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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武鉉 秩序는 瓦解했고 民主化 世界觀은 破産했다|신동아

盧武鉉 秩序는 瓦解했고 民主化 世界觀은 破産했다

[조귀동의 正照準]

  • 조귀동 ‘이탈리아로 가는 길’ 著者·政治經濟 칼럼니스트

    入力 2024-03-25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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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在明 헛발질, 민주당 崩壞 原因 아니라 結果

    • 仁川 桂陽·富平, 京畿 河南 公薦의 意味

    • 民族主義·檢察-言論改革 議題는 如前해

    • 任鍾晳 날린 자리 누구로 채웠냐가 問題

    • 獨裁 殘滓 淸算? 反共만큼 철 지난 議題

    • 代案은 없는데 새 人物 ‘스펙’은 떨어져

    [Gettyimage]

    [Gettyimage]

    仁川 부평구와 桂陽區, 京畿 하남시 公薦은 더불어民主黨의 問題를 壓縮해 보여준다. 李在明 民主黨 代表의 派閥에 屬하는 사람들이 非李在明系 現職議員을 無理하게 쫓아내는 形態의 公薦이 이뤄져서만이 아니다. 人物, 이데올로기, 政策, 支持基盤, 組織 等에서 總體的 危機에 逢着했기 때문이다.

    富平과 繼養은 하나의 生活圈이다. 예전에는 仁川 都心에 들어가는 택시는 따로 割增料金을 받을 程度로 別個의 正體性을 지닌 地域이기도 하다. 京仁線 부평역을 中心으로 工場이 들어서고, 移住民이 몰려들면서 只今의 市街地가 形成됐다. 大宇自動車(現 韓國GM) 富平工場과 富平國家産業團地, 湖南 出身 移住民들이 富平·桂陽 政治의 核心 키워드다. 이番에 컷오프(公薦排除)돼 脫黨한 홍영표 議員(富平乙)은 대우자동차 勞組委員長 出身이고, 桂陽乙에서 5線을 한 송영길 前 議員은 富平에 事務室이 있는 仁川택시勞組에서 活動했다. 盧會燦을 輩出하고 民主勞動黨 建設에 寄與한 傳說的 勞動運動組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人民勞聯)도 富平乙 基盤으로 한다. 湖南과 湖南 出身 移住民의 政黨이던 민주당의 歷史, 學生運動에서 出發해 進步 運動을 하다 2000年代 民主黨으로 編入된 80年代 學番들, 그리고 그들이 主張하던 민주당式 改革과 進步 어젠다가 富平-繼養에 集約돼 있는 셈이다.

    이番 總選에서 民主黨은 홍 議員(1957年生) 地域區에 박선원 前 國家情報院 1次長(1963年生), 바로 옆 富平甲에 YTN 勞組委員長 出身인 노종면 氏(1967年生)를 公薦했다. 2年 前 李在明 代表(1963年生)는 宋 前 議員(1963年生)을 서울市長 候補로 내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仁川 地域의 移住民과 勞動運動을 背景으로 삼던 86(1980年代 學番-1960年代生) 政治人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統一·民族主義와 言論이라는 민주당의 傳統的 ‘改革 議題’를 내세운 또 다른 86들이 차지한 樣相이다.

    河南道 事情은 비슷하다. 河南은 輕工業 製品이나 園藝 作物 等 서울 市民을 위한 商品을 만들어주고, 서울서 일하는 中下層 勞動者에게 값싼 住居地를 提供하던 곳이었다. 이番에 河南을 選擧區가 新設되는 미사강변도시는 李明博 政府의 보금자리住宅 事業의 結果物로, 민주당을 支持하는 30~40代 通勤者 家族 比重이 높다. 檢察改革을 前面에 내세운 秋美愛 前 法務部 長官(1958年生)과 白凡 金九의 曾孫子인 金龍萬 大韓民國臨時政府記念事業會 理事(1986年生)가 민주당 强勢일 수밖에 없는 이 地域에서 公薦을 받았다. 人的 淸算은 이뤄졌지만 檢察·言論 改革과 統一·反日 民族主義 基調는 오히려 더 뚜렷해진 것이 李在明標 公薦의 本質이다.

