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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灣은 醫師보다 TSMC 엔지니어가 最高”|新東亞

“臺灣은 醫師보다 TSMC 엔지니어가 最高”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半導體 1等 主役 임형규 前 三星電子 社長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4-03-3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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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半導體 血戰, 戰士가 不足하다

    • 半導體 뿌리 弱해지는데 큰 나무 자라겠나

    • 戰士들에게 싸울 動力 불어넣어야

    • 실리콘밸리 人材 데려오던 時節 끝

    • 技術 重視 以前에 必要한 건 ‘切迫感’



    李健熙 會長의 人材 經營 이야기를 더 해보자.

    三星은 基本的으로 技術會社다. 技術會社를 끌어가는 主軸은 當然히 엔지니어다. 그렇다면 이 會長의 엔지니어 人材 經營은 어떤 式으로 作動했을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만난 사람이 임형규 前 三星前者 社長이다.

    林 前 社長은 삼성전자에서 메모리 開發本部長, 시스템 LSI社業部長, 技術總括 社長, 삼성종합기술원長, 新事業팀長을 歷任하며 메모리 半導體 1等을 만든 主役 中 한 사람이다.

    現在 삼성전자가 世界 메모리 市場에서 獨占的 地位를 維持하는 것은 D램에 이은 플래시 메모리 技術에서 斷然 앞서고 있기 때문인데 林 前 社長은 1984年 8月 그 援助 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이피(EEP) 롬(Rom) 開發부터 始作해 플래시 메모리 事業을 성공시켰다. 그에 對한 이야기는 筆者의 冊 ‘李健熙 半導體 戰爭’에도 仔細히 紹介돼 있다.



    삼성반도체의 신화를 만든 주역 중 한사람인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글로벌 첨단산업에서 부의 신대륙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반도체 메모리의 성취를 이어가려면 엔지니어에 대한 교육과 평가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지호영 기자]

    삼성반도체의 神話를 만든 主役 中 한사람인 임형규 前 三星前者 社長은 “글로벌 尖端産業에서 富의 新大陸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半導體 메모리의 成就를 이어가려면 엔지니어에 對한 敎育과 評價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지호영 記者]

    結局 人才 戰爭

    林 前 社長은 平素 “半導體 戰爭은 結局 人材 戰爭”이라며 “核心 엔지니어들에게 글로벌 最高 專門家에 걸맞은 破格的 補償과 社會的 評價를 해야 한다”고 主張하면서 理科生들의 醫大 쏠림 現象을 憂慮하는 發言을 많이 해왔다. 마침 醫大 增員 問題로 시끌벅적한 요즘이라 이걸 먼저 話題로 삼았다. 그에게서는 한숨부터 나왔다.

    “韓國은 半導體産業을 시의적절하게 選擇해 先進國 소리를 듣고 있어요. 只今처럼 人材들이 醫大로 쏠리면 大韓民國은 漸漸 어려워집니다. BTS(防彈少年團)도 대단하지만, 國家的으로 보면 數十兆 원 利益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은 ‘技術 人材’들입니다. 이들의 重要性은 아무리 强調해도 지나치지 않죠. 醫師 增員과는 別途로 똑똑한 學生들이 엔지니어를 希望할 수 있도록 社會的 評價와 補償 體系에 對해서도 苦悶할 때라고 봅니다,”

    韓國은 半導體 製造 强國으로 産業에서 차지하는 比重이 매우 큰데 엔지니어에 對한 社會的 認識은 그에 못 미친다는 생각에 저도 同意합니다.

    “國內 總生産의 20%가 半導體 聯關 産業 아닙니까. 코스피 時價總額 1位 2位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이고 코스닥에는 無慮 300個 以上 企業이 半導體, 디스플레이, 배터리 關聯 素材, 裝備 企業이 布陣해 있어요. 모두 나노(超微細)技術 基盤 企業이죠. 三星이나 SK하이닉스 같은 大企業들이 잘돼야 中小企業도 잘됩니다. 이 中心에 技術 人材들이 있습니다.

    三星은 半導體를 包含해 世界에서도 類例없이 넓은 나노技術 事業을 保有하고 있습니다. 메모리 半導體를 비롯해 파운드리, 시스템 半導體(設計), 디스플레이 事業, 三星SDI 배터리, 三星電機 素材部品 事業까지 6個 分野를 모두 갖고 있는 世界 唯一의 綜合 電子會社입니다.

    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글로벌 메이저 産業이고 빠르게 成長하는 未來 産業입니다. 分野마다 專門的인 核心 엔지니어가 必要한데 三星이 産業 내 차지하는 比重으로 보면 每年 하이엔드 高級 技術 人材가 數千 名씩 排出돼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社會는 10餘 年 前부터 人材가 醫대로만 쏠리고 엔지니어를 評價해 주지 않는 社會 雰圍氣가 생겨서 優秀한 技術 人材들이 만들어질 土臺가 弱해지고 있어요. 뿌리가 弱해지는데 큰 나무가 자랄 수 있겠습니까. 半導體, 배터리 契約學科度 만들고 했지만 늦은 感이 있습니다. 對應이 더 빨랐어야 했다고 봅니다.”

    記者는 ‘李健熙 半導體 戰爭’ 冊을 쓰는 過程에서 그를 여러 番 만났는데 뼛 속까지 엔지니어라는 느낌이 들 程度로 冷徹하고 理性的으로 보였다. 목소리 톤도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이날은 對話가 이어질수록 表情은 어두워지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만큼 앞을 내다보면 걱정이 많다는 거였다.

    2월 24일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서 열린 TSMC 반도체 제1공장 개소식. 사이토 겐(왼쪽부터) 일본 경제산업상, 모리스 창 TSMC 창업자, 류더인 TSMC 회장,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CEO), 요시다 겐이치로 소니 회장,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자동차 회장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月 24日 日本 구마모토縣 기쿠요마치에서 열린 TSMC 半導體 第1工場 開所式. 사이토 겐(왼쪽부터) 日本 經濟産業上, 모리스 窓 TSMC 創業者, 류더人 TSMC 會長, 웨이著者 TSMC 最高經營者(CEO), 요시다 겐이치로 소니 會長,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自動車 會長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로이터 聯合뉴스]

    “問題는 우리 內部에 있다”

    美·中 葛藤에 自國 內에서 半導體를 만들겠다는 先進 各國의 攻擊的 態度 變化로 半導體 市場의 地形이 확 바뀌고 있습니다. 最近 日本의 구마모토 TSMC 工場이 竣工式을 했고, 인텔이 파운드리 事業에 들어간다고 宣戰布告를 했습니다. 엔비디아 株價가 高空行進을 하고 말이죠. 그러다 보니 危機感도 올라가는 것 같아요.

