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民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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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府 (國民府)는 日帝强占期 韓國의 獨立運動團體, 軍政府 (軍政府)이다. 1929年 4月 滿洲 自治地域에서 正義府 中心의 全民族唯一黨協議會派가 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母體로 하여 國民府를 結成하였다.

背景 [ 編輯 ]

唯一黨 促成運動 [ 編輯 ]

1928年 무렵 滿洲 地域에 參議府 , 正義府 , 新民府 等 3部가 定立된 가운데, 正義府가 在蠻 獨立運動團體를 影島하기 위해 唯一黨 促成運動을 主唱하였다. 1928年 2月 3部의 幹部들이 聯合會議를 開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28年 5月 新民府와 參議府 外 民族·共産主義를 網羅한 재만 18個 團體 代表가 모여 會議가 進行되었으나 旣成團體의 不正을 主張하는 '촉성회派'와 旣成團體의 本位를 主張하는 '協議會派'로 分裂되었다. 會議의 結果, 촉성회 側은 民族唯一黨 '촉성회組織同盟'을 組織하였고, 協議會 側은 '재만運動團體 協議會'를 規約하였다.

촉성회派 (革新議會) [ 編輯 ]

이에 1928年 8月 正義府를 離脫한 一部가 촉성회에 加擔하여 吉林省 內 김응섭 의 집에서 김동삼 · 이종건 · 김상덕 · 倍활산 等과 唯一黨促成의 組織과 宣傳을 위하여 남·北滿洲 各地에서 區域을 分擔하여 積極 努力할 것을 決意하였다. 11月 中旬 반석현 蝴瓓羊창자(呼蘭梁廠子)에서 民族唯一黨의 이름으로 同盟規約을 發表함과 同時에 盟員(盟員)의 募集에 努力하였다. 이에 新民府의 軍政派와 參議府가 촉성회에 投合할 것을 決定함으로써 그해 12月 下旬 正義府 脫退派의 加擔과 더불어 吉林에 모여 會合을 갖고, 新民府 軍政派의 主唱에 따라 養父는 解體를 宣言하고 臨時 過渡的 機關으로 '革新議會'를 組織 [1] 하고, 主要 課業 [2] 을 定하였다. 그리고 韓嶠(韓僑)의 自治를 위한 暫定 行政區域으로 前 參議府의 管轄區域을 南區(南區), 在野革命黨 所在 管轄區域을 中區(中區), 前 新民府의 管轄區域을 北區((北區)로 나누어 統合하기로 하였다.

한便 期成會와도 意見의 一致를 보게 됨으로써 民族唯一獨立黨 재만'책진회'를 組織하고, 새로운 陣容으로 會長에 김동삼 等 執行委員會 [3] 를 構成하여 唯一黨의 促成에 注力하기로 議決 [4] 하였다.

  • 촉성회의 消滅

그러나 期限인 1929年 5月 以前까지 책진회가 軍政府를 組織하지 못해 김좌진 , 김시야 等은 北滿洲로, 이청천 은 五常(五常)縣으로 김희산 , 박희곤(朴希坤) , 이白波 等은 南滿洲로, 各自의 根據地로 돌아간 後 一部가 日本 官憲에 逮捕됨으로써 촉성회는 有名無實하게 되었다. 以後 책진회는 正義府에서 脫退하여 김동삼 , 김상덕 , 김원식 等에 依해 근근히 維持되었다.

金佐鎭 等은 元來 新民府의 根據地였던 中東선 石頭瑕疵(石頭河子)에서 同志를 糾合하고 民族團體를 造成하면서 1929年 8月 한족總聯合會 (韓族總聯合會) [5] 를 組織하면서 勢力을 挽回하는 데 注力하였다. 한족總聯合會는 順 국수波인 金佐鎭 等과 無政府主義者의 一派인 남대하 (南大廈)를 비롯하여 國內 人士들이 提携한 團體로 中東선 一帶를 管轄할 수 있는 永安縣 산시(山市) 逆轉에 本部를 두고 註釋에 김좌진 이 就任하였다. 그러나 1930年 1月 24日 金佐鎭이 反對派인 在中國靑年同盟 一派인 共産主義者 靑年에게 暗殺됨으로써 分裂하여 精神 等에 依해 ' 韓足自治聯合會 '로 改稱되었다가, 그해 7月 紅塵 , 이청천 , 悶瞀 (閔武), 안훈 (安勳), 黃鶴洙 , 信宿 , 이장녕 (李章寧) 等이 推進하던 韓國獨立黨 에 合流함으로써 北滿洲 唯一獨立黨의 組織으로 抗日運動을 展開하게 되었다.

