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나들이 探梅 旅行|新東亞

봄나들이 探梅 旅行

[에세이]

  • 정찬주 小說家

    入力 2024-03-23 09: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Gettyimage]

    [Gettyimage]

    개구리들이 내 産房 이불再 작은 蓮못에서 목청을 높여 개골개골 노래하고 있다. ‘개골개골’은 擬聲語인데 나는 뜻글字로 받아들인다. 겨우내 닫혔던 山골짜기가 비로소 열리고 있다(開谷開谷)는 뜻으로 들리는 것이다. 나이 마흔아홉에 서울 生活을 淸算하고 南道 山中으로 落鄕한 지 24年이 지났다. 只今도 서울에서 살고 있다면 개구리의 淸雅한 노랫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이 무렵의 개구리 소리는 切切하게 다가온다. 겨울잠을 자는 동안 내내 참았던 소리이므로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도 함부로 排泄하듯 말해서는 안 된다. 懇切하지 않은 말이 相對의 가슴에 남을 理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목울대 너머로 꾹꾹 눌러놓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어야 한다. 말은 沈默의 체로 거를수록 格調가 생기는 法이다. 요즘 自稱타칭 政治指導者들의 말을 들어보면 여름철 개구리 소리처럼 귀청이 따가울 程度다. 여름철 개구리 소리는 ‘아굴아굴’ 하고 들린다. 未安한 얘기지만 溫和한 말이 아니라 騷音을 내지르는 것 같다.

    개구리의 切切한 소리를 듣고 應答하는 存在가 있다. 바로 내 産房 이불再議 梅花나무들이다. 內 産房 뜰에는 靑梅, 紅梅, 白梅가 있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났다고 개골개골 申告하면 梅花나무들이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和答한다.

    그러면 나는 봄나들이로 當日치기 探梅(探梅) 旅行을 떠난다. 나의 봄나들이 旅行地는 두 군데다. 하나는 200餘 年 前에 火가 所致(小痴) 허련이 末年을 보낸 珍島 운림산방이고, 또 하나는 蟾津江 附近의 智異山 梅花나무 밭이다. 나이가 들면서는 梅花 꽃 一色인 智異山 山자락보다 운림산방을 자주 찾아가고 있다. 靑梅 꽃이 雪原처럼 뒤덮인 智異山의 長官도 좋지만 敍事가 있는 운림산방의 두 그루 梅花나무 꽃이 내 마음을 더욱더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어제도 아침 8時에 眞景(珍鏡) 先生의 車에 同乘해 아내와 함께 珍島를 갔다. 이불再 梅花나무에 꽃망울이 부풀었으니 운림산방의 梅花나무는 滿開했으리라고 斟酌했다. 進度는 내가 사는 山中보다 더 南쪽이므로 따뜻할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운림산방을 찾아간 것은 16年 前의 일이다. 乘用車 運轉이 서툴러서 버스 便으로 물어물어 찾아갔다. 以後 每年은 아니지만 운림산방 梅花나무 꽃이 필 무렵이면 가곤 했다.



    2年 前 나는 운림산방에서 偶然히 梅花나무 밑에서 梅實 몇 個를 주워 와 이불재 텃밭에 묻었는데, 그中에서 한 個가 發芽해 只今은 1m쯤 자라 있다. 꽃이 피려면 더 成長해야 하지만 梅實이 싹을 틔워준 것만 해도 얼마나 多幸인지 모르겠다. 텃밭의 梅花나무가 成年에 이르면 굳이 운림산방을 가지 않아도 될 터. 아무래도 나 亦是 高齡이 되면 珍島까지 外出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까.

    운림산방의 梅花나무는 두 그루인데 모두 白梅다. 百枚는 粉紅色 꽃받침인데 꽃잎은 흰色이다. 靑梅는 푸른色 꽃받침인데 흰 꽃잎에 푸른빛이 어려 있다. 紅梅는 꽃받침과 꽃잎이 붉은色이다. 운림산방의 梅花나무는 所致가 첫 스승 초의선사를 잊지 않고자 일지암에서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傳해진다. 그러니까 운림산방 梅花나무는 초의의 魂이 서려 있는 셈이다.

    다 알다시피 小癡의 두 番째 스승은 秋史(秋史) 金正喜다. 초의가 漢陽에 있는 秋史에게 紹介한 것이다. 所致가 初의 門下에서 그림을 익힌 지 4年째 되던 해, 초의는 秋史에게 小癡의 그림을 보내면서 평해 달라고 付託한다. 이에 秋史는 “아니 이와 같은 뛰어난 人材와 어찌 손잡고 함께 오지 못하셨소…. 卽刻 서울로 올려 보내도록 하시오”라는 便紙를 띄웠다. 그리하여 그해 8月, 所致는 漢陽으로 올라와 월성위宮 바깥舍廊에 起居하며 秋史에게 그림을 배운다.

    秋史는 小癡에게 元末 4大家의 그림을 模寫한 畫帖(?帖)을 주고 幅마다 열 番씩 본떠 그리라고 했다. 小癡는 秋史의 가르침대로 날마다 그림을 그려 바쳤다. 小癡의 그림 實力은 日就月將했고, 秋史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한 幅씩 나누어주면서 小癡를 紹介했다. 이때부터 小癡의 이름이 漢陽에 알려졌다. 이윽고 秋史는 허련에게 騷致라는 號를 주었다. 元末 4臺가 黃公望의 號인 對峙(大痴)에서 着眼한 號다.