    “그런 外的 要素는 本質이 아닙니다. 問題는 우리 內部에 있습니다. 일할 사람들이 없는데 三星더러 ‘왜 TSMC를 이기지 못하느냐’고 非難할 일이 아니죠. 한마디로 三星이라는 구슬을 꿸 人材들이 줄고 있다는 게 第一 큰 問題입니다.

    여기에는 三星도 反省할 대목이 있습니다. 엔지니어가 없으면 三星도, 大韓民國도 없다는 것을 國民에게 더 積極的으로 알리고 疏通하면서 ‘國民 企業’ 이미지를 심어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봅니다.

    政治人과 國民도 말로는 ‘三星 亡하면 大韓民國 亡한다’고 하지만 實際로는 企業이나 엔지니어들을 그렇게 所重하게 待接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2022年 삼성반도체의 過去 現在 未來를 湖巖이나 李健熙 會長의 리더십 側面이 아닌 ‘偉大한 폴로어들’에게 焦點을 맞춘 冊 ‘히든 히어로즈’를 내놓았다. 冊에서는 30餘 年間 半導體 尖端 戰爭에 參與한 戰士들의 ‘戰鬪機’가 생생하게 실렸다. 그도 스스로를 ‘전사’라고 불렀다.

    “옛날 帝國主義가 植民地들을 爭奪하던 때처럼 半導體, 바이오, AI, 모빌리티라는 ‘富의 新大陸’을 두고 피 터지게 싸우는 新(新)經濟 戰爭 時代입니다. 글로벌 市場에서 競爭하는 技術 大企業들은 새로운 富(富)를 創出하는 戰爭에 投入된 軍隊이고 엔지니어들은 戰士들입니다.

    戰士들에게 必要한 건 돈도 돈이지만 業에 對한 自矜心, 召命感이 重要합니다. 臺灣 사람들을 만날 機會가 있어서 이야기하다 보면 醫師, 辯護士보다 TSMC 엔지니어가 最高입니다. 이러니 臺灣이 半導體 强國이 되지 않을 수가 없죠.”

    社會 全體的으로 ‘技術이 未來’라는 共感帶가 必要해 보입니다.

    “半導體와 電子産業은 世界市場에서 大韓民國이 歷史上 唯一하게 ‘퍼스트 무버’로서 우뚝 선 産業이고 그야말로 無에서 有를 만든 건데 여기에 對한 評價가 아직도 弱하다고 봅니다. 메모리 世界 1等 30年, 非메모리 파운드리 世界 2等, 所在 部品 裝備 分野도 이렇게 基盤을 다졌다는 건 대단한 거예요.

    半導體가 新生 事業이었기 때문에 可能했습니다. 湖巖이 半導體 事業을 宣言한 1983年은 PC가 나오고 6年 뒤인데 正말 대단한 神의 한 수였지요. 그때만 해도 世界 2等 國家였던 日本을 오가면서 그들이 메모리 事業을 始作한 걸 보고 우리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타이밍이 正말 기막혔죠. 조금만 더 늦게 들어갔으면 技術 隔差로 따라잡지 못했을 겁니다. 初盤에는 苦戰했지만 마침내 1993年 1994年 1995年 엄청난 好況이 오잖아요.

    이에 비해 制約, 化學, 精密機械, 自動車, 飛行機 等 2次 産業革命期에 誕生한 産業은 先進國이 100年 넘게 城을 쌓아 進入障壁이 높았는데 新興工業國이던 韓國이 追擊에 들어간 거였죠. 自動車가 成功했지만, 나머지 大部分 分野에서 韓國은 如前히 메이저 글로벌 企業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半導體産業은 앞으로도 擴張할 産業 分野가 많습니다. AI時代 아닙니까. 우리가 잘만 하면 엄청난 富의 新大陸을 爭取할 機會가 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人材 確保’에 死活을 걸어야 합니다.”

    미국 그래픽처리장치(GPU) 제조사 엔비디아 창업자인 젠슨 황 최고경영자가 지난해 대만 타이베이에서 신제품을 발표하는 모습. 엔비디아는 주가가 고공행진해 시장가치에서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인 사우디 아람코를 제치고 세계 3위 기업이 됐다. 엔비디아 앞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애플만이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3월 4일 보도했다. [뉴시스=AP]

    美國 그래픽處理裝置(GPU) 製造社 엔비디아 創業者인 젠슨 黃 最高經營者가 지난해 臺灣 타이베이에서 新製品을 發表하는 모습. 엔비디아는 株價가 高空行進해 市場價値에서 世界 最大 石油 企業人 사우디 아람코를 제치고 世界 3位 企業이 됐다. 엔비디아 앞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애플만이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3月 4日 報道했다. [뉴시스=AP]

    半導體業은 徹底하게 步톰 業 文化

    李健熙 會長이 生前에 光跡일 程度로 人材, 人材 하던 理由가 있었군요.

    “三星의 成就는 李健熙 會長이 平素 强調했던 人材 經營의 結果입니다. 三星은 技術會社高 結局 엔지니어 會社라는 意識이 確固했죠. 半導體業의 槪念을 正確하게 알고 있었던 거죠.”

    ‘社長보다 年俸 많이 줄 수 있는 天才들을 데려오라’고 한 時代는 三星이 只今처럼 確固한 1位가 아닌 時節이었는데 迎入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궁금해요.

    “時代別로 若干 差異가 있어요. 삼성반도체의 始作은 실리콘밸리 在美科學者들입니다. 湖巖 創業會長이 平素 親分이 있던 日本 NEC 會長에게 ‘엔지니어들을 求해달라’고 하자 自己 會社 顧問으로 있으면서 실리콘밸리에 있던 韓國人 科學者 이임성 博士를 推薦했는데, 이 博士가 主軸이 돼 실리콘밸리 韓國人 科學者 10餘 名을 꾸려 硏究所를 만들었습니다. 이분들이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以後 美國에서 일하던 젊은 韓國人 工學者들이 많이 迎入되는데 後날 리더가 되는 진대제, 黃昌圭, 權五鉉, 이문용 博士 等이 그들입니다.

