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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5 創業’ 이끄는 韓華 金東官, 韓華오션 다음 引受合倂은?|신동아

‘第5 創業’ 이끄는 韓華 金東官, 韓華오션 다음 引受合倂은?

[In-Depth Story] “잘 키운 M&A 하나, 熱 會社 안 부럽다” 戰略

  •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代表

    入力 2024-03-2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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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東官 經營 成果 ‘테스트베드’, 太陽光

    • 第1 創業 = 火藥, 第2 創業= 化學, 第3 創業 = 流通·레저

    • 第4 創業 對三星 빅딜, 金東官 비전에 힘 싣기

    • 第5 創業 韓華오션, 韓國판 ‘록히드 마틴’ 志向

    • 引受合倂 → 內實化 → 追加 引受合倂 戰略… 다음은 KAI?

    지난해 9월 5일 폴란드에서 열린 국제방위산업전시회에서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한화 전시장을 방문한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에게 한화오션 잠수함을 설명하고 있다. [한화오션]

    지난해 9月 5日 폴란드에서 열린 國際防衛産業展示會에서 金東官 한화그룹 副會長이 한화 展示場을 訪問한 안제이 두다 폴란드 大統領에게 韓華오션 潛水艦을 說明하고 있다. [韓華오션]

    金東官 한화그룹 副會長은 지난해 4月부터 最近까지 美國의 재생에너지 分野 專門 投資會社 샌드브룩캐피털의 顧問으로 活動했다. 샌드브룩캐피털은 2021年에 設立된 再生에너지 關聯 專門 投資會社다. 홈페이지에는 ‘글로벌 企業 9곳에 40億 달러를 投資한 會社’로 紹介돼 있다. 金 副會長이 이 會社의 顧問으로 活動한 理由로는 現地 再生에너지 産業 動向을 把握하고, 네트워크 構築에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으로 分析된다. 太陽光 事業으로 始作한 金東官 副會長의 再生에너지 事業에 對한 意志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皇太子 金東官 그룹 비전 ‘그린 事業’

    한화그룹은 2010年代 들어 太陽光에 本格的으로 힘을 실었다. 金 副會長은 2010年 韓華그룹 會長室로 入社한 뒤 이듬해 韓華솔라원 企劃室長으로 昇進, 太陽光 事業에 발을 들였다. 當時 한화그룹은 막 太陽光에 進出한 次였다. 그해 世界 4位 太陽光 모듈 業體인 中國 솔라펀파워를 引受했고, 2012年엔 業況 沈滯에 破産한 獨逸 太陽光셀 業體 큐셀을 555億 원에 사들였다. 同時에 큐셀이 保有한 獨逸과 말레이시아의 셀·모듈 生産 工場을 손에 넣게 된다. 또 큐셀의 海外 營業法人들도 引受하면서 本格的인 事業 構造를 갖추게 된다. 韓華큐셀은 2011年 以來 赤字를 이어오다 2015年 처음으로 黑字 轉換했다. 2016年엔 海外 太陽光 需要 急增으로 最大 成果를 냈다. 그러나 2017年 主要 太陽光 業體들의 設備 增設로 供給過剩이 이어져 收益性이 急落했다.

    不安 要素에도 不拘하고 한화그룹은 太陽光에 힘을 더 실었다. 한화그룹은 2018年 8月 “2022年까지 主要 事業에 22兆 원을 投資하겠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9兆 원을 太陽光 事業에 投入한다. 또 美國에선 最大 太陽光 모듈 工場 建設에 突入했다. 海外 事業도 積極的으로 擴張하고 있다. 한화에너지는 2018年 10月 베트남에 太陽光 事業을 맡을 支社를 設立했다. 太陽光 事業은 金東官 副會長의 經營 能力 評價를 위한 ‘테스트베드’이자 經營 授業의 試金石이었다. 커리어 大部分을 太陽光에서 쌓았고, 後繼者답게 그룹의 全幅的 支持도 받았다. 달리 보면 그룹이 太陽光 事業 擴張에 速度를 내는 만큼 金 副會長도 이른 時期에 可視的 成果를 내야 했다.

