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걸 (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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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걸 (金英傑, 1930年 ~ )은 大韓民國 科學者 , 敎育者, 포항공과대학교 名譽敎授이다.

學歷 [ 編輯 ]

主要經歷 [ 編輯 ]

生涯 및 業績 [ 編輯 ]

1951年 서울大學校 藥學大學 을 卒業하고, 1955年 美國 留學길에 올라 1958年 버크넬 大學校 에서 化學工學 學士 課程을 마치고, 1963年에는 프린스턴 大學校 에서 博士學位를 取得했다. 博士學位를 받은 後 美國 노스웨스턴 大學校 에 敎授로 任用되어 10餘 年間 敎育과 硏究에 沒頭해 停年保障(tenure)을 받았다. 그런데, 1974年 安定된 職場을 뒤로 한 채 韓國에 電擊 歸國했는데, 當時 政府가 推進하던 ‘在外科學者 誘致 事業 [1] ’ 때문이었다. 美國에서 停年 保障까지 받은 敎授로서는 처음으로 歸國을 斷行한 것이어서 當時 波長이 컸다.

韓國 理工系 大學 發展에 寄與 [ 編輯 ]

1974年 歸國 後 1987年까지 한국과학원(1988年 KAIST 로 再編) 化學工學科 敎授로서 敎務處長, 副院長을 歷任하면서 한국과학원이 韓國 最初의 大學願 大學으로 자리 잡는 데 核心的인 役割을 遂行했다. 美國 大學에서 쌓은 經驗을 바탕으로, 當時까지 틀이 잡히지 않고 있었던 韓國의 理工系 大學院에 硏究를 中心으로 한 學事運營 體制를 뿌리내렸다. 特히 博士學位를 받기 위해서는 國際學術誌에 論文 을 싣는 것을 必須 條件으로 삼도록 하고, 敎授 昇進을 위해서는 國際的 水準의 學術誌 에 論文 揭載를 要求하여 大學院에서 이루어지는 硏究의 目標 水準을 크게 높였다. 이렇게 敎授 誘致와 昇進 및 保守制度, 그리고 學生의 卒業 要件 等을 國際 水準에 걸맞게 强化함으로써 韓國科學院의 博士學位 水準은 크게 높아졌고 敎授들의 硏究 力量도 强化되었다. [2] 1987年 포항공과대학교 가 門을 열어 거기에 合流하여, 또 하나의 硏究中心 大學을 세우는데 힘썼다. 招待 化學工學科 主任敎授와 招待 大學院長 等을 歷任하면서 2001年 2月 停年 隱退할 때까지 포항공과대학교 를 硏究中心大學으로 育成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런 努力으로, 韓國科學技術院 포항공과대학교 는 오늘날 世界 有數의 硏究中心大學으로 成長했다.

韓國 化學工學 國際化 [ 編輯 ]

1981年부터 3年間 韓國化學工學會 會長으로 在任하며 韓國 化學工學의 國際化에 寄與했다. 大型 國際學會人 第3回 'Pacific Chemical Engineering Congress(PACHEC-III)'를 韓國에 誘致하고 組織委員長을 맡아, 1983年 1,100名을 넘는 人員이 參席한 가운데 成功的으로 치러냈다. 그리고 1997年에는 아시아太平洋 觸媒 [3] 學會(APACS)의 創立을 主導하여 그 첫 番째 學會인 APCAT-I을 慶州市 에서 開催했다.

1991年부터 9年間 韓國科學財團 指定 優秀工學硏究센터(ERC)인 觸媒技術硏究센터의 所長으로 觸媒 硏究分野 發展을 이끌었고, 活潑한 算學 協力을 펼쳤다. 또한 著名한 國際學術誌 'Applied Catalysis'와 'Catalysis Review'等의 編輯顧問으로 活動하기도 했다. 이에, 2019 科學技術有功者 엔지니어링 分野에 指定되었다.

褒賞 [ 編輯 ]

各州 [ 編輯 ]

  1. 朴正熙 政府는 1966年 韓國科學技術硏究院 (KIST)을, 1971年 韓國科學技術院 (KAIS)을 各各 設立하고, 過去 頭腦 流出 (brain drain)로 빠져나간 優秀 科學技術人力을 國內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當時로서는 破格的인 條件을 내걸고 歸國을 勸誘했다. 이에 呼應하여 김영걸敎授를 비롯한 人材들이 國家 發展에 獻身하기 위해 歸國했다.
  2. 이와 같은 그의 業績은 韓國科學院 設立調査팀 委員長이며 뒷날 美國 顧問團(US Coordinating Office) 團長을 맡아 韓國科學院의 産婆 役割을 했던 스탠퍼드 大學校 의 '프레드 터먼'(Fred Terman) 敎授도 높이 評價한 바 있다.
  3. 管理者, 사이언스올. “觸媒(catalyst ; catalyser) | 科學포털 사이언스올” . 2019年 12月 23日에 確認함 .  

參考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