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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人權에 寄與한 건 ‘保守’ 페미니즘|新東亞

女性 人權에 寄與한 건 ‘保守’ 페미니즘

[노정태의 뷰파인더] 페미니즘, 進步?左派 專有物 아니었다

  • 노정태 經濟社會硏究院 專門委員·哲學

    jeongtaeroh@ries.or.kr

    入力 2024-04-1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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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代表的 女性主義 誤解 해프닝, ‘이대生 美軍 性上納 論難’

    • 女性主義 = 進步? “No!”

    • 처칠도 落選시킨 서프러제트 運動

    • 韓國 페미니즘-政治權 豫見하는 팽크허스트 母女 葛藤

    • 女性 人權 伸張, 進步?左派에 從屬됐다면 ‘茶盞 속 颱風’으로 끝났을 것

    8일 이재명 대표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게시물. [유튜브]

    8日 李在明 代表가 自身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揭示物. [유튜브]

    “歷史的 眞實에 눈감지 말아야…”

    8日 李在明 더불어民主黨 代表가 本人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內容이다. ‘김준혁 論難의 大反轉! “나의 姨母는 金活蘭의 祭物로 美軍에 바쳐졌다” 證言 터졌다!’라는 題目의 映像에 덧붙인 한 줄 코멘트다.

    京畿 水原丁에 出馬해 이수정 國民의힘 候補를 꺾고 當選한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候補는 過去 한 유튜브 채널에서 “金活蘭 總長이 이화여대 學生들을 美 將校에게 性上納시켰다”고 主張한 바 있다. 5日 이화여대 卒業生과 在學生 700餘 名이 이화여대 앞 大講堂에서 糾彈 大會를 열고 金 當選人의 辭退를 要求하는 等 그 發言은 選擧 막바지에 큰 波長을 몰고 왔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북한이탈주민 김다혜 씨가 9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정 후보 사퇴를 촉구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뉴스1]

    이화여대를 卒業한 北韓離脫住民 김다혜 氏가 9日 서울 汝矣島 더불어民主黨 黨舍 앞에서 김준혁 더불어民主黨 京畿 水原丁 候補 辭退를 促求하며 削髮式을 하고 있다. [뉴스1]

    但只 一介 候補者의 發言 問題를 넘어 本人의 公薦 責任까지 擧論될 수 있는 事案이기 때문이었는지, 이 代表는 한동안 沈默을 지키다 結局 한 마디 덧붙였다. 脈絡上 ‘歷史的 眞實’이 있고, 그것은 金 當選人의 發言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解釋된다.

    問題는 그 發言이 나온 方式이다. 金 當選人의 發言이 政治的으로 큰 論難을 불러일으키자 8日 고은광순 平和어머니會 理事長은 10餘 名 內外의 이화여대 卒業生과 함께 이화여대 正門 앞에서 ‘歷史 앞에 堂堂한 이화를 바라는 梨花人 共同 聲明 發表 記者會見’을 열었는데, 그 內容을 追認하는 듯한 模樣새를 띤 것이다.



    고은 理事長은 “1935年生 姨母가 1948年 무렵 樂浪클럽에서 金活蘭(이화여대 前 總長)에게 걸렸다”고 主張했다. 이화여대 政治外交學課에 入學한 그 해에 金活蘭의 손에 이끌려 樂浪클럽에 갔고, 美軍政 當時의 美軍들에게 性上納을 강요당했다는 趣旨다.

    이화여대 側은 卽刻 反撥했다. 一旦 1935年 出生者가 1948年, 그러니까 13歲에 大學에 入學하는 것은 不可能하다. 게다가 이화여대 政治外交學科는 1950年에 設立됐으며 고은 氏의 姨母 隱藝玉 氏는 1956年 入學해 1961年 卒業했다. 이미 美軍程度 끝나고 樂浪클럽 亦是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진 後다.

    事實關係가 全혀 맞지 않는 主張에 首肯하고 再流布한 負擔을 느꼈기 때문일까. 李在明 代表는 유튜브 揭示物을 곧 削除했지만 이 事件을 單純한 해프닝으로 置簿할 수는 없다. 女性主義를 둘러싼 가장 큰 誤解와 歪曲을 赤裸裸하게 보여주는 事案이기 때문이다.

