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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끼 地上’ ‘各自圖生’ 틈에서 죽은 아내 그리는 悼亡詩를 읽다|신동아

‘내 새끼 地上’ ‘各自圖生’ 틈에서 죽은 아내 그리는 悼亡詩를 읽다

[김호기의 古典으로 읽는 21世紀] 朴智元·丁若鏞 詩로 본 ‘只今, 여기’ 家族의 肖像

  • 김호기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入力 2024-04-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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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家族 사랑 至極했던 燕巖과 茶山

    • ‘아내와 헤어진 지 河馬 千年이 된 듯…’

    • 燕巖 時, 하염없이 눈물 흐르게 해

    • ‘맑고 밝은 世上에 佚民(逸民)李 되어라’

    • 廢族 된 子息에 對한 茶山의 憐憫과 사랑

    • 家族이란 애틋함·힘 안겨주는 存在的 據點

    손자 박주수가 그린 박지원의 초상화. [동아DB]

    孫子 박주수가 그린 朴智元의 肖像畫. [東亞DB]

    이 企劃을 連載하며 苦悶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 古典을 얼마나 다루느냐 하는 問題였다. 古典이 西洋의 獨占物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勿論 東아시아에도 古典이 적지 않다. 例를 들어 中國의 境遇 ‘論語’와 ‘孟子’, ‘老子’와 ‘莊子’, ‘詐欺’와 ‘육조단경’ 等은 古典의 古典이라 할 수 있는 著作들이다. 우리 傳統社會度 마찬가지다. 이 企劃을 始作하며 나는 新羅 鄕歌와 高麗歌謠, 鄭澈의 歌詞와 尹善道의 時調, 朴趾源과 理獄의 散文을 우리나라의 古典으로 꼽았다.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이라면 朝鮮 後期를 代表하는 古典으로는 燕巖 朴趾源과 茶山 丁若鏞의 著作을 들 것이다. 朴趾源과 丁若鏞은 當代는 勿論 지난 20世紀에도 큰 影響을 미친 知識人들이다. 이러한 朴趾源과 丁若鏞의 삶과 思想을 나는 10餘 年 前 내놓은 冊 ‘時代精神과 知識人’에서 다룬 바 있다.

    널리 알려졌듯, 朴趾源은 ‘熱河日記’ 等 散文에서, 丁若鏞은 ‘牧民心書’ 等 經世學에서 이름이 드높았다. 오늘 注目하려는 것은 이채로운 텍스트다. 朴趾源과 丁若鏞이 家族을 다룬 詩들이다. 여기서 家族 詩를 選擇한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文學은 個人의 感情은 勿論 理性, 그리고 社會에 對한 批判이나 未來에 對한 熱望을 形象化한다. 이러한 文學 가운데 個人의 感情과 생각을 잘 드러내는 樣式이 시다. 市는 本디 노래다. 노래란 感情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 人間的인 自然스러운 목소리는 삶과 社會에 對한 共感을 일으키고 洞察을 안겨준다.

    둘째, 朴趾源과 丁若鏞이 家族을 다룬 詩만 쓴 것은 아니었다. 외려 自然과 社會를 다룬 詩가 더 많다. 그런데도 家族 詩를 注目하는 것은 家族의 意味 때문이다. 家族은 東아시아에서든 西歐 社會에서든 國家와 함께 共同體의 代表 格이다. 特히 우리나라를 爲始한 東아시아에서는 個人 및 社會生活의 가장 一次的 單位다. 그런데 우리 社會에서 이 家族은 21世紀에 들어와 劇的 變動을 겪고 있다.



    朴智元의 家族 詩

    朴趾源은 詩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 漢學者 신호열과 國文學者 김명호가 現代 國語로 옮긴 ‘燕巖集’에 아들 박종채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버님이 本是 詩人으로 自處하지 아니하여 남과 더불어 창수(唱酬)한 것이 極히 드물었으며, 普通 要求에 應해 지은 作品들도 箱子에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作品 題目이 몹시 적다.” 朴趾源의 詩는 ‘燕巖集’ 第4卷 ‘領帶正雜詠’에 42首가 실려 있고, 다른 곳에 8首가 傳한다.