    마침내 소치는 御殿으로 나아가 그림을 그렸다. 憲宗15年(1849) 그의 나이 41歲 때의 일이었다. 小癡는 憲宗 앞에서 5個月 동안 다섯 番이나 下賜받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等 地方 畫家로서는 最高의 榮譽를 누렸다. 興宣大院君과 當代의 勢道家인 김홍근과 閔泳翊 等도 小癡의 그림을 極讚했다. 이처럼 榮譽를 누리던 所致가 故鄕 進度로 落鄕한 것은 스승 秋史가 濟州島와 咸鏡道 北靑 10年 流配 生活 끝에 果川에서 生을 마쳤기 때문이다. 落鄕한 얼마 뒤 공교롭게 超意圖 大興寺에서 入籍했다.

    나는 小癡의 偉大함을 스승 초의와 秋事를 對한 변함없는 義理에서 본다. 秋史가 濟州島로 流配 갔을 때 거룻배로 목숨을 걸고 茫茫大海를 세 番이나 건너갔으며, 일지암에서 膳物받은 梅花나무를 가져와 운림산방 마당에 심은 뒤 날마다 精誠껏 돌본 일은 스승의 恩惠를 잊지 않고자 하는 마음의 發露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뛰어난 小癡의 眞面目은 스승을 뛰어넘는 靑出於藍을 보였다는 點이 아닐까 싶다. 小癡는 秋史가 죽고 나자 南宗畫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眞景山水風의 운림산방을 그렸다. 現在 서울대 博物館에 保管된 ‘扇面山水度(扇面山水圖)’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珍島大橋를 건너 바로 운림산방으로 가지 않았다. 진도읍 現代美術館에서 小癡의 孫子 남농(南農) 展示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박주생 館長의 說明과 함께 남농 그림을 鑑賞하면서 小癡의 그림자가 어떻게 스며 있는지를 살폈다. 美術館 2層에 남농의 그림이 初期, 中期, 後期 順으로 展示돼 있었다. 나는 남농이 40代 初盤 무렵 다리에 凍傷이 걸려 結局 몇 年 뒤 자르고 義足을 한 채 濟州島로 가서 그린 그의 鬪魂이 서린 그림들이 좋았다. 所致가 온갖 逆境에도 畫格(畵格)을 높였던 것처럼 그러한 DNA가 孫子인 남농에게까지 이어진 듯해서였다.

    남농戰을 鑑賞한 뒤 우리는 市中(時中) 정현인 先生과 함께 小癡의 精神을 잇겠다는 珍島 出身 진치(珍痴) 김양수 畫伯의 畫室을 訪問했다. 眞치當(珍痴堂)이란 懸板이 걸린 畫室은 農幕이었다. 지난해 번듯한 畫室이 漏電으로 모조리 全燒돼 버린 탓이었다. 農幕 안으로 들어가 茶를 두세 盞 마셨다. 茶罐과 茶물을 담은 숙우에도 불에 탄 痕跡이 검게 남아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 꺼낸 茶罐과 숙우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런데 金 畫伯은 絶望하지 않고 그 多冠으로 車를 우리며 또 다른 自身의 美術 世界를 構想하는 듯했다.

    나는 동국대 後輩이기도 한 金 畫伯을 慰勞했다. 小癡의 精神을 잇겠다는 그의 克服 意志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인지 眞치當 마당에 핀 靑梅 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불에 그슬린 茶罐과 숙우는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靑梅 꽃은 나를 慰勞했다. 靑梅 꽃은 慰勞하러 간 나를 慰勞한 셈이다.

    以後 우리는 운림산방으로 갔다. 一行은 賣票所를 지나 小癡의 ‘扇面山水度’에 나오는 돌다리를 건넜다. 조금 더 올라가자 例의 그 梅花나무가 나타났다. 내가 만나고자 한 梅花나무였다. 때마침 白梅 꽃이 滿開해 陰陰한 둘레가 불을 켠 듯 환했다. 內 産房 이불再 텃밭에 자라고 있는 梅花나무의 아버지로서 위의(威儀)가 대단했다. 이윽고 우리는 小癡의 畫室인 小허암(小許庵)을 둘러보았다. 秋史 글씨를 所致가 새겼다고 하는 懸板이 정겨웠다. 뒷門으로 나온 우리는 다시 梅花나무 한 그루 앞에 섰다. 이 白梅가 바로 所致가 일지암에서 直接 가져온 2代 梅花나무인데, 늙어서인지 아직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다. 一行 中에 누군가가 아쉬워했지만 나는 小癡의 魂이 꽃봉오리에 뭉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나는 探梅 旅行의 終點에 서 있었다. 小癡의 魂을 봤으니 이제는 운림산방을 떠나도 그만이었다.

    정찬주
    ● 1953年 出生
    ● 동국대 國文科 卒業
    ● 1983年 ‘한국문학’ 新人賞에 小說 ‘유다學士’ 當選, 登壇
    ● 著書: 大河小說 ‘李舜臣의 7年’ ‘나는 朝鮮의 선비다’ ‘아소까大王’, 長篇小說 ‘淺絳에 비친 달’ ‘茶山의 사랑’ ‘光州아리랑’ ‘깨달음의 빛, 靑瓷’, 散文集 ‘庵子로 가는 길’ ‘부처님 人生應援’ ‘마지막 스승 法頂스님’ 外
    ● 行員文學賞, 화쟁文化大賞, 東國文學上, 류주현文學賞, 유심作品賞 等 水上




    에세이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