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헌터’
人間의 一生은 確率 게임의 連續이다. 出生부터가 確率의 結果다. 地球上의 수많은 男女 가운데서 ‘何必이면’ 누구를 만나게 될 確率은 얼마나 奇跡 같은 일인가. 그리고 그 짝들의 精子와 卵子 中 어느 것이 修正해 生命을 탄생시키는 것은 또 얼마나 奧妙한가. 그 後의 人生에서도 確率은 每日, 每 瞬間 運命의 갈림길에서 찾을 수 있다. 儒敎의 古典인 ‘周易’도 實은 많은 經驗과 삶의 確率을 集大成한 冊이 아닌가.
베트남 戰爭에 參加한 美國 젊은이들의 傷處와 絶望을 그린 映畫 ‘디어 헌터’. 戰爭의 慘狀이 어떤 것인지, 戰爭이 個個人에게 어떤 惡夢을 남기는지를 事實的으로 그린 傑作이다. 映畫 題目인 디어 헌터, 卽 ‘사슴사냥’은 여기서 二重的인 意味로 쓰였다. 主人公들이 平素 즐기던 趣味가 사슴사냥이기도 했지만, 이들이 戰爭터에 내던져져 겪게 되는 狀況이 사슴사냥의 表迹과 같은 悲慘한 處地라는 點을 象徵하는 것이었다.
自身을 向해 언제 어디서 銃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狀況. 그런데 映畫에서 그 같은 恐怖와 不安을 表現한 대목은 銃彈이 빗발치는 戰鬪 場面이 아니었다. 이 映畫가 아니었으면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러시안룰렛이라는 게임 場面이었다. 過去 帝政러시아 때 貴族들 사이에서 流行하던 죽음의 게임인 러시안룰렛. 拳銃에 銃알을 한 個나 두 個 넣고 相對方과 번갈아가며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다. 베트콩의 捕虜가 된 닉이 이 러시안룰렛을 강요당한다. 6發을 넣게 돼 있는 拳銃에 銃알을 한 個 넣은 뒤 自己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길 때의 氣分은 어떤 것일까. 이 러시안룰렛 場面에 對해서는 戰爭의 結果는 確率임을 暗示하는 場面이라는 解釋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假想의 質問을 한番 던져본다. 萬若 拳銃에 6發이 아닌 10發, 20發, 아니 100發이 들었다면 恐怖는 果然 덜했을까라는 것이다. 목숨을 잃을 確率이 6分의 1에서 10分의 1, 100分의 1로 줄어드니 그만큼 무서움이 덜하게 되는 것일까.
처음 確率理論이 誕生한 것은 賭博場이었다고 한다. 어느 쪽에 돈을 걸어야 하는지를 따지는 사이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삶이 確率이듯 賭博도 確率이기 때문에 파스칼은 “人生은 賭博”이라고 했던 것일까.
‘人生의 모든 것이 確率이라면 죽는 것도 確率 아닌가.’ 게다가 그 確率이 6分의 1도 아니고 ‘기껏’ 數萬分의 1이라면야. 只今 많은 이들을 不安케 하는 狂牛病에 對해 이렇게 淡淡하게 말할 수 있을까. 닉을 붙잡고라도 한番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