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바다 仁川 上陸 同行 自由를 위한 高貴한 犧牲 記錄|週刊東亞

週刊東亞 755

..

불바다 仁川 上陸 同行 自由를 위한 高貴한 犧牲 記錄

傳說的인 從軍記者 마거리트 히긴스 … 韓國人이 보여준 眞正한 勇氣 報道

  • 주성민 軍事專門 自由寄稿家 bluejays@kebi.com

    入力 2010-09-17 18:16: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불바다 인천 상륙 동행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 기록

    1950年 11月 22日 中國을 刺戟하지 않으려 했던 워싱턴의 北爆 自制 指示에도, 맥아더 極東軍 司令官은 人民軍의 主 補給船을 遮斷하려는 目的으로 信義主敎 爆破를 命令했다(왼쪽). 6·25戰爭 報道로 女性 最初로 퓰리처賞을 受賞한 美國의 히긴스 記者가 6·25戰爭 直後 더글러스 맥아더 將軍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해질 무렵 한 女人이 美軍 지프에 앉아 精神없이 타이프라이터를 두들기고 있었다. 얇은 스웨터에 海軍 네이비블루의 群靑色 스커트를 입은 女人은 記事 쓰는 일에 沒頭해 지나가던 軍人들이 쳐다보는 줄도 몰랐다. 傳說的인 從軍記者(war correspondent) 마거리트 히긴스였다.

    韓國에서 戰爭이 벌어진 지 4日째인 1950年 6月 28日, 그는 美國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送稿할 記事를 쓰고 있었다. 이날 새벽 防禦線이 무너져 서울은 北韓軍에 陷落됐다. 國軍 兵士들은 後退하느라 바빴으나, 땅거미가 내려앉는 黃昏 녘 美貌의 女性이 지프에 앉아 타이핑하는 모습은 너무도 뜻밖의 光景이었다.

    히긴스는 늘 最前線에서 從軍한 記者였다. 그는 戰爭 속에서 韓國人들이 보여준 眞正한 勇氣를 보았다. 그는 自身이 目擊했던 韓國人들의 꺾이지 않는 勇氣에 對해 숱한 記事를 썼고, 美國으로 돌아간 뒤에는 ‘韓國을 도와야 한다’고 呼訴했다. 그는 6·25戰爭을 取材하며 韓國人에 對한 깊은 理解心과 信賴를 보여주었다. 最近 政府는 히긴스의 이런 精神을 높이 사 故人이 된 그에게 勳章을 追敍했다. 9月 2日 어머니를 代身해 外交勳章을 받은 린다 밴더블릭 博士는 所感을 이렇게 밝혔다.

    “自由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어머니는 굳게 믿었다. 自由를 지켜낸 韓國人에게 어머니를 代身해 拍手를 보낸다.”

    히긴스는 第2次 世界大戰과 6·25戰爭, 베트남戰爭, 콩고 內戰 等 여러 戰爭터에서 從軍하며 많은 特種 記事를 썼다. 1945年 4月에 쓴 ‘다카우 收容所 解放期’도 그中 하나다. 獨逸이 降伏하기 直前, 히긴스는 美軍 機關紙 ‘성조지(Star · Stripes)’의 記者인 陸軍 商社와 뮌헨 近郊의 惡名 높은 유대人 收容所 다카우를 찾아갔다. 運이 좋았던 두 사람은 警備兵들을 武裝解除시키고 그곳을 接受했다. 美軍 42師團이 다카우로 進擊하고 있었으나 그들이 더 빨랐다. 이 特種 報道로 그는 美軍으로부터 特別勳章을 받았고, 그해 뉴욕 ‘女記者 클럽’이 주는 ‘海外報道賞’도 受賞했다.



    6月 27日 비 내리는 金浦에 到着

    1950年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 特派員이던 히긴스(當時 30歲)는 本社로부터 韓國으로 가라는 指示를 받았다. ‘뉴욕타임스’의 番튼 크레인 等 3名의 同僚와 美軍 輸送機에 올랐다. 6月 27日 午後 日本에서 離陸한 輸送機는 戰鬪機의 護衛를 받으며 비 내리는 金浦에 到着했다. 4名의 記者는 美軍 軍事顧問團 本部에 到着해 責任者인 라이트 大領의 執務室로 갔다. 그곳은 카빈 小銃과 彈藥, 담배꽁초가 널려 있어 엉망이었다. 記者들이 大領에게 戰況을 묻자 인스턴트커피를 끓이던 그가 對答했다.

    “아직은 希望이 있지만 壯談하긴 어렵소.”

    子正이 가까워져 히긴스는 顧問團 官舍의 房 하나를 配定받았고 男子들은 바깥의 宿所로 갔다. 6月 28日 새벽 2時 15分, 顧問團에서 男子 記者 宿所로 電話해 “狀況이 좋지 않다”며 깨웠다. 그들이 本部로 가자 狀況室 作戰將校가 事態를 說明했다.

