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誅 大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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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誅 大捷
第3次 高麗-거란 戰爭 의 一部

1019年(玄宗 10年) 2月에 侵略한 10萬餘 名의 거란군을 上元帥 강감찬 都統使와 怨讐 강민첨 大將軍이 鬼誅에서 크게 무찌른 戰鬪이다.
날짜 1019年 3月 10日 ( 陰曆 2月 1日 )
場所
鬼誅(龜州, 現在의 平安北道 構成時 )
結果 高麗의 決定的 勝利. 以後 遼나라는 成長勢가 꺾여 沈滯期로 접어들고, 다시는 高麗를 攻擊하지 못한다.
交戰國
高麗 遼나라
指揮官
강감찬
강민첨
김종현
蕭排押
아과달
작고
高淸明
兵力
20萬 8千餘 名 10萬餘 名
被害 規模
알 수 없음 거의 全滅
生存者 約 1000名 未滿

救主 大捷 또는 鬼誅 大捷 (龜州大捷)은 1019年 3月 10日 [1] ( 陰曆 2月 1日 ) 上元帥 강감찬 都統使와 怨讐 강민첨 大將軍 麾下의 高麗 軍이 遼나라 君을 鬼誅(龜州, 現在의 平安北道 構成時 )에서 물리쳐 勝利한 戰鬪이다. 高麗側 20萬 名 以上, 要側 10萬 名 以上의 大兵力이 平野 한복판에서 맞붙은 總力 大會戰 이다.

戰爭의 背景 [ 編輯 ]

太祖 王建 은 高麗를 建國할 때부터 거란과는 距離를 두었다. 高句麗 를 繼承한 渤海 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高句麗 를 繼承한다는 意味에서 考慮는 北進 政策 을 國是로 내걸었기 때문에 國境을 마주한 거란과는 對立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立場에서는 이러한 高麗의 政策과 더불어 宋나라 와 高麗가 聯合할 境遇, 考慮가 自身들의 뒤를 칠 것을 憂慮하여 事前에 考慮를 完全히 自身들의 屬國 程度로 制壓하든지 最小限 宋나라와 距離를 두게 만들 必要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高麗를 3次例 侵攻하였다.

993年 ( 成宗 12) 1次 侵入에서는 蕭遜寧 이 이끈 거란軍이 敗北한 後, 서희 가 談判을 벌여 考慮가 江東 6週 를 獲得하였고, 1010年 ( 顯宗 1) 2次 侵入에서는 强調의 政變 을 口實로 侵攻해 왔으나 별다른 所得없이 돌아갔다. 1018年 ~ 1019年 3次 侵入에서 上元帥 강감찬 都統使와 怨讐 강민첨 大將軍이 鬼誅 大捷을 勝利로 이끌었다.

經過 [ 編輯 ]

이에 高麗는 平章事 강감찬 을 上元帥로 봉하고, 大將軍 강민첨 을 怨讐로, 兵馬判官에 김종현 을 任命, 20萬 8千의 大軍으로 蕭排押 을 막도록 하였다. 高麗軍의 강민첨 大將軍은 鴨綠江 流域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軍과 맞서 싸워 升轉하였으나( 흥화진 戰鬪 ), 거란軍은 首都인 開京을 目標로 迂廻하여 繼續 南下하였다. 하지만 거란軍은 自主에 있는 내구산에서 追擊戰을 벌인 강민첨 大將軍의 起兵 1萬 4千 名에게 大敗하고, 大同江 가의 마탄에서도 시랑 조원에게 大敗하면서 1萬 名의 軍士를 잃게 된다.

結局 首都 開京에서 約 100里 程度 밖에 떨어지지 않은 신은현에 到着한 거란軍은, 또 한番 高麗軍의 請야 作戰에 當하고 만다. 開京에 偵察兵들을 보냈지만, 開京의 防禦가 旺盛하다는 諜報를 들은 蕭排押은 後退를 決心하게 된다. 追擊하는 高麗軍을 막기 위해 約 300名 程度의 騎兵隊를 配置해 두었지만, 이들은 금교역에서 高麗軍의 襲擊에 全滅하고 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繼續 退却하던 거란軍은, 演奏에서 또다시 강민첨 大將軍의 騎兵隊에게 大敗한다.