    國內에서는 김광호·이윤우 會長이 主軸이 돼 서울對 工大, 카이스트, 兵役特例 人材들이 大擧 들어오면서 鬐興工場에서 일하며 自體 工程, 設計 技術을 確保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1993年 메모리 1等’이라는 奇跡을 만들어내는 主役이 됩니다.

    事實 半導體業은 徹底하게 現場이 重要한 ‘步톰 業’ 組織文化입니다. 그前까지만 해도 韓國 企業文化는 軍隊式, 官僚 文化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半導體業은 現場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고 效率과 能力 中心으로 사람을 쓸 수밖에 없어요. 윗사람에게 恭遜하고 잘 보이는 게 重要한 게 아니라 當場 現場에서 發生한 問題를 解決하는 사람이 重要하니까요.

    ‘1메가에서 4메가 가라’고 指示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죠. 技術이 100가지가 必要하다면 이걸 具現해 내는 技術者 100名이 必要합니다. 나는 部下 職員들이 ‘熱心히 하겠다, 忠誠을 다하겠다’고 하면 ‘다 必要없다, 일만 잘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게 技術企業의 文化입니다.

    特히 엔지니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이 活潑하게 意見을 펼치면 귀 기울여 듣고 實行한 김광호·이윤우 두 분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三星의 오늘은 없었다고 봅니다.

    저도 1993年 프랑크푸르트 新經營 宣言 現場에 있었는데 이 會長의 메시지는 半導體 現場에서 이미 實踐하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해 메모리 1等을 하자 自信感을 갖고 一과 現場 中心인 半導體 企業文化를 家電을 비롯해 전사的으로 퍼뜨리려고 했던 것이 바로 新經營 宣言이었다고 봅니다.”

    半導體業을 組織文化的 觀點에서 보니 新鮮하네요.

    “韓國 社會에 旣存에 없던 産業이었던 만큼 美國式 尖端技術 企業에 있던 組織文化가 넘어와 進化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社會가 技術 專門家 社會로 넘어가는 매우 象徵的 事件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端的인 例로 저희는 설 秋夕 때 部下 職員들이 上司 집에 찾아오면 魂을 냈어요. 다른 系列社나 公務員 社會는 그때만 해도 一般的이었죠. 윗사람 눈치 보지 말고 現場에서 問題가 생기면 기탄없이 이야기를 하라는 거였죠.

    當時에 인텔이나 IBM 같은 美國 會社 칩 購買 팀이 韓國에 오면 저희 技術陣과 무슨 메모리가 必要한지, 納期는 언제인지 等을 相議하는데 普通 日本 會社들 돌고 韓國에 왔습니다. 이 사람들 하는 이야기가 韓國에 오면 릴랙스가 되고 疏通이 된다는 거예요. 日本만 해도 位階秩序가 뚜렷하다 보니 會議 때 팀長만 이야기하고 다들 입을 닫고 있다면서 말이죠.

    複雜하고 어려운 産業일수록 現場 技術者, 專門家의 목소리가 重要합니다. 오너는 監督, 任員은 코치, 技術者는 選手들이죠. 監督과 코치는 選手들이 잘 뛰게 方向을 設定해 주고 經營 리소스를 잘 配分하고 評價와 補償을 잘하는 게 다죠.”

    1993年 新經營 語錄을 보면 ‘日本人 拷問’ 活用에 對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데 이건 主로 家電 事業에 該當한 거였군요.

    “日本 技術者들은 半導體에서도 1980年代 祕密裏에 모셔온 분들도 있지만 組織 內에서 中心 人力으로 일하는 건 아니고 메모리(半導體 事業) 할 때 拷問이나 컨설팅 人力으로 迎入했습니다. 以後 디지털 時代가 되면서 日本 自體가 뒤처져서 別 도움이 안됐습니다. 더는 日本으로부터 배울 게 없어진 거죠. 디지털 情報革命은 美國에서 始作됐기 때문에 美國의 재미 工學者를 主로 迎入했습니다.”

    會長의 督勵는 뛰어난 人事政策

    그는 外部 人材 迎入에 加速度가 붙은 時期를 “2000年 以後”라고 記憶했다.

    李健熙 會長이 天才級 外部 人材 迎入을 强調했던 時期죠?

    “半導體도 메모리를 넘어 非메모리 分野로 事業을 擴大해 나가야 했고, 電子産業 全體를 디지털 轉換에 對備하기 위해 脆弱한 技術 部門을 빠르게 補完할 必要性이 큰 時期였죠.

    실리콘밸리 在美 韓人 科學者들을 시스템, 소프트웨어 分野 中心으로 1年에 몇 十 名씩 데려왔습니다. 저도 많이 接觸했는데 留學 가서 자리 잡은 사람들이나 IBM 같은 美國 會社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만났어요.

    會長이 하도 社長들에게 人材 데려오라고 닦달(?)을 해서 그때 저를 包含한 社長들의 重要한 일이 스카우트였습니다. 人材 迎入은 社長만 나선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組織 內 反撥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너가 强調하고 힘을 실어주니 迎入된 사람들이 氣를 펼 수 있었죠. 그런 點에서 會長의 督勵는 뛰어난 人事政策이었습니다.

    未來를 보는 眼目이 뛰어났던 거죠. 거슬러 가보면 1990年代 後半부터 디지털 轉換이 빠르게 進行되고 있었는데 會長은 三星의 自體 人力만 갖고는 充分하지 않다고 判斷했던 거 같아요. 스마트폰이 2007年에 誕生했으니까 結果的으로 미리 準備한 셈입니다. 애플이 아이폰을 만들며 스마트폰 時代를 열었고 三星은 MS 옴니아 폰, 노키아 심비안 폰 等을 오락가락하는 施行錯誤 끝에 구글 안드로이드폰으로 살아남지 않습니까. 2000年代 初盤 外部 人材를 積極的으로 輸血해 디지털 技術 力量을 올려간 努力의 結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 그 時期 社長들이 데려온 사람들이 한 100名은 될 겁니다. 韓國에는 없는 技術을 가진 사람들이 大擧 迎入돼 오면서 三星이 디지털 리딩 企業으로 跳躍하는 데 크게 寄與했습니다.”

    데려오는 過程은 어땠나요.