    “敵의 電車가 서울로 들어왔다. 빨리 漢江을 건너 水原으로 가는 게 좋겠다.”

    當時 北韓軍은 蘇聯製 最新型 戰車 140臺를 앞세워 進擊하고 있었다. 3名의 記者는 지프에 올라타 漢江鐵橋로 갔으나 後退하는 軍人과 車輛, 避亂民으로 북새통이었다.

    그들의 지프가 鐵橋를 半도 못 건너고 멈춰 있을 때, 國軍 爆破半이 兩쪽에서 通行을 遮斷하지도 않은 狀態에서 다리를 爆破했다. 鐵橋에 있던 프랭크 기브니 記者는 그때의 狀況을 ‘타임(Time)’誌에 이렇게 썼다.

    “갑자기 하늘에서 오렌지色 巨大한 불꽃이 번쩍했다. 바로 앞에서 爆發이 일어나 우리가 탄 지프가 튀어 올랐다. 내 眼鏡은 散散조각 났고 머리에서 흐른 피가 옷을 적셨다. 크레인 記者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이 때문에 避亂民은 勿論 트럭에 타고 있던 韓國軍이 自身의 눈앞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고 그는 記事에 썼다. 官舍에서 잠자던 히긴스度 連絡을 받았으나 이미 다른 記者들은 떠난 다음이었다. 60餘 名의 軍事 顧問團은 撤收 時期를 놓치면 北韓軍의 捕虜가 될지 모른다는 不安感에 戰戰兢兢했다. 히긴스에겐 捕虜가 될 걱정보다 더한 게 있었다. 特有의 記者 根性을 지닌 그답게 ‘서울 陷落’이란 特種 記事를 어떻게 내보낼까를 걱정했던 것이다. 焦燥해하는 그에게 大領이 물었다.

    “記事 때문에 걱정하는 거요?”

    히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方法을 묻자 大領이 對答했다.

    “記事를 짧게 줄여봐요. 無線通信 裝置로 보낼 수 있게 해볼 테니까.”

    그는 바로 지프로 가 타이프라이터를 꺼내 記事를 쓰기 始作했고, 지나가던 軍人들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히긴스는 顧問團 一行과 나룻배로 漢江을 건넜고 山길을 걸어 水原까지 强行軍해 撤收했다.

    男子도 힘든 飽和 속에서 取材

    불바다 인천 상륙 동행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 기록

    9月 3日 6·25 戰爭 60周年 ‘洛東江地區戰鬪 全勝記念行事’의 一環으로 慶尙北道 왜關鐵橋 아래에서 當時 戰鬪 狀況을 再現하고 있다.

    다음 날인 6月 29日, 히긴스는 水原에서 最高指揮官 맥아더와 遭遇했다. 도쿄 하네다 空港에서 專用機 C-54 바탄(Bataan)을 타고 날아온 맥아더는 漢江邊에서 雙眼鏡으로 江 北쪽의 서울을 觀察한 뒤 水原 前方指揮所로 돌아왔다. 그때 그는 한강교 爆破事件과 맥아더의 韓國戰線 訪問 記事를 쓰느라 滑走路 구석에서 타이핑에 沒頭해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 맥아더가 다가갔다.

    “여기선 記事를 보내기 힘들 텐데, 내 飛行機로 도쿄에 가는 게 어떻겠소?”

    寫眞記者가 撮影한 寫眞에는, UN君 司令官 앞에서 두 손을 허리에 붙인 채 얘기 나누는 히긴스의 모습이 아주 堂堂해 보인다. 送稿가 쉽지 않던 그는 拒絶할 理由가 없었고, 맥아더를 인터뷰해 美軍이 大規模로 參戰한다는 特種을 잡아냈다. 도쿄에서 記事를 보낸 그는 다음 날 韓國 戰線으로 돌아왔다.

    6·25戰爭에는 數百 名의 記者가 從軍했지만 女性 記者는 單 2名이었다. 히긴스와 ‘라이프(Life)’의 寫眞記者 마거리트 버크화이트였다. 두 사람은 第2次 世界大戰 後 東유럽을 함께 取材 旅行한 적이 있다. 이들은 男子도 견디기 힘든 最前線의 飽和 속에서 取材하는 猛烈한 記者였다.

    히긴스는 韓國 海兵隊의 作戰에도 同行했고, 戰線에서 兵士들과 많은 時間 對話했으며, 兵士들은 그를 ‘霉氣’라는 愛稱으로 부르며 좋아했다. 그러나 美國 大使였던 貿草는 이런 히긴스가 못마땅했다. 結局 貿草는 히긴스에게 韓國을 떠나달라고 通告했는데, ‘귀찮고 성가시다’는 게 理由였다.

