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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年 前 學兵世代는 어떻게 新生 大韓民國의 主役이 됐나|신동아

80年 前 學兵世代는 어떻게 新生 大韓民國의 主役이 됐나

[歷史 속으로]

  • 金賢美 記者

    khmzip@donga.com

    入力 2024-04-0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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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支援이라는 이름의 徵兵, 學徒志願兵

    • 김유길, 권중혁 마지막 學兵 出身 愛國志士

    • 日帝가 엘리트 兵士 動員에 必死的이었던 理由

    • 박순동 ‘侮蔑의 時代’와 이가형 ‘버마戰線 敗殘機’

    • 智異山으로 간 하준수와 ‘新版 임꺽정’

    • 美 OSS 遙遠 된 韓國人 톰·조·찰리

    • 되풀이 돼선 안 되는 歷史와 ‘學兵 敍事’

    • 帝國이 키운 엘리트에서 大韓民國 設計者로

    • 動員된 協力者인가 戰爭의 犧牲羊인가

    일제강점기 학도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 청년들.  [동아DB]

    日帝强占期 學徒志願兵이라는 이름으로 强制 動員된 朝鮮 靑年들. [東亞DB]

    2023年 10月 10日 권중혁 愛國志士의 別世 消息이 傳해졌다. 卷 知事는 1921年 12月生으로 102歲를 두 달 앞두고 世上을 떠났다. 獨立有功者는 日帝에 依한 國權 侵奪 前後로부터 1945年 8月 14日까지 日帝에 抗拒한 功勞로 敍勳을 받은 이를 가리키며, 死亡者는 殉國先烈, 生存者는 愛國志士로 褒賞하고 있다.

    慶北 迎日郡(現 浦項) 出身의 卷 知事는 보성전문학교에 在學 中이던 1944年 1月 日本軍 大邱24部隊에 入營했다. 이 部隊에 配屬된 學兵(學兵) 600餘 名 가운데 戰線 等으로 配置되지 않은 20餘 名이 集團 脫出을 謀議했다. 이들의 計劃은 單純한 脫出이 아니었다. 彈藥庫를 爆破하고 武器를 奪取하며 食水에 毒劇物을 타서 大邱 駐屯 日本人 兵力 6000餘 名을 沒殺시킨다는 居士였다. 또한 學兵들이 集團 脫出함으로써 日本軍 內部의 崩壞를 加速化하고 民族精神과 反日 思想을 鼓吹한다는 名分도 있었다.

    그러나 그해 8月 實際 脫出에 成功한 사람은 권중혁 外 권혁조(1923年生, 日本 주오大), 문韓牛(1921年生, 연희전문), 권성훈(1920年生, 혜화專門, 권태용으로 改名), 김복현(보성전문), 김이현(1923年生, 日本 메이지대) 等 6名뿐이었다. 大邱 八公山으로 避身한 6名은 軍과 警察을 總動員한 搜索隊의 包圍網이 좁혀지자 2名씩 짝을 지어 分散 隱身했지만 密告로 김복현과 김이현 두 사람만 빼고 모두 逮捕됐다.

    集團 脫出로 日帝에 抗拒한 學兵들

    逮捕된 4名은 日本 규슈에 있는 고쿠라陸軍刑務所에 收監됐다가 1945年 10月에야 釋放됐다. 當時 고쿠라陸軍刑務所에는 이들보다 앞서 6月에 咸興 43步兵部隊에서 脫出했다 逮捕된 태성옥(1919年生, 와세다大), 임영선(1919年生, 메이지대), 이윤철(1925年生, 주오大)도 있었다. 1944年 大邱 24部隊 脫出 事件, 咸興 43步兵部隊 脫出 事件, 平壤師團 脫出 事件은 學兵들이 主導한 代表的 抗日 義擧로 꼽힌다.

    권중혁 知事 以前 最高齡 獨立有功者는 김유길 志士였다. 金 知事는 2022年 4月 享年 103歲로 世上을 떠났다. 1919年 平南 平原에서 태어난 金 知事는 日本 규슈 오이타(大分)高等商業學校를 卒業하고 1944年 1月 入營해 中止派遣軍 第7997部隊에 配置됐다. 中止(中支)는 中國의 中部 地方으로 양쯔江 下流 地域을 가리킨다.



    김유길 知事는 平壤 出身 金映豪(1920年生, 보성전문)와 함께 日本軍을 脫出해 장제스의 國民黨軍이 運營하던 황포軍官學校 分校(中國 안후이省 린취안 所在)로 갔다. 여기서 먼저 脫出해 있던 장준하(1918年生), 김준엽(1923年生) 等을 만나 特設 韓國光復軍幹部訓鍊班에 編成돼 軍事敎育을 받는다. 以後 25名의 學兵은 臨時政府가 있는 충칭까지 移動한다. 이들의 抗日 大長程은 張俊河의 回顧錄 ‘돌베개’(1971)와 김준엽의 回顧錄 ‘壯丁-나의 光復節 時節’(1987)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김유길 等은 1944年 4月 中國 試案에서 美國 中央情報局(CIA)의 前身인 戰略事務局(Office of Strategic Services, 以下 OSS)李 主導한 韓美合作 特殊訓鍊을 받고, 光復軍의 國內 정진군 京畿道 第3條에 編成돼 韓半島 進入(一名 禿수리 作戰)을 기다리다 光復을 맞이했다.

    2024年 3月 1日 現在 生存 獨立有功者(愛國志士)는 單 6名. 이 가운데 1924年生인 김영관 知事는 경성사범학교 在學 中이던 1944年 9月 ‘志願兵’이 아닌 ‘徵集’ 對象者로 入隊했다. 中國 貯藏性에서 駐屯하다 脫出 後 光復軍에 合流해 抗日 獨立運動을 한 그도 올해 100歲를 맞는다.

    김유길은 中國에서, 권중혁은 日本의 刑務所에서 各各 光復을 맞았지만 두 사람을 이어주는 共通點은 ‘學兵 體驗’이었다. 두 支社의 他界로 1944年 1月 20日 學徒志願兵이라는 이름으로 皇軍(日本 天皇의 軍隊)이 돼야 했던 20代 靑年들은 이제 우리 곁에 없다. ‘學兵世代’가 사라진 것이다.

    支援에서 入營까지 석 달 만에 一瀉千里

    전장으로 나가는 학병을 배웅하는 가족들. [동아DB]

    戰場으로 나가는 學兵을 배웅하는 家族들. [東亞DB]

    帝國主義 日本은 1931年 滿洲事變에 이어 1937年 中日戰爭을 일으키며 아시아 大陸을 侵略하는 한便, 1941年 太平洋戰爭을 일으켜 南太平洋 地域으로까지 戰線을 擴大했다. 日本에서는 이미 徵兵制가 實施되고 있었지만 植民地 朝鮮에는 아직 兵役 義務가 없었다. 그러나 戰爭의 長期化와 戰場의 擴大로 物的, 人的資源이 不足해지자 日帝는 植民地와 占領地에서 展示 總動員 體制를 稼動했다. 곧바로 ‘徵兵’에 들어간 게 아니라 ‘特別支援’이라는 美名下에 朝鮮의 젊은이들을 軍隊로 보냈다.

