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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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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읍
大山邑

로마字 表記 Daesan-eup
行政
國家 大韓民國
地域 忠淸南道   瑞山市
行政 區域 29 , 108
법정리 10
官廳 所在地 대산읍 舊進路 42-4
지리
面積 105.03km 2
人文
人口 15,248名( 2017年 1月 31日 )
世代 6,653世代
人口 密度 145.18名/km 2
地域 富豪
웹사이트 대산읍 行政福祉센터

대산읍 (大山邑)은 忠淸南道 瑞山市 에 있는 이다.

地名 由來 [ 編輯 ]

대산이라는 地名이 언제부터 쓰이기 始作하였으며,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이에 對한 正確한 記錄은 없으나 큰 山(大山)이라는 漢字의 語源에서 由來되었다고 傳해지고 있다.

대산이란 地名이 文獻에 記錄된 것을 살펴보면

  • 太宗實錄 1412年(朝鮮 太宗 12) 8月 20日 3番째 技士에‘배를 잘 管理하지 않은 忠淸道 대산萬戶(大山萬戶) 박의손(朴義孫)을 論罪하다.?라는 記錄이 있고,
  • 世宗實錄 1426年(世宗 8) 8月 16日 正軸條에 忠淸道 監査와 節制使가 合同하여 아뢰기를“도내에 있는 瑞山의 다리串, 흥양, 吐盡, 猛串 等 네 個의 牧場을 親히 踏査하여 살펴보니 不便한 點이 있어 - 中略 - 대산串은 水草가 豐富하고 牧場 築造하는 공역도 便利하게 되었으니 - 中略 - 큰 말은 대산串에 放牧하고 작은 말은 흥양串에 放牧토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記錄이 있어 冠名으로, 또는 指名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沿革 [ 編輯 ]

대산읍은 元來 1圖面과 2圖面으로 分秤되었었다.

  • 1圖面은 扶餘 鎭守府에 있은 後 高麗時代 革罷되고 그 後 木磨場으로 되어 있었으나 200餘年 前에 金吹鳴 僉使가 이를 京畿 南陽으로 옮기고 平身(화곡의 反哭)僉使를 設置한 後 1896年 革罷됨
  • 2圖面은 平身 僉使 以前에 대산리에 鎭守府를 設置하였으나 그 後 革罷되고 遺跡地를 丘疹이라 稱하여 오고있음
  • 1914年 3月 16日 에 忠南道 영 제3호에 依하여 1圖面과 2度면 現在 지곡면 환성리, 대요리를 除外한 地域을 合倂하여 10個里 25個 九老 대산면이라 稱하였다.
朝鮮總督府令 第111號
舊 行政區域 神 行政區域
瑞山郡 日圖面 대산면 대로리, 대죽리, 毒串리, 화곡리, 墺地利, 기은리
瑞山郡 이圖面 대산면 대산리, 운산리, 영탑리
瑞山郡 지곡면 대산면 웅도리

地質 [ 編輯 ]

  • 대산읍의 主要 地質構造는 선캄브리아기의 便巖類, 硅巖, 石灰巖 等으로 構成된서산층군내에서는 褶曲과 斷層들이 形成된 後 重複變形에 依하여 再褶曲構造들에 依해 形成되었다.
  • 선캄브리아기의 後半인 原生代에 이 地域은 碎屑性堆積物이 쌓일 수 있는 堆積盆地였고, 여기에 主로 粘土와 모래가 쌓여 셰일과 沙巖이 形成되었으며, 部分的으로 石灰質 物質의 沈澱으로 石灰巖이 形成되었다. 後期의 廣域變成作用에 依하여 變成巖으로 變하여 호상片麻巖과 便癌類로 되었다. 그 後 화강片麻巖의 貫入을 받았다. 以後 쥬라기의 大寶造山運動 末期에 이 地域에는 小規模의 閃長巖과 花崗巖類의 貫入이 일어났으며, 白堊紀에 小規模의 酸性脈巖類의 巖脈上 貫入이 있었다.
  • 모든 巖石은 形成된 以來 現在까지 繼續 風化 侵蝕作用을 받았으며, 모든 暗層을 덮으며 海岸과 낮은 地帶에 널리 發達되어 있는 土沙層이다. 近來의 干拓事業으로 넓은 埋立地가 생겨났다.