    韓華그룹 全體 賣出 가운데 太陽光 事業이 차지하는 比重은 2015年 8.27%에서 2017年 6.8%로 줄어들었다가 2019年엔 12.25%로 올랐다. 그동안 한화그룹의 主要 事業群으로 꼽히던 火藥製造業 賣出 比重이 2019年 末 基準 14.5%라는 點을 勘案하면 太陽光 事業의 成長勢가 얼마나 가파른지 알 수 있다.

    韓華솔루션은 2020年 最高의 한 해를 보냈다. 2019年 1月 한화케미칼과 韓華큐셀앤드尖端素材가 합쳐 出帆하면서 太陽光 事業의 賣出 比重이 빠르게 올라가 韓華그룹 全體 賣出의 30%에 肉薄하게 됐다. 韓華솔루션의 賣出에서 太陽光이 차지하는 賣出도 壓倒的으로 上昇하는 趨勢다. ㈜한화의 지난해 3分期 報告書에 따르면 太陽光 事業 賣出은 그룹 全體의 17.65%에 이르렀다. 全體 賣出에서 차지하는 比重은 金融業에 이어 두 番째다.



    올해는 美國 조지아州 카터스빌에 設立하고 있는 太陽光 모듈 工場을 完工할 豫定이다. 完工 時 韓華솔루션의 모듈 生産能力은 現在 演算 5.1기가와트(GW)에서 8.4GW까지 擴大된다. 아울러 잉곳·웨이퍼까지 아우르는 밸류체인을 完成해 垂直系列化가 이뤄지게 된다.

    太陽光을 包含해 新재생에너지, 나아가 ‘그린 事業’에 對한 意志도 明確하다. 最近 金東官 副會長은 다보스포럼(WEF) 年次總會 세션 ‘世界 最初 脫化石燃料 船舶’에서 한화의 海洋 脫炭素 비전과 그린에너지에 對한 向後 計劃을 밝혔다. 最近 引受를 마무리한 韓華오션과 金 副會長의 新재생에너지 비전을 椄木한 것으로 判斷된다.

    引受合倂으로 始作된 한화史

    한화그룹은 火藥을 基盤으로 成長했다. 그런 企業이 어쩌다 防産에 化學, 流通, 에너지를 넘어 宇宙로까지 事業을 넓히게 됐을까. 한화그룹의 始作과 成長은 企業 引受合倂의 歷史와 櫃를 같이한다. 創業主 김종희 會長은 1942年 朝鮮火藥公判에 入社했다. 當時는 日本이 太平洋戰爭을 치르고 있던 時節이기 때문에 火藥의 需要가 크게 늘던 때다.

    國內 唯一의 火藥 販賣 獨占 業體이던 朝鮮火藥公判에서 김종희 會長은 最初의 韓國人 管理社員으로 일하던 中 光復을 맞이한다. 美軍政이 日本人 會社를 赤山 不下하면서 當時 官吏社員이던 김종희 會長이 朝鮮火藥公判의 支配人으로 經營權을 일임받았다. 이곳에서 最高經營者 자리에 오른 김종희 會長은 後날 會社를 落札받았다. 企業引受가 곧 한화그룹의 始作인 셈이다.

    6·25戰爭이 벌어지자 그는 1952年 工場을 釜山으로 옮기고 ‘한국화약株式會社’를 創立했다. 戰爭 中 火藥이 多量 必要했기에 한국화약의 規模는 漸漸 커졌다. 1955年엔 仁川火藥工場을 保守·新築해 本格的인 和約 國産化의 기틀을 다졌고, 마침내 國內 最初의 다이너마이트 生産에 成功해 ‘韓國의 노벨’ ‘다이너마이트 金’으로 불리기도 했다. 創業 以後 1956年 朝鮮火藥公判과 朝鮮維持를 引受한 것이 引受合倂의 始初다. 1959年 國內 화약류의 完全 國産化를 이뤄내는 等 火藥 産業이 漸次 자리를 잡자 다음 引受 候補를 物色했다.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 [동아DB]

    김종희 한화그룹 創業主. [東亞DB]

    1961年 8月 김종희 會長은 한국화약의 聯關 産業 進出을 推進할 目的으로 本社에 企劃室을 設置했다. 當時로선 破格的 事件이었다. 韓國銀行 營業部에서 10餘 年間 勤務한 권오균을 스카우트하는 等 有能한 經歷 社員들을 特採했다. 企劃室에선 火藥을 中心으로 하는 軍需産業 分野와 함께 이산화티탄을 包含한 精密化學 分野의 事業性을 廣範圍하게 檢討했다.

