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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수 前 檢察總長이 말하는 ‘檢察과 政權’|新東亞

송광수 前 檢察總長이 말하는 ‘檢察과 政權’

“‘靑瓦臺 들어와 大選資金 問題 相議해보자’는 盧武鉉 大統領 提案 拒絶했다”

  • 組成式│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mairso2@donga.com│

    入力 2009-10-09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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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盧 大統領 大選資金 關聯 嫌疑, 이제는 다 끝난 일
    • 盧, 任命狀 주면서 “檢察總長은 大統領 哲學 따라야”
    • 강금실 長官 主導한 人事에서 내 側近 檢事들 좌천당해
    • 出勤 前 집으로 걸려온 大統領의 電話
    • 總長 就任 直後 ‘SK 大選資金’ 具體的인 額數까지 報告받아
    • 권양숙 女史가 電話해 親姻戚 問題로 만나자고 했으나 拒絶
    • 參與政府, 檢察의 政治的 中立과 搜査 獨立에 寄與한 面 있다
    • ‘강정구 敎授 事態’, 檢察總長이 辭表 낼 일 아니었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말하는 ‘검찰과 정권’

    ●1950年 慶南 馬山 出生 <br>●서울大 法大 卒業 <br>●1971年 司法試驗 13回 合格 <br>●1977年 서울地方檢察廳 水原支廳 檢事 <br>●法務部 檢察1課長, 釜山地檢長, 法務部 檢察局長, 大邱高檢長 <br>●2003年 第33代 檢察總長 <br>●現 法務法人 金&腸 拷問

    檢察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盧武鉉 前 大統領이 自殺한 以後 그것은 奇異한 벌레처럼 스멀스멀 내 머릿속을 기어 다녔다.

    歷史는 돌고 돌면서 發展한다. 檢察 안팎에선 李明博 政府 出帆 後 檢察의 政治的 中立性과 搜査 獨立性이 弱化되거나 後退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歷代 政權 中 檢察權이 가장 威力的이었던 政權은 아이러니하게도 檢察改革을 積極 推進했던 노무현 政權이었고, 盧 前 大統領은 自身과 葛藤을 겪으며 무섭도록 强해진 檢察이 마침내 自身의 목에 칼끝을 들이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勿論 그에 對한 檢察搜査가 不當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 當時 檢察이 盧武鉉 大統領의 弱點을 단단히 잡고 있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國家元首는 在任 中 刑事訴追 對象이 아니므로 그 程度에서 덮었다는 거죠.

    “記錄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 뒤 關心을 갖고 追跡하는 言論이 없습디다. (搜査結果 發表 當時) 正確한 文句는 이래요. ‘檢察 나름대로의 結論을 갖고 있지만 大統領에 對해서는 憲法上 規定이 있으니 이 問題는 더 言及하지 않겠습니다.’ ‘檢察 나름대로의 結論’은 제가 생각해낸 表現입니다. 表現을 두고 하도 苦悶들 하기에.”

    ▼ 그 意味가 무엇입니까?



    “그대로입니다. 只今은 다 끝난 일이죠. 退任 後에도 그 部分에 對해 搜査하지 않았으니.”

    ▼ (盧 大統領이) 돈을 받는 데 直接 干與한 情況도 確認했다는 뜻인가요?

    “거기에 對해선 제가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 額面 그대로 解釋하시면 됩니다.”

    ▼ 額面 그대로 解釋하면, 有罪라는 얘기인가요?

    “(웃음) 자꾸 그렇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處地 곤란하게.”

    송광수(59) 前 檢察總長은 一部 質問 內容에 곤혹스러워했지만 代替로 誠意 있게 答辯했다. 그는 나와 세 次例 만나 自身이 28年 동안 몸담았던 檢察에 對한 記憶을 5時間 동안 풀어놓았다. 그가 2005年 4月 退任한 以後 本格 인터뷰에 應한 것은 이番이 처음이다.

    그는 노무현 前 大統領에 對한 記憶과 강금실 前 法務部 長官과의 葛藤, 檢察人事를 둘러싼 紛爭, 大選資金 搜査 祕話 等에 對해 昭詳하게 털어놓았다. 類例없는 大選資金 搜査로 自身을 임명한 大統領에게 致命打를 입혔던 參與政府 첫 檢察總長의 證言을 통해, 우리는 政治權力의 뒷모습과 權力의 向背에 敏感하게 反應해온 檢察의 屬性과 메커니즘, 權力機關 間에 벌어진 파워게임의 實體를 엿보는 한便 盧 前 大統領을 죽음에 이르게 한 檢察搜査의 뿌리가 무엇인지 斟酌하게 될 것이다.

