹部 한 사람이 當時 國防 長官 人 김정렬에게 美國 機關과는 別途 [3] 의 組織을 構成해야 한다며 當時 國防部 長官 김정렬 에게 提議해왔다.

그는 美國 機關과는 別途의 組織으로 運營될 CIA 支部를 韓國에 設置하고 싶다고 提議해왔다. 그는 CIA 支部가 設置되면 그 要員들에게 外交官과 똑같은 治外法權이 保障되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4] 그러나 김정렬 은 쉽게 應하지 않았다. 美國 中央情報部 , 卽 CIA 幹部라고 自身을 紹介한 넬슨은 CIA서울支部를 創設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金 長官에게 넬슨은 前任 長官인 김용우와 CIA部長 앨런 덜레스 가 함께 署名한 協約書를 提示했다. [5] 韓美 두 나라의 情報協力에 對해서 規定한 文書였는데 김정렬 은 이런 것이 있는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김정렬 은 이 提案에 對해 CIA 韓國支部가 獨自的인 機關으로써 設置되는 것은 곤란하나, 美國 大使館 안에 適當한 자리를 마련하여 活動하는 것이 좋겠다는 意見을 내놓았다. [4] 韓美 두 나라의 情報協力에 對해서 規定한 文書였는데 김정렬은 이런 것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웨인 넬슨은 이 協約에 따라 CIA支部를 開設하고 이 機構와 相對할 韓國側 情報機關도 만들어줄 것을 要請했다. [5]

김정렬 이후락 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美國 CIA 에서 繼續 付託하자 李承晩 에게 報告했다. 李承晩은 兒에 CIA를 믿지 말라면서 쉽게 許諾해주지 않았다. 金 長官이 이 問題를 李承晩 大統領과 相議했더니 大統領은 내키지 않는 表情으로 CIA支部의 創設을 許可하면서도 注意를 주는 것이었다. [5] 李承晩 은 許諾을 해주되 "CIA는 못된 놈들이야. 操心해! [5] "라며 助言하였다.

設立 [ 編輯 ]

兩國 間의 合意를 거친 結果 美 大使館에는 美 CIA 韓國 支部長 웨인 넬슨이 赴任했다. 넬슨은 赴任 卽時 김정렬 國防部 長官 에게 '前任 김용우 國防部 長官 時節 韓國과 美國 두 나라 國防 長官 사이에는 兩國의 情報를 交換한다는 祕密 協定을 맺은 적이 있는데, 이 協定을 履行하려면 韓國 側에도 GA 相對役인 情報機關이 있어야 한다'고 提案했다. 이 提案을 받아들인 김정렬은 3군에서 情報 要員을 뽑아 國防 長官 麾下의 直屬部隊를 만들고 그 部隊長으로 이후락 准將을 임명했다. [4] 이 部隊의 定式 名稱은 '中央情報部'였고 對外的으로는 이후락 自身의 軍番을 딴 '79部隊'라는 僞裝呼稱을 붙였다. [4]

國防部 의 直屬 機關으로 國防部 中央情報部長은 國防部 長官 이 겸했다. 그리고 國防部 中央情報部(79號室)을 運營하는 實質的인 運營者인 室長은 이후락 이 맡았다.

機關長 [ 編輯 ]

部長 [ 編輯 ]

室長 [ 編輯 ]

國防部 中央情報部 室長이었고, 對外 名稱은 國防部 79好室長, 國防部 79部隊長 等 여러 가지 名稱으로 알려졌다.

活動 [ 編輯 ]

國防部 中央情報部의 目的은 美國 中央情報局 과의 情報 交流가 目的이었다. 旣存에 存在하면서 諜報, 情報를 入手하던 國防部 第4國이나 陸軍本部 情報局, 海軍 情報局, 陸軍 特務部隊, 國防部 國軍 防諜隊 等과는 別途로 運營, 活用되었다.

創立 當時에 79 部隊의 人員數는 20餘 名 이었고 美 CIA 要員들도 이 部隊에 派遣되어 草創期 業務를 도왔다. 79部隊는 各 情報部隊에서 蒐集된 情報들을 體系的으로 整理하는 日課 OA에서 提供하는 海外情報를 分類해 내는 일이 주된 業務였다. 美國 의 CIA에서 傳達되어 오는 情報量은 1週日에 케비넷 하나를 가득 채울 程度로 厖大했다. 이후락 은 CIA 情報 가운데 重要한 內容들을 選別하여 每日 國防部 長官에게 報告했고 國防 長官은 이를 土臺로 간추린 情報들을 景武臺 에 報告하였다.

라오스 密派 活動 [ 編輯 ]

79部隊長 時節 이후락 李承晩 의 密命을 받아 라오스 에 潛入하기도 했다. 當時 韓國 政府는 라오스 共産化 防止를 위해 右翼 勞使半 將軍이 이끄는 政府軍 支援方案을 檢討하다가 이후락 라오스 現地로 보냈다. [1] 이후락은 當時 베트남 大使 崔德新 (崔德新)의 도움을 받아 勞使班을 만난 結果를 李承晩 大統領에게 直接 報告했다.

김정렬 國防長官은 서울로 돌아온 이후락 准將을 데리고 景武臺로 들어가 李承晩 大統領을 만났다. 이때 이후락 准將이 直接 報告를 하도록 했다. 그는 '盧, 盧, 勞使半 將軍이…' 式으로 말을 더듬거렸고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다. 이후락은 勞使半 將軍이 韓國軍의 派遣을 希望하고 있더라고 傳했다. 이 報告에 따라 白善燁(白善燁) 合參議長의 傘下에 라오스 派兵을 硏究하는 實務班이 組織됐다. 그러나 美國 側의 反對로 白紙化된다.

報告에 따라 韓國軍 라오스 派兵이 깊이 있게 檢討되다가 美國 의 反對로 霧散되었다. [1]

기타 [ 編輯 ]

國防情報本部 의 電信이며 1960年 11月에 創設된 中央情報位 中央情報部 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이후락 4·19 革命 以後에도 79號室의 責任者로 있으면서 業務를 繼續하였다. 그러다가 1961年 5·16 軍士 政變 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때 政變 主體勢力들이 第一 먼저 逮捕한 것이 바로 情報 責任者인 이후락 이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關聯 書籍 [ 編輯 ]

  • 문정인, 《國家情報론》 (박영사, 2006)
  • 함성득, 《大統領 祕書室長論》 (나남출판, 2002)
  • 김교식, 《다큐멘터리 朴正熙 3卷》 (平民史, 1990)

各州 [ 編輯 ]

  1. 김충식, 《南山의 部長들: 政治 工作 司令部 KCIA, 1卷》 (동아일보사, 1992) 36페이지
  2. 홍석률, 《統一問題와政治?社會的葛藤, 1953-1961》 (서울대학교 出版部, 2001) 29페이지
  3. 김교식, 《다큐멘터리 朴正熙 3卷》 (平民史, 1990) 21페이지
  4. 김교식, 《다큐멘터리 朴正熙 3卷》 (平民史, 1990) 22페이지
  5. 第7部 가난한 軍人의 길.....<206> 朝鮮日報 1998年 6月 11日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