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國樂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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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金東鎭, 1938年 ~ 1989年 )은 大韓民國 國樂人 으로 代金 散調의 名人이다.

生涯 [ 編輯 ]

藝名(藝名)은 김동식(金東植), 號는 聚訟이다. 全羅南道 和順 出身이다. 김동진의 집안은 傳統的으로 國樂人 家計로써 專門 曳引으로 行世하는 이들이 많았고, 近來에 이르러서도 많은 專門 藝人을 輩出한 家門이었다. 特히나 그의 兄弟로서 專門 曳引으로 中央과 地方을 아우르며 活動한 이들이 많은데, 代表的으로 큰 兄 김동준 (金東俊)과 막내 동생 김동표 (金東票)를 들 수 있다. 김동준은 1970年代와 1980年代를 주름 잡았던 名鼓手로 重要無形文化財 第59號 판소리 高法의 藝能保有者로 있다가 作故하였고, 김동표는 重要無形文化財 第45號 代金 散調의 藝能保有者로 指定되어 現在까지 釜山에서 後進을 養成하고 있다.

14歲 때 當時 南原 에 起居하던 강백천 (姜白川)으로부터 伽倻琴 散調를 배웠고, 16歲 때에는 井邑 에서 신달용(申達用)에게 代金 줄風流 [1] 가운데 本中領(本中靈)~굿거리 課長을 배웠고, 또한 남도삼현(南道三絃) 가운데 念佛(念佛)~타령(打令) 課長을 배웠다. 그러다가 다시 20歲가 되어서 강백천의 門下로 들어가 代金을 受學하여 一家를 이루었다. 또한 강백천의 가락 뿐 아니라 편재준(片在俊)과 한주환(韓周煥)의 바디를 硏究하여 自身만의 獨創的인 流派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中年 以後에는 釜山, 慶州, 龍仁의 韓國民俗村 等地에서 자주 연주하였으며, 그 뒤로는 서울에서 旺盛한 活動을 하였다. 그러나 喉頭癌에 걸려 苦生하다가 1989年, 서울 自宅에서 作故하였다.

藝術 世界 [ 編輯 ]

흔히 김동진을 강백천流 大笒散調의 一人者로 評價하는 境遇가 많은데, 實際로 그는 강백천의 代金 가락을 바탕에 두고 편재준과 한주환 等의 가락을 덧붙여서 강백천의 그것과는 差異가 있는 새로운 바디를 形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對해서는 亦是 강백천을 師事한 送付억쇠의 證言에서 確認할 수 있는데, 送付억쇠는 김동진의 代金 散調에 對하여 강백천의 것과는 多少 差異가 있다고 하였다.

그의 錄音을 통해서 確認해 보자면, 먼저 중중모리와 자진모리 장단의 區分이 確然하여 강백천流가 아닌 박종기 類의 所謂 '소리더늠 散調'의 脈을 따르고 있으며, 다음으로 條(調)의 使用에 있어서 강백천과는 多少 다른 樣相을 보이는데, 이는 한주환의 것과 거의 恰似하다. 뿐만 아니라 강백천이 傳統的인 시나위 大笒으로 散調를 연주했던 것에 비하여, 김동진은 散調 代金을 使用하여 연주했다. 散調 大笒은 시나위 大笒보다 約 2度 程度 音程이 낮은데, 이 또한 강백천과는 差異가 있는 대목이다. 때문에 그의 가락을 穩全히 강백천流라고 하기에는 問題가 있는 것이다. 다만, 代金의 聲音 만큼은 강백천의 것을 큰 줄기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강백천流를 中心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散調가 이처럼 변용되고 擴大된 까닭에는 그 自身의 經驗도 影響을 미친 바 있을 것이나, 큰 兄인 김동준의 影響을 크게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김동준은 本來 소리꾼으로 出發하였고, 10代부터 40代에 이르기까지 소리꾼으로서의 活動 또한 活潑했다. 그가 無形文化祭 制度 안에서 처음 자리잡은 것 또한 東樵 金延壽의 首弟子로서 指定된 것이었다. 헌데, 40歲를 전후하여서부터 소리꾼으로서의 活動과 더불어 高手로서 活動을 하기 始作하는 等, 音樂的 外延을 넓혀갔다. 그리고 1970年代가 되면 소리를 作破하고 本格的인 專業 高手로서 活動하기 始作하였는데, 그로부터 作故할 때까지 그는 판소리와 各 散調, 시나위의 伴奏者로서 中央 舞臺에서 名聲을 얻었다. 그 音樂的 外延의 擴大는 自然히 김동진에게 이어진 것이다. 김동준이 直接 代金을 연주하거나 한 것은 아닐지라도, 名人들과 呼吸을 맞추면서 그들의 가락을 口音으로 體化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김동진에게 傳해지면서 그 산조의 바탕이 더욱 넓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反面, 1960年代의 閉鎖的인 文化財 指定 制度 속에서 김동진은 履修者나 文化財로서 指定받지 못했는데, 그 表面的 原因에 對해서는 '왼손 代金'을 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實地로는 上記의 過程을 통해 그 音樂的 外延이 擴大되어 강백천의 것과는 分明 差異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듯 豐盛해진 代金 散調의 가락은 김동진 以後의 大笒 演奏者들에게 많은 影響을 미쳤으며, 現在 演奏되는 大笒散調의 曲調를 들어보면 김동진의 가락이 폭넓게 收容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相當히 많은 演奏活動을 가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比較的 많은 回數의 演奏 活動에도 不拘하고 無形文化財 指定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全판의 傳承은 잘 되지 않았으며, 그 死後에는 中央 舞臺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地方에서 活動하는 몇 弟子들이 그의 가락을 잇고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 兄 : 김동준 (1928年 ~ 1990年 10月 2日)
  • 동생 : 김동표 (1941年 ~ 2020年 6月 10日)
    • 祭需 : 김말례
      • 조카 : 김영석, 김영규, 김영미

各州 [ 編輯 ]

  1. 所謂 '民間風流'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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