    연암집. [한국학자료원]

    燕巖集. [韓國學資料원]

    作品 數가 적은 만큼 朴智元의 家族 詩 또한 드물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作品은 兄 박희원이 世上을 떠난 後 兄을 그리워하며 쓴 詩다.

    “우리 兄님 얼굴 鬚髥 누구를 닮았던고 /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懶眠 우리 兄님 쳐다봤지 / 이제 兄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 두건 쓰고 옷 입고 가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燕巖에서 線形(先兄)을 생각하다’)

    ‘나의 아버지 朴智元’에서 박종채는 1787年(正祖 11年) 兄 박희원의 죽음을 哀悼한 作品이라고 적고 있다. 兄 얼굴에서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고, 내 얼굴에서 다시 兄 얼굴을 떠올리고 있다. 더는 볼 수 없는 兄에 對한 그리움을 애틋하게 담고 있다.

    朴趾源은 1737年(英祖 13年) 2男 2女 中 막내로 태어났다. 兄 박희원과는 열다섯 살 差異였다. 朴趾源에게 兄 夫婦는 또 하나의 父母 같은 存在였다. 兄과 兄嫂는 나이 어린 동생이자 媤同生인 朴趾源을 子息처럼 돌봤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兄嫂가 世上을 떠난 後 이제 兄마저 곁에 없으니 朴智元의 슬픔은 決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朴趾源은 朝鮮 後期 北學派를 代表하는 知識人이었다. 北學派는 淸나라의 文物을 받아들여 朝鮮을 改革하려고 한 이들이었다. 朴智元, 그의 벗 홍대용, 그의 弟子들인 이덕무·朴齊家·柳得恭·李瑞求 等이 北學派에 屬했다. 이들 가운데 朴趾源에게 가장 가까운 이는 洪大容과 이덕무였다. 洪大容이 年上의 벗이었다면, 李德懋는 네 살밖에 差異가 나지 않은 弟子이자 親舊였다.

    李德懋는 庶孼 出身이었다. 正祖의 庶孼 登用 政策에 따라 朴齊家, 柳得恭 等과 함께 奎章閣 檢書官을 지냈다. 李德懋의 號 가운데 하나가 ‘간서치(看書痴)’였다. ‘冊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그만큼 그는 當代에 가장 博識한 知識人인 것으로 알려졌다. 李德懋가 朴趾源을 尊敬한 것처럼 朴趾源도 李德懋를 아꼈다. 李德懋가 世上을 떠나자 朴趾源은 “꼭 나를 잃은 것 같아”라고 歎息했다.

    ‘나의 아버지 朴智元’을 보면, 李德懋가 ‘燕巖에서 線形을 생각하다’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 있다. “情을 表現한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해야 비로소 眞實되고 切切한 것”이라고 李德懋는 論評했다.

    朴趾源은 2男 2女를 뒀다. 子息들에 對한 燕巖의 사랑 또한 각별했다. ‘燕巖集’에는 子息들과의 關係를 보여주는 글이 거의 없다. 國文學者 박희병이 現代 國語로 옮긴 ‘고추醬 작은 團地를 보내니’라는 冊은 子息들에 對한 朴智元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 冊은 燕巖의 便紙 33統으로 이뤄져 있다. ‘燕巖集’에 실려 있지 않은 個人的 內容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句節은 朴智元의 섬세한 사랑을 發見하게 한다.

    “前後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잘 받아서 朝夕間에 飯饌으로 하니? 왜 한 番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 (…) 고추醬은 내 손으로 담근 것이다. 맛이 좋은지 어떤지 仔細히 말해 주면 앞으로도 繼續 두 物件을 人便에 보낼지 말지 決定하겠다.”

    1796年(正祖 20年) 朴趾源이 眼醫縣監으로 있을 때 서울에 사는 큰아들에게 쓴 便紙다. 쇠고기 장볶이와 直接 담근 고추醬을 보내는 아버지의 섬세하고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父母와 子息 間의 사랑은 時間을 超越한다. 이때는 아내마저 世上을 떠나 朴趾源이 혼자 子女들을 돌보던 時期였다.

    朴智元의 個人事에서 가장 重要한 이는 當然히 全州 李氏 夫人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同甲이었다. 열여섯 살에 結婚했다. 아내 全州 李氏가 51歲에 世上을 떠났으니 35年 동안 함께 살았다.