    1964年엔 베어링 製造社 新韓베어링을 引受했다. 1960年代는 國內에 引受合倂(M&A)이라는 槪念 自體가 없을 때였다. 한화는 新韓베어링 引受 後 外國 會社들과 技術提携를 통해 베어링 國內 生産에 成功했다. 部品 供給을 大部分 輸入에 依存하던 國內 製造業體들이 國産 베어링을 使用하게 되면서 部品 國産化의 길을 열었다. 火藥과 베어링을 아무런 關係가 없는, 생뚱맞은 業種이라 여길 수 있지만 當時 베어링은 軍需物資였다. 新韓베어링은 元來 日本의 3代 베어링 메이커 가운데 하나인 고요베어링이 1937年 仁川에 軍需用 베어링을 生産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1945年 光復 後 陸軍 조병창이 管理해 오던 것을 유병선이 1953年 新韓베어링工業 名義로 拂下받아 引受하고, 各種 베어링 講究 및 其他 機械附屬品을 生産 販賣하다가 1958年 ICA 資金 20萬 달러를 들여 西獨에서 最新 機械까지 導入하는 等 意欲的으로 生産施設을 大幅 擴充해 온, 우리나라 唯一의 베어링 工場이기도 하다. 國産 베어링의 品質이 多少 좋아졌다곤 하지만 軍部隊에서 流出되는 外製 베어링이 市場에 汎濫해 販賣 戰略上 到底히 이겨낼 方法이 없었다. 結局 新韓베어링은 破産 直前에 이르렀고, 한화에 引受된 것이다. 韓華그룹으로선 火藥 以外 業種으로 첫 進出이었다. 不渡 直前 新韓베어링을 다시 健實한 企業으로 되살린 經驗이 한화그룹이 企業의 引受合倂을 持續할 수 있는 契機가 됐을 것이다.

    以後엔 1978年 金屬 工作機械 綜合生産業體로 指定된 後 1980年 韓國精工을 合倂해 1982年에 ‘韓國綜合機械’로 改稱했다. 1986~1987年까지 美國 포드와 비커스, 日本 NSK 等과 合作해 韓國自動車部品·韓國비커스·韓國精密 等을 各各 設立했고, 1993年엔 韓國비커스를 合倂해 1994年 ‘한화기계’로 商號를 變更한 後 삼미그룹으로부터 삼미정功을 引受해 이듬해에 合倂했다. ㈜한화에 合倂과 분사를 反復하다 2018年 工作機械 및 航空事業 營業을 各各 讓渡한 뒤 2020年 韓華精密機械로부터 로봇事業 營業을 揚水했으며, 2022年 7月 모멘텀部門으로 部門名을 變更했다.

    김종희 會長은 美國에서 火藥으로 始作해서 各種 化學藥品과 染料·窒素·메탄올·高級 알코올·合成고무 等을 만들면서 나일론을 發明하고, 現在 原子彈과 水素彈 硏究 製造에도 參與하고 있는 듀폰(Dupont)을 보고 온 뒤 1965年 韓國化成功業(現 한화케미칼 및 한화 L&C)을 設立, 플라스틱 産業을 始作하면서 石油化學産業에 進出한다. 한국화약 貿易 部署에서 取扱해 온 貿易·消費財·火藥 等 業務는 1966年 太平物産(現 ㈜한화/貿易)으로 系列 分離하고, 1972年 韓國프라스틱工業 引受合倂을 통해 石油化學産業을 擴張했다.