    “스폰서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宋 前 總長은 現在 法務法人 金&腸 拷問이다. 退任 後 個人法律事務所를 運營하다 지난해 8月 金&張으로 옮겼다. 金&腸 辯護士들은 크게 諮問팀과 訟務팀으로 나뉜다. 諮問팀은 事件 受任 前 法律的 問題를 檢討한다. 主要 顧客과의 法律 相談과 諮問이 主 業務인 宋 前 總長은 受任이나 裁判에는 關與하지 않는다고 한다.

    ▼ 檢察 高位職을 지낸 人士들이 檢察에 電話해 事件에 對해 알아보거나 辯論하는 境遇가 많지요?

    “예전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요즘은 그것도 問題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안 하죠. 過去처럼 電話 안 합니다.”

    ▼ 前官禮遇가 있지 않습니까. 로펌度 그런 걸 期待해 迎入하는 것이고.

    “저도 總長 해봤지만 電話한다고 봐주지도 않아요.”

    ▼ 金&張으로 옮겨온 後 檢察에 한番도 電話한 적이 없나요, 事件과 關聯해?

    “한番도 안 했습니다.”

    ▼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했다 하길 바라는 겁니까.(웃음)”

    ▼ 於此彼 辯護士인데요.

    “電話로 하는 辯論은 認識이 안 좋죠. 誤解받거나 욕먹을 짓은 아예 안 하는 게 낫죠.”

    ▼ 몇 年 前 檢察 高位職을 지낸 사람은 退任 後 얼마 동안 事件 受任을 못하게 해야 한다는 論議가 있었지요?

    “그건 檢察總長에 局限해 얘기할 게 아니라 法院이나 다른 政府機關 高位職 出身들에 對해서도 檢討해야겠지요. 關聯 業務를 안 맡는 동안 政府에서 代身….”

    ▼ 生活費를 줘야겠네요.

    “生活費야 뭐 退職金이 나오니까…. 何如間 綜合的인 檢討가 이뤄져야겠지요.”

    그는 個人 辯護士 時節 多段階詐欺 嫌疑로 拘束된 JU그룹 代表 朱水道氏 辯論을 맡았다가 輿論의 叱咤를 받고 손을 뗐던 아픈 經驗이 있다.

    “제 後輩 辯護士가 그분(朱水道氏)과 가까워요. 그분과 關聯된 事業도 하고. 그 後輩 辯護士가 찾아와 (朱水道氏가) 抑鬱하다고 해서 맡았다가 魂이 났지요. 나중에 後輩 辯護士한테 짜증도 냈지만, 다 내 잘못이지요. 누구를 탓하겠어요?”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말하는 ‘검찰과 정권’

    2003年 4月3日 盧武鉉 大統領에게 任命狀을 받는 송광수 檢察總長.

    ▼ 천성관 檢察總長 內定者 辭退 波動은 어떻게 보십니까.

    “천성관 檢事는 제가 法務部 課長 할 때 같이 일했어요. 머리도 좋고 일도 참 잘했습니다. 聽聞會 때 提起된 疑惑 中 大部分은 곁가지高, 집이 問題가 된 거지요.”

    ▼ 한마디로 스폰서 疑惑 아닙니까. 巷間엔 檢事들이 스폰서 한두 名씩은 거느리고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웃음) 요즘 檢事 스폰서 해서 得 보기를 期待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 總長님은 없었습니까.

    “전 없었습니다.”

    ▼ 周邊에서 얘기는 들으셨겠지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요. 先輩 檢事 中 누구에게 어떤 스폰서가 있다고…. 그런데 저는 이것(聽聞會 波動)李 社會 發展過程이라고 생각합니다. 言論人도 스폰서 있지 않습니까. 예전엔 言論社 編輯局長, 社會部長들 다 스폰서가 있었습니다. 힘 있는 자리엔 다 스폰서가 있습니다. 어쨌든 스폰서 文化는 없어져야죠.”

    내기바둑 參見하다가 맞을 뻔해

    慶南 馬山에서 태어난 그는 4남1女 中 셋째다. 初等學校 卒業 後 서울로 올라와 兄과 함께 下宿을 했다. 서울中과 서울고를 나온 後 1967年 서울대 法學科에 入學했다.