    水原에서 AP通信과 ‘시카고 데일리 뉴스’ 等의 記者들과 合流한 히긴스는 大田으로 갔다. 그들은 大田에서 스미스 部隊(Task Force Smith)로 알려진 美軍 2個 戰鬪中隊가 처음 戰線에 投入된 事實을 確認했다.

    그러나 ‘美軍 參戰’ 記事를 보낼 마땅한 手段이 없어 골머리를 앓았다. 苦悶하던 그들은 大田에 가 있던 貿草 大使의 宿所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엔 通信施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貿草가 히긴스를 싫어한다는 事實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方法이 없었다. 記者들이 찾아가자 大使는 無表情한 얼굴로 말도 없이 居室로 案內했고, 테이블엔 그가 마시던 스카치위스키가 甁째 놓여 있었다. 東西洋을 莫論하고 記者들은 위스키와 가장 가까운 部類로 通한다. 히긴스는 自身의 著書 ‘War in Korea’에서 “스트레이트로 마신 위스키가 그처럼 확확 달아올랐던 적은 없었다”고 回想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貿草 大使의 宿所에도 通信施設은 없었다. 히긴스와 AP 記者는 소파에 파묻힌 同僚 둘을 위스키와 함께 남겨두고 나왔다. 위스키보다 記事 送稿가 多急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大田驛 附近 美軍 情報課를 찾아내 電話로 도쿄를 連結한 뒤 艱辛히 記事를 불러줄 수 있었다. 6·25戰爭에서 活躍한 記者들은 戰爭이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記事를 보낼 手段을 찾느라 두고두고 골탕을 먹었다.

    美 陸軍의 첫 戰線 浸透 部隊인 24師團 21聯隊 1大隊, 卽 스미스 部隊의 2個 中隊는 7月 5日 烏山에서 北韓軍 107 戰車連帶의 機甲部隊와 對決했다. 이들은 75mm 無反動砲를 쏘며 4代의 戰車를 破壞했다. 그러나 30代가 넘는 電車는 그들을 지나쳐 繼續 前進해갔다.

    1時間 後 北韓 4師團 主力軍에 맞서 42名의 敵을 射殺하면서 中隊員들은 敵의 進擊을 沮止했다. 그러나 이들의 火力은 劣勢였고 銃알마저 바닥나 7時間 동안 150名이 戰死하고 26名이 失踪됐으며, 남은 360餘 名은 艱辛히 退却했다.

    60年 前 스미스 部隊가 悽絶한 近接戰을 벌였던 烏山 1番國道 옆 죽미령고개 現場에는 參戰碑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브라보 中隊와 찰리 中臺의 犧牲者 176名이 自身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말없이 證言하고 있다.

    워커 “戰爭터 女子 안 된다” 追放令

    불바다 인천 상륙 동행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 기록

    하긴스 記者를 韓國에서 追放한 건 美8軍 司令官 워커 中將이었다. 6月 23日 서울 용산 美8軍 司令部에서 열린 워커 將軍 銅像 除幕式에서 祝辭를 朗讀하는 캐슬린 스티븐스 駐韓 美大使.

    히긴스를 韓國에서 追放한 건 美8軍 司令官 워커 中將이었다. 그는 “戰爭터는 女子가 올 곳이 못 된다. 우린 淑女를 위한 아무런 施設도 없다”며 그에게 追放令을 내렸다. 히긴스는 戰線 取材를 抛棄할 수 없어 도쿄의 맥아더에게 歎願書를 보냈다. 그러나 기다려도 消息은 없었고 속이 탄 히긴스는 워커 中將에게 電話했다. 後任 特派員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있게 해달라고 懇請했으나, 豬突的이며 거친 性格으로 有名한 워커는 이를 拒絶했다.

    “잔소리 말고 떠나라!”

    그래도 그는 “記者에게서 報道權을 빼앗지 말라”며 抵抗했다. 韓國에 온 지 20餘 日째인 7月 16日, 大邱로 護送된 히긴스는 8軍 公報將校들에게 이끌려 도쿄行 航空機에 실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도쿄에 到着하자 재미있는 消息이 기다리고 있었다. 歎願書를 받은 맥아더가 12時間 前 워커 앞으로 ‘追放을 取消하라’고 專門을 보냈다는 것이다. 워커가 直屬上官의 專門을 受信하고도 모른 체한 것이라 히긴스는 도쿄에서 몹시 약이 올랐다.

    맥아더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도 專門을 보냈다.

    “韓國에서 女記者 從軍禁止 措置를 解除한다. 마거리트 히긴스는 뛰어난 職業精神으로 우리 모두의 尊敬을 받고 있다.”

    氣勢 좋게 戰線으로 돌아온 히긴스에게 워커 中將은 事情했다.