    女性主義?進步, 본디 同義語 아니었다

    오늘날 女性主義는 進步 運動의 一部로 看做되고 있다. 페미니스트라면 마땅히 進步 政黨을 찍어야 한다거나 保守 政黨 國民의힘을 牽制하는 次元에서라도 민주당을 찍어야 한다는 認識이 一般的이다. 女性主義와 政治的 保守主義는 서로 兩立할 수 없는 뭔가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생각이다. 歷史的 脈絡을 놓고 보면 完全히 뒤집힌 觀點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서프러제트 運動(20世紀 初 英國에서 벌어진 女性 參政權 運動)의 指導者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自敍傳 ‘싸우는 女子가 이긴다’(현실문화 刊)를 통해 女性 參政權 運動이 한창이던 20世紀 初 英國으로 돌아가 보자.

    에멀린 팽크허스트. [동아DB]

    에멀린 팽크허스트. [東亞DB]

    當時엔 英國의 執權黨이며 進步的 性向을 띤 自由黨을 支持하는 女性運動이 主流 女性運動이었다. 反面 只今껏 記憶되고 있는 ‘戰鬪的’ 女性參政權 運動인 서프러제트는 自由黨을 支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女性參政權 運動家들과 葛藤했다.

    主流 運動圈은 女性參政權 運動을 社會 進步라는 ‘代議’의 一部로 봤다. 그러므로 自由黨에 批判的 意見을 낼 수는 있으되 積極的으로 對立할 수 없다는 見解를 지니고 있었다. 反面 서프러제트는 女性參政權을 얻는 것 自體만이 目標였다. 女性參政權을 얻을 수 있다면 그런 變化를 가져오는 것이 自由黨이건 保守黨이건 상관없다고 여겼다.

    1906年 8月 코커머스에서 補闕選擧가 치러지면서 그 差異가 本格的으로 드러나기 始作했다. 自由黨 指導部는 女性社會政治聯合이 自由黨을 支持하는 것을 當然하게 여기고 있었다. 팽크허스트는 當時 狀況을 이렇게 傳한다.

    “自由黨은 女性이 投票權을 或是 얻게 된다 해도 自由黨을 통해야만 하는데, 自由黨을 公公然히 敵으로 돌리는 女性들에게 投票權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냐며 非難했다. 女性 自由黨員이나 合法的 參政權論者들 亦是 이런 賢明한 체하는 論議를 펼쳤다. 그들은 政黨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方式이라고 忠告했다.”(108쪽)

    팽크허스트와 그의 追從勢力인 서프러제트는 同意하지 않았다. 只今껏 벌써 몇 年이나 그런 方式으로 女性參政權 運動을 해왔지만 아무런 成果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當然한 일이기도 했다. 女性參政權 運動을 自由黨이 推進한다 해서 그렇게 投票權을 얻은 女性들이 自由黨 支持 勢力이 될 것이라는 保障은 어디에도 없었다. 自由黨으로서는 女性參政權 運動의 支持만 받고 女性에게 參政權을 주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政略的으로 볼 때 最善이었기 때문이다.

    이 矛盾에서 빠져나가는 方法은 單 하나 뿐. 女性參政權 運動이 自由黨의 一部로 轉落하지 않고 獨自的인 活動 範圍를 얻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마침 補闕選擧가 열리자 팽크허스트는 決斷을 내렸고, 두 番 苦悶하지 않았다. 直接的?公開的?全面的으로 自由黨 落選運動을 벌이기 始作했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들이 ‘투표 없인 세금 없다(No vote, No tax)’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참정권을 요구하고 있다. [세종서적]

    20世紀 初 英國에서 女性들이 ‘投票 없인 稅金 없다(No vote, No tax)’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參政權을 要求하고 있다. [세종서적]