歷史 [ 編輯 ]

  • 舊石器 時代: 김현구 瑞山文化院長은 1990∼1991年까지“서산 泰安文化遺跡指標調査團(團長-충북대 博物館長 이융조)”을 構成, 調査를 實施하여 그 結果로 文化遺跡地, 遺物에 對한 記錄紙를 發刊하였다. 이때 瑞山의 船社·原始의 遺跡 遺物이 많이 發掘되었다. 當時 찾아진 舊石器 遺跡에 對하여 시급히 調査해야할 곳에 對해서는 1996年度에 再調査를 實施하여 精密 指標 調査 報告書를 發刊하였으며 그때 대로리에서 遺跡이 發見되었다. 이 遺跡은 대로1里에 所在하는데, 海邊에서 멀지않은 곳에 位置한 박태성 집 近處로 遺跡은 破壞되고, 遺物만 發見되었다. 發見된 遺物은 뗀石器로서 충북대학교의 이융조 博物館長이 確認한 바 遺物은 찍개와 밀개이다. 찍개는 많이 使用한 듯 날 部分이 많이 닳았는데 用途는 나무를 자르고 다듬기, 짐승의 뼈 추리기 등에使用했을 것이다. 밀개는 가죽 等을 손질할 때 使用되는데 바닥은 판판하고 거칠어서 가죽에 붙어 있는 기름氣 等을 除去하는데 使用되었다. 遺物은 2點만 發見되었다.
  • 新石器 時代: 舊石器 時代가 끝나면서 新石器 時代가 되며 連帶는 B.C. 1萬年에서부터 1千年까지이다. 新石器 時代를 알려주는 重要한 指標로는 간石器를 使用하기 始作한 것과 土器 使用, 그리고 農事의 始作을 들 수 있다. 간石器는 舊石器 時代에 돌을 깨트려서 쓰던 돌창이나 돌칼 等을 끝이나 날을 날카롭게 갈아 씀으로써 몇 十 倍의 能率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中에서도 가장 威力이 컸던 것은 돌칼, 돌도끼, 화살鏃으로써 대산의 여러 地域에서 다양하게 出土된 것을 現在 대산중학교 史料館에 展示 中이다. 빗살무늬土器는 料理를 하거나 穀食을 貯藏하기 위하여 흙을 빚어서 불에 구운 것으로써 간石器와 함께 新石器 時代를 알려주는 重要한 證據物이 되고 있다. 또 이 土器의 變遷 良識을 가지고 新石器 時代의 歷史的 變遷過程을 推定할 수 있다. 그러나 이 船社 土器는 破損되기 쉬워서 대산에서는 各地에서 出土되나 깨진 部品만 있고 原形으로 남아 있는 것이 적다. 대죽리 貝塚遺跡에서 特히 많이 發掘되었다. 新石器 時代는 器具의 날을 銳利하게 세워서 쓰고 날을 세우는 숫돌 等이 發達했다. 또 穀食을 갈아서 껍질을 벗겨내는 方法, 穀食을 갈아 가루를 내먹는 갈돌 갈판이 必需品으로써 대산地域에서 많이 出土된다.
  • 靑銅器 時代: 酸素의 封墳을 만들고자 흙을 採取하던 구덩이에서 靑銅器 時代 움집 1期, 石器, 土器 等 多數等 遺物이 나와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뒷山 丘陵地帶에서 採集한 土器 2點과 함께 중앙박물관에 提供하였다. 博物館의 調査結果 土器는 百濟 時代 것이고 石器와 無紋 土器 篇, 그리고 구덩이의 形態는 靑銅器 時代 것으로 判斷하였다. 發掘은 1984年度에 중앙박물관에서 施行하고많은 遺物이 나왔으며 대산에서는 처음으로 發掘된 집터 遺跡이다.
  • 三國時代: 백제는 漢江邊에서 勢力을 擴張하여 忠淸·全羅道까지 倂合하는데 그때 瑞山地域을 掌握한 것으로 본다. 300年 무렵에 百濟에 倂合되었을 것으로 보여 대산의 百濟史는 360年이라 할 수 있다.
  • 統一新羅時代: 百濟는 660年에 羅唐聯合軍에 依하여 滅亡하였다. 그러나 王族인 福信과 僧女印度침(道琛) 等은 王子 風(豊)을 擁立하고 復興軍을 組織하여 聯合軍에 抗拒하였다. 한 때는 200女性을 回復하는 等 戰果를 올렸으나 內部의 分裂로 前歷이 弱化되어 走流性에서 663年에 聯合軍에게 陷落되었다. 以後에도 지수신(遲受信)을 筆頭로 復興軍의 一部는 任存城(任存城, 豫算 大興)에서 繼續 抗戰하다가 665年에 陷落되었다. 대산地域은 이때 新羅에 編入되었다.
  • 後三國時代: 後百濟의 甄萱은 全羅道 地方을 中心으로 貰를 擴張하여 前 백제의 故土를 휩쓸었으니 變化 많은 時代에 대산地域 農民層에서도 他 地域과 같이 어려운 生計를 維持했을 것이며 바로 隣近地域에서 集團蜂起가 있었으니 여기에 同調하여 騷擾事態度 있었을 것으로 推測된다. 王建은 918年에 弓裔를 몰아내고 高麗를 創建했다. 이듬해에는 鐵圓에 있던 首都를 開城으로 옮겼다. 그 後에 甄萱軍은 934年에 洪城에서 일어나 高麗와 싸웠으나 大敗하고 公主 以北의 30女性을 빼앗기고 이듬해에는 父子間에 內紛이 일어 싸우는 사이 太祖가 쳐서 大破하니 아들인 身檢群(神劍軍)李 936年(太祖 19)에 降伏하여 後三國이 統一되었다. 高麗의 朝廷이 地方統治를 위하여 常住하는 外觀(地方官)을 派遣한 것은 983年(成宗 2)에 12牧(牧)을 設置하면서 부터였다. 이것은 崔承老의 時務策에 따른 것이며 이때는 高麗가 建國한 지 60餘年이 지난 後로 그間은 地方의 豪族들이 支配하고 있었다. 이러한 領軍 영현制의 間接支配는 일정한 制約이 뒤따라 睿宗(睿宗) 以後에는 最下位이긴 하지만 監務(監務)를 設置하기 始作했다. 그러나 重要地域을 中心으로 外觀을 配置하는 高麗의 地方統制 施策은 餘말까지 完全히 是正되지 못하고 속軍, 屬縣은 朝鮮朝에 들어와서야 없어진다. 그렇지만 대산은 釜谷地域을 除外하고는 어떤 組織이 다스렸는지 末端組織의 記錄은 남아있지 않다.
  • 高麗時代: 高麗時代 대산의 명지地域 以北이 대산部曲이 되었다. 部曲이 되는 理由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산 地域은 太祖 王建의 命을 거스른 地域이라는 條件이 第一 컸다고 본다.
  • 朝鮮時代: 朝鮮은 建國 後 1413年(太宗 13)에 大大的인 地方行政組織 改編을 斷行하여 全國을 京畿, 忠淸, 慶尙, 全羅, 講院, 黃海, 平安, 咸鏡의 8度로 나누고 그 아래 總334個의 下部 牧, 部, 郡, 現 行政組織을 두었다. 各 地方 單位의 差等은 聚落의 對蘇, 人口의 多少 田結의 廣狹 等을 考慮하여 決定되었다. 郡縣制는 高麗朝에서도 實施되고 있었으나 地方官이 派遣되지 않는 屬縣과 特殊 行政組織(香, 소, 部曲)李 相當數 있었다. 그러나 朝鮮朝에서는 1409年(太宗 9)에 特殊組織을 革罷하여 郡縣으로 하였거나 그 地域 郡縣에 흡수시켰으나 홍주목에 내속된 대산串은 그대로 存續되었다.