    學窓時節 그는 무척 內省的인 性格이었다.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것을 宏壯히 수줍어했다. 只今까지 그런 習性이 남아 있는데 그나마 軍法務官으로 勤務할 때 敎官을 하면서 좀 나아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檢査가 꿈이었다. ‘장비호’라는 探偵小說이 人氣를 끌었는데 그걸 耽讀하면서 漠然히 搜査하는 職業을 憧憬했다. 型의 家庭敎師를 하던 考試生의 檢事 禮讚論에도 影響을 받았다.

    高等學生 때 模範生이던 그는 圖書館에서 冊 읽는 게 趣味였다. 特記할 點은 바둑에 미쳤었다는 事實. 中3 때 배웠는데, 高1 때 벌써 1級의 實力을 갖췄다.

    “그때 아주 미쳤었지요. 아버지한테 프로棋士 되겠다고 日本 보내달라고 했다가 호되게 야단맞았지요. 高3 때 精神 차려 죽을 판 살 판 工夫했어요. 그때는 只今보다 大學 들어가기가 쉬웠습니다.”

    現在 그의 氣力은 아마 6段. 大學生 時節엔 校內大會에서, 檢査를 할 때는 全國 公務員 部處別 對抗戰에 나가 優勝한 經歷을 갖고 있다.

    ‘獨逸 兵丁’

    아버지가 事業을 해서 집안은 넉넉한 便이었다. 그가 高等學校 卒業할 무렵 父親의 事業 物品을 쌓아뒀던 倉庫에 큰불이 났고 以後 家勢가 기울었다. 그는 大學生 때 아르바이트로 學費를 벌었다. 卒業하던 해인 1971年 司法試驗(13回)에 合格했다. 司法硏修院 成績이 좋으면 大體로 判事를 志望하는 게 法曹界 風土다.

    “자랑은 아니지만 硏修院 成績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꿈이 檢事 아니었습니까. 罪 지은 사람, 잘못한 사람을 審判해야 한다는 그런 素朴한 생각이었지요. 只今도 눈앞에 잘못된 게 보이면 그냥 못 있는 性格입니다. 甚至於 내기바둑을 구경하면서 꼼수 쓰는 사람한테 한소리했다가 된통 얻어맞을 뻔한 적도 있어요. 나이 들면서 操心해야지 하면서도 잘 안 돼요.”

    1977年 任官한 그의 첫 勤務地는 서울地方檢察廳 水原支廳(現 水原地檢)이었다. 그가 檢察에서 걸어온 길을 보면 搜査通이라기보다는 企劃通이라 할 만하다. 釜山地檢 特殊部에서 痲藥搜査를 할 때를 빼고는 特別히 눈에 띄는 搜査를 한 적이 없다. 서울地檢 刑事3部長 時節 大學入試不正 事件을 搜査한 게 꼽힌다.

    釜山地檢 勤務 後 檢事들의 羨望인 法務部 檢察1課로 發令이 났고 以後 大檢 硏究官을 거쳐 法務部 檢察4課長, 檢察2課長을 지냈다. 1991年엔 ‘檢察의 皇太子’로 불리는 法務部 檢察1課長을 꿰찼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다.

    “檢事 時節 ‘獨逸 兵丁’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저는 그게 듣기 좋았습니다. 徹底히 일하니까 그런 말을 듣는구나 하고. 勿論 幹部가 되고 指揮官이 되면 조금 물렁한 맛도 있어야죠. 그런 點에서 不足한 點이 많았습니다. 後悔되는 게 많아요.”

    人事에서 挫折을 느낀 적이 없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廉恥없는 놈이지요. 오히려 惠澤을 많이 입었지요. 同僚나 後輩들에게 未安하지요. 檢事長度 제때 됐고요. 다만 사치스러운 얘기지만, 김대중 政府 初期 내가 釜山高檢 次長을 1年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人事 때 司法硏修院 副院長으로 보내더라고. 나는 別로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 周邊에서는 左遷이라고 하더라고요.”

    “在寅아. 담배 한 대 주라”

    널리 알려진 대로 김대중 政府 時節 檢察은 湖南 出身 檢事들이 主要 補職을 獨占하다시피 했다. 그는 湖南 出身 同期生들에게 밀리는 渦中에서도 檢察의 4代 補職으로 꼽히는 法務部 檢察局長을 지냈다. 檢察局長은 檢察의 人事와 豫算을 짜는 核心 補職으로 歷代 檢察總長 中에는 이 자리를 거쳐 간 사람이 많다.