    “出張 갈 때마다 紹介를 받아 만났습니다. 40代에서 50臺로 美國에서 10年 以上 일하던 사람이 많았는데 事實 美國 會社에 있다 보면 위로 올라가는 데 限界가 많다는 걸 느끼게 되죠. 또 三星이 글로벌 舞臺에서 막 떠오르는 企業이어서 힘도 있고 未來도 보이는 데다 年俸도 맞춰주고 任員級 자리에 집, 아이들 學校까지 다 알아봐 주니까 魅力이 컸죠.

    이분들이 와서 팀長, 常務, 專務, 센터長을 맡았습니다. 제가 迎入한 20餘 名 中에도 任員級이 10名, 部長級이 10名 程度였는데 뒤에 社長까지 昇進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林 前 社長은 “只今은 三星도 技術 先進 企業이어서 그렇게 무더기로 데려올 人材가 別로 없다”며 “脆弱點을 補完하거나 新事業에 必要한 人材에 對한 더 精巧한 迎入 戰略이 必要한 時期”라고 했다.

    “美國이 잘하는 소프트웨어나 시스템 設計 같은 건 韓國이 이기기 어렵지만 尖端 製造에서 우리가 只今 世界 最高 아닙니까. 東유럽, 東南亞, 西南아시아 國家에도 自體 産業은 없지만 머리 좋은 理工系 人材가 많아요. 開發途上國 人材들에게 韓國에서 일하면 最高 技術者가 될 機會가 있기에 充分히 可能性이 있습니다. 이런 나라 사람들에게 비자를 주어서 韓國語를 익히게 하고 韓國人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確固한 基盤을 構築한 半導體, 배터리, 디스플레이, 尖端 素材 等의 나노技術 産業과 또 다른 한 軸인 携帶폰, 自動車, 防衛産業 等의 知能型 시스템 産業을 키워나갈 基盤이 充分히 構築돼 있습니다.

    인터넷과 콘텐츠 플랫폼이나 寒流를 이끄는 엔터테인먼트 産業도 第3섹터로 자리 잡았고요. 여기에 必要한 國內外 最高의 技術 人材들이 일하는 技術 허브 國家가 되는 게 우리가 세워야 할 目標입니다. 제대로 하면 實現도 可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點에서 “三星도 政府도 사람 키우는 일에 切實하게 나서야 한다”고 했다.

    “政治도 혼란스럽고 硏究開發(R&D) 豫算도 줄고 理工系는 放置되고 있어요. 엔지니어라는 職業을 安定化해야 해요. 專攻 分野도 이것저것 마구 시키지 말고 國家 次元에서 産業과 人材 育成과 關聯한 큰 그림을 그려서 未來의 ‘必然的이고도 大勢가 되는 産業’에 集中的으로 쓰일 材木들을 키워야 합니다.

    엔지니어에겐 本人이 擇한 專攻이 쓰일 수 있는 産業이 縮小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가장 큰 리스크죠. 大學들은 이 리스크가 最少化되도록 專攻分野를 選擇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장 重要하다고 봅니다.

    半導體같이 ‘必然的인’ 成長이 豫想되는 大勢 産業에 從事하면 엔지니어도 失敗 確率이 顯著히 낮아집니다. 또 다른 問題는 名文 工大를 卒業한 優秀한 大學生들이 글로벌 水準의 會社에 들어가면 學校에서 배운 水準과 너무 큰 差異가 납니다. 適應하기 위해 또 다른 期間이 必要한 거죠. 그 隔差를 줄일 수 있는 大學院 敎育도 强化해야 합니다.”

    新任 社長 5名에게 會長이 傳한 眞心

    對話는 人材 이야기에서 最近의 半導體 戰爭 狀況으로 넘어갔다. 于先 그에게 길게 물었다.

    美國이 中國 半導體 굴기를 沮止하기 위해 供給網 戰爭에 나설 때만 해도 ‘三星이 反射利益을 얻을 수 있으니 또 다른 機會’라는 評價가 많았는데 요즘 펼쳐지는 樣相은 日本과 臺灣이 三星을 壓迫하고, 美國도 인텔이 自體 칩을 만들겠다고 하는 等 危機感이 일고 있어요. 三星이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그가 컵에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길게 答을 이어갔다.

    “三星의 技術力은 탄탄합니다. 半導體 技術이란 게 워낙 進入障壁度 높고 專門的이어서 追擊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 대목에서 저는 지난 일을 돌이켜보는 것도 意味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지난 時間을 돌이켜 보면 恐怖와 두려움으로 點綴된 時間이었다”고 했다.

    “三星이 글로벌 業體들을 追越하고 競爭할 수 있는 體制가 된 건 1990年代 後半에 들어서였습니다. 1993年에 메모리 1等 하고, 以後 3年間 最大 好況을 누렸지만 1996年부터 3年間은 宏壯히 무서운 時節을 살았습니다.

    잘나가던 日本의 世界的 메모리 企業들이 퍽퍽 쓰러지는 걸 바라보는 오너나 저희 心情이 어땠겠습니까. 世界 1位였던 핀란드 노키아 무너질 때에도 우리 亦是 한 房에 훅 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澎湃했어요.

    李健熙 會長 立場에서 보면 하나하나가 너무 힘들었을 겁니다. 國內에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政治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오죽했으면 ‘政治가 3流’라는 말을 大衆 앞에서 했겠습니까. 한時도, 한瞬間도 속 便하지 못했을 겁니다. IMF 經濟危機까지 겹쳐 올인했던 自動車 事業도 亡하고 말이죠.

    그러다 겨우 安堵의 한숨을 내쉰 게 世上이 디지털로 바뀌기 始作하는 2000年代 들어서였습니다. IMF에서 벗어나 經濟도 回復되고 世界 메모리 大田에서 世界 1等이 굳어졌고, LCD·디스플레이도 先頭圈에 섰죠. 完製品 分野에서는 携帶폰 애니콜이 急成長해 安定的 利益을 내기 始作했고, 디지털 評判 TV도 世界市場에서 躍進했습니다. 어렵고 힘들던 때 尖端技術의 未來를 내다보고 陣頭指揮하던 會長의 디지털 轉換 리더십, 1993年 新經營 메시지의 核心인 ‘技術 重視’가 그야말로 結實을 본 거죠.”

    그는 2000年 말에 李健熙 會長을 가까운 距離에서 直接 만나 對話를 나눌 機會가 있었다고 한다.