    火藥 以外 産業 進出은 繼續해서 이어졌다. 1973年에는 動員工業을 引受했으며 太平開發(現 韓華호텔&리조트)을 設立해 플라자호텔을 開館 運營했다. 1974年 유니온捕吏마(現 韓華컴파운드)를 設立했고, 1976年에는 聖徒證券(現 韓華證權)을 引受했다.

    29歲 會長 就任 金昇淵 “더 攻擊的으로”

    1981년 8월 1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취임식. [한화그룹]

    1981年 8月 1日 金昇淵 韓華그룹 會長 就任式. [한화그룹]

    火藥 産業이 繁昌하던 1977年 11月 11日 大型 事故가 터진다. 광주역으로 가던 한국화약의 貨物列車가 다이너마이트와 電氣雷管 等 爆發物 40t을 싣고 이리역(現 益山驛)에서 停車하던 中 暴發한 것이다. 이 事故로 驛에서 勤務하던 鐵道 公務員 16名을 包含해 59名이 死亡했고, 1343名이 重傷 및 輕傷을 입었다. 光復 以後 가장 큰 規模의 事故였다. 金昇淵 會長은 ‘이리역 爆發事故’와 함께 經營에 投入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김종희 創業主가 幽明을 달리하면서 젊은 나이에 會長職에 앉는다. 1981年 8月 1日, 그의 나이 29歲 때다.

    金昇淵 會長은 就任 다음 해부터 引受合倂을 통해 事業 多角化를 推進한다. 化學産業의 垂直系列化를 위해 1982年 ‘한양화학’과 ‘韓國다우케미칼’을 引受한다. 漢陽化學은 69年 8月 美國 다우케미컬과 한국종합화학이 50對 50으로 投資, 設立한 合作會社다. 蔚山에 工場을 두고 폴리염화비닐(PVC)의 原料 비닐클로라이드모노머(VCM)와 폴리에틸렌(PE)을 生産했다. 1970年代 末 불어닥친 ‘第2次 오일쇼크’로 石油化學 景氣가 크게 萎縮되면서 經營 狀態가 나빠졌다.

    다우케미컬은 한양화학을 賣却하기로 決定하고 引受者를 찾았지만 年間 赤字 規模가 커서 買收者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當時 漢陽化學과 韓國다우케미칼은 各各 75億 원, 430億 원의 赤字를 내고 있었다. 石油化學産業에 對한 展望이 매우 不透明한 時節이었다. 글로벌 企業인 다우케미컬이 撤收한다는 것 自體가 世界經濟가 不況에 빠졌다는 信號와도 같았다. 日本 石油化學까지 辭讓化하고 있다는 展望이 나오며 石油化學産業 自體가 끝났다는 悲觀論도 나왔다.

    이때 金昇淵 會長은 PVC를 生産하는 韓華가 한양화학을 引受하면 原料確保가 容易해져 價格競爭力이 높아질 것이라고 判斷했다. 韓華 幹部들은 每年 數百億 원 赤字를 내는 漢陽化學 引受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決死反對하고 나섰다. 1980年代 初盤은 第2次 石油波動을 겪으며 國內 石油化學 景氣가 暗鬱한 狀況이었다. 이때 巨大 裝置産業에 本格 進出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反轉이 일어났다. 全 世界 石油化學 景氣가 살아나면서 當時 累積赤字가 75億 원이던 會社가 1年 만에 75億 원 黑字를 記錄한 것이다. 이 두 企業을 引受한 것은 한화그룹의 ‘점프業’에 重要한 契機가 됐다. 1982年 以前까지 한화는 火藥業體를 根幹으로 몇몇 製造業體를 거느린 中堅企業이었지만 單숨에 國內 10大 그룹에 編入됐다.

    漢陽化學은 한화그룹이 에너지·石油化學 事業으로 뻗어나가는 嚆矢가 됐으며, 이를 通해 한화그룹은 火藥事業 一邊倒에서 重化學을 兼備하며 事業多角化를 일궈내는 데 成功한다. 金昇淵 會長은 漢陽化學 引受 後 不過 1年 만에 黑字 構造로 돌려놓으며 業界의 注目을 받는다. 金昇淵 會長이 30代 初盤에 거둔 이 成功 經驗은 以後 한화그룹의 企業 引受合倂에 動力을 더했을 것이다.