    1938年 ‘陸軍特別志願兵制度’, 1943年 ‘海軍特別志願兵制度’와 ‘學徒志願兵制度(陸軍特別志願兵 臨時採用規則)’를 實施했다. 흔히 學徒志願兵을 줄여서 ‘學徒兵’ 또는 ‘學兵’이라고 하는데, 1950年 6·25戰爭 때 學生 身分으로 戰鬪에 參與한 學徒義勇軍을 ‘學徒兵’이라고 부르면서, 1944年 日本軍에 들어간 學徒志願兵은 ‘學兵’으로 區分하기도 한다. 一般的으로 ‘日帝 末 學兵에 徵集되어’라고 表現하지만 1943年 10月부터 施行된 學兵은 形式上 徵集이 아닌 支援이었다. 滿 20歲 男子에 對한 徵集은 1944年 8月부터 施行됐다.

    朝鮮總督府는 1943年 10月 20日 陸軍省 命令 第48號 ‘陸軍特別志願兵 臨時採用規則’을 통해 20歲 以上(1923年 12月 1日 出生者)으로 專門學校와 法文界 大學에 在學 中이거나 卒業한 男子에 對해 志願兵 制度를 實施한다고 發表했다. 이때 醫學部, 이학부, 工學部와 師範系는 募集 對象에서 除外됐다. 當時 募集 對象者는 몇 名쯤 됐을까. 1917~1923年 사이에 태어나 專門學校 以上 高等敎育을 받은 이들은 7000名(國內 1000名, 在日本 6000名 推算)이 조금 넘는 것으로 推算한다.

    學徒志願兵 制度가 恐怖되자마자 10月 25日 接受를 開始해, 11月 20日 마감하고, 12月 20日까지 銓衡檢査를 實施하고, 이듬해(1944) 1月 20日 一齊히 入營하는 節次였다. 支援에서부터 入營까지 석 달이 채 안 걸릴 만큼 一瀉千里로 進行됐다. 在日 留學生도 例外는 없었다. 故鄕과의 距離나 交通 事情 等을 勘案해 家族과 協議할 物理的 時間조차 許容하지 않고 時日 내 支援하도록 慫慂받았다.

    半島 學生들, 피의 代價를 要求하다

    在日 留學生 황호근은 1943年 進行된 學徒志願兵 募集을 ‘官製(官製) 榮光의 사도(使徒)’라는 題目의 글로 비꼬았다.

    玄關門을 밀치고 들어가니 下宿집 主人아주머니가 멍하게 나를 쳐다보며 한참동안 말없이 어물어물하는 態度가 以上하므로 나는 直感的으로 무엇을 느꼈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저, 電報가 왔어요….” “네 電報요? 언제나 故鄕에 急하면 오는 電報인데 그리 놀랄 게 없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한 張도 아니고 電報가 일곱 張이나 왔어요.”(‘세대’ 1972年 9月號)

    황호근 앞으로 온 電報는 發信者만 다를 뿐 內容은 한결같았다. ‘學兵에 支援하라.’ 故鄕 慶州의 郡守, 面長, 署長, 國民精神總力聯盟 OO면 理事長. 甚至於 아버지와 어머니도 따로따로 電報를 쳤다. 마지막 電報의 發信者인 ‘이와모토’는 安東에 사는 外叔父의 創氏名이었다. 單純한 勸誘가 아니라 脅迫에 가까운 便紙가 오기도 했다. 메이지대 賞學部에 다니던 濟州島 出身 金 아무개는 아버지로부터 ‘萬若 學兵에 支援하지 않으면 營業症(水産業)을 回收하겠다고 威脅하니 卽時 歸鄕하라’는 便紙를 받고 어쩔 수 없이 支援을 決心한 터였다.

    學生들은 “이런 式의 勸誘, 支援 督促, 强制 出願은 期必코 反對한다”고 憤慨했지만 도망가지 않는 限 拒否할 方法이 없었다. 逃亡 後 家族과 親知들에게 갈 被害를 생각하면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그저 모여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다 닥쳐올 개죽음을 떠올리며 엉엉 우는 게 고작이었다.

    1943年 11月 11日 午前 10時 니혼臺 상경學部 講堂에서 ‘半島의 先輩’들과 함께하는 在日本 學生들의 總蹶起大會가 열렸다. 여기서 半島의 先輩들이란 學兵 支援을 督勵하기 위해 온 春園 李光洙와 六堂 崔南善 等을 가리킨다. 그들은 도쿄 各 大學을 巡廻하며 朝鮮 留學生들에게 學兵 支援 勸誘 演說을 하고 있었다. ‘激勵辭’가 끝나자 와세다大 法學部 3學年 金 아무개가 發言을 要請했다.

    “저희들이 戰場에 나가는 피를 흘리는 것은 좋으나 學兵 支援의 成績 如何에 따라 半島 市政(施政)을 根本的으로 是正하겠다는 고이소 (朝鮮)總督의 發言은 確實히 우리들을 威脅하는 言辭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恐怖 雰圍氣 가운데 그 피(血)의 代價를 어떻게 補償하겠느냐 하는 問題가 提起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保障을 받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半島 學生들이 피를 흘리는 代價를 要求합니다.”(황호근 ‘官製 鉛鑛의 사도’)

    얼마 後 이런 發言을 한 金 아무개가 보이지 않았다. 憲兵에게 끌려 나간 것이었다. 이 무렵 도쿄憲兵司令部 所屬 朝鮮人 憲兵과 憲兵 補助員들이 在日 留學生들을 隨時로 尾行하며 動態를 監視했다. 두 달 뒤 金 아무개가 그때 받은 拷問으로 精神異常이 생겨 故鄕으로 떠난 뒤 消息이 끊겼다는 事實을 알게 됐다.

    豫見된 日本 敗亡, 개죽음은 當하지 말자

    겉보기에는 募集이 순조로워 보였지만 順順히 支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在日 留學生들은 1943年 4月 18日 午前 11時 40分 美軍 B29街 도쿄를 爆擊했을 때 日本의 敗亡을 確信하고 있었다. 每日 밤 라디오를 통해 하와이에서 放送하는 李承晩 博士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짐했다. “개죽음은 當하지 말자.”

    도쿄帝國臺 法學部에 다니던 신상초(1922年生)도 戰況이 日本에 不利하다는 것과 國際 情勢의 變化를 어느 程度 把握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入隊하더라도 반드시 脫出하겠다고 決心했다.

    “太平洋에서 美 海軍, 空軍에게 ‘롤백(roll-back)’을 當하고 있는 日本軍은 南部太平洋과 中部太平洋의 戰略據點을 잃어버리고 希望 없는 戰爭을 繼續할 따름이었다. 유럽 大陸에서는 스탈린그라드 反擊作戰 以來 蘇聯軍이 亞鉛 活潑한 攻勢로 바뀌었다. 유럽 大戮에서의 美軍上陸作戰은 거의 必死的으로 보였다. 유럽에서 聯合國이 勝利하리라는 曙光이 分明히 비치기 始作했다면 獨逸 敗亡이란 決定的인 것이고, 獨逸이 亡한다면 美國과 英國은 모든 힘을 太平洋에 集中할 터이니 日本의 敗戰은 加速的으로 甚해질 것이다.”(신상초 ‘日軍(日軍) 脫出記’, ‘신동아’ 1964年 9月號, 이 手記를 土臺로 1966年 ‘脫出’이라는 單行本이 나왔고, 1987年 出刊된 ‘1·20 學兵詐欺’ 1卷에도 실렸다.)