    朴趾源에게 妻家는 작지 않은 意味를 가졌다. 朴趾源은 丈人 이보천에게 ‘孟子’를, 妻叔 이양천에게 ‘詐欺’를 배웠다. 學問的 스승들이었다. 더해 妻男 이재성은 平生知己였다. ‘燕巖集’에는 丈人과 妻叔의 祭文, 妻男에게 보낸 便紙가 실려 있다. 特히 ‘匠人 處事 유안재 理工에 對한 祭文’은 朴趾源이 품고 있던 한없는 尊敬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朴趾源이 近代的 感覺을 갖고 있었지만, 時代的 拘束을 完全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亦是 家父長主義 文化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女性보다 男性을, 否認 못지않게 親舊를 더 重視했다. 그러나 朴趾源은 때때로 그 時代的 拘束을 넘어섰다. 박종채는 ‘나의 아버지 朴智元’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여읜 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맏며느리 李 氏의 喪을 當하셨다. 그래서 끼니를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혹 小室을 얻으라고 勸했지만, 아버지는 우스갯소리로 대꾸할 뿐 終身토록 妾을 두時地 않으셨다. 親한 벗들 가운데에는 이 일을 갖고 아버지를 稱讚하는 사람이 많다.”

    妾 또는 小室을 두는 것은 傳統社會의 나쁜 家父長主義다. 現代社會에서는 當然히 容納해서 안 되는 것이다. 아내가 世上을 떠난 後 朴趾源은 18年 동안 혼자 살았다. 朴智元의 內面을 모두 알 순 없지만, 그가 아내 한 사람을 平生 眞心으로 사랑했던 것은 分明해 보인다.

    ‘나의 아버지 朴智元’에서 박종채는 어머니가 世上을 떠나자 아버지가 悼亡詩(悼亡詩) 20首를 지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詩를 잃어버려 볼 수 없다고 哀痛해했다. 悼亡詩란 아내의 죽음을 哀悼하는 시다. 中國과 우리나라 傳統社會에서 적잖이 創作됐다. 朴智元 亦是 悼亡詩를 남긴 거였다.

    이 悼亡詩 20修 가운데 2首가 얼마 前 發見됐다. 김명호는 ‘燕巖 文學의 深層 探究’라는 著書에서 文人 유만주의 日記 ‘欠英’이 傳하는 朴智元의 悼亡詩 두 篇을 紹介하고 解說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한 寢牀에서 지내다가 暫時 헤어진 지 河馬 千年이 된 듯 / 視力이 다하도록 먼 하늘로 돌아가는 구름 바라보네 / 何必이면 나중에 烏鵲橋 건너 만나리오 / 銀河水 西쪽 가에 달이 배처럼 떠 있는데.”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을 表現한 作品이다. 아내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千年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고, 하늘 멀리 사라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自身과 아내를 견우와 織女로 比喩하고, 西쪽 하늘에 떠 있는 달을 倍로 삼아 銀河水를 건너 아내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朴趾源은 노래한다.

    ‘燕巖集’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내 平生 諺文이라고는 한 글字도 모르기에, 50年 동안 偕老한 아내에게도 끝내 便紙 한 글字도 서로 주고받은 일 없었던 것이 只今에 와서는 恨이 될 따름이다.” 아내가 世上을 떠난 後 오랫동안 홀로 살아냈던 朴趾源은 1805年(純祖 5年) 世上을 떠났다. 박종채는 아버지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記錄했다.

    “마침내 이날 하늘의 加護度 그쳐 끝내 殞命하셨으니, 遺言은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말씀뿐이셨다. (…) 아아, 哀痛하다! 理解 12月 5日, 장단의 大勢縣(京畿道 長湍郡 송서면) 南向에 자리한 어머니 墓에 合掌했다.” 이렇게 朴趾源은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아내 옆에 自身의 몸을 누여 다시 만났다.

