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와 동아미디어그룹의 지나온 발자취입니다.
南侵이 始作된 1950年 6月 25日 아침 非常 召集된 本報 社員들은 時時刻刻 들려오는 戰況에 따라 號外를 發行하다 27日 午後 南侵 先鋒隊가 이미 議政府를 거쳐 미아리 附近까지 내려왔다는 消息에 製作 中斷 決斷을 내린다. 編輯局에 모인 記者와 印刷職員들은 ‘敵, 서울 近郊에 接近, 우리 國軍 苦戰 血鬪中’이라는 題目의 號外 300張을 마지막으로 發行하고 서울 市內 一圓에 直接 配布한 뒤 武橋洞 설렁湯집으로 모였다. 新聞社 가운데 最後의 號外를 낸 記者精神을 自祝하는 술盞도 잠깐, 이들은 再會를 期約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後 本報는 國軍과 유엔軍의 進退에 따라 避亂地 釜山을 오르내리며 地域新聞에 ‘求乞 印刷’도 마다하지 않고 新聞 製作을 繼續했다. 國民防衛軍 事件과 居昌 良民虐殺 事件, 拔萃改憲案을 둘러싼 政治波動 때는 李承晩 政府의 極甚한 彈壓을 받으면서도 批判의 强度를 낮추지 않았다. 本報는 1953年 7月 27日 休戰協定 以後 8月 18日子를 끝으로 釜山 避亂時代의 幕을 내리고 光化門 社屋으로 돌아왔다.
1955年 2月 1日子부터 連載된 김성환 畫伯의 ‘고바우 令監’은 1958年 1月 23日子 ‘ 景武臺에서 똥 치는 人夫’로 景武臺의 威勢를 諷刺해 長安의 話題를 모았다. 當時 權力者에게 無條件 阿附하는 風潮를 反映한 것으로, 이 漫畫의 背景은 이강석(李起鵬의 아들로 李承晩 大統領의 養子)을 詐稱해 地方 官吏들에게 極盡한 待接을 받은 ‘假짜 이강석’事件이었다. 金 畫伯은 警察에 連行돼 ‘他人의 四史(私事)에 關하여 虛僞事實을 揭載’했다는 理由로 ‘輕犯’으로 몰려 450圜의 科料를 낸 뒤 풀려났다. 1980年 11月 11日부터 金 畫伯의 뒤를 이어 ‘나대로 先生’을 그려온 이홍우 畫伯 亦是 첫 號부터 戒嚴令下의 軍 檢閱로 難産을 거듭했다. 그는 情報機關에 依한 數次例의 連行調査와 脅迫, 懷柔工作에도 屈하지 않고 4컷 漫畫로 權力世界를 銳利하게 諷刺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