    戰況이 不利해질수록 日帝는 學兵 募集에 더 熱을 올렸다. 朝鮮總督府와 總督府 機關紙 ‘每日申報’가 앞장서서 ‘學徒出陣(學徒出陣)’ 慫慂에 나섰다. 學兵 制度의 成功的 施行을 바라는 座談會, 懇談會, 激勵大會가 이어졌고, ‘自發的’ 志願者와 子息들을 줄줄이 戰場으로 보낸 父母까지 動員된 各種 美談 記事가 쏟아졌다. 入營을 앞둔 한 달 내내 地域別로 出進學도 壯行會(壯한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앞날을 祝福하고 送別하기 위한 모임이라는 意味로 一種의 入隊 記念式)가 이어졌다.

    한便 學兵 拒否者는 ‘膺懲學徒’ ‘徵用學徒’로 分類돼 鑛山이나 시멘트 工場 等으로 보내 强制 勞役을 하게 했다. 北韓 ‘主體思想’ 理論의 定立字로 金日成綜合大學 總長을 지냈고 1997年 韓國으로 亡命한 황장엽(1923年生, 平南 江東)은 日本 주오大에 다니던 1944年 1月 下宿집을 찾아온 刑事에 이끌려 歸國한 뒤 100餘 名의 朝鮮人과 함께 志願兵 訓鍊所에 入所했다 10日 後 徵用工으로 끌려갔다.(황장엽 回顧錄 ‘나는 歷史의 眞理를 보았다’) 그가 끌려간 곳은 江原道 三陟의 시멘트 工場이었다. 詩人 金洙暎(1921年生)은 日本 留學 中 學兵 募集이 始作되자 滿洲로 도망갔다. 學兵 動員을 避해 山으로 脂肪으로 海外로 逃避하는 젊은이들이 續出했고, 個中에는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거나, 戶籍을 고치거나, 死亡申告를 해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新版 임꺽정’, 智異山으로 간 사람들

    끝내 學兵을 拒否하고 山으로 숨어든 사람들 가운데 代表的 人物이 後날 남도부라는 이름으로 남부군(6·25戰爭 때 智異山에서 活動한 빨치산 部隊, 朝鮮人民遊擊隊) 副司令官을 지낸 하준수(1921年生)다.

    慶南 涵養의 千石꾼 집안 아들이던 하준수는 日本 주오大 법문學部 卒業班 때 學兵募集을 避해 歸國 後 德裕山으로 들어갔다. 이어 智異山·장안산·白雲山·掛冠山(大峯山)으로 移動했고, 이곳에 모여든 學兵·徵兵·徵兵 拒否者들을 糾合해 ‘널리 나라의 빛이 되자’는 뜻의 抗日決死團體 ‘보광당(普光黨)’을 만들고, 駐在所 銃器 奪取 等 一種의 武裝鬪爭을 벌였다. 보광당은 後날 智異山 남부군의 母體가 됐다. 하준수는 光復 後 呂運亨이 이끄는 朝鮮建國準備委員會에서 活動했으나 呂運亨이 暗殺되자 智異山에서 빨치산 게릴라 活動을 했다. 1946年 ‘新天地’에 ‘新版 임꺽정-學兵 拒否者의 手記’라는 題目으로 3回에 걸쳐 하준수의 글이 실렸다.

    “白雲山에서 겨울을 난 우리들은 1945年 3月 掛冠山으로 들어가서 그곳에다 큰 집을 짓고 火田을 始作하는 한便 冬至 73名으로 보광당을 組織하고 日本이 戰爭을 繼續 못하도록 될 수 있는 대로 妨害할 것과 黨員을 訓鍊하여 聯合軍 南銑 上陸 時에 應할 수 있도록 諸般 態勢를 갖추는 것이 우리들의 行動 目標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火田을 일어서 우리의 食糧 問題를 解決코자 일을 하는 時間 外에는 나머지 時間을 全部 軍事訓鍊에 充當시키었다.”

    ‘掛冠山도령들’(地域民들이 붙여준 呼稱)은 그들 나름의 方法으로 光復을 準備하고 있었던 것. 慶南 河東 出身의 이병주(1921年生)는 와세다大 佛文科 在學 中 學兵에 다녀온 뒤 代表的 學兵 體驗 小說로 꼽히는 ‘관부連絡船’(1968年 4月~1970年 3月 ‘월간중앙’ 連載)에서 하준수라는 實名을 그대로 使用했다. 관부連絡船은 釜山과 日本 시모노세키 사이를 運航하던 連絡船을 가리킨다. 이 小說에서 李炳注는 하준수가 이끈 보광당을 ‘水滸誌’의 梁山泊에 比喩했다. 李炳注의 또 다른 小說 ‘智異山’(1972年 9月~1978年 8月 ‘世代’에 連載)에는 ‘하준규’라는 이름으로 다시 登場한다.

    인텔리 兵士 使用法, 徵兵制 爲한 事前作業

    學兵 募集 對象者 7000餘 名 가운데 實際 몇 名이나 入隊를 했을까. 行政安全部 過去事關聯業務支援團 ‘日帝의 朝鮮人 學徒志願兵 制度 및 動員部隊 實態調査 報告書’(2017)에 따르면 朝鮮 駐屯 日本軍이 作成한 文件에는 3893名, ‘1·20洞支會’가 確認한 人員은 4385名으로 492名의 差異가 있다. ‘1·20洞支會’란 歸還 學兵들이 自身들의 入營 날짜인 1月 20日을 따서 1962年 結成한 團體다.

    朝鮮人 學兵 硏究의 先驅者인 在日 史學者 강덕상은 1997年 日本에서 펴낸 ‘조선인 學徒 出陣’(韓國語 飜譯書 題目은 ‘日帝强占期 末 朝鮮 學徒兵의 自畫像’)에서, 1944年 8月 朝鮮總督府가 作成한 ‘朝鮮 學徒의 支援 最終 現況’을 引用해 學兵 適格者 數는 6203名, 實際 入隊者 數는 4385名이었다고 했다. 1·20同志會가 確認한 것과 同一하다.

    日帝는 學徒志願兵制와 別個로 1943年 8月 1日 兵役法을 改正해 滿 20歲의 朝鮮人 男子에게 兵役 義務를 賦課하고, 1944年부터 徵兵에 依한 强制動員을 始作했다. 崇實大 史學科 표영수는 博士學位 論文 ‘日帝强占期 朝鮮人 志願兵制度 硏究’(2008)에서 特別支援과 徵兵으로 日帝 末期 日本 陸·海軍으로 動員된 朝鮮人 規模를 大略 21萬 名으로 推算했다.

    徵兵制가 本格的으로 實施되기 前인 1938~1943年까지 6年間 朝鮮人 陸軍特別志願兵에 ‘支援’한 사람은 累計 80萬 2047名에 達했고, 實際 訓鍊所를 거쳐 軍에 ‘入隊’한 사람은 1萬6830名이었다. 特히 1940年代 들어 志願者 數가 飛躍的으로 늘어나(매년 10萬 名 以上씩 急增) 入隊 競爭率이 50~60 對 1이 넘었다는 事實은 믿기 어려울 程度다.

