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카쿠止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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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다이카쿠지. 교토시 禹쿄 區(右京?) 社가(嵯峨) 五事와 鄭(大?町)에 所在한다.

다이카쿠지 皇統 ( 大?寺統 , だいかくじとう)은 日本 가마쿠라 時代 (鎌倉時代) 後期부터 難보쿠初 時代 (南北朝時代)에 걸쳐(난보쿠초 時代에는 南朝에 屬했다) 日本 天皇을 繼承했던 王統으로, 日本 天皇의 자리를 놓고 至妙人 王統 (持明院統)과 對立하였다.

이름의 由來는 제88대 告祀가 天皇 (後嵯峨天皇)의 皇子였던 第89代 고후카쿠社 天皇 (後深草天皇)의 親同生인 제90대 가메야마 天皇 (?山天皇)의 아들인 고우다 天皇 (後宇多天皇)李 교토 (京都) 外郭의 賜暇노(嵯峨野, 오늘날의 日本 교토 市 禹쿄 舊 )의 다이카쿠지(大?寺)의 再興에 힘을 쏟았고 出家 後에는 다이카쿠지에 머무르며 인세이 (院政)를 行했던 것에 依한 것이다.

槪要 [ 編輯 ]

양통질립에 이르기까지 [ 編輯 ]

쇼카 (正嘉) 2年( 1258年 ) 考査가 狀況은 當時 16歲였던 고후카쿠社 天皇의 親同生으로 當時 10歲였던 히사히토 親王(恒仁親王, 後날의 가메야마 天皇 )을 太子로 삼고, 이듬해인 쇼겐 (正元) 元年( 1259年 )에 고후카쿠社 天皇으로 하여금 히사히토 親王에게 讓位하게 하였다. 고후카쿠社 狀況에게도 그 所生의 皇子가 있었으나, 考査가 狀況은 分에이 (文永) 5年( 1268年 )에 고후카쿠社 狀況의 第2皇子로 當時 4歲였던 히로히토 親王(?仁親王, 후시미 天皇 )을 제치고 가메야마 天皇의 第2皇子로 當時 2歲였던 要히吐 親王(世仁親王, 後날의 고우다 天皇 )을 太子로 指名하였다.

그 뒤 考査가 狀況은 分에이 9年( 1272年 )에 死亡하였는데, 遺言狀에 누구를 後繼者로 한다고 明記하지 않고 다만 다음 治天의 軍이 누가 될 것인가에 對해서 " 가마쿠라 幕府 (鎌倉幕府)의 意向을 따르라"는 維持를 비쳤을 뿐이었다. 治天의 軍은 인세이를 行하는 狀況(上皇)을 가리키는 말이다. 때문에 고후카쿠社 狀況과 가메야마 天皇은 저마다 自身이 다음 治天의 軍이 되기를 바라고 紛爭을 벌였고, 朝廷을 맡아 介入한 가마쿠라 幕府는 考査가 狀況의 定處(正妻)인 고후카쿠社 狀況과 가메야마 天皇 두 兄弟의 生母 오미야人(大宮院)에게 告祀가 狀況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물었다. 이때 오미야人은 가메야마 天皇의 便을 들었으므로 가메야마 天皇이 治天의 軍으로 指名된다. 그 結果 가메야마 天皇은 在位 狀態에서 治天의 軍으로써 狀況의 정무도 執行하게 되었고, 分에이 11年( 1274年 ) 當時 8歲였던 要히吐 親王에게 讓位하였다.

그러나 幕府는 고후카쿠社 狀況의 不滿도 受容해서 겐지 (建治) 元年( 1275年 )에 當時 11歲였던 히로히토 親王을 太子로 指名하고 將來 고후카쿠社 狀況이 다음 治天의 軍이 될 수 있도록 補正하였다. 이렇게 發生한 고후카쿠사와 가메야마 두 君主의 對立은 幕府에 依해 兩側 子孫 사이에 거의 10餘年 週期로 交代로 돌아가면서 王位를 繼承한다는, 이른바 兩通질립(?統迭立)의 原則으로써 인세이를 行하도록 하였다.

兩通질립 以後 [ 編輯 ]

고니兆 天皇 (後二?天皇)李 死亡하고 그 아버지인 고우다 狀況 (後宇多上皇)은 「(고니兆 天皇의 아들인) 拘泥요시 親王(邦良親王)李 成人이 될 때까지」라는 條件으로 고니兆 天皇의 동생인 다카하루 親王(尊治親王)에게 皇位를 잇게 하였다. 이가 고다이고 天皇 (後醍?天皇)이다. 그러나 고다이고 天皇은 旣存의 양통질립이 아니라 自身의 아들에게 王位를 繼承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고우다 法皇(後宇多法皇)이나 皇太子 拘泥요시 親王이 反撥하자 고다이고 天皇은 인세이를 停止시켜 對抗하였으며, 또한 가마쿠라 幕府 打倒를 計劃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다이카쿠지 王統 그 自體가 分裂될 危機에 놓이기에 이르렀다. 至妙人 王統이나 가마쿠라 幕府는 拘泥요시 親王을 支援했고, 拘泥요시 親王이 急逝하자 親王의 아들인 야스히吐 親王(康仁親王)을 至妙人 皇統의 苦困 天皇(光?天皇)의 太子로 삼게 하여 고다이고 天皇 系統으로의 王位 繼承을 拒絶할 姿勢를 비쳤으나, 겐코 (元弘) 3年( 1333年 ) 가마쿠라 幕府가 滅亡하고 고다이고 天皇이 復位하면서 고니兆 天皇 系列의 基데라노미야 가(木寺宮家)의 皇位 繼承은 夫人되게 되었다.

겐무 新正 (建武の新政)으로 一時 王統은 다이카쿠지 王統(고다이고界)로 統一될 듯 보였으나, 2年 半만에 겐무 신정은 崩壞했다. 요시노(吉野)로 달아난 고다이고 天皇이 南朝(南朝)를 宣布하면서, 아시카가 打카우지 (足利尊氏)에 依해 옹립된 至妙人 王統의 天皇이 북조(北朝)로써 對立하게 되어, 日本은 難보쿠初 時代를 맞이하게 되었다.

以後 間爐의 騷亂 (??の擾?) 때에 南朝가 교토를 奪還하고 一時的으로 年號를 統一하였으나(쇼헤이 一統) 이마저도 半年 만에 崩壞해버렸다. 後날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의 斡旋으로 正式 讓位 儀式을 行하는 同時에 以後의 王位 繼承에 對해서는 양통질립으로 한다는 條件으로, 다이카쿠지 王統의 高카메야마 天皇 (後?山天皇)李 三種神技 (三種の神器)를 至妙人 王統의 고코마쓰 天皇 (後小松天皇)에게 넘겨주고, 難보쿠初 時代의 分裂은 幕을 내렸다.

그러나 南朝側의 교토 入城에 즈음해 神奇 歸還의 意識은 이루어졌으나 正式 讓位 意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高카메야마 天皇에 對한 處遇는 「天皇으로써 卽位하지는 않았지만 特別히 狀況으로 禮遇한다」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以後의 王位 繼承이 至妙人 王統으로 굳어지면서, 다이카쿠지 系統은 不滿을 품고 옛 南朝의 維新(遺臣)들이 宮中의 身氣를 奪取하는 等의 抵抗을 15世紀 半까지 持續하였다(후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