    丁若鏞의 家族 詩

    전남 강진군의 의뢰로 전통 초상화법의 대가인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그린 정약용 초상화. [다산기념관]

    全南 康津郡의 依賴로 傳統 肖像畫法의 代價인 김호석 韓國傳統文化臺 敎授가 그린 정약용 肖像畫. [茶山記念館]

    丁若鏞은 朴趾源과 달리 相當한 詩를 남겼다. 國文學者 김상홍은 丁若鏞의 詩를 社會詩, 樂府詩, 人倫視, 田園詩, 抒情詩로 區分한 바 있다. 이 가운데 丁若鏞의 人間的 面貌를 잘 보여주는 것이 人倫시다. 儒學者였던 만큼 丁若鏞은 孝道와 友愛를 重視했고, 이에 對한 詩를 적지 않게 썼다. 丁若鏞의 詩는 國文學者 송재소에 依해 ‘茶山視線’이란 題目으로 現代 國語로 옮겨져 있다.

    家族이란 存在가 唯獨 큰 意味로 다가올 때는 幸福을 느끼는 境遇보다 不幸을 마주하는 境遇다. 1801年(純祖 1年) 辛酉迫害로 流配를 떠났을 때 丁若鏞은 家族에 對한 詩를 많이 남겼다.

    “아버지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 어머니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 우리 家門 갑자기 뒤집어져서 / 죽고 사는 問題가 이 地境이 되었네요(…) 子息 낳아 父母님 기뻐하시며 / 잡아주고 끌어주고 애써서 길렀는데 / 父母 恩惠 갚으리라 應當 말했지 / 이같이 꺾이리라 생각인들 했겠어요 / 이 世上 사람들께 바라는 바는 / 다시 子息 낳았다 기뻐 말기를.” (‘荷擔의 離別’)

    丁若鏞이 流配地인 臟器로 가면서 忠州 先山에 들렀을 때 쓴 作品이다.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辛酉迫害로 정약용 집안은 風飛雹散이 났다. 둘째 兄 丁若銓은 薪智島로 流配를 갔고, 셋째 兄 丁若鍾은 殉敎했다. 그리고 自身도 流配를 떠나게 됐으니 父母 墓所를 들렀을 때 丁若鏞의 心情은 慘澹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世上 사람들에게 子息을 낳았다고 기뻐하지 말라고 丁若鏞은 歎息하고 있다.

    丁若鏞에게 스승이자 知己(知己)는 둘째 兄 정약전이었다. 丁若銓은 두 番째 流配地 黑山島에서 물고기를 硏究한 ‘玆山魚譜(玆山魚譜)’(‘玆山魚譜’라고도 읽음)를 執筆했다. ‘玆山魚譜’는 朝鮮時代에 쓰인 이채로운 自然科學 著作이었다. 丁若鏞은 긴 流配 끝에 故鄕으로 돌아왔지만, 丁若銓은 안타깝게 流配地에서 世上을 떠났다. 아래의 詩는 첫 番째 流配地인 薪智島에 있는 둘째 兄을 그리워하며 쓴 것이다. 丁若鏞 自身도 臟器에 流配돼 있을 때였다.

    “신지 섬 아스라이 멀고 멀지만 / 分明히 이 世上에 있는 섬이라 / 水平으로 弓福海에 連接해 있고 / 비껴서 등龍山을 마주해 있네 / 달이 져도 消息 한 字 들리지 않고 / 뜬구름만 저 혼자 갔다가 돌아오네 / 언젠가 地下에서 다시 만나면 / 우리 兄弟 얼굴에 웃음꽃 피리.” (‘가을날 兄님을 그리며’)

    消息 없는 둘째 兄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丁若鏞은 自由롭게 오가는 뜬구름에 빗대 쓸쓸하게 表現한다. 流配가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저승에서나 웃으며 만나자는 句節은 마음 시리게 한다. 丁若鏞의 ‘流配地에서 보낸 便紙’를 보면, 兄弟는 便紙를 통해 學問的 討論을 이어갔다. 더없이 不幸한 時節이었음에도 不拘하고 두 사람 모두 知識人으로서의 氣品을 잃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 [보물창고]

    流配地에서 보낸 丁若鏞의 便紙. [寶物倉庫]

    이러했던 둘째 兄을 잃은 슬픔은 丁若鏞에게 큰 衝擊을 안겨줬다. 丁若鏞은 아들에게 보낸 便紙에서 “나를 알아주는 분이 죽었으니 또한 슬프지 않겠느냐? 經書에 關한 240冊의 내 著書를 새로 裝幀하여 冊床 위에 保管해 놓았는데 이제 그것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라고 쓰고 있다. 丁若鏞과 丁若銓의 友愛는 이렇듯 남달랐다.