行政 區域 [ 編輯 ]

  • 대산리

대산리는 邑所在地에 位置한 丘疹(舊鎭)을 中心으로 정자동과 원두骨, 매남리와 各골 等의 一圓을 말한다. 구진은 派指導萬戶陣을 駐屯했던 由緖깊은 곳으로 여지도서에 依하면 今生洞里(金生洞里)와 마남리(馬南里)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5年 行政區域 改編市 金生動 一部(各골)와 정자동, 원두骨, 매남리를 합쳐 산전리(山前里)로 하였다. 그後 1914年 行政區域 改編 때에 肺 牧場地域에 새로 생긴 老相(路上), 滷蝦(路下) 兩 里의 一部와 산전리 一圓을 全部 統合하여 대산면 대산리가 되었다. 1991年 12月 1日 대산면이 대산읍(大山邑)으로 昇格됨에 따라 대산읍 대산리가 되었다. 대산리의 地名 由來는 대산이라는 글字 그대로 큰 山에 關聯된 이름으로 東쪽에 우뚝 솟은 대산의 名山, 網一山(望日山)에 緣由되어 얻어진 이름이다. 대산리는 6개리로 分離되어 있다.

  • 기은리

기은리는 둥기山 西쪽에 자리한 企銀串이와 그마재 等의 中心마을로 形成되었다. 이곳에는 대산地方海洋港灣廳과 대진초등학교가 있고, LG石油化學 社員아파트가 자리하고 있어 사람이 많이 居住하는 先進地域으로 發展되고 있다. 기은리는 1765年(英祖 41)에 刊行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독곶리가 包含되어 企銀串리(其隱串里)로 表記 되어 있다. 以後에 刊行된 호구총수 瑞山郡便에서 1789年 基準 리 編制를 보면 기은곶리와 독곶리로 分離되어 있어 이 무렵에 독곶리가 分離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4年 行政區域 改編에서 다시 現 대로2里 一部 地域이 分離되었는데 이때 기은곶리에서 串(串)字가 빠진 대산면 기은리가 되었다. 그리고 기은리라는 地名 由來는 當初 毒串 地域과 統合되었을 時, 마을의 地形이 南北으로 길게 形成되어 있고, 西쪽으로 突出되었으므로‘긴곶’이라 하였다. 이‘긴’자가 發音上의 變化에 依해 起因에서 企銀(其隱)으로 變하여 企銀串이 되고, 이어 지응고지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現在 기은리는 1·2里로 行政區域이 分離되어 있다.