    B2B → B2C 事業 多角化

    한양화학의 經營 正常化에 成功한 한화그룹은 1980年代 後半 M&A를 통해 流通과 레저라는 ‘完全히 새로운’ 分野에 進出했다. 漢陽化學 引受로 1980年代 初盤까지 한화그룹의 事業 構造는 重化學産業에 쏠렸고, 이로 인해 消費者와 直接 만나는 B2C(Business to Customer) 事業에 對한 必要性이 論議됐다.

    1985年 한화그룹은 ‘名聲콘도’를 運營하던 정아그룹(現 韓華호텔&리조트)을 引受했다. 정아그룹은 韓國國土開發로 이름을 變更한 後 콘도미니엄인 韓華리조트를 全國 12個所로 擴大했다. 또 大型 물놀이 施設인 ‘워터彼我’, 드라마 테마파크인 ‘氏네라마’를 設立하는 等 한곳에서 여러 가지를 즐길 수 있는 ‘펀(fun) 리조트’ 槪念을 導入했다.

    1986年엔 ‘漢陽슈퍼’와 ‘漢陽쇼핑센터’를 運營하던 한양유통 引受를 통해 流通産業에 進出했다. 한화그룹이 한양유통을 引受할 때만 해도 流通業界의 强者가 되리라 豫想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화그룹은 한양유통의 이름을 한화流通(現 갤러리아百貨店)으로 바꾸고 後發走者로서의 限界를 克服하기 위해 ‘名品(名品) 百貨店’이라는 새 槪念을 導入했다. 海外에서만 살 수 있던 有名 브랜드를 들여와 압구정동에서 팔면 勝算이 있다고 判斷하고 ‘名品館’이라는 이름을 最初로 使用한 것이다.

    金昇淵 會長 就任 以後 한화그룹은 10年 以上 旣存 企業 및 引受 企業의 內實을 다지며 順航을 이어갔다. 이 期間이 韓華그룹 歷史에서 唯一하게 10年 以上 企業 引受合倂이 없던 時期이기도 하다. 하지만 1997年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外換危機를 한화도 避해 갈 수 없었다. 金昇淵 會長은 强度 높은 構造調整으로 37個이던 系列社 數를 17個까지 줄였다.

    金昇淵 會長은 그룹의 流動性 危機가 어느 程度 解決되자 새 成長動力을 찾기 始作했다. 先制的 構造調整으로 餘裕 資金이 1兆 원假量 되던 때였다. 그가 注目한 事業 領域은 金融業이다. 첫 番째 引受한 곳은 대한생명(現 韓火生命). 當時 대한생명은 大株主의 專橫과 系列社에 對한 不實 貸出로 金融監督院의 特別 監査를 받고 있었다. 累積 缺損金이 3兆 원에 達했고, 核心인 營業 組織은 崩壞 直前이었다.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引受는 2002年 이뤄졌다. 過程은 쉽지 않았고 後遺症도 解決해야 했다.

    대한생명은 1946年 設立된 國內 最初의 生命保險社다. 1990年代까지 國內 2位 生保社 位置를 지켰지만 外換危機의 波高를 넘지 못하고 1999年 不實 金融機關으로 指定됐다. 예금보험공사는 2年 동안 公的資金 4兆 원을 投入했고, 2002年 12月 12日 대한생명은 한화그룹과 맥쿼리生命 等이 聯合한 한화컨소시엄에 넘어갔다.