    陸軍보다 5年 뒤 施行된 海軍特別志願兵制度에 依해 動員된 朝鮮人 1萬2166名을 包含해 日帝 末期 特別支援으로 動員된 朝鮮人은 3萬3000餘 名에 達한다. 이들은 朝鮮 및 日本·中國·萬株·쿠릴熱島·南洋群島·버마 等 日本이 戰爭을 遂行하는 거의 全 地域에 配置됐고, 이 가운데 相當數가 日帝에 依해 犧牲됐다.(표영수)

    강덕상은 아무리 日帝의 慫慂에 依한 半强制的 支援이라 해도 6年間 陸軍特別志願兵 志願者가 累計 80萬 名을 넘었다는 事實로 보아 學兵 動員은 單純히 不足한 兵力을 確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一般 志願者가 넘치는 狀況에서 入隊 銓衡 基準을 조금만 낮추면 얼마든지 兵力 動員이 可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5000名도 안 되는 大學生 兵士를 確保하기 위해 온 나라가 大騷動을 벌인 眞짜 目的은 무엇이었을까.

    皇國臣民 敎育받은 二重言語 엘리트

    1920年 前後로 태어난 이들은 날 때부터 日本 國民이었고 國語는 日本語였다. 日本人 敎師가 多數인 學校에서 日本語로 歷史·地理·受信 等 充實한 皇國臣民 敎育을 받았고, 銃劍術 等 敎鍊을 통해 基礎 軍事訓鍊까지 마쳤다.

    강덕상은 “1943年 學徒志願兵 適格者들은 ‘軍校一致(軍敎一致)’의 延長線上에서 高等敎育을 받은 엘리트였다”며 “日本 軍人이 될 素地를 이렇게 잘 갖춘 層은 없었다”고 했다. 말 그대로 ‘準備된’ ‘良質의’ 幹部 候補生이었던 것.

    日帝强占期 朝鮮 땅에서 子女를 大學까지 보낼 수 있는 집이 얼마나 됐을까. 親日 貴族이나 企業家는 勿論이고 代代로 地主 집안 또는 名門家인 境遇가 많았다. 例를 들어 光復 後 言論인, 敎授, 國會議員 等을 歷任한 신상초는 平安道 井州 地主의 맏아들로 태어나 도쿄帝國臺 法學部에 入學했다. 고려대 總長을 지낸 김준엽은 平北 江界의 地主 아들로 日本 게이오대 文學部에 다녔다. 신상초와는 新義州高等普通學校 同窓이었다.

    강덕상은 “地域社會를 代表하는 집안의 아들이 個人 事情을 超越해 皇軍의 兵士가 되는 것이 地域의 徵兵 適齡者나 家族에게 影響을 주지 않을 理 없었다”면서 日帝가 學兵 動員에 熱을 올린 目的을 다음 두 가지로 整理했다.

    첫째, 中日戰爭 以後 朝鮮人 사이에서 愛國心이 高揚되고 있는 現象을 警戒하며 “學生들의 民族意識을 ‘漂白火’하고 精神을 ‘國防色’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朝鮮 學生의 힘이 以後 想像 以上의 勢力으로 成長할 것을 알고 이를 事前에 分解시키려는 反動的 行爲”(‘新天地’ 1946年 2月號)라는 歸還 學兵의 發言을 引用했다.

    둘째, 學兵 動員은 1944年 4月부터 全面的으로 實施될 徵兵制의 軟着陸을 爲한 事前作業이었다. 總督府가 把握한 바에 따르면 朝鮮人 徵兵 對象者 가운데 日本語 理解者는 3分의 1 水準이었다. 日本語를 모르는 兵士가 入隊했을 때 벌어질 問題를 解消해 줄 對案으로 떠오른 것이 學兵들이었다. 그들은 日本語와 韓國語 二重言語를 完璧하게 驅使할 뿐만 아니라 英語, 中國語, 佛語, 獨語까지 習得한 人材들이었다.

    “學徒兵 問題는 志願兵 制度에서부터 徵兵制로 이어지는 經過 措置였지만 長期的으로는 皇民化의 加熱 찬 促進에 있었다. 學兵 將校가 朝鮮人 兵士를 거느린 日本 幹部로 出世하고, 戰功(戰功)을 세워 權力과 떼려야 뗄 수 없을 程度로 結合됐을 때 그 家族, 그 故鄕 사람들의 對日 感情은 어떻게 될 것일까. (그들이) 退役한 뒤 社會的·經濟的 엘리트 子弟가 在鄕軍人으로서 地方 中堅 人物로서 各地에 흩어져 있는 光景을 想像할 때, 朝鮮은 어떠한 딴 世界가 되었을지를 생각하면 日本 帝國主義의 眞正한 目的이 보인다.”(강덕상)

    豫想보다 빠른 日本의 敗亡으로 ‘帝國主義의 眞正한 目的’은 實現되지 못 했지만, 自意든 他意든 皇軍이 된 學兵들에겐 苛酷한 運命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監獄을 擇했어야 할 일이다”

    1944年 1月 20日 午前 9時. 유태림은 約 1000名의 學兵과 같이 大邱에 있는 80聯隊에 入營했다. 簡單한 身體檢査가 끝난 뒤 검은 學生服을 벗고 카키色 軍服으로 갈아입었다. 軍服으로 갈아입은 親舊들의 모습에 反射된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運命의 채찍질을 頭腦에서 가슴에서 뼈에서 皮膚에서 實感했다. …人格은 學生服을 싼 옷 꾸러미와 더불어 故鄕으로 보내버리고 兵力의 한 單位로서 스스로의 肉體와 精神을 規制해야 하는 奴隸의 나날이 그때부터 始作되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危害ㅡ 그리고 어떻게 하자는 이 꼴인가!’ 차라리 監獄을 擇했어야 할 일이었다.(이병주 小說 ‘관부連絡船’)

    李炳注는 ‘관부連絡船’(1970年 單行本 出刊) 以後로도 ‘辨明’(1972), ‘智異山’(1985), 未完成 遺作이 된 ‘별이 차가운 밤이면’(1992)까지 學兵 體驗이라는 主題에 穿鑿했다. 어쩌면 그는 平生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라는 答을 찾기 위해 살았는지도 모른다.

    全南 木浦 出身으로 도쿄帝國臺 文學部에 다니던 이가형(1921年生)에게 ‘奴隸의 나날’은 文學的 表現이 아니라 現實이었다. 後날 英文學者(국민대 名譽敎授)이자 小說家, 飜譯家로 活動한 이가형은 ‘버마戰線 敗殘機’(‘신동아’ 1964年 11月號)를 남겼다.

    聯合軍은 1943年 10月 印度 國境을 넘어 進軍했고, 中國軍은 사르윈강(버마語로 ‘憤怒의 江’)을 넘어 東北部로 넘어왔다. 日本軍은 이를 沮止하기 위해 임팔 攻擊을 試圖했으나 敗北하자 支援軍을 派遣했다. 산포 第49聯隊 第5中隊에 編入된 이가형은 1944年 6月 18日 용산역을 떠나 20日 釜山港에서 出帆하는 輸送船에 올라 버마로 向했다. 이때 함께 輸送船에 몸을 실은 14名의 學兵 中에는 全南 順天 出身의 박순동(1920年生)과 靈巖 出身의 이종실(1915年生)도 있었다. 박순동은 日本 고마자와대 豫科를 修了했고, 이종실은 日本 니혼臺 法學部를 卒業했다. 이종실과 이가형은 광주고보 先後輩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박순동의 手記에 다시 登場한다.

