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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코의 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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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코의 便 (藥子の變)는 헤이안 時代 初期에 일어난 事件. 헤이제이 狀況 社가 天皇 의 對立에서 社가 天皇側의 機敏한 軍事行動으로 헤이제이 狀況이 出家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헤이제이 狀況의 愛妾이었던 후지와라노 구스코(藤原藥子)나, 그 오빠인 후지와라노 나카나리(藤原仲成) 等이 處罰되었다. '구스코의 便'이라는 亂의 名稱도 以前에는 후지와라노 구스코 等이 中心이 되어 亂을 일으킨 것으로 여겨져 붙여진 名稱이었지만, 律令制 아래서의 太上天皇 (太上天皇) 制度로 狀況과 天皇이 王權을 나누어 맡은 데에서 이 事件의 發端이 일어났다는 評價가 이루어지면서, 2003年頃부터 日本의 一部 高等學校 敎科書에서는 헤이제이 太上天皇의 便 이라는 表現이 쓰이고 있다.


背景 [ 編輯 ]

806年 , 干舞 天皇 이 崩御하고 皇太子 안덴(安殿) 親王이 卽位하였다.(헤이제이 天皇). 헤이제이 天皇은 男동생 瞋怒(神野) 親王(後날의 社가 天皇)을 皇太弟로 삼았는데, 여기에는 病弱한 헤이제이 天皇 自身의 健康이나 天皇의 子息들까지 어렸기에 皇位를 嫡子에게 잇게 하기엔 現實的으로 곤란하겠다고 여긴 干舞 天皇의 意向이 있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듬해에 이미 天皇의 異腹 동생 이요(伊予) 親王이 갑작스런 母斑 嫌疑로 죽임을 當하는 等 皇位繼承을 둘러싼 日本 宮廷의 紛爭은 收拾될 줄을 몰랐다.

809年 4月 갑작스럽게 病을 얻은 헤이제이 天皇은 自身의 病을 앞서 아버지에게 處刑된 叔父 사와라(早良) 親王이나 親同生 이요 親王의 亡靈 때문이라 여겼고, 災難을 避하기 위해 兩位를 決心했는데, 이때 天皇의 讓位를 極口 反對한 것이 當時 헤이제이 天皇의 寵愛를 받으며 權勢를 휘두르고 있던 常時(尙侍) 후지와라노 구스코와 그 오빠 후지와라노 나카나리였다. 하지만 天皇은 讓位에 對한 剛한 意思를 보이며 同年 4月 13日에 讓位, 瞋怒 親王이 뒤를 이어 卽位하였다(사가 天皇). 皇太子로는 헤이제이 天皇의 아들인 다카오카(高岳) 親王이 冊封되었다.

810年 , 退位한 헤이제이 狀況은 構圖 헤이조쿄 (平城京)로 居處를 옮겼다. 그런데 헤이제이 狀況이 天皇으로 있던 時節에 設置했던 觀察使 制度를 社가 天皇이 改正하려고 한 것에 對해 狀況은 不快하게 여겼고, [1] 霎時間에 狀況의 調整(헤이조쿄)과 天皇의 調整(헤이안쿄)으로 派閥이 나뉘어 對立하게 되었다. 이 對立을 뒤에서 助長한 것도 헤이제이 狀況의 復位를 劃策하고 있던 구스코나 나카나리였다고 한다. 게다가 구스코가 當時 맡고 있었던 常時라는 職責은 天皇이 태정官 (太政官)에 對해 내리는 命令書人 內視線(內侍宣)의 發給을 管掌하는 職責이었으며, 當時 政界의 觀念에서는 太上天皇을 天皇과 마찬가지로 國政에 關與할 수 있는 位置로 여겼기에, 境遇에 따라서는 狀況이 구스코의 職權으로 內視線을 내어 태정官을 움직이는 事態도 일어날 수 있었다.

또한 社가 天皇은 3月에 쿠란度도코로(?人所)를 設置하고, 6月에는 條를 내려 觀察使를 廢止하고 産氣 (參議)를 부활시켰다. 이는 決定的으로 헤이제이 狀況을 刺戟하게 된다.

經過 [ 編輯 ]

두 朝廷의 對立이 깊어지는 가운데, 9月 6日, 헤이제이 狀況은 헤이안쿄를 廢하고 헤이조쿄로 遷都한다는 詔勅을 내렸다. 二는 社가 天皇에게 있어서는 생각치 못한 事件이었고, 天皇은 一旦 이에 따를 氣色을 보이며 사카老우에노 다무라마로 (坂上田村麻呂), 후지와라노 後遺쓰구(藤原冬嗣), 기노 다카미(紀田上) 等을 旺盛 造營을 위한 操弓社(造宮使)로 임명한다. 이들은 모두 社가 天皇의 信任을 받고 있던 側近들이었다.