    流配를 떠난 後 丁若鏞에게 가장 애틋한 存在는 두고 온 아내와 子息들이었다. 丁若鏞이 市의 模範으로 삼았던 詩聖(詩聖) 杜甫 亦是 아내와 子息들에 對한 詩를 남겼다. 杜甫는 ‘달밤(月夜)’이란 詩에서 그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오늘밤 父主 하늘에 뜬 달을 / 아내는 홀로 바라보려나 / 더욱 가여운 어린 子息들은 / 長安의 아비를 그리는 엄마 마음을 알지 못하리.” 安祿山의 亂이 일어나자 家族을 부주에 避難시킨 後 長安에 혼자 남았을 때 杜甫가 쓴 詩다. 아내와 子息에 對한 그리움은 丁若鏞도 마찬가지였다. 丁若鏞은 6男 3女를 뒀지만, 그 가운데 4男 2女를 일찍 잃었다.

    “陶淵明 아들보다 사뭇 낫구나 / 아비에게 밤 부쳐 보낸 것을 보니 / 한 자루 조그마한 이 밤알들이 / 千里 밖 궁한 나를 慰勞해 주네 / 내 생각 잊지 않은 그 마음 어여쁘고 / 封緘한 그 솜씨 생각이 나네 / 맛보려 생각하니 도리어 맘에 걸려 / 서글피 먼 하늘만 바라보노라.” (‘밤’)

    첫 番째 流配地인 將棋에서 쓴 詩다. 流配를 간 丁若鏞에게 아들이 밤을 보내오자 기쁘면서도 서글픈 마음을 읊은 作品이다. 丁若鏞은 陶淵明의 아들이 배와 밤을 찾은 것을 떠올리며 밤을 보내준 아들을 稱讚하고 흐뭇한 마음을 詩로 表現한다. 하지만 두고 온 子息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그 마음은 이내 서글픔으로 바뀐다.

    비슷한 時期에 쓴 다른 詩에서 丁若鏞은 “부지런히 힘써서 남새밭 가꾸어 / 맑고 밝은 世上에 佚民(逸民)李 되어라”(‘아들에게’)라고 當付한다. 일민이란 벼슬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사람을 뜻한다. 流配는 丁若鏞에게 견디기 힘든 挫折人 同時에 子息들의 삶에 큰 影響을 미치는 重大한 事件이었다. 廢族이 돼버린 子息들에 對한 憐憫과 사랑을 丁若鏞은 이렇게 表現하고 있다.

    두 番째 流配地인 康津에 있은 지 10年 만에 찾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쓴 詩 또한 印象的이다. “얼굴 생김은 내 子息 같은데 / 鬚髥이 자라서 딴사람 같구나 / 집안 便紙를 가지고 왔지만 / 아직도 내 子息인지 미심쩍다네”(‘둘째 아들을 보고’)라는 告白은 어느새 長成한 아들에게 느끼는 대견함과 自身의 不在에 對한 未安함을 簡潔하게 表現하고 있다.

    丁若鏞의 아내는 流配의 苦痛을 누구보다 크게 느꼈을 家族이었을 것이다. ‘茶山視線’을 보면 아내를 言及하는 作品이 더러 나온다. 아래의 ‘回婚日(回婚日)에’는 結婚 60年을 맞이해 쓴 詩다. 丁若鏞이 남긴 마지막 作品이다. 成功과 挫折로 이어지는 삶에 對한 無常한 心情, 得意와 苦難의 時期를 함께해 온 아내를 向한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다.

    “六十年이 바람처럼 瞬息間에 지났는데 / 복사꽃 핀 봄빛은 新婚 時節 같구나 (…) 이 밤 읽는 木蘭辭(木蘭詞·男便이 아내에게 읽어주었다는 樂府詩) 소리 더욱 多情하고 / 그 옛날 下皮(霞?·글을 썼던 붉은色 치마)엔 먹痕跡 아직 있네 / 갈라졌다 合해지니 眞짜 나의 모습이라 / 合한週 술盞 남겨 子孫에게 물려주리.” (‘回婚日에’)

    傳統社會의 平均壽命을 생각할 때 夫婦가 回婚을 맞이하기란 쉽지 않다. 丁若鏞은 1776年(英祖 52年) 2月 22日 풍산 洪氏 夫人과 結婚해 60年 되는 1836年(憲宗 2年) 2月 22日 回婚日에 世上을 떠났다. 그의 나이 일흔다섯이었다. 이 詩는 回婚日 3日 前에 쓴 거였다.