    公薦은 權力鬪爭, 問題는 ‘새 商品’

    이재명(왼쪽 두 번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월 7일 경기 양평군 강상면 병산리 서울·양평고속도로 특혜의혹 현장을 방문, 예정지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있다. [신원건 동아일보 기자]

    李在明(왼쪽 두 番째) 더불어民主黨 代表가 3月 7日 京畿 楊平郡 강상면 병산리 서울·楊平高速道路 特惠疑惑 現場을 訪問, 豫定地에 對한 브리핑을 듣고 있다. [신원건 동아일보 記者]

    언제 어느 政黨에서나 公薦은 權力鬪爭이었다. 民主黨은 2012年 公薦에서 國民競選制를 앞세워 非主流를 밀어내고, 1980年代 學番·1960年代生 運動圈이 主軸이 된 親盧(親盧·또는 親文 親文)가 主導權을 쥐기 始作했다. 2016年에는 祖國 曺國革新黨 代表 等이 參與한 革新위 活動에 安哲秀 前 代表와 김한길系를 비롯한 非主流가 反撥해 국민의당을 結成해 떨어져 나갔다. 2020年에는 文在寅 前 大統領에 對한 어떠한 批判도 許容치 않는 雰圍氣에 琴泰燮 前 議員을 겨냥한 찍어내기식 刺客 公薦이 벌어졌다. 朴槿惠 前 大統領은 2004年 國民의힘의 前身인 한나라당에서 大規模 물갈이 公薦에 나섰다. 2008年과 2012年은 各各 이명박과 박근혜, 두 大統領이 黨을 掌握하기 위해 非主流를 밀어내는 公薦이 있었고 그 反撥로 脫黨한 이들이 ‘親朴連帶’ 等을 結成하는 일이 생겨났다. 不安定한 政黨 構造와 組織, 5年 單任이지만 强力한 大統領의 權力은 公薦을 둘러싼 葛藤이 일어날 수밖에 없던 原因이었다.



    이러한 脈絡에서 볼 때 2024年 민주당의 公薦 過程에서 나타난 非명系에 對한 肅淸과 黨內 主流와 非主流 間 葛藤은 傳統的 公薦 葛藤이라 볼 수 있다. 민주당은 스스로 主流가 됐다고 宣言할 만큼 多數 議席을 갖고 있는 政黨이다. 黨 안팎에는 오랫동안 活動한 人物이 가득 차 있다. 또 次期 大選 최유력 走者인 李在明 代表는 國會 內 自派 勢力은 많지 않고, 그에 對抗해 求心點이 될 수 있는 競爭者가 없다. 過去 保守政黨에서 나타났던 大規模 虐殺 公薦은 必然的이다. 李 代表 쪽에서 名分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番에 排除된 사람 中 相當數는 2004年께부터 國會議員이었던 ‘고인 물’이다. 서울 中·成東甲 選擧區에서 컷오프된 임종석 前 議員의 境遇 2012年 事務總長을 맡아 親盧·386 公薦 作業을 도맡은 人物 中 하나다.

    問題는 無理하게 親명系를 꽂아놓고, 非명系를 찍어내는 公薦 方式이 아니다. 새롭게 進入한 親명系가 以前과 별다른 差別性을 보여주지 못하고, 人物 競爭力이 없다는 것이 核心이다. 오래된 商品을 치우겠다고 가게를 헤집어놨지만, 정작 들여온 새 商品이 以前과 別 差異가 없을 뿐만 아니라 細部的인 品質이나 디자인을 놓고 보면 以前보다 더 못해 보인다는 點이다. 게다가 以前 商品은 競爭業體의 主力 商品에 밀린 狀況에서 大大的 革新이 必要한 狀況이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親명系 人物들의 現在 모습은 李在明 派閥의 問題가 아니라, 민주당을 包含한 汎進步 陣營에서 1980年代 學番-1960年代生 以後 世代에서 적합한 能力과 經歷을 갖춘 政治 엘리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데 가깝다.

    上位 中産層이 獨走하는 政黨의 議題

    2003년 11월 11일 당시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열린우리당 창당식 도중 노무현 대통령의 축사가 대독되는 동안 노 대통령의 모습이 대형 화면에 나오고 있다. [동아DB]

    2003年 11月 11日 當時 서울 올림픽 體操競技場에서 開催된 열린우리당 創黨式 途中 盧武鉉 大統領의 祝辭가 代讀되는 동안 盧 大統領의 모습이 大型 畵面에 나오고 있다. [東亞DB]