遷都 消息에 人心은 몹시 動搖했고, 結局 遷都를 拒否하기로 決斷한 社가 天皇은 9月 10日에 使節을 보내 二世 · 오미 · 미노 의 고쿠後(國府)와 關門을 封鎖하게 하고는 나카나리를 逮捕해 우병위部(右兵衛府)에 監禁해버린 뒤, 그를 左遷시키고 구스코가 가지고 있던 常時로서의 棺위를 剝奪하며 罪를 물을 것이라는 條를 내렸다. 또한 社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다이羅곤 (大納言)으로 승진시키고 후지와라노 후유쓰구는 植付大寶(式部大輔), 기노 다카미는 誤와리老카미 (尾張守)에 임명하였다. 다음날 天皇은 密使를 헤이조쿄에 보내 후지와라노 마나쓰(藤原眞夏)·훈야노 와타마로(文室綿麻呂) 等의 몇몇 大官들을 召喚했는데, 勳야노 와타마로는 狀況波로 指目되어 左衛師父(左衛士府)에 갇힌다.

社가 天皇의 움직임을 알게 된 헤이제이 狀況은 激怒하여 自身이 몸소 도고쿠(東國)로 가서 擧兵할 것을 決斷하였다. 주나곤 (中納言) 후지와라노 街道노마로(藤原葛野麻呂) 等의 君臣이 極口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狀況은 구스코와 함께 가마에 올라 東쪽으로 向했고, 社가 天皇은 사카老우에노 다무라마로에게 狀況이 東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을 것을 命했다. 다무라馬로는 出發에 臨하여 일찍이 에미視(蝦夷) 征伐의 戰友였던 勳야노 와타마로의 金庫를 풀어줄 것을 要請했고, 와타마로는 赦免받고 産氣에 任命되었다. 이 날 밤 나카나리는 누군가가 쏜 화살에 맞아 殺害되었다. 이는 헤이안 時代의 政權이 律令 에 根據한 死刑 으로 處罰한 얼마 안되는 事例 [2] 였으며, 以後 1156年 好겐의 난 으로 미나모토盧 다메요시 가 死刑에 處해질 때까지 約 346年間 單 한 件의 死刑도 없었다.

야마토國 小에카美(添上) 軍 다무라(田村)까지 이른 헤이제이 狀況은 이미 다무라마로의 兵士가 防備를 굳게 하고 지키고 있음을 깨달았고, 到底히 이길 수 없겠다는 判斷에 結局 헤이조쿄로 돌아왔다. 9月 12日에 狀況은 헤이조쿄에서 머리를 깎고 出嫁했으며, 구스코는 毒을 마시고 自殺했다.

處置 [ 編輯 ]

事件 以後 社가 天皇은 關係者에 對해서는 寬容을 베푼다는 條를 내렸다. 다카오카 親王은 肺太子되고 代身 天皇의 男동생 오오토모 親王(後날의 준나 天皇 )이 皇太子로 冊封되었다. 덧붙여 824年 에 헤이제이 狀況이 崩御했을 때는 이미 退位한 狀態였던 社가 狀況의 要望에 依해 준나 天皇의 이름으로 關係者에 對한 赦免令이 내려지기도 했으며, 僧侶 구카이 (空海)는 社가 天皇側의 勝利를 祈願하여 以後 日本 佛敎界 第1의 實力者가 되는 契機를 마련했다.

各州 [ 編輯 ]

  1. 日本에서는 헤이안 時代 初期인 797年頃, 地方 行政을 보다 徹底하게 處理하고자 했던 干舞 天皇에 依해 地方官의 行政實績을 監査하는 카게유視(勘解由使)가 設置되었다. 카게유市는 地方官의 行政을 嚴正하 感謝하며 地方 行政 向上에 일정한 效果를 올리고 있었다. 헤이제이 狀況은 干舞 天皇의 뒤를 이어 卽位한 뒤 政治 刷新을 내걸고 806年 6月에 카게유시를 廢止하고 807年 까지 일곱 도와 機內에 觀察使를 두어 産氣가 이를 兼任하게 했는데, 810年 6月에 社가 天皇은 觀察使를 없애고 産氣를 復活하는 條를 發令하면서 4年 만에 觀察使 制度는 廢止되었다.
  2. 우와요코테 마사노리(上?手雅敬)는 9月 10日에 나카나리를 사도勞困老카미 (佐渡權守)로 左遷한다는 條를 냈을 뿐 다음 날에 施行한 死刑에 關해서 條가 存在하지 않는 點, 養老率에 死刑의 方法으로서 '射殺(射殺)'을 言及하지 않았다는 點 等을 들어 나카나리의 死刑은 律令(法律)에 根據하지 않는 社가 天皇의 '린치(私的 制裁)'였을 可能性을 指摘하고 있다. 덧붙여 雨蛙요코테는 天皇은 本來 나카나리의 死刑을 면해주기 위해 그를 左遷시킨다는 調書를 作成했지만 某種의 事情으로 이를 撤回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法에 根據하지 않은 措置를 取했다고 推定하고 있다.(上?手雅敬「『建永の法難』について」, 수록 : 上?手 編 『鎌倉時代の?力と制度』, 思文閣出版、2008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