    “우리는 코커머스로 가서 有權者들에게 自由黨이 果然 民主主義의 公約을 지켰는지, 或은 모든 사람들의 權利에 對해 그들이 公言한 信念에 맞게 行動해왔는지에 對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런던과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逮捕 事件에 對해 알렸고, 自由黨 集會에서 發生한 女性에 對한 羞恥스러운 待遇에 對해서도 알렸다. 우리는 投票權에 對한 要求에 非人道的으로 應酬한 政府를 見責해줄 것을 要請했다. 政治家가 알아들을 수 있는 唯一한 叱責은 議會에서 자리를 잃게 하는 것이니, 自由黨 候補를 敗北시켜달라고 付託했다.”107쪽)

    世上은 비웃었다. “그 ‘미친 女子들’의 말을 듣고 票心이 움직일 理 없다”고 斷言했다. 하지만 코커머스 補闕選擧 結果는 世上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1年 前 總選에서 655票 車로 壓勝을 거두었던 選擧區인데, 不過 이듬해 補闕選擧에선 聯合派 候補가 609票 車로 多數를 차지해 議席을 얻었다. 約 1200票가 뒤집어졌고, 世上이 움직이기 始作했다.

    “우리는 選擇해야 했다”

    그렇다고 서프러제트의 鬪爭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本格的 싸움은 이때부터 始作이었다. 1908年 헨리 캠벨-배너먼 驚異 健康上 理由로 辭任하고 애스퀴스가 首相職에 올랐다. 內閣을 새로 꾸리느라 몇 件의 補闕選擧가 더 치러지게 됐다. 當時 英國法에 따르면 새롭게 內閣에 들어가는 議員들은 議員職을 辭退하고 自身의 地域區에서 補闕選擧로 再信任을 치러야 했다.

    落選運動 對象은 財務委員會 委員長職을 맡게 된 윈스턴 처칠. 우리가 아는 그 처칠이다. 保守黨 首相으로서 第2次 世界大戰을 이끌었지만 1908年엔 自由黨 議員이었다. 처칠의 地域區는 맨체스터로 自由黨의 텃밭 가운데 하나였다.

    落選運動은 成功했다. 처칠은 420票 車로 議席을 잃었다. 팽크허스트는 다음과 같이 回想했다.

    “新聞들은 처칠 氏를 패배시킨 것이 서프러제트라는 事實을 認定했고, 런던의 自由黨 支持 新聞인 ‘데일리 뉴스’는 女性들에게 投票權을 附與해서 이 견디기 힘든 狀態를 종식시키라고 黨에 促求했다.”(147쪽)

    落選한 처칠은 自由黨 支持勢가 더 剛한 던디 地域에서 議席을 받았고, 그곳에서 또 한 番 補闕選擧를 치러야 했다. 서프러제트 運動의 쓴맛을 본 自由黨과 처칠은 態度를 바꿨다. 처칠은 던디에서 두 番의 大規模 集會를 열었는데, 그 가운데 두 番째는 오직 女性 支持者들만을 對象으로 했다.

    처칠은 具體的으로 어떤 行動을 할지 公約할 수 없다는 留保 條項을 단 채 “다음 議會에서는 女性의 主張이 이뤄져야 한다. 現 議會에서 參政權이 다뤄질 可能性도 排除하지 않는다”며 政治的 話法을 驅使했다. 代身 勞動者와 極貧者가 많은 地域區를 勘案해 雪糖稅 問題 讓步, 老齡 年金 導入 等 具體的 約束을 했다. 結局 처칠은 前任者보다 2200票나 적은 票를 얻었지만 當選에 成功했다.

    새로 꾸려진 自由黨 政權은 女性參政權을 提供했을까. 그럴 理 없다. 自由黨에게 女性參政權이란 마치 唐나귀를 앞으로 달려가도록 하기 위해 낚싯줄에 매달아 놓은 당근과 다를 바 없었다. 投票權은 없지만 選擧運動에 熱心히 參與하는 女性 參政權 運動家들, 그 外 다양한 女性을 動員하기 위한 허울 좋은 名分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애스퀴스 內閣이 空手票를 뿌렸다는 게 분명해졌다.