  • 대로리

대로리는 광암, 물安易(명지), 靈座木骨 等의 3個 마을로 形成되어 있어, 現在 行政區域이 臺로 1·2·3里로 되어 있다. 朝鮮朝 末까지 대로리라는 이름이 없었고 行政區域上 現 대로1里는 마남리, 2里는 企銀串리, 3里는 기은곶리와 評신리(반곡리)에 屬해 있었다. 이 地域에 1426年(世宗 8)에 造成된 木磨場이 1794年(正祖 18)에 廢止되면서 當時 정자동에서 원두骨 - 各골 - 명지서낭堂 - 房고개로 이어지는 道路를 基準으로 南쪽은 로하리, 北쪽은 로상리로 이름이 變更되었다. 1914年 行政區域 改編 때에 로상리·로하리·기은리·반곡리 等의 一部地域이 倂合되어 대로리가 되었다. 地名由來를 살펴보면 글字 그대로 큰길이 있음으로 이에 연유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 대죽리

대죽리는 1765年(英祖 41)에 編纂된 여지도서의 1759年 當時 리 編制를 보면 竹葉리(竹葉里)로 되어 있다. 以後 忠淸都邑地와 1871年에 編纂된 湖西邑誌에 竹葉리와 대각리(大角里)로 되어 있어 이 時期에 竹葉里에서 대각리가 分離된 것으로 보인다. 1914年 行政區域 改編 때에 2개리를 統合하고, 대각리의‘대? 者와 竹葉里의‘죽? 字를 따서 대죽리가 되었다. 以後 1946年에 다시 1·2里로 分離되었다 대竹2里 地域에 流入人口의 增加로 1980年에 녹와니 地域이 3里로 分離되었고, 以後 2里에 精油工場이 建設되면서 마을의 面貌가 一新되었다. 그리고 대竹3里 녹와니 地域에 忠淸南道 地方産業團地가 造成되면서 이곳 住民들이 移住를 함으로써 2002年에 殘餘世代가 대竹2里에 統合되어 現在 行政區域이 대竹1·2里로 되어 있다. 옛날부터 竹葉理는 사람살기에 좋은 곳이라 알려져 왔는데, 이것은 이 地域이 三面이 바다에 接하고, 肥沃한 土地와 天惠의 魚鹽柴水(魚鹽柴水)가 豐富하고 사람들의 性品이 후덕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5年 光復이 되면서 바다를 埋立하여 農土를 넓히고, 鹽田을 開發하여 소금을 生産해 脚光을 받던 곳이기도 했다.

  • 毒串리

독곶리는 西海에 接해있는 半島로 20餘年 前 까지도 오지(奧地)의 象徵으로 불러져왔던 地域이다. 하지만 只今은 國內 屈指의 大企業들이 石油化學工團을 造成하여 우리나라를 代表하는 新興工業地帶로 變貌하였다. 1970年代 中盤에 朴正熙大統領이 毒串리 海域을 視察하면서 道路가 확·鋪裝되고, 工團建設이 可視化되기 始作하여 現在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는 景觀이 아름다운 黃金山이 있는데, 朝鮮朝 初期에 이 山 아래에 萬호진이, 1705年(肅宗 31)에는 첨寫眞이 設置되어 海岸을 防禦하던 軍士要衝地였다. 독곶리는 朝鮮朝까지도 기은곶리에 包含된 곳으로 獨立된 마을이 아니었으나 여지도서의 1789年 當時 리 編制 現況에 처음으로 독곶리가 나와 이 무렵에 獨立된 것으로 보인다. 朝鮮朝에는 소금을 生産하여 國家 財政支援에 重要한 役割을 했으며, 光復 以後에도 많은 鹽田이 開發되어 天日鹽 生産에 注力하였다. 이 마을은 火焰을 生産하던 곳이라 목벗(項筏), 샘벗(泉筏) 等과 같은 鹽벗과 關聯된 地名이 많다. 독곶리의 由來를 살펴보면 마을의 形態가 半島이고, 바다에 突出된 串(串)으로 되어있는데, 안에 들어가서는 넓게 펼쳐져 있는 데에 연유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 웅도리

웅도리는 朝鮮時代부터 舊韓末까지 지곡면에 屬해 있다가 1914年 行政區域 改編 때에 대산면에 編入되어 대산면 웅도리가 되었다. 웅도리는 加露林灣 內海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대산읍의 7個 圖書 中 唯一한 有人島이다. 섬의 模樣이 곰의 形象을 닮았다 하여 곰섬이라 하는데 大路1里를 經由하여 썰물 때 乳頭를 건너 섬에 들어갈 수 있다. 웅도리에는 現在 東便말, 큰말, 큰골, 長骨 等의 自然마을에 3個 半이 있다. 住民들은 主로 漁業에 從事하고 있다.