며칠 뒤, 거란軍은 鬼誅를 지나게 되었다. 上元帥 姜邯贊은 鬼誅에서 數萬의 大軍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兩軍은 힘을 다해 싸웠고, 쉽사리 勝負가 갈리지 않았다. 때마침 開京에서 거란軍을 追擊하며 올라온 김종현의 騎兵隊가 거란軍의 後進을 襲擊하여 敵을 混亂에 빠뜨렸고 演奏에서 勝利한 강민첨 大將軍의 起兵 1萬 4千 名이 井州 方向에서 鬼誅에 到着해서 거란의 中心部로 全員 突擊하여 考慮本陣과 함께 거란군을 完全包圍하고 瞬息間에 殲滅시키니, 거란軍은 完全히 慘敗하고 北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怨讐 강민첨 大將軍의 騎兵隊가 半嶺까지 거란軍을 追擊, 擊退하여 살아돌아간 거란軍은 數千 名에 不過했다.

『高麗史節要』權4 正宗(靖宗) 12年 11月條 怨讐 강민첨 大將軍의 鬼誅大捷 記錄

11月. 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對中上部(大中祥符) 3年(1010)에 거란이 들어와 擄掠질하였을 때, 서북면都巡檢使(西北面都巡檢使) 楊規(楊規)와 部指揮(副指揮) 김숙흥(金叔興) 等은 先鋒에 나아가 힘써 格鬪를 벌이며 連이은 戰鬪에서 敵을 突破하였지만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集中되어 모두 戰場에서 戰死하였다. 또한 大衆上部 11年(1018) 거란 兵士가 闌入하였을 적에는 兵部尙書 知中樞院事(兵部尙書知中樞院事) 강민첨(姜民瞻)李 怨讐(元帥)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突擊하여 半嶺(盤嶺)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軍이 退却하면서 槍과 甲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姜民瞻은 이에 10,000名을 捕虜로 잡거나 斬首하였다. 그 功을 追念한다면 褒賞을 施行하기에 合當할 것이다. 功臣角(功臣閣)에 모습을 그려 이로써 後代를 勸勉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十一月. 制曰, “大中祥符三年丹兵入寇, 西北面都巡檢使楊規副指揮金叔興等挺身奮擊, 連戰破敵, 矢集如蝟毛, 俱沒陣下. 又於大中祥符十一年丹兵入,兵部尙書知中樞院事姜民瞻爲元帥, 鼓奮擊, 大敗於盤嶺之野, 丹兵奔北, 投戈委甲, 行路隘塞. 民瞻乃斬萬級. 追念其功, 合行褒奬. 可圖形功臣閣, 以勸後來.”

高麗 거란 戰爭과 鬼誅大捷 救國의 英雄, 怨讐(元帥) 강민첨(姜民瞻) 大將軍의 功臣 肖像은 現在 大韓民國 寶物 第588號로 國立 中央博物館에 保管되어 있다.

鬼誅 大捷에 對하여 《寮舍 遼史》에서는 다하(茶河)와 打以下(陀二河)의 敗戰에서 天運과 피室의 李君(二軍)의 溺死者가 많았으며, 거란의 最高 名門인 遙輦腸(遼輦帳)의 常溫(詳穩) 아과달(阿果達), 客星社(客省使) 작고(酌古), 渤海常溫 高淸明 (高淸明), 天運群常溫 海里(海里) 等과 같은 高位 幹部들이 戰死하였다고 傳하고 있다. 期待에 어긋난 이 敗戰에 거란의 成宗 은 크게 怒하여 蕭排押에게 使臣을 보내어서 ‘네가 敵地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地境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나를 만나려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고 責望하였다고 한다. 이 鬼誅 大捷이 지닌 가장 큰 意義는 거란의 成宗으로 하여금 다시 武力으로 高麗를 굴복시키려는 野望을 버리게 한 同時에, 거란이 끈질기게 要求하여왔던 國王의 親朝(親朝)와 江東 6週의 返還을 다시는 要求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高麗史>> <玄宗 10年> 己未年(1019) 2月 初하루 基軸일. 거란군이 鬼誅(龜州)를 通過하자 上元帥 강감찬 都統使 와 怨讐 강민첨 大將軍 等이 邀擊해 大敗시키니 겨우 數千 名만 살아 돌아갔다.

外部 링크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高麗의 對外政策〉"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