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公孫弘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公孫弘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公孫 洪 (公孫弘, 紀元前 199年 ~ 紀元前 121年 )은 傳한 中期의 官僚로, (季) 또는 借耕 (次卿) [1] 이며 치天國 설현(薛縣) 사람이다. 無題 治世에 內査 · 御史大夫 · 丞相 을 歷任했으며, 傳한 最初로 作爲 없이 丞相에 올라 丞相에게 爵位를 내리는 冠禮의 始初가 됐다. 作爲와 諡號는 坪眞 (平津獻侯)다.

生涯 [ 編輯 ]

젊어서 설현의 獄吏를 지냈다가 罪를 지어 免職됐고, 가난해 보하이 萬 의 바닷가에서 돼지 를 키웠다. 40살이 되기까지 工夫하며 繼母를 奉養했다.

無題 건원 元年(紀元前 140年), 武帝가 卽位하고 賢良科 文學을 招聘하자 나이 60에 賢良으로 불려가 博士를 지냈다. 그러나 匈奴 에 獅子로 갔다 와서 無題와 다투고 病을 핑계로 官職을 버렸다. 圓光 5年(紀元前 130年), 武帝가 다시 文學을 薦擧하게 해 치天國의 薦擧를 받았고, 예전 文學 時節 皇帝에게 쫓겨난 것 때문에 拒絶했으나 치天國에서 限死코 勸誘해 結局 長安 으로 갔다. 太上 은 文學들에게 策文을 짓게 하고 公孫弘을 100位로 評價했으나, 武帝가 公孫弘의 策文을 읽고 1等으로 뽑고 風采를 보고 博士로 임명했다.

武帝가 서남이를 開拓하고 파촉 사람들에게 賦役을 加하고 있을 때, 無題의 名으로 서남이 땅을 둘러보고는 그 땅을 貶下했다. 원삭 3年(紀元前 126年) 御史大夫 가 되고서도 武帝가 朔方 ·서남이· 창해 等에 武力으로 進出해 軍을 設置하는 것을 反對했으나, 武帝가 朱買臣 을 시켜 削榜에 軍을 設置하는 이로움을 말하자 이것만은 받아들이고 서남이·滄海는 如前히 反對했다.

원삭 5年(紀元前 124年)에는 丞相이 됐다. 元來 傳한에선 列侯 中에서 丞相을 임명하는 것이 慣例였는데, 公孫弘은 爵位가 없었기 때문에 武帝는 詔書를 내려 고성현(高成縣) 坪辰向(平津鄕) 650號 [2] 를 주어 평진후에 봉했고, 以後로는 丞相을 列侯로 封하는 것이 慣例가 됐다. 회남왕 硫安 · 衡山王 類似 의 母斑 事件 때는 重病이 들어 當時의 重大한 狀況에 제대로 對處하지 못할 것을 念慮해 辭職을 請했으나, 武帝는 公孫弘에게 藥과 宇宙(牛酒)와 緋緞을 주고 休暇를 주었다. 몇 달이 지나 病勢가 好轉돼 다시 業務에 從事했다.

怨讐 2年(紀元前 121年)에 죽으니, 시호 (獻)이라 하였고 恭遜도 가 爵位를 이었다.

各州 [ 編輯 ]

  1. 葛洪 , 《 西京雜記 》 卷5 酋長千贈遺誘導(鄒長?贈遺有道)
  2. 漢書 公孫弘全義 無題의 調書는 이러하나, 漢書 外戚恩澤後表에서는 373號라 한다. 外戚恩澤後表에는 또 高聲(高城)이란 地名이 있는데, 漢書 列侯 票의 地名은 封紙가 옮겨진 곳임을 主張한 金秉準(金秉駿) 敎授는 고성현이 南軍 에도 渤海郡 에도 있으므로 600號짜리 평진후國과 373號짜리 평진후國이 各各 別個로 存在할 수 있다고 했다.

出戰 [ 編輯 ]

  • 司馬遷: 《詐欺》 卷111 평진후週報熱前提52 中 公孫弘展
  • 班固: 《漢書》 卷58 公孫弘服飾예관前提28 中 公孫弘展
前任
( 內査 )
傳한 座內査
紀元前 130年 ~ 紀元前 126年
後任
이저
前任
장구
傳한 御史大夫
紀元前 126年 ~ 紀元前 124年
後任
磻溪
前任
설擇
傳한 丞相
紀元前 124年 11月 乙丑日 ~ 紀元前 121年
後任
理債
先代
(첫 封建)
傳한 의 평진후
紀元前 124年 11月 乙丑日 ~ 紀元前 121年
後代
아들 恭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