  • 영탑리

영탑리는 靈前과 탑동의 두 마을이 합쳐져 이루어진 마을로 대산읍의 關門이다. 榮轉(令田)은 三兄弟峯과 件稷山이 東西로 길게 자리하고 있어 서·북풍을 막아주는 防牌가 되어 溫和한 氣溫이 維持되는 곳이다. 또 물이 豐富하고 땅이 肥沃하여 사람살기에 좋은 地域으로 義城金氏와 潭陽全氏가 일찌기 입향하여 集姓村을 이루고 累代에 걸쳐 평화롭게 살아오고 있다. 1765年에 編纂된 여지도서에 依하면 영전리는 106家口에 332名, 탑동리에는 67家口에 195名이 居住한 것으로 되어 있어 當時로서는 相當히 많은 人口가 居住한 地域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탑리는 朝鮮時代에 영전리(令田里)와 탑동리(塔洞里)로 分離되어 있다가 1914年 行政區域을 改編하면서 영전리와 탑동리의 一部를 合倂하였는데 이때 영전리의 『英(令)』字와 탑동의『탑(塔)』자를 따서 영탑리라 하여 대산면에 編入 되었다. 以後 영탑1·2로 分離하면서 영전리는 영탑1里로, 탑동리는 영탑2里가 되었다. 영탑2里에 풍림아파트가 들어서면서 人口가 增加되어 1995年度에 영탑2里에서 풍림아파트가 영탑3里로 分離되어 現在에 이르고 있다.

  • 墺地利

대산읍의 西北端에 자리하고 있는 墺地利는 加露林灣과 粉줄만 사이에 西北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半島로 形成되어 있다. 벌말 海岸에서는 朝鮮時代부터 陰曆 3月에 소금豐年을 祈願하는 벗 告祀를 지내고 소금을 많이 구워 國家財政에 큰 寄與를 하였다. 光復 後에는 天惠의 自然條件을 活用하여 100餘 ha의 많은 鹽田을 開發하여 良質의 天日鹽을 生産함으로써 이 고장의 産業發展에 一翼을 擔當하였다. 1765年에 編纂된 여지도서에서부터 1895年 行政區域 改編 때까지 墺地利의 오 者를 까마귀吳(烏)를 쓰다 1914年 行政區域 改編 때에 나오(吾)字로 故處 써 現在에 이르고 있다. 墺地利는 1895年과 1914年 行政區域 改編 때에도 다른 地域과 倂合되지 않고 單一 里로 存續해 오고 있다. 그리고 墺地利의 由來를 살펴보면 墺地利에는 검은곶이라는 自然마을이 있는데 검은이란 語源에서‘까마귀오?자를 써서 墺地利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三面이 바다와 接하고 있어 住民들은 漁業과 農業을 겸하고 있는데, 벌촌포와 高敞個 沿岸에 漁場이 形成되어 있어 다양한 海産物의 採取로 生活이 豐足한 便이다. 그리고 最近에 벌村抛 海水浴場이 開場되면서 많은 避暑客들이 찾아와 觀光地로 變貌해 가고 있다. 1974年에 오지1·2리로 分離되어 現在에 이르고 있다.

  • 운산리

운산리는 網一山 東便 山 자락에 位置하여 知事, 葛麻, 淸凉, 間月, 懷抱 等 5個 마을로 形成되어 있다. 東쪽은 서산만과 隣接해 있어 바지락과 실치를 비롯한 海産物이 豐富하였고, 仁川을 往來하는 旅客船의 尿路였으나 1984年 大虎防潮堤가 築造되어 大規模 湖水와 함께 엄청난 規模의 農耕地가 形成되어 隣近住民에게 分配되었고, 複雜했던 海岸線의 모습은 모두 사라졌다. 운산리의 變遷過程을 살펴보면 朝鮮後期까지 金生動(金生洞)으로 되어 있었다. 今生洞은 亡日産을 가운데 두고 매남리를 除外한 대산리 地域과 운산리 全體를 하나로 묶어 指稱한 매우 넓은 마을이었다. 1895年 行政區域改編 때 現 대산리를 산전리로, 雲山1·2里를 산후리(山後里)로, 雲山3·4·5里를 운전리(雲田里)로 分離하였다. 그 後 1914年 日帝治下에서 行政區域을 改編하면서 산후리와 운전리를 合하여 운산리라 改稱하고 대산면에 편입시켰다. 운산리의 地名由來를 살펴보면 운전리의 韻字와 산후리의 橵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운산리는 現在 5개리로 分離되어 있다.

  • 화곡리

화곡리는 대산읍의 北端에 있는 地域으로 반곡리, 개화리, 삼길포 等 3個의 中心 마을로 形成되어 있다. 삼길포는 海上交通의 要地로 仁川을 往來하는 旅客船이 就航하였고, 한때 실치(뱅어)잡이로 盛況을 이룬 곳이다. 朝鮮時代에는 坪신리(平薪里) 또는 評神眞理(平薪鎭里)라 하였는데 이곳에 坪新進이 있었다. 坪新進은 1711年부터 184年間 種3品의 僉使(僉使)가 勤務하던 重要한 軍事要地였는데 軍事權은 勿論 牧場管理까지 맡은 兼木管 體制였다. 平身진지 周邊에는 善政을 베푼 僉使들의 永世不忘비가 세워져 있고, 反哭마을에는 陳 터임을 알 수 있는 城壁이 남아 있다. 1895年(高宗 32)에 斷行된 行政區域 改編에서 개화리(開花里)와 반곡리(盤谷里)로 分離되었다. 다시 1914年에 行政區域을 改編하면서 개화리와 반곡리 一部를 統合하였고, 一部는 대로리에 編入되었다. 이때 개화리의 ?火(花)?者와 반곡리의 ?曲(谷)?者를 따서 대산면 화곡리가 되었다. 以後 화곡1·2·3里로 分離되었다가 1966年 다시 하나로 統合된 後 또다시 1974年에 3개리로 分離되어 現在에 이르고 있다.