    3000餘 t의 낡은 貨物船에 兵士 5000餘 明과 軍需品, 軍馬들까지 실려 가는 狀況은 地獄 같은 現實이었다. 兵士들은 貨物칸에 차곡차곡 船積됐다. 좁은 칸 안에서 발을 쭉 펼 수도, 고개를 穩全히 들 수도 없었다. 映畫에서나 보던 ‘노예선’이나 다름없었다. 아침마다 甲板 위에 設置된 便所에서는 糞尿가 흘러넘쳐 兵丁들의 발을 적셨다.

    釜山港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싱가포르港에 到着한 이들은 다시 貨物車에 실려 버마 戰線으로 보내졌다. 聯合軍에 制海權과 制空權을 빼앗긴 日本軍은 敗殘兵이나 다름없었다. 戰鬪는커녕 爆擊을 避해 낮에는 숨고 밤에만 行軍했다. 그 渦中에 광주고보·도쿄帝大 先輩인 박태영의 死亡 消息을 듣는다. 말라리아에 걸렸지만 治療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異域萬里의 冤魂이 된 것. 이가형 自身도 말라리아에 걸려 高熱과 泄瀉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말라리아만큼이나 學兵들을 괴롭힌 것은 祖國이 아닌, 오히려 敵이 돼야 할 나라를 위해 銃을 들고, 敵이 아닌 사람을 쏘아야 하는 不條理한 現實이었다.

    우리 兵丁은 革帶에 手榴彈을 두 個 차고 있었는데, 이것은 萬若의 境遇 自殺을 위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手榴彈을 써본 적도 없거니와 써볼 생각도 없었다. 내게는 한 자루의 小銃이 있었다. 늘 짐스러웠지만 ‘바모’ 附近에서 돼지와 소를 精確하게 쏜 일이 있을 뿐 아직 사람을 쏴本 적도 없었다. 우리 朝鮮人에게는, 特히 只今 敵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미워할 수도 없었고, 따라서 自己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의 손에 依해서 미움을 받아가며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抑鬱한 일이다.(이가형 ‘버마戰線 敗殘機’)

    이 무렵 박순동과 이종실이 사라졌다. 背囊은 그대로 있는데 두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가형은 같은 朝鮮人인 두 사람이 自身만 빼고 脫營했다는 事實이 믿기지 않았다. 버려졌다는 事實에 絶望했다. 이가형은 박순동이 남기고 간 背囊을 整理하다 ‘黨(唐)視線’ 冊子를 發見하고 杜甫의 ‘빈郊行(貧交行)’을 몇 番이고 읽는다. “그대는 觀衆과 포숙의 가난한 때의 사귐을 보지 아니하느냐? 이 眞正한 右島(友道)를 只今 사람들은 버리기를 흙같이 한다.”

    脫營兵에서 ‘냅코 프로젝트’ 要員으로

    이제부터 박순동이 들려주는 日本軍 脫出記. 박순동의 手記 ‘侮蔑의 時代’는 이가형의 ‘버마戰線 敗殘機’보다 10個月 뒤 ‘신동아’ 1965年 9月號에 실렸다.

    나는 軍服의 윗 胡주머니 속에서 거의 半이나 찢어져 달아난 手帖과, 두 치假量이나 남은 鉛筆동강이를 꺼내었다. 手帖의 어느 페이지에나 無數히 그어진 줄을 별빛으로 따라 내려가서 다시 한 줄을 그어 넣었다. 이로써 그날은 1945年 3月 20日이라는 날이 되는 셈이었다.(박순동 ‘侮蔑의 時代’)

    줄을 그어 表示하지 않으면 오늘 날짜도 헤아리기 어려운 정글 속이었다. 釜山에서 輸送船을 타고 해로와 陸路를 거쳐 버마 東北端의 鐵道 終點 라시오에 到着한 것은 1944年 9月 7日. 그 後로 버마 東北部와 윈난省 變更 數千 里를 걸었다. 버마 首都 郎君과 윈난省 쿤밍 사이를 잇는 主要 道路를 사이에 놓고 聯合軍과 日本軍이 뺏고 빼앗기는 戰鬪를 벌였다. 日本이 道路를 占領하자 聯合軍은 아예 새 道路를 建設하려 했고, 이 工事를 沮止하는 것이 버마戰線 派遣軍에 맡겨진 任務였다. 하지만 日本軍은 敗戰을 거듭했고 兵士들은 말라리아로 죽어갔다. 退路가 막힌 自身들의 部隊가 머지않아 聯合軍 탱크 部隊와 落下傘 部隊 사이에서 ‘으깨질’ 身世임을 알게 된 박순동과 이종실은 脫出을 決心했다.

    問題는 말라리아에 걸린 이가형이었다. 이종실은 健康 狀態가 惡化된 이가형을 두고 갈 거라면 脫出 自體를 집어치우자고 할 만큼 頑强하게 反對했으나 狀況이 緊迫하게 흐르자 어쩔 수 없이 둘만의 脫出을 斷行했다. 逃走가 아닌 事故로 僞裝하기 위해 背囊도 두고 나왔다. 水桶 하나, 쌀 한 줌, 拳銃 한 자루가 全部였다. 銃은 萬若 脫出하다 發覺돼 包圍되면 自殺하기 위한 道具였다.

    多幸히 印度人 M의 도움으로 脫出에 成功한 박순동과 이종실은 英國軍에 投降해 印度 뉴델리의 捕虜收容所로 보내졌다. 두 사람보다 一週日 뒤 脫出한 박형무가 合流해 세 사람은 行先地도 모른 채 飛行機에 搭乘했다. 飛行機는 이집트 카이로를 거쳐 美國 워싱턴에 到着했고, 3日 뒤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그들의 最終 寄着地는 캘리포니아 산타카탈리나섬. 地球를 半 바퀴나 돌아 到着한 섬에서 國籍과 聲明과 只今까지의 經歷을 누구에게도 發說해서는 안 된다는 命令을 받았다. 이제부터 박순동은 톰, 이종실은 兆, 박형무는 찰리가 됐다.

    韓半島에서 日本을 相對로 祕密諜報作戰을 遂行할 要員을 길러내는 訓鍊이 始作됐다. 美國 OSS가 主導한 이른바 ‘냅코 프로젝트’. 톰과 條와 찰리는 孤立된 섬에서 極祕裡에 高難度 浸透 訓鍊을 받았다. 當時 함께 訓鍊한 美國 同胞 ‘딕’(韓國名 이태모, 1906年生)李 1908年 美國의 親日 外交官 스티븐슨을 狙擊한 田明雲 義士의 사위라는 事實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

    訓鍊이 끝나갈 무렵 實際 浸透 作戰을 펼칠 全羅道 海岸을 찾던 中 1945年 8月 6日 히로시마, 9日 나가사키에 原子爆彈이 投下됐다는 消息이 傳해졌다. 바로 訓鍊은 中斷됐다. 그제야 섬의 다른 地域에서 咸鏡道와 黃海道로 浸透할 以北 出身 要員들이 訓鍊받고 있었다는 事實을 알았다.

    1945년 중국 시안에서 독수리 작전의 일환으로 무선 교신 훈련을 받고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 [독립기념관]

    1945年 中國 試案에서 禿수리 作戰의 一環으로 無線 交信 訓鍊을 받고 있는 韓國光復軍 第2地帶 隊員들. [獨立記念館]

    “유감스럽게도 여러분을 引受할 政府가 없다”

    終戰이 되자 그들은 다시 捕虜收容所로 보내졌고 PW(Prisoner of War)가 그려진 옷을 입어야 했다. 이에 激忿한 세 사람이 ‘냅코 프로젝트’ 責任者이던 아이플러 大領에게 왜 自身들을 故國으로 보내주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때 아이플러 大領은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여러분을 넘겨주려 해도 여러분을 引受할 政府가 없다”고 答했다.