    노무현 政權 出帆 當時 그는 大邱高檢長이었다. 그는 自身이 總長으로 拔擢된 經緯에 對해 “모르겠다”고 했다.

    ▼ 노무현 政權에 가까운 人士가 없었나요?

    “正말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 어떻게 推薦됐다는 얘기는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못 들었습니다. 當時 제가 大檢 次長 간다는 說도 돌았는데, ‘檢事와의 對話’가 쾅 터졌어요. 日曜日이라 서울에 올라가 있었는데 TV로 그걸 보다가 ‘아이쿠 큰일났다’ 싶어 그날 밤 大邱로 내려왔어요. 大統領께서 ‘나는 只今의 檢察 指揮部를 못 믿겠다’라고 하셨잖아요. 總長이 그만둘지 모르는데 高檢長이 勤務地를 떠나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그길로 내려왔지요. 밤에 到着해 食堂에서 밥 먹는데 TV에서 ‘檢察總長 辭意 表明’뉴스가 나오더라고요.”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말하는 ‘검찰과 정권’

    2003年 9月4日 밤 이른바 ‘補身湯 會同’을 마치고 나오는 송광수 檢察總長과 강금실 法務長官.

    다음날 靑瓦臺에서 電話가 걸려왔다. 올라오라고 했다.

    “大統領께서 뵙자고 하더라고요. 저녁食事를 하면서 얘기하자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오늘 靑瓦臺에서 저녁을 먹으려면 勤務時間에 나가야 한다, 그러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겠느냐, 그러니 오늘 밤에 올라가 來日 아침에 들어가겠다고.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예전 政府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何如間 다음날 마누라가 運轉한 車를 타고 靑瓦臺로 들어갔습니다.”

    ▼ 大統領이 뭐라 하던가요? 初面이었겠네요?

    “初面이지요. 뭐, 잘하라고.”

    ▼ 檢察에 對한 不信을 言及하진 않던가요?

    “그런 말씀은 없었습니다. 새 總長 될 사람 앉혀놓고 뭐 氣分 나쁜 얘기를 하겠습니까.”

    ▼ 盧 大統領에 對해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참 素朴하시데요. 문재인 民政首席도 같이 食事를 했는데, 두 분이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 아 過去에 내가 생각했던 大統領 모습과는 참 다르구나 싶더라고요. 門 首席이 담배를 꺼내 물더니 大統領 앞에 놓인 라이터를 가져가 불을 붙이더라고요. 大統領도 ‘在寅아. 담배 한 대 주라’ 그러시더라고요.”

    “總長이 높다 해도 大統領 밑이다”

    얼마 後 그는 靑瓦臺에서 盧 大統領과 한 番 더 마주 앉았다. 總長 人事聽聞會가 끝난 다음날 任命狀을 받는 자리였다. 강금실 長官과 문재인 首席이 陪席했다.

    “이 兩班이 任命狀을 주시고 나서, ‘어제 聽聞會하는 걸 보니 總長님이 뭐 내 생각하고 다른 말도 많이 합디다’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聽聞會 通過하려면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하시는 겁니다. 國家保安法과 한총련 問題를 마음에 두신 것 같더라고요. 가만히 있었더니, ‘檢察總長이 높다 해도 大統領 밑에 있습니다. 檢察總長은 大統領의 統治哲學을 따라야 합니다’ 딱 이러시는 거예요. 統治哲學을 따라야 한다는 건 맞는 말씀이지만, 銳敏한 問題에 對해서는 따를 수가 없겠더라고요.”

    ▼ 앞으로 좀 疲困하겠구나, 싶었겠네요.

    “當場 그런 생각은 안 들고요. 大統領 앞에서 ‘承服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 말 없자 그 兩班이 조금 답답한지 ‘國民이 가장 위에 있고 그 다음에 大統領이 있고 總長은 그 밑에 있습니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예. 맞습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또 ‘그렇기 때문에 檢察總長은 大統領의 統治哲學에 따라야 합니다’ 하고 다시 한番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고개 딱 숙이고 있었습니다. 雰圍氣가 안 좋아졌죠. 그런데 강금실 長官이 ‘大統領님, 오늘은 氣分 좋은 날이니 茶나 한盞 주십시오’ 그랬어요. 그래서 끝났지요. 茶 한盞 마시고 얼른 나왔지요. 앞으로 참 어려운 일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나중에 靑瓦臺나 姜 長官과 많이 부딪쳤지요?