觀光 [ 編輯 ]

  • 벌천포海水浴場: 墺地利 最北端에 位置하고 있는데 이 海水浴場은 몽돌과 王모래로 이루어진 楕圓形의 海岸으로 泰安郡 이北面의 萬臺(萬臺)와 마주하고 있다. 北쪽에 鬱蒼한 松林이 있어 野營하기에좋고, 周邊 海岸을 따라 늘어선 絶妙한 模樣의 奇巖怪石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한 萬臺 너머로 펼쳐지는 落照京義 恍惚함이 끝나면, 건너便 工團의 아름다운 夜景이 感歎을 자아내게 한다. 멀리 海邊의 끝자락으로 눈길을 돌리면 山봉우리가 雙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周邊에 鹽田이 있던 외진 海邊으로 매우 閑寂한 곳이었다. 2000年 以後 조용하면서 景觀이 뛰어나고, 즐길 거리가 많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旅行客과 避暑客이 늘어나기 始作하였다. 特히 2010年度에 KBS TV 人氣프로인 1泊 2日 撮影팀이 다녀간 後 이곳의 아름다운 風光이 放映됨으로써 全國에 알려졌다. 깨끗한 물과 하얀 모래, 몽돌, 鬱蒼한 松林, 아름다운 落照가 발길을 잡는 天惠의 海邊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名所가 되었다. 隣近 海岸에서 바다낚시를 즐기고, 바지락을 캐고, 굴을 따고, 고동과 게를 잡으며 海邊의 浪漫을 滿喫(滿喫)할 수 있다. 여름철에 넘쳐나는 避暑客들의 便宜 圖謀를 위해 化粧室을 新築하고, 上水道를 普及하여 샤워場과 炊事施設을 擴充하였다. 또한 盛需期에 人命救助團을 運營하여 安全事故에 對處하고 있다. 한便 周邊에 膾집과 宿泊施設이 늘어나고, 볼거리와즐길거리, 먹을거리가 豐富해 보다 활기찬 遊園地로 有名하다.
  • 黃金山(黃金山)과 白沙場(白沙場): 대산읍 所在地에서 國道 29號線을 타고 道路 끝點까지 가면 前方에 黃金山과 三星乳化團地가 位置하고 있다.공단이 造成되기 前 이 地域은 黃金山 沿岸에서 안진 觸부리까지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自然沙丘의 드넓은 白沙場으로 天惠의 條件을 갖추고 있어 海水浴場으로 開發해야 한다는 輿論도 있었다. 바다와 隣接한 드넓은 모래벌판은 메말라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져 있었는데 6·25動亂 後 越南民들이 이곳에 定着하여 農事를 짓기 始作하였고, 한 때는 軍 特殊部隊 敎育場으로 活用되기도 하였다. 1970年代 中盤에 大統領이 헬기로 이 地域을 視察한 後 開發이 檢討되기 始作하여 1979年度에 瑞山-毒串間 道路가 鋪裝되었다. 그 後 1980年代 末 石油化學團地가 造成됨으로써 아름다운 白沙場은 아쉽게도 모습을 감추고 말았지만, 밤이 되면 工團의 輝煌燦爛한 불빛이 壯觀을 演出한다. 또한 많은 傳說을 孕胎(孕胎)하고 있는 黃金山은 예전에 港錦山(亢金山), 大邱米産(大口尾山), 後망봉(候望峯)이라고도 하였는데 干拓事業 以前에는 물이 들어오면 들어가는 목이 잠겨 섬으로 變하였다. 正常에는당집이 있고, 西쪽 海岸은 깎아지른 듯한 絶壁이며, 東便은 緩慢하여 나무가 茂盛하게 자라고 있다. 西便 바닷가 絶壁에는 海國을 비롯한 各種 野生花가 피어나고 있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면 木鐸소리가 난다는 傳說을 가지고 있는 큰굴과 작은굴(海蝕洞窟), 바다로 내려와 물을 마시는 모습의 코끼리바위와 絶妙한 形象을 하고 있는 奇巖怪石이 있다.
  • 삼길포港(三吉浦港): 삼길포項은 화곡3里에 位置하며 大虎防潮堤와 接하고 있다. 1999年 1月 1日 國家 1種漁港으로 指定되어 防波堤와燈臺, 물양장 等의 施設物들이建設되고 있다. 이곳은 大虎防潮堤 工事가 始作되기 前에는 50餘 隻의 重船을 부리며 백魚脯(실치) 잡이로 名聲이 높던 漁村이었는데, 防潮堤 築造 工事가 着工되면서 漁業 與件이 變化되어 好況(好況)을 누리던 실치 잡이는 中斷되고 말았다. 以後 臨海工業團地와 대산抗議 建設로 流入人口와 旅行客이 增加되자 삼길포구는 觀光地로 變貌하게 되었다. 2005年부터 每年 우럭祝祭를 開催하여 周邊의 아름다운 自然景觀과 豐盛한 海産物을 널리 弘報하면서 觀光客 誘致에 힘쓰고 있다. 이곳 浦口에서 遊覽船을 타면 雄壯한 모습의 臨海工團과 隣近에 점점이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돌아보며 아름다운 絶景을 鑑賞할 수 있다. 그리고 防波堤 끝에 자리한 빨간 燈臺와 흰 물살을 가르며 疾走하는 快速艇, 오가는 漁船 위로 날아드는 갈매기 떼의 정겨운 모습 또한 旅行客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浦口 中間 海邊에 地域의 情緖와 잘 어울리는 彫刻 作品을 設置한 彫刻公園이 2011年에 造成되어 觀光客들에게 볼거리를 提供해 주고 있다. 또한 이곳은 낚시하기에 좋은 곳으로 浦口 앞의 바다 座대낚시와 먼 海上에서 즐기는 線上낚시는 우럭科 놀래미, 廣魚 等이 많이 잡혀 낚시꾼들에게 人氣가 있다. 船着場에는 갓 잡아온 우럭科 놀래미, 廣魚 等의 新鮮한 自然産 膾감을 低廉한 價格에 파는 線上膾집이 있는데 뱃전에서 맛보는 담백하고 쫀득쫀득하게 씹히는 膾 맛이 一品으로 觀光客들의 味覺을 돋우어 준다. 한便 國際化 時代에 副應하여 2010年 11月에 대산項과 中國 룽淸市(榮成市) 롱앤港(龍眠港) 間 國際旅客船 定期航路 開設에 關한 共同推進 業務協約이 締結되었다.