    “그해 末 社長團 人事에서 5名의 新任 社長 中 네 名이 엔지니어 出身이 되는 異例的 人事가 있었습니다. 제가 메모리 半導體 事業을 떠나 시스템半導體 社長으로 옮긴 때였는데 CFO(經營支援總括) 최도석 社長을 除外하고 通信 이기태, LCD 이상완, 메모리 黃昌圭, 저 包含해 네 사람이 모두 엔지니어 出身이었습니다.

    李健熙 會長이 ‘新任 社長들 얼굴 한番 보고 싶다’고 해서 다섯 名을 美國 휴스턴으로 불렀습니다. 윤종용 副會長 引率로 專用機를 타고 갔어요. 入社 以後 처음으로 會長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했나요.

    “‘고맙다, 수고했다’ 이러시는데 얼마나 따뜻하고 人間的 愛情이 느껴지는 말이었는지 가슴속 깊이 感動이 일었습니다. 우리들 勞苦를 眞情으로 알아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李健熙 會長은 ‘이제야 會社가 제자리를 잡았다, 삼성전자는 세 番 亡할 뻔한 會社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는 會長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지쳤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正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힘도 없고 技術도 없던 時節에 戰爭터에 投入돼 맨땅에서 헤딩하던 先輩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會長은 그때 癌 鬪病 中이었습니다. 會社는 겨우 한숨 돌렸지만 癌細胞가 몸을 갉아먹고 있었죠. 當時 會社가 本軌道에 오르지 못하고 繼續 어려웠다면 會長 목숨이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多幸히 그때 世界 1位 자리를 굳히면서 10年 넘게 더 사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事實 湖巖度 苦生만 하다 돌아가신 거 아닙니까. 1983年에 도쿄에서 半導體 事業한다고 宣言하고 바로 이듬해부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式으로 繼續 돈을 쏟아부어야 했고, 日本 企業들은 虎視眈眈 덤핑 치면서 치고 올라가는데 內部를 돌아보면 사람도 없고 實力도 없으니 빨리 따라잡을 수도 없고…. 앞이 캄캄한 狀況에서 온 에너지를 다 불사르다 돌아가신 거라고 봅니다.”

    ‘技術 重視’는 危機意識과 함께해야

    林 前 社長은 “只今 우리에게 그런 切迫感이 있는가” 되물었다.

    “저는 ‘超隔差 三星’이라는 말을 들으면 不便합니다. 내가 只今 第一 優越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只今 三星이 메모리 1等은 맞지만 半導體 全體 1等은 아니지 않습니까. 파운드리度, 시스템 半導體도 아직 뒤지고 있습니다. 다시 危機意識으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첫째도 技術, 둘째도 技術이라는 技術 重視는 危機意識과 함께해야 합니다. 저도 會社 다닐 때에는 李健熙 會長이 危機, 危機를 말할 때 正말 싫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危機意識’이야말로 가장 强力한 모티프였습니다.”

    요즘 三星電子 半導體 엔지니어들을 만나보면 걱정을 많이 들어요. 當場 지난해 엄청난 赤字로 보너스가 없어진 것에 對한 놀람과 當惑感이 있었어요. 最近 메모리 市場의 不況이 늘 있어온 需給 過程의 사이클일지, 自體 需要가 줄어드는 것인지 하는 意見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세요.

    “제가 아무래도 現職이 아니다 보니 過去 經驗과 硏究를 통해 얻은 걸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저도 冊을 쓰면서 보니 情報通信革命이란 게 正말 妙한 分岐點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게 뭐죠.

    “1947年에 半導體가 發明된 以後 20餘 年間 수많은 發明과 技術革新이 이뤄지죠. 그러다 1968年 실리콘 게이트 모스(MOS) 技術이 나와서 半導體 固執赤化의 새로운 地平을 엽니다. 이 技術을 바탕으로 1970年代 半導體가 빠르게 高性能, 固執赤化하고 1977年 스티브 잡스의 애플2街 出市되면서 PC의 誕生으로 이어집니다. 李健熙 會長이 私財를 털어서 大韓民國 最初 半導體 會社인 韓國半導體를 引受한 게 1974年인데 비록 D램은 아니더라도 이때 經驗이 後날 技術 追擊에 큰 도움이 됐다는 걸 勘案하면 三星도 美國에 絶對 뒤지지 않는 時點에 事業을 始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1980年代 以後 윈도 OS(運營體系) 基盤 PC가 登場해 PC市場이 暴發的으로 커지는 걸 눈여겨본 湖巖이 메모리 半導體 事業에 뛰어들었고, 李健熙 會長이 拍車를 加했죠. 新經營을 宣言하기 直前 해인 1992年에 PC가 인터넷으로 連結되면서 本格的인 디지털 情報革命이 始作됩니다. PC가 나온 지 꼭 15年 만이죠.

    그러곤 꼭 15年 뒤인 2007年 스마트폰이 나오고 다시 꼭 15年 뒤인 2022年 챗GPT로 대표되는 AI革命이 옵니다. 理由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正確하게 15年마다 半導體 性能이 分野別로 205倍에서 1000倍가 올라가는 狀況이 오는 거죠.

    그런 歷史를 되짚어 본다면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只今 모바일 端末機도 永遠하지 않을 것이라는 展望이 可能합니다. 지난 15年間 메모리 半導體의 가장 큰 需要處는 스마트폰이었습니다. 韓國이 잘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스마트폰 交替 사이클이 길어지면서 市場도 鈍化하고 있습니다.”

    林 前 社長은 “모바일 端末機의 正體는 PC 需要가 1990年代 後半에 成長을 멈춘 것과 비슷한 點이 있다”며 말을 이었다.

    “1992年 인터넷이 깔리면서 1994年, 1995年에 메모리 半導體 需要가 爆發했고 三星을 비롯해 各國 D램 企業들이 큰돈을 벌잖아요. 너도 나도 工場 짓고 攻擊 經營을 했죠. 그러다 1996年에 칩 供給 過剩이 PC 需要 鈍化와 겹치면서 3年間 메모리 産業 大恐慌이 왔고, 12個였던 글로벌 D램 企業이 5個만 살아남는 臺地殼變動이 일어납니다. 그 大地震을 거치는 동안 三星이 世界 1位로 跳躍하고 日本 企業들은 D램 事業에서 아예 撤收하는 狀況이 오지요.”