    丁若鏞은 父母에게 孝心 가득한 아들이었고, 兄님에게 友愛 깊은 아우였다. 子息들에게는 嚴하면서도 仔詳한 아버지였고, 아내에게는 禮儀를 갖춘 多情한 男便이었다. 儒敎에서 强調한 三綱五倫을 丁若鏞은 具體的 삶에서 實踐했고, 이러한 丁若鏞의 倫理的 態度는 그의 詩에 오롯이 反映돼 있다.

    돌아보면 丁若鏞의 삶은 劇的이었다. 前半部가 榮光을 누린 삶이었다면, 後半部는 18年의 流配라는 挫折을 견뎌내야 한 삶이었다. 이러한 苦痛의 時間은 한便으로 家族에 對한 그의 사랑을 더욱 깊게 했다. 이 家族에 對한 사랑은 다른 한便으로 그에게 기나긴 流配를 依然히 견뎌낼 수 있는 힘과 勇氣를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傳統社會의 삶과 現代社會의 삶은 같고도 다르다. 普遍的 人間이라는 點에서 같지만 時代的 拘束을 받는 人間이라는 點에서 다르다. 丁若鏞의 家族 市는 子息이자 男便이자 아버지로서의 人間的 모습을 애틋하면서도 氣品 있게 傳達하고 있다. 同時에 이러한 人間的 모습은 傳統的 儒敎 倫理 안에 놓여 있었다는 事實 또한 否認하기 어렵다. 孝道 等 儒敎的 價値를 一方的으로 拒否하자는 게 아니다. 그것이 놓인 顯在的 자리와 意味를 생각해 볼 必要가 있다.

    21世紀 家族의 社會學

    오늘날 가족의 형태는 핵가족의 경우 ‘내 새끼 지상주의’가 견고한 반면, 1인가구의 경우 ‘각자도생주의’가 공고화하고 있다. [Gettyimage]

    오늘날 家族의 形態는 核家族의 境遇 ‘내 새끼 至上主義’가 堅固한 反面, 1人家口의 境遇 ‘各自圖生注意’가 鞏固化하고 있다. [Gettyimage]

    社會學的으로 家族이란 個人과 社會를 連結하는 共同體다. 人間은 國家와 市場이라는 制度 속에 살아가는 同時에 家族이라는 制度 안에 터 잡고 있다. 古典的 視角에서 家族은 婚姻과 出産으로 連結된, 情緖的으로 親密한 1次 集團을 의미했다. 傳統社會에서 近代社會로 履行하는 過程에서는 核家族이 빠르게 擴散됐다. 家父長制와 私的 親密性은 核家族을 支撐하는 두 기둥이었다.

    그런데 20世紀 後半에 들어와 家族은 다양해졌다. 西歐의 境遇 家族의 形態는 ‘家族(the family)’이 아니라 ‘家族들(families)’로 存在한다. 傳統的 家族 外에 한父母 家族 또는 再結合 家族, 그리고 LGBT(레즈비언·게이·兩性愛者·트랜스젠더) 家族 等이 存在한다. 21世紀에 들어와서 家族을 말할 때 하나의 普遍 모델을 想定하지 않는 게 社會 흐름을 이뤄왔다.

    우리나라 家族에 對해서는 社會學者 김동춘의 硏究가 注目할 만하다. 김동춘의 咀嚼 ‘韓國人의 에너지, 家族主義’에 따르면, 韓國의 近代는 獨自的 自由와 責任을 한 몸에 지닌 西歐的 ‘個人’의 誕生社가 아니다. 그것은 家族이라는 有機的 單位 속의 個人인 ‘家族 個人’의 誕生社로 봐야 한다. 김동춘은 우리나라 家族과 家族主義가 不安하고 危險한 世上에서 自身을 保護받을 수 있는 安息處이자 逃避處이며, 國家와 市場의 暴力을 버텨내는 울타리였다고 分析한다.