  • 網一山(望日山): 대산읍 대산리와 운산리,영탑리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山으로 대산地域에서 第一 높은 海拔 302m의 雅淡한 山이다. 山 頂上에는 아름드리赤松들이 鬱蒼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1966年 軍事基地 工事를 始作하면서 베어졌다. 이 山 西北쪽 기슭의 巨木이 우거진 숲속에 亡日社(望日寺)가 자리하고 있으며,산 아래쪽에 옛 절터도 있다. 頂上에 오르면 東으로 大湖淡水湖(大湖淡水湖)와 西쪽의 茫茫大海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위에 펼쳐지는 日出과 日沒의 모습이 長官을 이루어 第1의 祕境으로 꼽는다. 뿐만 아니라 淡水湖와 周邊 山野의 골짜기에 내려 깔리는 새벽안개의 景觀 또한 一品이며 黃金빛으로 물든 가을 들녘의 風光(風光)도 아름답다. 1997年 亡日社 進入路 便에 대산義勇消防隊와 JC, 라이온스,로타리클럽 會員들이 植栽한 벚나무가 茂盛하게 자라 꽃이 滿發하면 많은 賞春客 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봄의 情趣(情趣)를 즐긴다.
  • 自覺山(紫閣山): 奧地1里 마을의 北端에 位置하며 毒串리 黃金山과 마주하고 있는 海拔 156m의 나지막한 山이다. 離散 北쪽은 急傾斜로 바다와 接하고, 南쪽은 傾斜가 緩慢하여 마을과 農耕地가 形成되어 있다. 離散은 京仁地域으로 오르내리는 船舶의 動態를 把握하는데 容易한 곳이다. 이러한 與件으로 日帝時代에 산 8部 稜線에 防護通路를 波高, 頂上에 海上의 近況을 監視하는 監視哨所를 設置했던 곳으로 軍事的으로 重要視 했던 곳인데 現在까지 防護通路와 哨所 터가 남아있다. 南쪽 四面에 절터가 남아있고, 北便의 女優바위에 稀貴植物인 皐蘭草(皐蘭草)가 自生하고 있다. 頂上에 오르면 멀리 網一山(望日山)과 八峯山(八峯山)이 보이고, 가까이에 있는 벌村浦口(筏村浦口)와 鹽田의 모습이 정겹다. 또한 시원스럽게 펼쳐진 黃金바다와 毒串(獨串)·대竹(大竹)의 石油化學團地가 한 幅의 그림처럼 視野에 들어온다. 그리고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落照와 工團夜景 또한 아름답다. 最近에 登山路가 開設되어 山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 三길산(三吉山): 화곡리 마을의 北端에 位置하고 있는 대산의 名山이다. 離散은 京仁地域과 牙山灣으로 오르내리는 船舶의 動態를 把握하는데 容易한 곳이다. 이러한 與件으로 朝鮮時代(1711∼1895年)에는 離散 아래의 反哭마을에 駐屯하던 平身陣에서 국사봉에 烽燧臺를 設置 運營하여 軍事的으로 매우 重要한 位置를 占하고 있었다. 三길산의 北쪽은 急傾斜로 이루어져 바다와 接하고, 南으로는 傾斜가 緩慢한 便으로 山 中上端部에 백제時代에 創建되었다고 傳하는 三吉事(三吉寺)가 있다
  • 雄途(熊島): 加露林灣(加露林灣) 內海(內海)에 位置하고, 섬 앞에는 매섬과 분점도, 右島,새섬 等이 자리하고 있다. 섬의 模樣이 곰의 形象을 닮았다 하여 곰섬이라고도 하는데 썰물 때에 시멘트鋪裝 길인 乳頭를 건너서 섬에 들어갈 수 있다. 典型的인 漁村마을로 넉넉하고 薰薰한 人心을 가지고 있는 곰섬은 周邊에 汚染되지 않은 개펄이 드넓게 形成되어 體驗觀光마을로 指定되었다. 이로 因해 개펄體驗을 할 수 있는 좋은 곳으로 많은 觀光客이 찾아오고 있어 民泊과 펜션 施設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魚族資源이 豐富하여 바지락, 굴, 낙지, 붕長魚, 우럭, 놀래미, 망둥어 等이 많이 잡히는데, 바지락과 굴, 낙지는 이 섬의 週 特産物이다. 特히 사리 때에 바지락이 많이 나오는데 이를 싣고 바다에서 돌아오는 牛馬車行列의 모습이 長官이었다. 이러한 光景은 寫眞作家들에게 좋은 素材가 되었는데 只今은 작은 動力船으로 運搬하고 있어 牛馬車의 浪漫的인 모습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섬 內에는 初等學校 分校가 있고 學校 뒷山 頂上에는 마을의 安寧과 豐漁를 祈願하며 祭를 올리던 돌로 쌓은 祭壇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400餘年前에 입향 한 金海金氏들이 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祝祭 [ 編輯 ]