    죽도록 얻어맞다 KO를 시키다

    그 時節을 버틴 祕訣이 뭐였나요.

    “한마디로 製品 多樣化였습니다. 當時 企業 大部分은 PC用 製品 5가지 程度에 焦點을 맞추고 있었는데 三星만 唯一하게 서버, 그래픽, 램버스 等 폭넓은 應用 分野를 커버하는 20餘 個 製品을 每年 開發하고 生産했습니다. 말이 쉽지, 돈 안 되는 일을 한다고 反對도 많았어요. 工場에서도 效率性이 떨어진다고 反撥이 컸고요.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未來 投資를 熱心히 하면 補償을 받는다는 걸 보여준 代表的 事例죠.”

    1990年代 末 D램 臺 恐慌期에 日本 企業들이 舞臺에서 사라지고, 三星이 싱글 톱으로 우뚝 서게 된 過程은 筆者의 冊 ‘李健熙 半導體 戰爭’에도 記述돼 있다. 當時 非(非)D램 開發 總括을 맡고 있었던 林 前 社長은 메모리本部 設計 部門 責任者가 된다. 市場調査, 製品 設計, 디자인, 製品으로서의 承認 過程 等 메모리 全體를 設計하고 事業化하는 技術 活動을 總括하게 된 것이다. 林 前 社長 말이다.

    “當時 삼성반도체는 D램 事業에서는 1992年 以後 量的으로 世界 1位 市場占有率을 記錄하고 있었고, 次世代 D램 開發에서도 64M 試製品에서 先進 企業들을 따라잡는 氣焰을 吐하고 있었습니다. 半導體를 始作한 지 10年도 채 안 됐을 때였으니 그야말로 奇跡에 가까운 成功을 이룬 거죠.

    여기에다 PC 需要가 急激히 늘면서 1993年, 1994年에 無慮 10兆 원이라는 큰돈을 벌게 됩니다. 그때를 起點으로 메모리가 어느 程度 安定期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生産量이나 工程 技術은 先頭圈이었지만 12個(日本 5個, 韓國 3個, 臺灣 2個, 美國, 獨逸 各 1個) D램 企業이 피 튀기는 戰鬪를 치르는 狀況에서 製品과 顧客 基盤이 充分히 安定된 狀況이 아니었던 三星으로서는 極甚한 價格競爭이 일어날 때마다 外風에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PC 性能이 갈수록 尖端으로 가면서 D램도 漸漸 高度化하고 있었습니다. 單純한 中低價 製品이 아닌 ‘서버(server)’나 ‘스토리지(storage)’ 같은 大型 시스템에 들어갈 D램 開發이 必要했습니다. 게임이나 그래픽에 必要한 것도 開發해야 했고요.

    1995年까지만 해도 PC 主記憶裝置에 使用되는 主力 D램은 ‘싱크로너스(Synchronous) D램’ 卽 SD램이었습니다. 10年 以上 메모리의 代名詞로 통했는데 價格도 比較的 低廉하고 安定的인 것이 特徵이었지만 速度가 느리다는 短點이 있었죠. 이것만으로는 PC의 빠른 高性能化를 따라잡기가 힘들었습니다. 高品質의 次世代 칩 開發이 要求되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DDR램, 램버스 D램 等입니다.

    여기에 그래픽 게임 市場이 要求하는 高速 入出力 D램까지 가짓數가 5가지 內外에서 20餘 가지로 急增했습니다.

    엔지니어들이 턱없이 不足한 狀況이니 設計 프로세스를 劃期的으로 改善하는 革新만이 살길이었습니다. 單位 回路를 標準化, 블록化하고 全體 設計 過程을 체크 리스트로 만들어 매뉴얼化해서 設計 期間을 줄이고 에러도 줄였습니다. 商品企劃팀度 新設해서 顧客 需要를 미리 把握하고 必要한 製品을 適期에 開發하는 能力도 키워갔습니다.”

    社內에서 걱정이 많았던 이런 製品 多樣化는 1996年부터 始作된 D램 不況期에 빛을 發한다.

    1999年이 되자 市場이 安定을 찾기 始作했다. 三星은 名實共히 世界市場의 確固한 리더로 자리 잡게 된다.

    1999년 256MD램 세계 최초 양산을 알리는 삼성전자 경영진. 맨 오른쪽이 임형규 당시 부사장이다. [임형규 사장]

    1999年 256MD램 世界 最初 量産을 알리는 三星電子 經營陣. 맨 오른쪽이 임형규 當時 副社長이다. [임형규 社長]

    다시 林 前 社長 말이다.

    “PC에 들어가는 D램 값은 10分의 1로 떨어졌어도 서버나 그래픽, 게임用 D램은 3分의 1, 4分의 1 程度로 下落 幅이 相對的으로 적었습니다. 多幸히 우리는 PC 依存度를 줄이는 多樣한 製品 開發을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에 被害를 最少化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지 못한 企業들은 다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工場을 돌려봐야 原價도 챙길 수가 없으니 세울 수밖에 없는 거죠. 赤字는 쌓이고 施設은 老朽化되고 顧客은 떠나는 惡循環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特히 日本의 5代 半導體業體가 하나둘 工場 稼動을 멈추면서 結局 NEC가 主導하는 엘피다로 統合돼 버립니다.

    韓國도 현대전자와 LG半導體가 합쳐져 하이닉스반도체가 된 것이 이때입니다. 獨逸 인피니언, 美國 마이크론, 그리고 小規模 臺灣 大企業들이 살아남았지만 體力이 크게 損傷된 狀態였지요.”

    스마트폰 停滯가 가져올 새로운 新技術은

    只今 激變期가 PC 沈滯期와 비슷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三星은 PC 需要가 停滯되는 對激變期의 勝者였지만 2007年 스마트폰이 登場해 D램의 새로운 大型 需要를 創出할 때까지 PC事業에서 큰 成長은 어려웠습니다. 새로운 D램 需要를 가져온 携帶폰, PDA, 게임機 等이 있었지만 PC 需要 自體가 鈍化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鈍化를 겨우 메우는 水準에 그쳤습니다.

    앞으로 스마트폰 成長이 鈍化되는 數年間이 그때와 비슷한 狀況이 될 것 같아요. PC를 代替한 새로운 端末機였던 스마트폰이 나오기까지 6,7年 正體 狀況 말이죠.