    인수의 기쁨도 暫時, 한화그룹은 6年間 裏面契約 等 ‘引受 資格 論難’에 시달려야 했다. 當時 한화컨소시엄은 8236億 원에 대한생명을 引受하고, 1年 後인 2003年 12月 맥쿼리生命의 持分 565億 원어치를 引受했다. 이 過程에서 韓華가 ‘保險社가 컨소시엄에 參與해야 한다’는 投資者 資格을 얻기 위해 맥쿼리에 引受資金을 빌려주고 虛僞로 컨소시엄에 參與하게 했다는 疑惑이 提起됐다. 예금보험공사는 한화를 檢察에 起訴했고, 한화는 1審·2審·大法院에서 모두 無罪를 宣告받았다. 그러자 예금보험공사는 2006年 7月 國際商社仲裁委員會에 仲裁를 申請했다. 仲裁가 法院 判決과 똑같은 效力을 갖는 만큼 이는 韓華그룹에 큰 負擔이 됐다. 結局 仲裁委度 한화의 손을 들어주며 비로소 한화는 그룹 運營과 向後 M&A에서 모든 負擔을 덜 수 있었다.

    金昇淵 會長은 대한생명 引受와 同時에 M&A 後遺症을 없애고, 組織과 經營을 안정시키는 데 注力했다. 1982年 漢陽化學 引受 때의 成功 體驗을 다시 始作한 것이다. 當時 맡고 있던 그룹 內 系列社 代表理事職을 모두 내려놓고, 無報酬로 대한생명 代表理事에만 2年 동안 專念했다.

    한화그룹의 引受合倂 歷史를 보면 大規模 引受合倂 以後 5年 程度 引受企業 安定化 作業을 하며 다지는 期間이 있다. 이 期間이 지난 後엔 同種 業界 企業을 追加로 引受하면서 競爭力을 높여가는 戰略으로 事業을 擴張했다. 新韓베어링, 漢陽化學 引受 때 그러했듯 대한생명 引受 以後에도 2008年 제일화재, 2011年 푸르덴셜證券 等 引受를 이어가며 金融業 部門을 强化했다.

    ‘第4의 創業’ 對三星 빅딜

    引受合倂 後 安定化 및 內實 다지기, 事業 擴張의 成功 體驗은 2014年 삼성그룹과 斷行한 ‘빅딜’에서도 엿볼 수 있다. 金昇淵 會長은 2014年 11月 삼성테크윈(現 韓華에어로스페이스) 等 三星의 防産·化學 4個 系列社를 約 2兆 원에 引受하며 그룹 核心 事業의 競爭力을 强化했다. 한화와 三星 間 빅딜은 過去 外換危機 時節과 달리 民間이 主導한 自律型 事業 調整이라는 點에서 注目을 받았다. 2014年 한화케미칼이 三星油畫를 引受할 當時 樂觀的 展望보다 悲觀的 展望이 더 많았다. 中國과 中東 業體의 負傷으로 韓國 石油化學産業이 最惡의 狀況을 겪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三星그룹 油畫 部門 引受엔 規模의 經濟, 시너지에 集中한 戰略이 奏效했다. 한화케미칼이 삼성종합화학과 三星토탈을 引受해 한화綜合化學과 韓火토탈로 出帆하면서 한화그룹은 石油化學 基礎 原料인 에틸렌 生産 規模가 世界 9位 水準인 300萬t까지 늘어났다. 이에 따라 原料인 나프타 大量 共同購買가 可能해져 原價가 節減됐다.

    引受한 지 1年 만에 韓火토탈이 創社 以來 最大 實績을 記錄하면서 이 M&A도 反戰의 成功을 거두게 된다. 1982年 漢陽化學 引受 成功 體驗을 다시 거둔 것이다. 當時 韓華 內에서도 三星과의 빅딜을 두고 ‘第4의 創業’이란 얘기가 나왔다. 1952年 한국화약으로 出發해 1980年代 初 漢陽化學과 京仁에너지를 引受하며 化學·에너지로 領域을 넓혔고, 2002年엔 대한생명을 사들여 金融業에 進出한 데 이은 네 番째 勝負手라는 點에서다.

    한화그룹의 이러한 引受 成功의 核心엔 事業戰略도 있었지만 PMI(Post Merger Integration·引受合倂 後 統合하는 企業合倂 方法)가 奏效했다. 一般的으로 企業을 引受하면 引受 企業 側에서 被引受 企業에 合倂 過程을 위한 人力을 보내는데, 한화그룹은 最小 人力만을 보내는 것을 原則으로 했다. 被引受 企業 職員들에게 占領軍처럼 보여 拒否感을 느끼도록 하는 것을 最大限 줄이면서 旣存 經營시스템을 維持하기 위함이다.