  • 삼길포 우럭祝祭

2005年度부터 삼길포우럭祝祭推進委員會 主管으로 淸淨 삼길포의 海産物을 널리 알려지역 經濟를 活性化 하고, 觀光 名所의 이미지 構築을 위하여 우럭祝祭를 開催해오고 있다. 그동안 各種 公演行事와 體驗行事, 競演大會 等의 새롭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行事를 進行함으로서 每年 平均 11萬名 以上이 함께 어우러지는 藝術과 飮食文化의 먹거리 祝祭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다.

    • 公式行事 : 開會式, 閉幕式
    • 公演行事 : 打樂의 饗宴, 桶키타 連奏, 有名歌手 招請 公演, 有名 밴드希望콘서트, 國樂 한마당, 스포츠댄스 公演, 風物 한마당, 跆拳道 示範,平壤藝術團 招請公演, 却說이 품바公演, 乘務, 바다사랑 어울림 打樂, 海外民俗公演 等.
    • 體驗行事 : 삼길포 이야기 만들기, 빨간燈臺 사랑의 프로포즈, 千人糞 우럭비빔밥 試食, 우럭抛 料理體驗, 떡메치기, 陶瓷體驗, 風船아트, 페이스페인팅, 어린이 童心 먹거리體驗, 希望의 바람개비 만들기, 조개 캐기, 붕長魚 잡기, 脫·傳統활 만들기, 사랑·所望·希望·촛불心氣, 厄때움 소리지르기, 三길산 烽燧臺體驗, 갈매기 먹이週期體驗, 滿船旗 만들기, 모터보트·民俗놀이·追憶놀이·낚시體驗 等.
    • 競演行事 : 全國 主婦歌謠祭, 全國 한뫼歌謠祭, 觀光客 卽席 노래자랑, 邑民 어울 歌謠祭, 全國 職場人밴드競演大會, 全國 치어리더競演大會, 우럭壯士씨름大會 等.
    • 其他行事 : 불꽃놀이, 豐漁祭, 깜짝 競賣 等.

敎育 [ 編輯 ]

學校名 所在地 備考
대산初等學校 舊進路 40-5 (대산리) 1922年 個校
대산初等學校 雄途分校 雄途1길 82 (웅도리) 2016年 廢校
대산初等學校 奧地分校 奧地검은고지길 1-10 (墺地利) 2004年 廢校
명지초등학교 명지3로 25 (대로리)
명지초등학교 삼길포分校 화곡리 山1 2003年 廢校
瑞山대진초등학교 企銀亞섬길 16 (기은리)
청운초등학교 亡日山路 448-18 (운산리) 1999年 廢校
獨戶初等學校 毒串리 산75-1 2004年 廢校
대산중학교 忠義로 1856 (대산리)
瑞山명지중學校 명지1로 15 (대로리)
대산高等學校 대산1로 36 (대산리)

各州 [ 編輯 ]

  1. 瑞山市 條例 第130號.
  2. 瑞山市 條例 第426號.

參考 文獻 [ 編輯 ]

  • 대산읍地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