    現在 全 世界 톱 D램 企業이 3個로 줄어든 狀況에서 當場은 過去 PC의 沒落이 부른 D램 産業 大改編 같은 큰 變化는 없으리라 豫想되지만 各 企業 間 位相에는 變化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質問이 생각나는데 于先, 스마트폰을 잇는 다음 端末機는 뭐가 될까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웃음). 이番에 三星갤럭시가 通譯 機能에 선보인 서버를 아예 칩에 심는 ‘온 디바이스’ 칩이나 VR(假想現實), 自律走行自動車 等이 새로운 메모리칩 需要를 만들고 있지요. 하지만 當場은 暴發的인 D램 成長은 期待하기 어려울 겁니다. 過去 D램에서 大舶을 친 플래시 메모리가 그랬듯이 HBM(High Bandwidth Memory·高帶域幅메모리) 같은 새로운 메모리 需要에 對應할 수 있는 能力을 키워서 이 停滯期를 넘어야 합니다.

    챗GPT가 觸發한 AI 클라우드 인프라 需要는 向後 數年間 크게 成長할 겁니다. 엄청난 데이터를 貯藏하고 빠르게 處理할 수 있는 이 칩 市場을 主導하고 있는 會社가 바로 엔비디아입니다. 이 市場에 얼마나 빠르게 參與할 수 있느냐가 關鍵입니다. TSMC, 인텔과 競爭해야 하는 쉽지 않은 事業입니다만 파이가 커지는 만큼 三星에도 機會가 있다고 봅니다.”

    HBM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三星보다 技術이 한 수 아래인 하이닉스가 앞선 건 三星으로서는 뼈아픈 일이라고 보입니다.

    “하이닉스가 지난 10餘 年間 設計 能力을 올리고 顧客 中心 經營을 한 成果입니다. 三星의 境遇 電線(戰線)이 넓어서 充分한 人材 投入을 못 했을 可能性도 있고요. 앞으로 두 企業의 熾烈한 競爭은 韓國의 메모리 半導體産業을 더 剛하게 할 겁니다.

    勝敗는 兵家之常事입니다. 市場과 顧客에게 必要한 높은 品質의 製品을 앞서서 供給하는 三星의 力量은 그대로 있다고 봅니다. 工程 技術과 生産性에서 앞서나가는 것이 뒷받침돼야겠지만 새로운 應用에 對한 製品 技術開發만이 未來 生存에 가장 重要합니다. D램 大恐慌 때 敎訓을 參考 삼아 힘들어도 未來의 機會 産業에는 充分히 投資해야 합니다.”


    2월 21일 인텔은 2027년 ‘꿈의 공정’으로 불리는 1.4나노 초미세 공정에서 칩을 생산하겠다고 밝혀 시장에 충격을 주었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클라라의 인텔 본사. [동아DB]

    2月 21日 인텔은 2027年 ‘꿈의 公正’으로 불리는 1.4나노 超微細 工程에서 칩을 生産하겠다고 밝혀 市場에 衝擊을 주었다. 寫眞은 美國 캘리포니아州 산타 클라라의 인텔 本社. [東亞DB]

    인텔의 파운드리 進出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美國 政府는 尖端 半導體의 設計뿐 아니라 製造까지 半導體 技術에 對한 獨占的 位相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인텔을 앞세우고 TSMC와 三星에 補助金까지 주어가며 尖端 파운드리 工場을 自國 內에 세우게 하는 건 더 完全한 技術 파워를 갖겠다는 거죠. 設計는 勿論 自國 內에서 尖端 半導體를 만들면 安保에서부터 供給網까지 모든 게 便해지지요.

    實際로 美國에는 엔비디아, AMD, 인텔, 퀄컴 等 設計 最强 企業뿐 아니라 製造에 必須 裝備를 供給하는 AMT·LAM·KLA도 있고, 시놉시스·케이던스 等 世界 最高 EDA(半導體 設計 必須 소프트웨어) 企業이 布陣해 있습니다. 中國의 半導體 굴기를 效果的으로 늦추고 있을 程度로 世界 半導體 産業을 콘트롤하는 實際的인 힘을 가지고 있고요.

    하지만 尖端 半導體 製造는 지난 40餘 年의 競爭 結果 韓國과 臺灣이 勝者였습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于先 엔지니어가 不足하고 人件費 等이 높기 때문에 原價가 最少 30% 비쌉니다. 저는 美國이 自體 安保에 必要한 最小限의 量만 國內에서 할 것으로 봅니다. 지나 러몬도 美國 商務部 長官도 20%를 이야기했잖아요.

    1980年代 末 半(反)덤핑 이슈 때 美國이 自國 內에서 生産한 半導體만 쓸 수 있다고 해서 韓國과 日本 企業들이 메모리 工場을 잇따라 美國에 지은 적이 있어요. 三星 오스틴 工場이 그겁니다. 以後 어떻게 됐나요? 政治的 이슈가 사라지자 다 撤收했죠. 오스틴 工場은 파운드리 工場으로 바뀌었고요. 美國이 韓國과 臺灣을 中國처럼 敵對視하는 狀況이 오지 않는 限 市場은 品質과 價格을 따라 움직입니다. 結局은 競爭力입니다.”

    技術業 本質 깊이 생각할 때

    中國의 未來는 어떻게 보세요.

    “2003年에 中國 스촨性 聖徒科學技術大를 가본 적이 있는데 한 해 入學定員이 1萬 名이라고 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現在 中國이 輩出하는 엔지니어들은 G7, 韓國, 臺灣을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게다가 最上位 人材들이 엔지니어가 됩니다.

    그들이 지난 20餘 年間 技術을 蓄積해 왔기 때문에 中國 製造業은 剛할 수밖에 없습니다. 半導體 裝備같이 技術 蓄積이 長期間 必要한 産業에서는 아직 뒤져 있지만 新再生, 電氣車, 배터리 等 新産業에서는 앞서가고 있습니다.

    中國은 存在 自體가 威脅입니다. 共産黨이라는 政治體制 以前에 人口 14億 明과 巨大한 國土만으로도 G7의 牽制는 避할 수 없을 겁니다. 너무 크고 威脅이 될 수 있는 나라는 存在 自體가 不便하지요. 西區는 自國 産業을 保護하고 中國에 對한 過度한 依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漸漸 더 中國에 對한 技術과 市場 障壁을 높여갈 수밖에 없습니다.