    오늘날의 민주당은 盧武鉉 前 大統領의 成功 모델과 2004年 열린우리당의 成功을 基盤으로 한다. 이데올로기, 政策, 有無形의 制度, 政黨 間 또는 政黨과 市民社會 間의 關係를 包括하는 政治 秩序(Political Order)라는 槪念을 借用한다면, 2000年代 以後 韓國 政治는 ‘盧武鉉 秩序’라고 할 만한 政治 秩序의 影響力下에 있다. 盧武鉉 秩序는 政黨에 依存하지 않는 大衆政治, 輸出 志向 經濟의 質的 高度化, 그에 따른 上位 中産層의 政治的 行動主義 等에 基盤하고 있다. 민주당은 湖南 및 湖南 移住民의 政黨에서 麻浦·용산·성동의 上位 中産層이 同居하는 政黨으로, 이제는 上位 中産層이 獨走하는 政黨으로 變했다. 民主黨이 反日 民族主義나 檢察·言論 等 權力機構 改革 等 먹고사는 問題와 동떨어진 議題에 集中하게 된 背景이다. 先進國 進入과 成長率 下落에 뒤따른 社會 移動性 弱化 및 不平等 强化 속에서 祖國 曺國革新黨 代表 事件과 不動産 價格 上昇은 中下層 肉體勞動者와 自營業者가 民主黨 支持 聯合에서 離脫하는 結果를 낳았다.

    李在明 代表의 민주당은 2022年 選擧 敗北의 原因을 더 團結하지 못해서라고 診斷한다. 文在寅 政府와 親文들의 政治的 過誤에 責任을 묻는 것도 論理的 歸結이다. 檢察 獨裁에 反對하는 路線을 强化하되 새로운 人物로 交替하고, 黨의 凝集力을 높이는 게 政權交替의 方法이 된다.

    獨裁 殘滓 淸算은 反共만큼이나 철 지난 議題가 됐다. 많은 민주당 政治人은 12·12 軍士쿠데타를 다룬 映畫 ‘서울의 봄’ 興行에 歡呼했다. 그런데 1987年 時點에서 6·25戰爭(1950)은 37年 前 일이고, 올해 時點에서 12·12는 35年 前 일이다. 有權者 處地에서 民主黨이 反獨裁 民主化를 우려먹는 건 1980年代 反共을 내세워 民主化 勢力을 攻擊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낡은 理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北韓이 나날이 核 能力을 키워가고, 永久 分斷 方針을 闡明한 데다 新冷戰이 激化하면서 統一이나 그에 뒤따르는 東北亞 均衡 外交도 설 자리를 잃었다. 民主黨 政治人들도 유튜브를 참言論으로 치켜올려 주는 時代에 言論改革 議題는 말할 나위도 없다.

    大企業 正規職과 中小企業 非正規職의 壁이 높아지는 狀況에서 잘 敎育받고 좋은 企業에 다니고 서울이나 競技의 아파트 團地에 사는 화이트칼라들이 支持하는 政黨이 主張하는 ‘非正常의 正常化’가 說得力을 갖기도 어려워졌다. 그들이 分配 强化, 機會의 工程을 主張해 票를 얻기도 어려워진 것은 勿論이다. 急激한 高齡化와 低成長 속에 福祉 强化에 對한 支持는 弱해지고 있다. 民主化로 集約되는 世界觀이 事實上 破産한 狀況에서 路線 變更 없는 人物 交替만 固執하는 게 李在明標 公薦이다.

    왜 한총련 議長은 전대협 議長 大體 못 했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출범식을 하루 앞둔 1993년 5월 27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전야제 행사를 열었다. [동아DB]

    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한총련)李 出帆式을 하루 앞둔 1993年 5月 27日, 서울 城北區 고려대에서 前夜祭 行事를 열었다. [東亞DB]

    새로운 政治 엘리트의 需給도 원활하지 못하다. 全國大學生代表者協議會(전대협) 幹部 出身인 旣存 議員들을 代替하는 運動圈 出身 人物들은 質的, 量的 限界를 一致監置 드러냈다. 民主化 以後 社會 變化 要求가 噴出하면서 넓어진 學生運動의 底邊과 大衆運動을 强調한 NL(民族解放) 思潮의 擴散이 전대협을 平常時 10萬 名의 學生을 動員할 수 있는 大規模 組織으로 만들었다. 1990年 ‘시사저널’ 調査에서 전대협은 專門家 集團에서는 네 番째, 一般 國民에서는 세 番째로 影響力 있는 集團으로 꼽힐 程度였다. 貧弱한 人力풀을 갖고 있던 민주당이 이들을 大擧 迎入한 건 當然한 手順이었다. 1期(1987)~3期(1989) 전대협 議長이 30代 後半에 迎入돼, 40歲 무렵에 議員이 된 理由다.

