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委員會는 1974年 10月 嚴格한 言論統制에 對抗하여 表現의 自由를 외치며 躊躇없이 이를 記事化하고 編輯局에 常住해 온 情報員을 내쫓고 政府에 言論自由를 要求한 동아일보의 勇氣있고 責任있는 行動에 眞心으로 敬意를 표한다.”
國際新聞發行人協會가 言論自由 黃金펜賞 受賞者로 當時 동아일보 金相万 社長을 選定하며
“동아일보 創刊號를 받아 쥔 서울 市民들 가운데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東亞日報 萬歲!’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고(故) 이희승 博士의 回顧
“어느 時代의 權座가 우리의 것이 아닐지라도 東亞는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으며 東亞가 東亞 以上의 것임을 알고 있노라 東亞의 取材記者는 우리 自身이며 東亞의 編輯者는 우리 自身이며 東亞의 텅 빈 廣告야말로 우리 自身의 아우聲임을 알고 있노라”
詩人 고은의 ‘동아에 부치는 노래’ 中에서
“배운대로 實行 못하는 부끄러움을 이렇게 廣告하나이다”
서울법대 23回 同期生
“동아야, 너마저 무릎 꿇으면 眞짜 移民갈거야”
梨花女大 S生
“동아일보는 自由言論 수호의 大原則 아래 執拗한 外部 壓力을 一切 排除, 어려운 與件 아래서 充實 正確한 事實 報道를 위해 最善을 기울였다.”
韓國記者協會가 1971年 동아일보 編輯局 全體記者를 韓國祈子床 受賞者로 選定하며
“亦是 東亞日報다. 마음대로 쓰지 못할 바에는 아예 안 쓰는 便이 낫다.”
1980年 5月 軍의 自制를 要求하는 光州民主化 抗爭 社說을 戒嚴司가 檢閱한 것에 抗議, 5日 동안 '無社說 抵抗'李 繼續되자 한 讀者가 동아일보에 電話를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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