協議會派 (民族唯一黨組織同盟) [ 編輯 ]

統合 陣營이 '촉성회'派와 '協議會'派로 對立되어 서로 唯一黨의 促成과 軍政府의 建立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 때 協議會의 中核인 正義府가 촉성회 側에 앞서서 唯一黨을 完成하고자 新民府와 參議府에 3不統一會談의 開催를 提議하여 1928年 9月 吉林에서 3部 代表가 超黨派的 立場에서 全民族의 宿願인 民族唯一黨의 組織과 3不統一 等 案件을 熟議한 끝에 正義府의 過度한 主導에 對한 反撥과 新民府의 民政·軍政派의 代表權 問題, 參議府 代表의 召喚 問題로 會談은 決裂되고 말았다.

國民府의 成立 [ 編輯 ]

이에 '協議會' 側은 正義府의 主導 下에 '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結成하고 1929年 3月 下旬에 새로운 軍政府의 組織을 위해 各 部 代表들 [6] 이 會議를 가졌다. 그 結果 1929年 4月 1日 正義府·新民府·參議府의 3部를 解體함과 同時에 國民부라는 새로운 軍政府를 組織하고 執行委員 [7] 을 選任하여 總務·群舞·敎育·財務·脂肪의 各部를 擔任케 하였다. 또한 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朝鮮革命黨 으로 改編하고, 朝鮮革命軍 을 編成하였다.

비록 촉성회 側의 不參으로 滿洲 全域을 對象으로 한 獨立運動團體들의 統一은 이루지 못했으나, 民族唯一黨을 中心으로 하는 統合이 當時 在蠻 同胞社會의 宿願이었던 만큼 國民部에 對한 期待가 컸다.

강령 [ 編輯 ]

1925年 9月 20日부터 數日 間에 걸쳐 國民府가 새로 組織된 後 처음으로 中央議會를 開催하여 將來의 方針과 諸般 決意를 하고 3部 統一會에서 制定했던 綱領 및 憲章의 一部를 改正하였다.

  • 재만 朝鮮民族의 文化向上, 産業發展, 公安維持
  • 재만 朝鮮民族의 單一 自治機關의 實現
  • 한·中 兩民族의 革命的 協同作業

組織 [ 編輯 ]

國民府는 正義府 를 主軸으로 하여 新民府 의 민정파 側과 參議府 의 심용준派 等 一部 勢力을 統一하였는데, 正義府가 推進하던 民族唯一黨組織同盟 等 正義部 體制를 繼承하고, 5月 28日 中央執行委員會를 構成하였다.

8個 中隊와 中央扈衛隊의 軍人은 1萬 2千名이었다.

活動 [ 編輯 ]

1925年 9月 27日 中央執行委員會를 새로 構成하였고, 12月 20日 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改編, 朝鮮革命黨 을 組織하여 所屬唐軍을 朝鮮革命軍 이라 하였다. 민정과 軍政을 區分하여 國民부는 在蠻 同胞社會의 自治機關만을 擔當하고, 軍事에 關한 事項은 朝鮮革命軍이 擔當하여 1938年 9月까지 民族唯一黨 朝鮮革命黨의 命令에 따라 獨立鬪爭에 臨하면서 滿洲 唯一의 民族運動團體로 活動하였다.