    서프러제트는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平和的 大規模 群衆 集會를 열어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集會 側과 ‘런던 타임스’ 等 言論에 따르면 最小 25萬 名 以上의 群衆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애스퀴스 內閣은 變함없었다. 팽크허스트는 當時를 “政府는 女性 參政權을 包含해 修正된 一般的인 改革法案을 언젠가 發議할 作定이라는 宣言에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다고 公式的으로 答辯했다”고 述懷했다.(157쪽)

    自由黨이 이렇게 배짱 戰術을 부린 理由는 簡單하다. 女性運動이 自由黨과 進步 陣營의 ‘집토끼’ 取扱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自由黨으로서는 女性參政權 運動을 벌이는 女性의 政治的 에너지만 必要했지, 保守黨에게 票를 줄 수도 있는 女性들에게 眞짜로 投票權을 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팽크허스트의 說明에 따르면 그렇다. 女性運動은 自由黨과 進步 陣營의 下位 單位, 從屬變數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自由黨 落選運動을 했고 힘을 보여줬음에도 自由黨은 女性을 다시 背信했다. 팽크허스트는 苦惱에 빠졌다. ‘이런 式이라면 언제까지고 平和的이고 合法的 鬪爭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닐까.’

    “이제 우리가 두 가지 選擇 事項 가운데 하나를 擇해야 할 時點이 왔다. 우리는 이제까지 可能한 모든 主張을 다 펼쳤다. 한 가지 選擇은 1880年代 參政權論者들이 大部分 그랬듯 運動을 아예 그만둬버리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政府가 利己心과 固執을 꺾을 때까지, 或은 政府 自體가 무너질 때까지 行動하고 또 行動하는 것이다.”(158쪽)

    母女 사이에서도 엇갈린 女性主義 行路

    暴力的 手段까지 動員하는 女性參政權 運動과 함께 歷史는 더 요동쳤다. 1914年 1次 世界大戰이 勃發했고 유럽은 戰爭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 속에서 팽크허스트는 다시 한 番 政治的 決斷을 내렸다. 첫째, 女性參政權 運動을 暫時 中斷한다. 둘째, 獨逸과의 戰爭에서 英國이 이길 수 있도록 積極 協力한다.

    1917年 갓 共産主義 革命을 거친 러시아는 獨逸과의 戰爭에서 한 발 물러나려 했고, 팽크허스트는 戰爭 參與를 說得하기 위해 民間使節로서 러시아를 訪問했다. 그곳에서 共産主義가 女性의 權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結論에 到達했고, 共産主義와 볼셰비즘에 對한 反感을 품게 되었다.

    이렇듯 戰爭에 積極的으로 參與하고, 周邊人을 督勵하며 英國의 勝利에 寄與한 팽크허스트는 國民的 名士가 됐다. 女性參政權에 友好的 輿論과 政治的 힘을 가진 女性을 더는 無視할 수 없다는 雰圍氣가 擴散됐다. 結局 1918年 英國 政府는 女性參政權을 許容했다. 21歲 以上 男性에게는 普遍的 選擧權을 주면서도 女性에겐 年齡 制限(30歲 以上) 및 다른 資格條件을 附與한 折半의 勝利였지만 그래도 女性이 投票權을 爭取해낸 것이다.

    이 글을 始作하며 우리가 던졌던 質問으로 되돌아가보자. 女性運動은 進步運動의 下位 範疇일까? 階級, 民族解放 等 이른바 ‘더 큰 大義名分’ 乃至는 ‘根本矛盾’이 存在하며 女性의 要求는 根本矛盾 解決을 위해서라면 ‘나중’으로 밀려나도 되는가?