    “우리에게는 民族이 있고 山野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周邊의 自然現象일 뿐 法的으로 남의 認定을 받는 政府가 없는 우리는 國民이 아니며 우리의 山野는 領土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버마로, 美國으로 떠돌면서도 변변한 傭兵의 구실도 못한 것이다. 必要하면 걷어가고 쓸모가 없으면 버리는, 浮萍草처럼 뿌리가 떠돌아다니는 그러한 存在인 것이다.”(박순동 ‘侮蔑의 時代’)

    박순동은 ‘侮蔑의 時代’ 以後로도 1968年 ‘전명운 前’, 1969年 ‘巖泰島小作爭議’를 써서 세 番씩이나 ‘신동아’ 논픽션 最優秀作에 當選된 바 있다. 그가 어떻게 ‘전명운’에 關心을 갖게 됐는지는 OSS 要員 訓鍊 過程에 나온다. 박순동은 趙廷來 作家의 外三寸으로 大河小說 ‘太白山脈’의 民族主義者 金範禹가 박순동을 모델로 한 人物로 알려져 있다. 김성동의 小說 ‘黎明의 눈瞳子’(1991~1992年에 放映된 同名의 드라마가 엄청난 話題를 모았다)에서 學兵 出身 장하림이 OSS 要員 訓鍊을 받는 部分도 박순동의 手記와 겹친다. 장하림과 對蹠點에 있던 人物 最大値는 베이징大 在學 中 日本軍에 入隊한 學兵으로 오는데 그가 投入된다. 임팔 作戰은 이가형의 ‘버마戰線 敗殘機’에 登場한다.

    박순동과 이종실이 脫營한 뒤 殘留한 이가형은 어떻게 됐을까. 釜山港을 떠날 때 200餘 名이었던 中隊 隊員들은 4分의 1도 안 남았다. 分隊長, 小隊長, 中隊長, 大隊長, 聯隊長까지 모두 戰死했다. 行方不明된 박순동과 이종실을 書類上 戰死 處理한 사람도 이가형이었다. 1945年 8月 15日 日本의 無條件 降伏으로 戰爭은 끝났지만 敗戰國 捕虜들은 바로 歸鄕할 수 없었다.

    1946年 6月 30日이 드디어 버마를 떠나 싱가포르의 韓國人 抑留者 캠프로 들어가 國籍과 이름과 母國語를 되찾았다. 여기서 처음으로 太極旗를 보았고 愛國歌 歌詞를 배웠다. ‘올드랭사인’ 曲을 따서 愛國歌를 불렀다. 그해 7月 28日 드디어 歸國船을 탔다. 光復은 이미 1年 前 일이었다.

    이가형은 自身이 ‘버마戰線 敗殘機’를 쓴 理由에 對해 “韓 戰爭의 全貌는 兵丁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戰爭의 苦惱란 한 兵丁만이 알 수 있다”는 말로 對答을 代身했다. 이가형은 1993年 手記 ‘버마戰線 敗殘機’을 小說로 改作한 ‘憤怒의 江’을 出刊했다.

    志願者, 拒否者, 脫出者, 殘留者 그들이 돌아왔다

    1946年 3月 6日 美國 LST(上陸艦)을 타고 釜山 埠頭에서 내린 20餘 名의 中止 歸還 學兵들을 中心으로 同志會를 結成한 것이 ‘1·20洞支會’의 母體가 됐다. 안경환 서울대 名譽敎授에 따르면 이 모임을 主導한 사람이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社長을 지낸 황용주였다고 한다.(안경환 ‘황용주 그와 朴正熙의 時代’)

    慶南 密陽 出身인 황용주(1919年生)는 日本 와세다代 佛文科를 卒業하고 1943年 11月 初 學兵 入隊를 위해 관부連絡船을 탔다. 한 學期가 남았지만 學校는 早期 卒業을 認定했다. 中止 派遣 學兵들 사이에서도 리더로 活動했던 황용주는 歸還 後 1·20洞支會 發起人으로 參與했다.

    그러나 正式으로 1·20同志會가 結成된 것은 그로부터 16年이 지난 1962年 이었다. 이때는 中止 歸還兵뿐만 아니라 國內 配置子, 日本 乃至 勤務者, 東南亞 倍速子 等 ‘모든’ 同志(學兵)들을 아우르는 作業을 推進했다. 무엇보다도 自身들의 體驗을 歷史의 記錄으로 남겨야 한다는 使命感을 共有했다. ‘1·20學兵詐欺-試鍊과 克服’(1987)의 간행사는 이병주가 直接 썼다. 그는 運命, 民族, 屈辱을 얘기하면서도 日本에 對한 怨望을 淸算할 時期라고 했다. 그리고 學兵 體驗을 集大成한 ‘1·20學兵詐欺’를 ‘榮光의 씨앗’에 比喩했다.

    “우리는 그때 運命을 생각하고 歷史를 생각했다. 아니 運命처럼 歷史를 생각했다. …反抗的이었건, 逃避的이었건, 妥協的이었건, 그 學兵生活을 통해 한時 反詩人들 民族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이제 우리는 그 困辱의 體驗으로 하여 日本人을 怨望하는 마음을 淸算할 時期에 이르렀다. …只今 엮어내는 學兵士의 意味도 바로 여기에 있다. 屈辱의 時間을 回想하려는 노릇이 아니라 榮光의 씨앗을 찾기 爲한 努力이다. 그 씨앗은 오로지 우리의 精神과 實踐의 意志에 있다는 것을 確認하고자 하는 데 學兵士 刊行의 意味가 있은 것이다.”

    이어 ‘抵抗과 鬪爭’(1988), ‘光復과 興國’(1990), ‘統一과 繁榮’(1998)까지 11年에 걸쳐 總 4卷의 ‘1·20學兵詐欺’가 完成됐다.

    짧지만 强烈했던 體驗, 1960年代 ‘學兵 敍事’ 全盛期

    1963년 3월 16일 충북도청 회의실에서 열린 ‘1·20동지회’ 충북지부 결성식. 충북도청 [사진DB]

    1963年 3月 16日 忠北道廳 會議室에서 열린 ‘1·20洞支會’ 忠北支部 結成式. 忠北道廳 [寫眞DB]

    1·20同志會에 따르면 “學兵 4385名 中 15%인 657名이 死亡 乃至 失踪되고, 3728名은 生還한 것으로 推定된다. 그中 40%인 1531名이 北韓에 定着한 것으로 보면 2297名이 南韓에 定着한 것으로 推計된다.”(‘학병사기’ 1卷).