朝鮮革命黨과의 關係 [ 編輯 ]

國民府의 中央執行委員長人 현익철 이 朝鮮革命黨의 自治委員會 委員長을 맡아 國民府와 朝鮮革命黨은 組織上 分離되면서도 人脈이 相通하였다. [8] [9]

結局 朝鮮革命黨과 國民府의 關係는 以堂治國(以黨治國)의 原則에 立脚한 唯一黨과 行政府의 關係였다. 朝鮮革命黨은 南滿洲 一帶의 唯一黨으로서, 國民부는 同胞社會의 自治行政機關으로서 그 組織과 運營이 朝鮮革命黨의 領導 아래에 놓였다.

解體 [ 編輯 ]

1934年 김호석 (金浩石)李 朝鮮革命軍 總司令官에 選任되어 朝鮮革命軍을 朝鮮革命軍政府 (朝鮮革命軍政府)라는 軍事政府로 바꾸면서 國民부는 朝鮮革命軍政府 에 吸收, 解體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 韓民族獨立運動史,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데이터베이스'

各州 [ 編輯 ]

  1. 會長에 김동삼, 中央執行委員長 김원식 桐委員 김희산 (金希山)· 이청천 · 精神 等 16名이며, 軍事委員長에 黃鶴洙 (?學秀), 洞 委員에 이청천 , 民事委員長에 김승학 으로 하고
  2. 1. 臺當(大黨) 促成의 積極的 幇助(幇助), 2. 軍事先後(軍事善後) 및 敵勢侵入 防止, 3. 合法的 中國地方 自治機關(同?會) 組織, 4. 殘務 處理
  3. 촉성회 側(正義府 脫退 區 幹部) 이청천 , 김동삼 , 김원식 , 김상덕 外 4名, 參議府 側 김회산 , 김소하 外 2名, 新民府 側(軍政派) 김좌진 , 黃鶴洙 , 김시야(金時野) , 最好(崔灝) , 精神
  4. 1. 一般 構成分子를 督勵하여 黨의 集成土臺(集成土臺)에 奮鬪 進出케 할 것, 2. 朝鮮의 革命에 對한 理論을 展開하여 滿洲 運動의 內在的 矛盾을 整理하고 大黨促成의 準備에 努力할 것, 3. 臺當이 아직 成立되기 前인 過渡期에서 惡毒한 魔手의 侵入을 防止하는 한便 所謂 滿蒙(滿蒙)侵略 積極政策을 排除할 것.
  5. 그 綱領을 보면, 1. 國家에 完全한 獨立과 民族의 徹底한 解放, 2. 民族生活의 安定 및 革命的 綱領의 徹底, 3. 革命民衆의 組織 完成이었다.
  6. 正義府 側 代表 현익철 · 이동림 · 고이허 (高而虛)· 최동욱 (崔東旭)· 李鐸 (李鐸)· 고할신 , 參議府 側 代表 심용준 (沈龍俊)· 임병무 (林炳武)· 유광흘 (劉光屹), 新民府 側 代表 이교원 (李敎元)
  7. 正義府 側(主力) 현익철 · 이웅 · 김이대 外 11名, 參議府 側(심용준派) 심용준 · 二號 (李虎) 外 3名, 新民府 側(민정파) 送像하 · 毒古樂 (獨孤岳) 外 2名
  8. 朝鮮革命黨과 國民府의 關係에 對해 채근식은, "兩 團體는 表裏一體의 團體이나 朝鮮革命黨의 行政機關인 國民府에 對한 命令權은 地帶(至大)하여 國民부는 朝鮮革命黨이 指示하는 行政事項을 表面에 나타나 處理하는 데 不過하나 一黨獨裁國인 蘇聯이나 中國 國民政府에서만 그 例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9. 홍영도는, "朝鮮革命黨은 完全히 以堂治國의 性格을 具備한 民族陣營의 唯一黨으로서 政治·經濟·文化 等 모든 部門을 指導通語하기로 되었다. 더우기 國民府와는 그 構成人物로든지 그 內容精神으로든지 完全히 表裏一體의 姊妹機關으로서 朝鮮革命黨의 指導에 依하여 國民부는 地方自治 行政에 專力하였던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