    中國도 이 狀況을 正確하게 理解하고 있기 때문에 長期 眼目으로 基礎技術 自立을 推進하고 있고, 브릭스도 擴大하고, 아프리카에 投資하는 等 市場 擴充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美·中 競爭體制는 길게 갈 것 같습니다. 우리는 美國 中心의 供給網 體制 아래 우리 役割을 擴大하기 위해 尖端産業의 競爭力을 키워가야 합니다. 半導體의 境遇엔 臺灣과 日本을 이길 수 있는 相對的 競爭力이 重要하고요.”

    2023년 12월 28일 저녁 구마모토현 TSMC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 광경. 1년 365일 매일 24시간 공사로 5년 공기를 20개월로 단축했다. [동아DB]

    2023年 12月 28日 저녁 구마모토현 TSMC 半導體 工場 建設 現場 光景. 1年 365日 每日 24時間 公社로 5年 空氣를 20個月로 短縮했다. [東亞DB]

    臺灣은 왜 强한가요.

    “臺灣은 韓國과 같은 時期에 新興工業國으로 成長해 半導體도 거의 같은 時期에 始作했습니다. 三星이 1983年 메모리 半導體에 進出했는데 臺灣은 1987年에 TSMC를 公企業으로 創立했습니다.

    三星이 日本을 넘어 메모리 世界 1位에 오른 1990年代에 TSMC는 파운드리 産業을 開拓하고 리딩 企業이 됐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1980年代에서 1990年代 中盤까지는 PC가 半導體産業의 가장 큰 需要處였는데 이 PC의 CPU를 인텔이 掌握했지요. 設計하고 製造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파운드리 市場이 크지 않았죠.

    그러나 1990年代 들어 디지털 技術革命으로 通信, 컨슈머에서 多樣한 半導體 需要가 誕生하고 製造技術 難度度 높아지고 投資 規模도 커지면서 設計 會社가 製造까지 하기가 어려워졌어요. 製造를 擔當하는 파운드리 産業이 이때부터 急成長했고, TSMC가 斷然 이 分野 先頭가 됐지요.

    TSMC가 크는 過程에서 臺灣系 美國人들이 主導하는 美國 內 팹리스(製造는 안 하고 設計만 하는 會社)들의 成長도 도움이 됐습니다. 엔비디아, 마블, 브로드컴, 最近 AMD까지 美國 팹리스 企業에 臺灣系 高位 任員이 많다는 걸 注目해 봐야 합니다.

    이건 韓國과 臺灣의 電子産業 成長 過程의 差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韓國은 1980年代부터 家電에서 電子産業이 始作돼 携帶폰, TV等으로 發展해 日本과 오랫동안 競爭해 온 反面 臺灣 電子産業은 PC 마더보드(基本 回路와 部品을 담고 있는 基板)에서 始作해 美國 컴퓨팅 産業界와 오랫동안 同伴 發展해 왔습니다. 그 過程에서 臺灣系 優秀 人力이 美國 半導體 企業으로 건너가 오늘날 여러 企業의 리딩 그룹이 된 겁니다.

    過去 臺灣은 韓國과 같이 多邊化 돼 있지 않고 半導體에 對한 集中力이 너무 剛한 것이 弱點으로 보였는데 AI時代에 들어서는 反對로 이게 큰 强點이 되고 있습니다. TSMC의 競爭力은 오랫동안 構築돼 왔을 뿐만 아니라 臺灣 政府와 社會의 强力한 支援을 받고 있지요.

    韓國은 메모리 半導體의 最强國인 것과 同時에 스마트폰, TV 等 電子産業, 여기에 自動車도 갖고 있기 때문에 온 디바이스 AI 時代를 主導할 力量이 있습니다. 파운드리 産業도 이들과 함께 同伴成長할 수도 있고요. 結局 모든 건 競爭力이고, 이는 거듭 말하지만 얼마나 優秀한 技術 人材를 키울 수 있느냐의 問題로 歸結됩니다.”

    ‘워라밸’을 重視하는 新世代 때문에 새로운 리더십이 나와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모든 걸 일의 本質에 焦點을 맞춰야 한다고 봐요. 技術 競爭의 本質은 時代를 不問하고 똑같아요. 構成員 하나하나가 일을 잘하게 모티베이션을 주는 게 重要하죠. 無作定 일을 더 하라는 게 아니라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重要한 役割을 주면 없던 힘도 생깁니다. 有能한 사람들에게 役割을 주고 補償을 주어야지 일하기 싫다는 사람까지 다 끌고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世界 最高 企業들이 角逐하는 尖端産業에서 烏合之卒로는 안 됩니다. 實力으로 競爭하게 해야죠. 그게 技術業의 特性이자 宿命입니다. 技術業의 本質에 對해 다시 한番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尖端産業의 尖兵들을 應援해야 합니다.

    李健熙 會長은 한켠에서 危機意識을 불어넣고 다른 한켠에선 補償을 해줬습니다. 잘한 놈(?)들은 確實하게 챙겨주라고 했어요. 戰爭에서 이기면 戰利品을 確實히 챙겨준 거죠. 그래서 저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은 醫師보다 더 많이 벌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補償 體系도 달라져야 합니다. 只今 젊은 사람들은 10年 程度는 기다릴 수 있지만 任員, 社長 될 때까지 20年 30年은 못 기다립니다. 上位 10% 20% 頂上級 엔지니어들한테도 그 能力과 寄與에 걸맞은 報償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點에서 人事가 無知無知하게 重要합니다. 옛날엔 昇進이라는 形態로 한 階段 올라가면 俸給이 두 倍씩 뛰게 補償을 昇進과 聯動했습니다. 昇進하면 年俸도 올라가는 式으로요. 하지만 只今은 昇進만 갖고는 올라가는 데 限界가 있습니다. ‘자리’란 것이 적으니까요. 職位가 높은 사람이 많은 役割을 하는 건 맞지만 너무 上層部에만 몰아주는 傾向이 있어요.

    只今은 ‘자리’나 ‘昇進’이라는 單純한 補償 體系만 갖고는 어렵습니다. 技術的 能力, 問題 解決 能力을 重視하는 새로운 補償 시스템을 매우 精巧하게 짜야 합니다. 宏壯히 어려운 일이지만 해야 하는 일입니다. 李健熙 會長 時代와는 너무 다릅니다. 只今까지 해온 걸 잘 지키면서 새롭게 擴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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