    바로 다음 世代인 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한총련)은 사뭇 다르다. 5期(1997) 議長으로 몇 年 前부터 李在明 代表의 側近으로 活動한 강위원 前 黨代表 特補는 光州 西區甲에 出馬했다가 競選 途中 抛棄해야 했다. 直接的으로는 2003年 저지른 性戱弄 事件을 제대로 收拾하지 못하고, 2018年 鑛山區廳長 出馬 當時 2次 加害까지 이어진 것이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더 本質的 理由는 낮은 支持率이었다. KBS光州放送總局이 지난해 12月 26~27日 實施한 輿論調査에서 姜 前 特報의 支持率은 12%로 3等에 그쳤다. 송갑석 議員(27%)의 折半에도 못 미쳤다.(만 18歲 以上 有權者 503名 對象 携帶電話 假想番號를 利用한 電話面接 方式으로 한국갤럽이 實施. 仔細한 事項은 中央選擧輿論調査審議委員會 홈페이지 參照) 支持率이 한참 劣勢인데 性暴力 履歷이 불거졌을 때 이를 收拾할 政治的 資本이 있을 理 없었다.

    學生運動은 1991年 5月 명지대生 강경대 氏의 죽음을 契機로 發生한 大規模 示威(5月 鬪爭)를 起點으로 急激히 내리막을 걸었다. 1990年代 本格化한대의민주주의와 中産層의 時代에서 學生運動은 外面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漸次 急進化·주변화됐다. 南北韓의 隔差가 確實히 벌어졌고, 蘇聯 等 東유럽이 무너졌다. NL系列 學生運動은 한총련을 結成해 對應에 나섰지만, 1996年 연세대에서 8·15汎民族大會를 强行하면서 벌어진 20日間의 學校 占據(連帶 事態)로 沒落하게 됐다. 全大協 世代와 달리 한총련 以後 世代는 人的 네트워크 等 動員할 수 있는 資源이 훨씬 적었고, 民主勞動黨 또는 統一·勞動運動 團體 等 민주당 밖 領域에서 活動했다. 全大協 以後 世代가 이룬 最大의 政治的 成果는 민노당에서 民主黨으로 넘어온 朴用鎭 議員(성균관대 民衆民主·PD 出身)이나 穩健 路線을 主唱하며 서울대 等에서 活動한 21世紀 進步學生聯合 出身의 朴柱民 議員일 것이다. 뚜렷한 路線이나 두터운 人的 基盤 代身 個人技에 依存해 成功한 사람들이다.

    市民團體도 事情은 비슷하다. 參與連帶(1994年 創立) 等 1990年代 登場한 市民團體는 時代 變化에 맞는 새로운 社會運動이 必要하다는 進步 陣營의 結果였다. 市民團體를 만든 86들이 民主黨과 끈끈한 關係를 맺고 活潑히 政治權에 進入하는 건 必然的이었다. 民主黨도 새로운 議題를 提起하고, 斬新하지만 力量 있는 人物들이 있는 市民團體를 주된 人力풀로 삼았다. 民主黨이 主流가 될수록 市民團體의 正當性이나 影響力이 줄어드는 건 必然的이었다. 신진욱 中央大 社會學科 敎授는 ‘한겨레21’ 寄稿에서 “政治勢力과 緊密한 네트워크를 갖거나, 政府支援金으로 延命하거나, 公共事業을 名目으로 利得을 取하거나, 市民이 일군 社會的 資産을 個人 資産으로 삼아 政治權·公共機關에 자리를 얻어가는 사람들로 그려지는” 視角이 澎湃해 있다고 指摘한다.

    이番에 서울 城北乙에 公薦을 받은 김남근 辯護士는 “참여연대를 實質的으로 이끌어가는 사람 中 하나”라는 評價를 받는다. 文在寅 政府 時節에는 靑瓦臺와 政府 部處에 相當한 影響力을 行使했다. 2019年에는 公正去來委員長 下馬評에 오를 程度였다. 一角에서는 幕後 實勢였던 金 辯護士가 언제든 받을 수 있었던 初選議員 자리를 굳이 選擇한 背景으로는 참여연대의 影響力 弱化를 꼽는다. 金 辯護士 公薦이 發表되자 그의 參與連帶 내 役割이 아니라 2021年 韓國土地住宅公社(LH) 投機 疑惑의 最初 暴露者라는 게 集中 浮刻됐다.

    3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박형기 [동아일보 기자]

    3月 5日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李在明 더불어民主黨 代表가 曺國 曺國革新黨 代表와 만나 握手하고 있다. 박형기 [동아일보 記者]

    20年 執權 외치던 政黨의 現住所

    李在明 代表가 이끄는 민주당은 旣存의 민주당에서 크게 離脫한 이들이 아니다. 文在寅 前 大統領의 大衆 動員 方式, 積弊淸算으로 대표되는 各種 改革 議題는 李在明 代表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李在明 代表의 眞짜 問題는 時代에 맞지 않는 민주당의 行態를 그대로 踏襲하면서, 親文들이 갖추고 있던 政治的 老鍊함이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신동아 4월호 표지.

    신동아 4月號 表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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