    支援했든, 끌려갔든, 回避했든, 拒否했든, 脫出했든, 殘留했든, 어떤 理由로 免除가 됐든 ‘學兵 體驗’은 植民地 엘리트 靑年에게 ‘學兵世代’라는 剛한 連帶感을 形成케 했다. 學兵世代의 特徵 中 하나가 自身들의 體驗을 積極的으로 記錄했다는 點이다. 많은 學兵이 訓鍊所나 戰線에서 메모와 日記를 남겼고, 捕虜收容所에 갇혀서도 消息紙를 만들어 配布했다.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는 하와이 捕虜收容所에서 韓國 關聯 뉴스와 讀者 投稿가 담긴 60쪽 分量의 週間 刊行物 ‘自由大韓步’를 製作했다. 이가형은 싱가포르 外郭에 있던 韓國人 抑留者 캠프에서 한글講習會, 各種 講演會를 열고 雜誌 ‘新生(新生)’을 發行했다. ‘新生’에는 中國語 新聞과 英字新聞에서 拔萃한 韓國 關聯 消息을 飜譯해서 싣고 캠프 내 消息과 文藝 作品을 실었다. 김준엽, 장준하, 윤재현은 韓國光復軍幹部訓鍊班 時節 硏究 敎材用으로 ‘燈불’이라는 雜誌를 만들기도 했다. ‘新生’은 1953年 創刊한 ‘사상계’로 이어졌다.

    學兵 體驗을 土臺로 한 이야기를 通稱 ‘學兵 敍事’라고 한다. 조영일은 論文 ‘學兵敍事 硏究’(2015)에서 “그들만큼 自身들의 이야기를 後代에 남기려고 한 世代도 없다”면서 “이 世代는 韓國 現代史의 悲劇을 온몸으로 겪지만 어떤 것도 學兵 體驗만큼 强한 痕跡을 남기지는 못한 것 같다. 이들 間에 存在하는 剛한 連帶感, 그리고 바로 거기서 自身들의 存在 根據를 發見하려는 努力이 그 證據”라고 했다.

    1946年 最初의 學兵 團體인 ‘朝鮮學兵同盟’에서 雜誌 ‘學兵’을 創刊했고(2호까지 發行), ‘新天地’ 等 雜誌에서 歸還 學兵들의 報告大會라는 이름으로 座談會, 手記, 短篇小說 等을 揭載했다. 1948年에는 日本 도시샤臺 文學部에 다뎠던 윤재현(1920年生)李 ‘斜線을 헤매이며’라는 長篇 手記를 出刊했다(조영일은 ‘斜線을 헤매이며’가 單行本으로 出刊된 最初의 學兵 手記라고 본다). 같은 해 大邱 24部隊에서 脫出에 成功해 滿洲로 도망갔던 김이현이 ‘學兵 脫出記’(최정식 共著)를 出刊했다. 이 內容은 1991年 ‘멀고도 먼 歸路-어느 學兵의 日帝下 回顧錄’으로 再出刊됐다.

    6·25戰爭이라는 空白期를 지나 1960年代는 學兵 敍事의 全盛期였고, 그 熱氣는 1970年代까지 이어졌다. 出發은 한운사의 ‘玄海灘은 알고 있다’였다. 日本 주오大 在學 中 學兵으로 갔던 한운사는 歸國 後 放送作家로 活躍했다. 1960年 自身의 學兵 體驗을 바탕으로 쓴 라디오 드라마가 暴發的 人氣를 끌자 主人公 아로운의 이름을 딴 小說 ‘아로운 3部作’을 發表했다. 이 作品은 김기영 監督에 依해 映畫로도 製作될 만큼 長安에 話題를 뿌렸다. 李炳注의 ‘관부連絡船’(1968), 張俊河의 ‘돌베개’(1971), 1·20洞支會 集團證言集 ‘靑春萬張’(1973), 閑曠反學兵同志會의 ‘壯丁6千里’(1979) 等이 持續的으로 發表됐다.

    신상초의 ‘일군 탈출기’(‘신동아’ 1964년 9월호). 이가형의 ‘버마전선 패잔기’(‘신동아’ 1964년 11월호). 박순동의 ‘모멸의 시대’(‘신동아’ 1965년 9월호). (왼쪽 부터)

    신상초의 ‘日軍 脫出記’(‘신동아’ 1964年 9月號). 이가형의 ‘버마戰線 敗殘機’(‘신동아’ 1964年 11月號). 박순동의 ‘侮蔑의 時代’(‘신동아’ 1965年 9月號). (왼쪽 부터)

    文學評論家 金允植 서울대 名譽敎授는 學兵世代가 글쓰기에 執着한 理由를 이렇게 分析했다.

    “그들의 글쓰기의 特徵은 논픽션이든 픽션이든 ‘體驗’에 바탕을 두었다는 點에 있습니다. 人生의 決定的 時期에 겪은 極端的인 戰爭體驗을 두고 그들은 民族的으로도 人類史의 處地에서도 그 悲劇性을 告發해야 할 使命感이 주어졌을 터이지만, 同時에 그들은 이 惡夢에서 스스로 解放되어야 했을 터입니다. 電子는 歷史에의 發言이지만, 後者는 斷然 深層心理的 課題가 아닐 수 없습니다.”(김윤식 ‘日帝末期 韓國人 學兵世代의 體驗的 글쓰기론’)

    연세대 國文科 최영욱은 論文 ‘解放 以後 學兵 敍事 硏究’(2009)에서 注目할 만한 學兵 手記 및 小說이 多數 發表된 1960年代라는 時期에 注目했다. 이 時期를 貫通하는 歷史的 事件은 1960年 4·19革命, 1961年 5·16軍士쿠데타, 1964年 韓日國交正常化會談 反對運動, 1965年 韓日協定 締結이다.

    ‘신동아’를 통해 公開된 學兵 手記들-신상초의 ‘日軍 脫出記’, 이가형의 ‘버마戰線 敗殘機’, 박순동의 ‘侮蔑의 時代’-李 1964~1965年에 걸쳐 發表된 것은 偶然이 아니었다. 박순동은 다음과 같이 當選(1965年 ‘신동아’ 논픽션 公募 最優秀作) 所感을 밝혔다.

    “이 記錄이 發表되는 마당에 韓日協定이 批准되었다는 消息을 듣게 된다는 것은 歷史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합니다. 鰻鱺異域의 冤魂이 된 戰友들을 생각할 때 나의 가슴이 錯雜해집니다. 그 누가 그들의 초혼(招魂)의 禮節을 베풀어줄 것인가! 이 記錄은 마땅히 저 孤魂(孤魂)들에게 奉呈(奉呈)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民族이 當했던 지난날의 侮蔑의 歷史는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936년 9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 여파로 폐간됐던 ‘신동아’가 1964년 복간을 기념해 개최한 논픽션 공모전에서 박순동의 ‘모멸의 시대’가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동아일보 1965년 8월 28일자]

    1936年 9月 東亞日報 日章旗 抹消事件 餘波로 廢刊됐던 ‘신동아’가 1964年 復刊을 記念해 開催한 논픽션 公募展에서 박순동의 ‘侮蔑의 時代’가 最優秀作으로 뽑혔다. [동아일보 1965年 8月 28日子]

    누가 새롭게 建設될 나라의 主體가 될 것인가

    1945年 8月 15日 光復은 되었으나 嚴密히 말해 ‘獨立’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1948年 大韓民國 政府가 세워졌지만 두 해도 안 돼 6·25戰爭이 일어났다. 1950年代 初中盤이 돼서야 비로소 本格的인 ‘國家 建設’이 始作됐다. 누가 새로운 大韓民國 建設의 主體가 될 것인가.