    우리 社會 傳統과 현대가 보여주는 連續 및 斷絶에서 家族은 兩面的 特性을 드러내 왔다. 한便에서 볼 때 近代化 過程에서 家族은 크게 變化해 왔다. 大家族의 減少, 核家族의 增大, 家族의 小規模化가 家族 變動을 이끌었다. 가장 劇的 變化는 1人家口의 變動이다. 統計廳에 따르면, 2022年 1人家口의 比重은 全體 家口의 34.5%를 차지했고, 그 規模는 750萬 家口를 넘어섰다.

    그러나 다른 한便에서 볼 때 核家族의 再生産에서 傳統的인 家族文化가 如前히 큰 影響을 미쳐왔다. 朴趾源과 丁若鏞의 家族 詩에서 發見할 수 있듯, 그리고 김동춘의 分析에서 살펴볼 수 있듯, 家族은 그 構成員들에게 社會的·情緖的 保護膜을 이뤄왔다. 特히 情緖의 領域에서 家族은 애틋함과 힘을 同時에 안겨주는 存在的 據點이었다.

    이러한 情緖的 애틋함과 힘에서 勿論 傳統과 현대 사이에 距離가 存在한다. 朴趾源과 丁若鏞의 家族 詩를 통해 엿볼 수 있는 傳統社會의 家族文化는 孝道와 慈愛와 友愛라는 儒敎的 倫理 및 文化에 基盤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家族文化에서 子息에 對한 사랑인 慈愛는 극대화돼 있는 反面 孝道와 友愛는 적잖이 退色해 있다.

    21世紀 現在, 文化的 側面에서 家族은 그 形態에 따라 다양한 樣相으로 나타나고 있다. 核家族의 境遇 ‘내 새끼 至上主義’가 堅固한 反面, 1人家口의 境遇 ‘各自圖生注意’가 鞏固化하고 있다. 내 새끼 至上主義가 共同體注意의 21世紀的 變形이라면, 各自圖生主義는 個人主義의 21世紀的 變形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21世紀 우리 社會에서 家族의 肖像이 크게 變化하고 있다는 點이다. 家族은, 最近 低出生·高齡化 傾向이 證據하듯, 새로운 轉換의 地點에 到達해 있고, 이에 따른 새로운 問題에 直面해 있다. 核家族化 强化에 따른 子女와 父母의 돌봄 問題, 1人家口 增加에 따른 高齡 世代의 貧困과 孤獨死 問題, 離婚 增加에 따른 偏父·偏母 乃至 祖孫 家族 問題 等은 現在 우리 社會 家族이 直面한 重要한 이슈다.

    바로 이點에서 21世紀 家族 變動에 걸맞은 家族政策을 推進할 必要가 있다. 巨視的 次元에서 低出生·高齡化에 對한 對策이, 微視的 次元에서 돌봄노동에 對한 對處가 重要하다. 나아가 1人家口 高齡 世代의 貧困을 解決할 수 있는 持續 可能한 福祉政策의 强化도 重要하다. 共同體注意의 觀點에서 家族을 一方的으로 擁護하자는 게 아니다. 家族이 如前히 所重한 사람에게 그 家族을 維持할 수 있게 하는 政策을 政府는 思慮 깊게 推進해야 한다는 點을 指摘하고 싶다.

    家族이란 무엇인가. 論理보단 사랑이, 理性보단 感性이, 말보단 沈默이 감싸 흐르는 空間이 家族이다. 우리 社會에서 私的 領域에 머물러 있던 家族은 21世紀에 들어와 公的 領域의 이슈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韓國的 家族과 그 變動에 對한 熟考와 이에 基盤한 政策 摸索 및 推進을 더는 미뤄선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1960年 京畿 洋酒 出生
    ● 연세대 社會學科 卒業. 獨逸 빌레펠트臺 社會學 博士
    ● 美國 스탠퍼드대 亞太硏究센터 코렛 펠로
    ● 現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 著書 : ‘現代 資本主義와 韓國社會’ ‘韓國의 現代性과 社會變動’ ‘韓國 市民社會의 省察’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신기욱과 共編)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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