    이러한 見解 或은 世界觀 差異는 하루이틀된 것이 아니다. 女性運動의 草創期라 할 수 있는 100年 前 女性參政權 運動부터 온 것이다. 甚至於 팽크허스트 本人과 그 딸들마저 그 部分에서 見解 差異를 보였고 서로 다른 運動을 始作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長女 크리스타벨은 戰爭에 贊成하는 쪽이었던 反面 次女 실비아와 三女 아델라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실비아와 아델라는 第1次 世界大戰을 帝國들이 벌이는 霸權 싸움으로 봤다. 女性에 對한 抑壓과 搾取는 帝國主義의 植民地 搾取와 別個로 볼 수 없는 問題라고도 여겼다. 그러니 英國 內에서 억압당하는 女性을 위한 女性運動이, 植民地를 搾取하는 帝國人 英國의 勝利를 위해 힘을 보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비아와 아델라는 어머니, 큰언니와 달리 反戰運動과 平和運動을 展開해 나갔다.

    女性人權 더 위한 건 ‘保守主義 페미니즘’

    100年도 더 된 다른 나라의 歷史를 이토록 仔細히 살펴본 理由는 팽크허스트 母女의 葛藤이 오늘날 大韓民國에서 벌어지고 있는 女性運動과 現實 政治의 關係를 豫見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은 理事長을 비롯해 민주당 或은 左派 政黨 支持 性向이 强한 主流 女性運動은 실비아와 아델라 같은 立場이다. 페미니즘의 旗幟를 올리며 女性團體를 運營하지만 女性의 人權만을 對象으로 삼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問題에 더 關心이 많아 보이기도 한다.

    고은 氏가 理事長으로 在職하고 있는 平和어머니回만 해도 그렇다. 平和어머니會는 스스로를 “韓半島 分斷克服을 위한 反戰平和活動과 市民連帶 事業을 합니다”라고 紹介하는 團體다.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反戰平和, 文化行事, 治癒事業, 마을共同體, 기타事業을 하는데, 假令 文化行事는 ‘지北지남(知北知南)을 위한 映畫上映, 招請講演 等 文化行事 事業’을 內容으로 하고 있다. ‘平和’와 ‘어머니’ 가운데 電子에 傍點을 찍고 있다는 印象을 지우기 어렵다.

    고은 氏의 女性主義가 틀렸다거나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問題는 고은 氏가 金活蘭으로 대표되는 ‘保守主義 페미니즘’을 對하는 態度다. 參政權, 敎育權, 其他等等 女性人權을 위한 鬪爭의 歷史를 놓고 볼 때, 더 큰 寄與를 한 쪽은 아무래도 保守主義 女性運動일 수밖에 없다.

    舊韓末 宣敎師들이 女學生들을 가르치면서 始作된 韓半島의 女性 敎育은 指摘?獨立的 女性을 輩出했다. 그러한 脈絡을 前提한 채 흔히 論難거리로 삼는 金活蘭의 ‘親日 行脚’에 對해 생각해 보자. 金活蘭과 梨花學堂은 수많은 女性들을 가르쳐 왔다. 그러던 中 2次 世界大戰이 벌어졌고 日帝의 一部인 朝鮮 亦是 빨려 들어갔다. 朝鮮 獨立을 외치는 것과 朝鮮 女性이 朝鮮에서 敎育받을 수 있는 學校와 그 權利를 지키는 것, 兩者擇一을 강요당한다면 李花女子專門學校와 이화保育學校의 校長은 어떤 選擇을 해야 할까.

    人生에는 正答이 없고, 歷史엔 假定法이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分明한 몇 가지 事實이 있다. 페미니즘은 그 出發부터 進步와 左派의 專有物이 아니었다. 女性主義가 進步?左派에 스스로 從屬돼 있을 때 女性參政權 運動은 目標하던 成果를 내지 못했다. 自由黨 落選運動을 하고 女性의 戰爭 參與를 督勵하지 않았다면 서프러제트는 또 한 番의 ‘茶盞 속 颱風’으로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茶盞을 깨뜨렸고, 歷史는 그의 이름과 貢獻을 永遠히 記憶한다.

    노정태
    ● 1983年 出生
    ● 高麗大 法學科 卒業, 서강대 大學院 哲學科 碩士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韓國語版 編輯長
    ● 著書 : ‘不良 政治’ ‘論客時代’ ‘탄탈로스의 神話’
    ● 曆書 : ‘칩 워’ ‘人間의 本質’ ‘地球를 위한다는 錯覺’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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