    “한총련, 國家保安法 問題….”

    ▼ 송두율 敎授 件도 있고.

    “그때는 엄청 싸웠지요.”

    “나를 먼저 調査하라”

    姜 長官과 宋 總長이 衝突한 事例 中 代表的인 것이 2004年 3月에 發生한 大統領 彈劾 反對 촛불集會 主動者들에 對한 逮捕令狀 請求다. 檢察이 逮捕令狀 請求事實을 事前에 法務部에 報告하지 않았다고 해서 論難이 일었다. 法務部와 大檢은 이 問題로 날선 攻防을 벌였다. 主要 事件에 對해서는 事前에 法務部에 報告하는 것이 그間의 慣例였다.

    “(大檢) 公安部에서 報告를 하면서 ‘法務部에는 어떻게 할까요’ 묻더라고요. 서울地檢에서 물어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令狀을 請求하면서 法務部에 報告하라’고 指示했습니다. 實際로 그렇게 했습니다. 다만 미리 보고하진 않았죠.”

    ▼ 法務部 側에선 그런 報告는 意味가 없다고 激忿했지요?

    “그렇죠. 一種의 通報죠. 그런데 그게 그래요. 報告內容이 長官 口味에 맞는 거면 앞에 하든 뒤에 하든 어떻습니까. 令狀을 請求한 것 自體가 맘에 안 들었던 거죠. 그런 걸 法務部에 事前에 알려주면 시끄러울 것 아니에요. 서울地檢에서 ‘法務部에 보고 안 해도 되냐’고 물어보기에 ‘總長 指示라고 하라’고 했지요. 그間 一線 檢察廳은 主要 事件의 境遇 情報報告 次元에서 大檢과 法務部 兩쪽에 同時 報告를 해왔습니다. 事實 法務部에 對한 情報報告는 法에 없는 겁니다. 法務部 內規日 뿐입니다. 法務部에서 搜査와 關聯해 자꾸 檢察에 뭘 注文하니까 檢察의 中立性이 毁損됐던 것 아닙니까. 그래서 法務部에 建議해 그 制度를 고치자고 했더니 反對하더라고요. 長官이 우습게 된다고. 그런 狀況에서 그 事件이 일어났던 겁니다.”

    事件 直後 大檢은 法務部의 要請에 따라 經緯를 說明하는 報告書를 提出했다. 法務部는 그걸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調査團을 보내겠다고 通報했다.

    “아침에 出勤해 엘리베이터에 타는데 記者들이 물어보는 겁니다. 法務部에서 調査團 보낸다는데 어찌할 거냐고. 그래서 내가 ‘調査는 무슨 調査? 調査하려면 나부터 調査하라’고 말했지요. 事實 지나가는 말처럼 한 얘긴데, 記者들이 그걸 또 法務部와 大檢이 大판 싸우는 것처럼 報道해서….”

    當時 참여연대 常任執行委員長이던 차병직 辯護士의 글이 檢察 안팎에서 話題가 됐다. 車 辯護士는 參與連帶 홈페이지에 올린 ‘송광수를 調査한다’라는 글에서 宋 總長의 發言을 長官에 對한 抗命으로 規定하면서 “宋 總長이 姜 長官을 落馬시키려는 戰略의 一環으로 촛불示威 事態를 意圖的으로 키웠다”고 主張했다.

    ▼ 그 글에 抗議는 안 하셨습니까.

    “안 했어요. 自己 생각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總長이 長官을 어떻게 落馬시킵니까. 뭘 모르는 사람이에요.”

    ▼ 實際로 長官을 흔들려는 意圖가 있었습니까.

    “흔들려고는 안 했지. 逮捕令狀이 꼭 必要하다고 생각했어요. 法을 無視하고 촛불集會를 하고 (警察에) 나오라고 하는 데도 안 나오던 사람들 아닙니까.”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말하는 ‘검찰과 정권’

    2003年 11月3日 안대희 中搜部長과 함께 構內食堂으로 向하는 송광수 檢察總長이 決然한 表情을 짓고 있다.

    ▼ 法院은 令狀을 棄却했지요?

    “그렇게 싸움하는데 發付해주겠어요? 어쨌든 우리가 令狀을 請求하니까 그쪽에서도 態度를 바꿔 나오겠다고 했잖아요. 結果的으로 잘된 거죠.”