    金昇淵 會長은 빅딜을 마무리한 뒤에도 引受한 系列社들의 力量을 尊重해 4個社 經營陣을 包含한 大部分의 任職員을 重用했다. 4個 系列社의 完全한 獨立 經營을 保障하는 것은 勿論 任職員의 停年, 給與, 福祉 等 各種 處遇와 勤勞 條件도 維持했다. 이러한 部分에 對해 金昇淵 會長의 信用과 義理라고 解釋하는 곳도 있지만 이는 PMI 觀點에서 매우 戰略的인 措置다.

    以前에도 그러했듯이 빅딜로 國內 最大 防産業體가 된 한화그룹은 以後 다시 內實 다지기를 통해 各 系列社의 經營 效率性을 끌어올리는 데 注力한다. 連이은 物的分割로 事業 部門別 專門性을 살린 獨立 法人들을 設立했고, 重複 事業은 果敢히 합쳤다. 한화그룹은 三星에서 引受한 삼성테크윈을 一連의 過程을 거쳐 韓華에어로스페이스(航空엔진, 航空 事業)를 中心으로 그 아래에 韓華디펜스(방산), 韓華시스템(IT·防産), 韓華精密機械(精密·工作 機械), 韓華파워시스템(에너지), 한화테크윈(시큐리티) 等 子會社가 자리하는 事業 構造를 完成했다.

    이러한 흐름은 한화케미칼의 太陽光 企業引受에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한화그룹은 2010年 8月 나스닥에 上場돼 있던 中國 太陽光 業體 솔라펀파워홀딩스를 4300億 원에 引受하면서 太陽光 事業에 뛰어들었다. 2012年에는 獨逸 큐셀을 引受했다.

    太陽光産業은 2010年 글로벌 金融危機로 이미 墜落하고 있었으며 2012年엔 바닥을 알 수 없을 程度로 떨어지는 狀態였다. 2010年 1㎏當 50달러에 去來되던 太陽光 패널 原材料인 폴리실리콘 價格은 2012年 8月 1㎏當 20달러까지 떨어졌다. 中國發 過剩 投資와 全 世界的 太陽光 需要 減少라는 ‘二重苦’ 狀況 탓이다. 이런 最惡 狀況에서 한화케미칼은 큐셀 引受를 決定했다. 當時만 해도 ‘太陽光의 詛呪’에 빠질 것이라는 念慮에도 不拘하고 이것이 結果的으로 卓越한 選擇으로 판가름 나는 데엔 4年이 채 걸리지 않았다.

    引受 2年 後인 2014年 1分期 賣出 4991億 원으로 2013年 1分期(5100億 원) 對備 2%假量 줄었지만 營業利益이 큰 幅으로 改善되면서 太陽光 事業은 그룹의 ‘미운 오리새끼’라는 汚名을 벗었다. 2015年 韓華큐셀은 賣出 17億9950萬 달러, 營業利益 7660萬 달러, 純利益 4400萬 달러를 記錄했다. 工巧롭게도 2012年 金東官 副會長의 나이는 29歲로 아버지인 金昇淵 會長이 會長으로 就任할 때의 나이와 같았다.

    한화그룹은 이러한 빅딜과 引受 以後 2020年 7月 美國의 젤리와 시마론을 引受할 때 까지 별다른 引受 없이 內實을 다진다. 特히 太陽光 事業에선 構造調整으로 內實을 다졌다. 構造調整 以後 여러 番의 事業 構造 改編을 통해 韓華솔루션(한화케미칼-韓華큐셀앤드 尖端素材 合倂法人) 傘下로 編入된 太陽光 事業은 다시 浮沈을 겪었다. 2020年 4分期 新再生에너지 部門은 赤字로 轉換했다. 그래도 그룹 次元의 支援은 繼續됐다. 韓華솔루션은 有償增資로 韓華큐셀에 資金을 支援했다. 結局 2022年부터 다시 太陽光 事業은 黑字로 轉換했고, 이젠 世界에서 認定받는 太陽光 企業으로 成長했다. 過去에도 그랬듯 이番에도 內實을 다져 黑字로 轉換되면 다시 事業의 競爭力을 높이기 위한 企業 引受合倂을 進行했다. 2021年 8月 美國의 폴리실리콘 企業人 REC실리콘에 持分 投資 後 이듬해인 2022年 3月엔 殘餘 持分을 引受했다. 典型的 韓華그룹式 引受合倂과 內實 다지기 後 事業 競爭力 擴大를 위한 行步다.