    “當身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난 두고두고 非難받을 거요. 그러니 제발 몸操心해 죽거나 捕虜가 되지 말아요.”

    맥아더의 特別 配慮로 이제 處地가 바뀌었다. 그런데 不幸히도 워커 中將은 지프를 타고 가다 國軍 트럭에 들이받히는 事故로 死亡했다. 그는 第2次 世界大戰 때 패튼 戰車軍團의 師團長으로 獨逸 戰線을 누비며 나치를 擊破한 盲腸이었다.

    美 全域 巡廻 “韓國을 돕자” 呼訴

    戰爭이 始作된 以後 2個月이 넘도록 UN君은 北韓軍에 繼續 밀리기만 했다. 戰況은 悲慘했고 韓半島는 마지막 그루터기人 釜山만 남겨두고 있었다. UN君은 最後 防禦線인 洛東江 戰線의 維持도 힘겨워 狀況은 絶望的이었다.

    맥아더는 仁川 上陸을 企劃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히긴스는 作戰 取材를 위해 美 海軍에 가 乘船을 要求했다. 그러나 海軍은 戰艦에 女性을 태우지 않는다는 傳統을 내세워 拒絶했다. 그 程度로 물러설 히긴스가 아니었다. “난 最前線의 塹壕 속에도 있어봤다. 그러니 甲板에서라도 자겠다. 태워만 달라”며 그는 싸우다시피 해서 病院船 乘船을 許諾받았다. 大部分의 記者가 맥아더와 함께 旗艦(flagship) 매킨리를 탄 것에 비하면 엄청난 差別이었다. 히긴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病院船은 電線에 맨 나중 到着하는 支援 船舶이라 作戰에 對한 記事는 한 줄도 못 쓸 게 뻔했다. 그는 수송선단의 指揮官인 艦長을 찾아갔다. 잘 곳이 없으니 甲板에 슬리핑백을 놓고 자겠다며 매달린 結果 “좋아요, 非喪失이 하나 비었으니 그걸 使用해요”라는 許諾을 받았다. 히긴스는 卽時 房을 찾아가 門을 잠가버렸다. 或是라도 艦長 마음이 變해 下船하라 하면 盟誓코 잠긴 門을 안 열어줄 생각이었다.

    마침내 韓半島의 傳貰를 바꿀 作戰이 9月 15日 새벽 始作됐다. 上陸作戰이 展開되자 엄청난 砲擊 속에서 相當數 記者가 恐怖에 질려 上陸을 두려워했다. 히긴스는 美 海兵隊員들과 같이 上陸艇을 탔고, 艦砲射擊으로 불바다가 된 海岸에 올라 取材를 始作했다. 그가 쓴 上陸從軍記 ‘붉은 海岸(Red Beach)’은 9月 18日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全面記事로 실렸다.

    이 報道를 통해 히긴스는 이듬해 女性 記者로는 처음 ‘퓰리처 國際 報道賞’을 受賞했다. 그는 美國 言論史上 가장 有名한 女性 記者 中 한 사람이었고 傳說的인 從軍記者였다.

    히긴스는 韓國에서 6個月間 取材 後 歸國해 戰爭 經驗을 쓴 ‘War in Korea’를 1951年 出版했다. ‘自由를 위한 犧牲’이라고 飜譯된 이 冊은 韓國의 自由를 위해 美國이 主導한 UN聯合이 共産主義에 맞서 싸운 不滅의 記錄으로 남아 있다. 冊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는 이 冊을 가지고 美國 全域을 巡廻하며 美國人들에게 ‘韓國을 도와야 한다, 自由를 지켜야 한다’고 呼訴했다.

    그는 戰爭이 加熱되던 베트남에서도 從軍했으나 1966年 取材하다 感染된 風土病으로 45年間의 生을 마감했다. 美國 政府는 從軍記者로서 히긴스가 쌓은 뛰어난 業績과 韓美同盟 紐帶를 위해 기울인 努力을 高貴하게 評價했다. 그는 國家를 위해 犧牲된 軍人은 아니다. 그러나 有害는 알링턴 國立墓地에 명예롭게 安葬됐다. 番號 ‘4705-B’인 이곳은 觀光名所로 알려진 존 F 케네디의 墓地와 不過 50餘m 距離에 있다. 워싱턴의 링컨記念館 附近 韓國戰爭參戰 記念碑의 검은 花崗巖에는 ‘FREEDOM IS NOT FREE’라고 鮮明하게 새겨져 있다.

    自由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건 히긴스의 信念이었고, 우린 모두 그에게 精神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히긴스는 59年 前 自身의 冊을 이렇게 마감했다.

    “韓國에서 우린 準備하지 못해 값비싼 代價를 치르고 있다. 勝利에는 많은 費用이 들 것이다. 그러나 敗北의 代價보다는 훨씬 低廉할 것이다.”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