    ▼ 한총련 問題로도 부딪쳤죠? 姜 長官이 한총련 主動者 手配 解除 方針을 밝혔는데, 檢察은 反對했지요?

    “犯法行爲를 한 사람들이 自首해서 잘못을 認定하고 앞으로 한총련에 다시 加入하지 않으면 拘束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法을 適用하는 건 檢察입니다. 長官이 總長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法律로 保障된 指揮權을 行使하면 되죠. 指揮權을 記者會見 方式으로 行使하면 안 되는 거죠.”

    ▼ 指揮權 行事는 文書로 해야죠? 姜 長官이 在任 中 指揮權을 行使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長官이면 따른다”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를 받은 在獨(在獨) 敎授 송두율氏 處理를 놓고도 兩側은 날카롭게 對立했다. 姜 長官은 記者들과 밥 먹는 자리에서 宋氏 拘束에 反對한다는 意見을 밝혔다. 하지만 檢察은 宋氏를 拘束했다.

    ▼ 長官이 그렇게 말하면 總長으로서 負擔스럽지 않습니까.

    “負擔을 가졌어요. 大統領께서도 國會에서 비슷한 趣旨로 말씀하셨지요. 1審에서는 大部分 有罪로 認定됐는데, 高等法院에서는 主要 嫌疑가….”

    ▼ 다 깨지지 않았습니까.

    “無罪가 宣告됐는데… 그 事件에 對해선 眞짜 할 얘기가 많습니다. 宋氏를 拘束하지 않으면 앞으로 다른 國家保安法 事件을 搜査할 수 없다는 게 檢察 意見이었습니다. 그런 論理로 法務部를 說得했고 法務部도 檢察 方針이 變하지 않는다는 걸 위에 報告했어요. 그래서 檢察 意見대로 拘束하고 起訴했죠. 팽팽한 緊張關係가 있었습니다.”

    ▼ 當時 제가 듣기로는 宋 總長께서 姜 長官에 對해 長官 待遇를 안 했다고 하더군요.

    “그분이 長官으로 就任하고 나서 제가 任命됐습니다. 總長이 長官으로 待遇하지 않는다고 해서 長官이 아닌 건 아니잖습니까.”

    ▼ 當時 檢察 氣流가 그렇지 않았나요? 姜 長官에 對한 拒否感이 컸지요?

    “그런데 檢察組織이 그래요. 마음에 안 들더라도 長官이면 깍듯이 對합니다.”

    ▼ 잘 따랐다고요?

    “壯觀이라도 不當한 指示를 하면 못 따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不和가 있는 것처럼 비쳤던 거죠. 저의 10年 後輩지만 ‘長官님’ 하면서 따랐지요. 다만 業務的으로 衝突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2003年 8月 下旬 參與政府 出帆 後 두 番째 檢察 人事가 斷行됐다. 人事結果를 두고 法務部와 大檢은 葛藤을 빚었다. 그해 4月에 있었던 첫 番째 人士가 宋 總長이 主導한 것이라면 8月 人事는 姜 長官의 作品이라는 게 定說이었다.

    ▼ 當時 檢察總長의 側近이라 할 만한 檢察 幹部들이 願하는 자리로 못 갔지요?

    “願하는 자리로 못 간 程度가 아니라 아주 虐殺을 當했지요. 엉뚱한 자리로 左遷을 當했지요.”

    ▼ 왜 그랬지요?

    “모르겠어요.”

    ▼ 姜 長官이 意圖的으로 그랬나요?

    “그러기야 했겠습니까. 갈 때가 됐으니 갔겠지요.”

    “長官이 人事를 몰라서”

    이 무렵 宋 總長과 姜 長官의 葛藤은 大檢이 姜 長官의 核心參謀인 法務部 政策企劃團長 A檢査에 對해 懲戒를 請求하면서 絶頂에 이르렀다. A檢査가 法曹브로커에게 不正한 돈을 받았다는 嫌疑였다.

    그런데 懲戒 請求 時點이 人事 直後라서 ‘誤解’가 빚어졌다. 人事에 不滿을 품은 大檢 側이 報復性 懲戒를 請求한 것 아니냐는 視角이었다. 이에 對해 大檢 側은 “監察調査는 한 달 前에 始作됐고 뒤늦게 嫌疑事實이 確認돼 懲戒를 請求한 것뿐”이라고 說明했다. 하지만 檢察 안팎에선 A檢事의 嫌疑에 對해 論難이 일었다. 確實한 證據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結局 大檢 檢事長들도 參席한 法務部 懲戒委員會에서 A檢査는 6對 1의 決定으로 無嫌疑 處分을 받았다.