    2014年 以後 10餘 年間 큰 引受를 斷行하지 않던 한화그룹은 지난해 大宇造船海洋(現 韓華오션)을 引受하면서 또 한 番의 빅딜을 성사시킨다. 韓華그룹 ‘第5의 創業’을 알리는 信號彈이다. 2008年에도 大宇造船海洋 引受를 試圖했다가 不發된 한화그룹이 結局 대우조선해양을 품은 것이다. 事實 한화는 大宇造船海洋 引受 以前인 2022年에 이미 그룹 全體의 事業 構造 改編을 통해 防衛産業에 對한 그림을 그려놓은 狀態였다.

    第5 創業 맞이한 金東官, 新成長動力 어디에서 찾을까

    한화는 그룹 內 3個 會社로 分散돼 있던 防産 事業을 한데 모아 ‘韓國型 록히드 마틴’李 되겠다는 抱負를 밝혔다. 2030年까지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글로벌 톱10 防産 企業으로 키우겠다는 비전이다. 潛水艦, 軍艦 等 特殊船 事業을 하는 대우조선해양을 引受함으로써 陸海共을 아우르는 綜合 防産 企業으로 거듭나기 위한 발板을 마련한 것이다.

    대우조선해양을 引受한 한화그룹은 移轉 引受合倂 때와 비슷한 行步를 보일 可能性이 크다. 于先 PMI를 통해 被引受 企業에 拒否感을 줄이면서 內實化를 進行할 것이다. 內實化가 마무리되는 時點(5年 以內)에 防衛産業 强化를 爲한 追加 引受를 進行할 可能性이 크다. 가장 有力한 候補로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다. 政府가 再賣却 作業에 다시 나선다면 한화그룹이 引受할 것이 有力하다고 展望된다. KAI 最大株主는 韓國輸出入銀行(持分率 26.41%)이다. 2012年과 2013年 總 3次例에 걸쳐 KDB산업은행과 크레디트스위스를 賣却 主管社로 選定해 賣却을 試圖했지만 不發된 바 있다.

    大宇造船海洋 引受合倂 以後 成功的으로 事業 實績을 安定化하고 造船 産業 內에서 競爭力을 確保한다면 한화그룹의 核心 力量은 ‘引受合倂 後 성장시킬 수 있는 能力’임이 분명할 것이다. 한화그룹은 1956年 첫 M&A를 始作해 56年 歷史 동안 짧게는 1年, 길게는 5~6年마다 굵직한 M&A를 持續해 왔다. 10大 그룹 內에서 M&A 分野 ‘蓄積된 技術’ 面에선 따라올 그룹이 없다. 또 다른 그룹들과는 달리 旣存 事業과 全혀 聯關도, 經驗도 없는 業種을 다양하게 引受했다. 새로운 成長 動力을 마련한다는 目標가 있지 않다면 不可能했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金東官 한화그룹 副會長은 ㈜한화 傘下에 直屬 M&A 組織을 擴張하기 위해 人力 確保에 나서고 있다. 韓華그룹 內部的으로는 單純 人力 追加 採用으로 認識하고 있지만 IB業界에선 投資 擴大로 받아들이는 雰圍氣다. 한화그룹은 金東官 副會長을 통한 第5의 創業에 突入했다. 분명한 것은 한화그룹의 지난 70年은 企業 引受合倂 → 內實化 → 새 成長 動力 確保의 歷史라는 點이다. 人工知能(AI)이라는 巨大한 技術 變化 時點에 金東官 副會長이 어떤 새로운 成長 動力을 찾을 것인지 歸趨가 注目되는 時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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