    ‘大韓民國의 設計者들-學兵世代와 韓國 右翼의 起源’(2017)을 쓴 김건우 대전대 敎授는 “解放期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主體를 세울 때 ‘親日’ 與否의 問題는 대단히 重要했다”면서 “問題는 너무 많은 이들이 日帝의 植民 統治에 協力했다는 것, 이 地點에서 새로운 世代가 注目받은 것은 자연스러웠고 學兵世代가 寵兒로 登場했다”고 말한다.

    그는 學兵世代를 “日帝 末 戰爭에 動員돼 自己 意思와 無關하게 戰爭터로 끌려갔던 사람들, 帝國 最高의 高等敎育을 履修했지만 親日 前歷이 없는 이들, 正確히는 親日을 要求받기에 너무 젊었던 이들”이라고 說明했다. 그가 이 冊에서 ‘大韓民國 設計者’로 꼽은 人物은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장기려, 鮮于煇,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 金壽煥, 池學淳, 조지훈, 金洙暎 等이다.

    日帝 末 大學을 다닌 年齡層은 위로는 1917年生부터 아래로는 1923年生까지, 1920年 前後 約 6~7年에 걸쳐 태어난 이들이지만 ‘學兵世代’를 區分하는 데 나이보다 重要한 것은 親日로부터 자유로운지였다. 學兵世代보다 不過 서너 살 많은 1915年生 이항녕(高麗大 敎授, 前 문교부長官)은 京城帝大 在學 中 日帝 末 高等文官試驗 行政科에 合格해 1941年부터 光復까지 郡守로 지낸 것을 平生 부끄러워했다. 김건우는 “親日이 學兵 윗世代들에게는 原罪 같은 콤플렉스로 作用한 反面, 逆으로 새 祖國 建設에 寄與하고자 했던 學兵世代는 少數를 除外하면 親日의 罪意識으로부터 자유로운 첫 世代였다”고 했다.

    안경환은 學兵世代를 “日帝 末期 朝鮮의 最高 靑年知識人 集積體”라고 했다. “日帝에 依해 强制로 民族精神을 말살당하기를 강요받은 朝鮮人이라는 事實에 더하여 儼然한 大日本帝國의 知的 水準을 고스란히 投影하고 있던 集團”이라는 것. 그러나 ‘帝國이 키운 世代’라는 自負心은 다음 世代에 依해 ‘親日’로 疑心받는 理由가 됐다. 김건우는 “帝國 最高 水準의 敎育을 받았다는 것은 解放 後 이들의 國家 建設의 밑바탕이 된 知識이 모두 日本으로부터 온 것임을 뜻한다”고 했다.

    4·19世代의 登場과 學兵世代의 退場

    學兵世代는 그로부터 20年 뒤 태어난 ‘4·19世代’(1960年 4·19革命을 主導한 世代)에 依해 日帝의 走狗 노릇(學兵)을 拒否하지 않은 動機와 理由에 對해 追窮받는다. 안경환에 따르면 “4·19世代는 스스로 日本 軍國主義에 汚染되지 않은 眞正한 最初의 自主國家의 主人들이라고 自負”했다. 이들은 學兵世代를 向해 ‘日帝의 앞잡이’ ‘受動的 協力者’라는 疑心을 거두지 않았다. 1960年代 以後 學兵 敍事가 集中的으로 發掘된 것도 이런 社會 雰圍氣와 無關치 않았다.

    1972年 1·20同志會가 出刊한 集團 手記集 ‘靑春萬張’ 編輯者 後期에 어쩔 수 없이 日帝에 協力했다는 ‘辨明’이 나온다. ‘贖罪’라는 表現도 登場한다.

    “우리들은 解放 後 오늘에 이르기까지 過去 他意나마 日帝에 協力하는 것처럼 했던 贖罪의 뜻에서 各其 나름대로 國家, 社會에 이바지하였다고 自負는 하고 있으나 지나간 젊은 그 時節이 쓰라린 追憶을 回想하여 볼 때 무언가 釋然치 않은 點이 있고 後世에 한 마디 남기고 싶은 衝動을 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지윤은 서강대 政治外交學科 博士學位 論文 ‘親日 淸算의 딜레마: 動員된 協力者 學兵을 中心으로’(2018)에서 “學兵들은 왜 自身들의 經驗을 持續的이고 積極的으로 解明해 왔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淸算의 政治라는 側面에서 보면, 그것은 只今까지 親日 淸算이 根本的으로 民族 反逆의 責任을 묻는 作業이었기 때문이다. 日本軍 敗殘兵으로 돌아온 學兵은 解放 當時부터 反逆의 嫌疑를 씌우기도, 그렇다고 그 嫌疑를 完全히 지우기도 힘든 模糊한 存在였다”고 말한다. 結局 “現在 學兵의 位相은 判斷 留保의 模糊한 狀態로 남아 있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혜화동)에 있는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일제 말 강제동원된 학도지원병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입영 날짜인 1월 20일에서 딴 ‘1·20동지회’가 2008년 8월 21일에 세웠다. 비가 세워진 장소는 학병들이 입대 전 합숙 훈련을 했던 곳이다. [조영철 기자]

    서울 종로구 大學路(혜화동)에 있는 大寒曺國主權守護一念비. 日帝 末 强制動員된 學徒志願兵들을 記憶하기 위한 것으로, 入營 날짜인 1月 20日에서 딴 ‘1·20洞支會’가 2008年 8月 21日에 세웠다. 碑가 세워진 場所는 學兵들이 入隊 前 合宿 訓鍊을 했던 곳이다. [조영철 記者]

    올해 1月 20日 서울 종로구 大學路에 있는 ‘大寒曺國主權守護一念비’ 앞에서 ‘日帝强占期 學兵 强制動員 80周年 記憶 行事’가 열렸다. 大寒曺國主權守護一念費는 日帝 末 學兵이라는 이름으로 動員된 朝鮮 靑年들을 記憶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案內文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日帝가 2次大戰 末期(1943~1945) 우리 大韓의 精銳 4300餘 名의 專門 大學生들에게 所謂 學徒特別志願兵이라는 터무니없는 허울을 씌워서 一群에 强制 入隊시켜 無慘하게 各 戰線에 내몰려고 함에 한 목숨 내걸고, 이를 拒否하고 自身과 民族을 위하여 抗爭, 脫走, 逮捕, 懲役, 死刑, 失踪, 戰死 等 온갖 犧牲을 몸으로 겪으면서 싸웠던 피의 鬪爭 痕跡을 2700名(生死 不問)의 이름과 함께 새겨서 이 겨레 後孫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恥辱의 過去事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峻嚴한 警告의 象徵으로 여기 入隊 前 한때 合宿訓鍊長이었던 追憶의 자리 同性高校 構內 양지바른 언덕에 民族의 歷史와 함께 永遠히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이 行事를 主催한 것은 1·20洞支會 遺族會였다. 공교롭게도 ‘大寒曺國主權守護一念비’에서 不過 몇 m 떨어진 자리에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文句가 새겨진 4·19革命 記念碑가 있다. 80年 前 學兵世代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들을 어떻게 記憶할 것인지는 如前히 宿題로 남아 있다.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글씨가 새겨진 4·19 발원 기념비. 동성고는 서울에서 4·19혁명을 주도한 학교 중 하나다. 4·19세대의 등장은 학병세대의 퇴진을 의미했다. [조영철 기자]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글씨가 새겨진 4·19 發源 記念碑. 東姓考는 서울에서 4·19革命을 主導한 學校 中 하나다. 4·19世代의 登場은 學兵世代의 退陣을 의미했다. [조영철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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