    8月 人事 以後 한나라당 議員이 多數인 國會 法査委는 ‘長官은 總長의 意見을 들어 大統領에게 人事를 提請한다’는 條文을 새로 만들었다.

    ▼ 曖昧한 表現이네요.

    “過去에 비하면 發展한 거죠. 人事 때 檢察總長의 意見을 反映하는 制度的 裝置를 마련한 것이니. 檢察은 職務上 獨立된 機關입니다. 그럼 뭘로 牽制하느냐. 人事權밖에 없는 거죠. 日本에서 오랜 硏究 끝에 나온 겁니다. 長官이 人事權으로 檢察權을 牽制한다는 理論이죠.”

    ▼ 長官과 어떤 方式으로 人事를 協議합니까.

    “一旦 둘이서 만나죠. 各自 參謀들이 만든 資料를 갖고. 만나서 人事의 基本方向을 定합니다. 예컨대 昇進은 몇 回까지 할 건지, 主要 補職은 몇 膾가 맡을 건지, 서울과 地方 交流人事는 어떻게 할 건지….”

    ▼ 具體的인 人選은?

    “그런 다음 具體的인 人事案을 갖고 한 番 더 만납니다. 이때는 主要 補職에 對한 各自의 意見을 나눕니다. 主要 補職이 定해지면 나머지는 大檢 次長과 法務部 檢察局長이 相議해 基礎案을 만듭니다. 이에 對해 長官과 總長이 意見을 냅니다. 漸漸 좁혀지면서 整理가 되는 거죠.”

    ▼ 主要 補職 人事에는 靑瓦臺나 政權 實勢들의 입김이 作用하지요?

    “안 해봐서 모르겠습니다.”

    ▼ 法務部 檢察局長度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暫時 沈默한 뒤 말을 꺼냈다.

    “깊은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檢察局長 할 때 長官은 최경원氏였고 實勢라는 신승남氏가 總長이었습니다. 申 總長이 特檢 搜査로 물러난 後 이명재 總長이 赴任했죠. 崔 長官이 이 總長과 協議해 人事를 準備하다가 更迭됐습니다. 그걸 보면서 主要 補職 人事에 對한 調整이 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狀況이 벌어질 수도 있구나 하고.”

    그는 “主要 補職을 長官과 總長이 決定한다고는 하나 計量化된 點數가 좋아야 그 자리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제가 總長 하면서 特定 騎手의 檢事들에 對한 評價資料를 본 적이 있어요. 上位圈을 보니 제가 알고 있는 一般的인 評價와 거의 一致하더라고요.”

    “靑瓦臺에서 人事 關與 안 했다”

    2004年 2月 定期人事를 앞두고 姜 長官과 宋 總長은 또 한番 衝突했다. 姜 長官이 豫定대로 人事를 하려 하자 宋 總長이 “大選資金 搜査 中”이라는 理由를 내세워 强力히 反對했던 것. 結局 靑瓦臺의 仲裁로 定期人事는 4月 總選 뒤로 延期돼 6月初에야 이뤄졌다. 한 달 뒤 姜 長官은 更迭됐다.

    ▼ 當時 大選資金 搜査가 마무리 段階 아니었나요?

    “나는 修辭를 다 끝내고 (人事를) 하자고 했지요.”

    ▼ 當時 法務部 側에서는 大檢이 長官의 人事圈에까지 挑戰한다고 여겼죠?

    “長官이 人事를 몰라서 그래요. 搜査팀 몇十名을 남겨둔 채 어떻게 人事를 합니까.”

    ▼ 아니, 元來 다 같이 하려 했는데 宋 總長께서 搜査를 理由로 反對한 것 아닙니까.

    “끝나고 나서 하자고 했죠.”

    ▼ 姜 長官이 몹시 憤慨했다고 들었습니다.

    “姜 長官이야 자꾸 改閣說이 나오니 自己가 있을 때 하고 싶었던 거죠.”

    ▼ 當時 靑瓦臺가 大檢에 弱點이 잡혀 大檢 便을 들어줬다는 얘기가 나왔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檢事長 人事는 했잖아요.”

    ▼ 一部에 局限된 人士였죠.

    “姜 長官도 (側近인) 이훈규 檢事를 승진시키는 데 내가 反對하다가 나중에 同意하니까 滿足했지요. 큰 짐을 던 거죠.”

    ▼ 큰 搜査가 進行되고 있으면 人事를 演技하는 게 慣例인가요?

    “그런 境遇 人事를 한 적이 있었나요? 그리고 大選資金 搜査는 워낙 많은 人員이 投入됐어요. 그 사람들 苦生했는데 좋은 補職 줘야 할 것 아닙니까. 搜査하는 데 人事發令이 나서 누가 어디로 간다는 둥 周邊이 시끄러우면 搜査에 集中할 수 있겠습니까.”

    ▼ 2004年 6月 人事 때는 어땠습니까.

    “姜 長官이 저와 相議하면서 했습니다. 몇몇 補職을 빼고는 意見 差異가 別로 없었습니다. 意見이 다른 部分은 折衝을 했죠. 大檢 次長과 法務部 檢察局長度 많이 協議했지요.”

    ▼ 노무현 政府 初期 檢察人事는 歷代 政權에 비해 地域色이 덜한 便이었죠?

    “靑瓦臺에서 別로 關與하지 않았습니다. 注文事項이 過去보다 적었다고 봐야죠.”

    ▼ 李明博 政府 出帆 後 檢察 人事에서 TK(大邱·慶北) 出身이 要職을 다 차지했다고 말이 많았죠?

    “當然히 갈 사람이 간 건데도 特定地域 出身이라고 統計에 넣는 境遇가 많아요. 그런 表現은 신중할 必要가 있습니다. 政權이 바뀌면 으레 그럴 것이라는 先入觀을 버려야 합니다.”

    “靑瓦臺 電話라요”

    이제 大選資金 搜査 얘기를 해보자. 歷代 政權에선 靑瓦臺와 檢察 사이에 이른바 핫라인이란 게 作動했다. 靑瓦臺 民政首席室이 公式 窓口였다. 하지만 參與政府에서는 핫라인이 끊겼다는 게 定說이다. 宋 前 總長도 이에 同意했다.

    “그런 問題로 김대중 政府 때 하도 批判을 받아 極力 警戒했습니다. 그래서 公式 라인이 없었습니다. 法務部를 통해 들어오는 것 外엔 靑瓦臺와 對話한 적이 없어요. 大統領 就任 後 대여섯 달쯤 後 大選資金 搜査가 始作됐습니다. 최도술氏(當時 靑瓦臺 總務祕書官) 이름이 公開되기 前 搜査팀은 이미 資金追跡에 들어간 狀態였습니다. 靑瓦臺와는 緊張關係日 수밖에 없었지요. 當時 搜査받던 企業은 大選 때 與野 兩쪽에 다 돈을 줬거든요. 그 狀況에서 對話라인을 트면 誤解 살 수 있으니 서로 避했습니다.”

    ▼ 民政首席이나 大統領이 電話한 적 없었나요?

    “業務와 關聯해선 없었습니다. 다만 大統領께서 이런 電話를 한 적은 있습니다. 大選 政治資金에 問題가 많다, 이 問題에 對해 靑瓦臺에 들어와 相議를 하자고.”

    ▼ 언제였지요?

    “大選資金 搜査內容이 公開되기 前이었어요. 資金 追跡을 하고 있을 때였지요. 그걸 報告받고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아침 집으로 電話를 하셨어요. 들어와서 床의 좀 하자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檢察이 그 問題에 對해 搜査를 할 수도 있는데 大統領님을 뵙고 나면 그 搜査結果가 공정하다고 國民이 믿겠습니까. 제가 들어가는 건 適切치 않다고 봅니다. 그러자 大統領께서 ‘아, 그렇습니까. 알았습니다’ 하면서 끊으시더라고요.”

    ▼ 예전 같으면 想像하지 못할 일이군요. 大統領이 보자는데.

    “檢察이 政治的으로 獨立하지 못했다는 批判을 하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제가 剛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狀況이었죠. 搜査 初期 搜査對象이 될지도 모르는 분과 만나서, 壓力은 아니더라도 어떤 얘기를 듣는다면 나중에 國民이 뭐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絶對 따를 수 없더라고요.”

    ▼ 大統領이 直接 電話했나요?

    “出勤 前에 洗手하고 있는데, 祕書官이 했어요. 집사람이 받았지요. ‘靑瓦臺 電話라요’ 해서 받았더니 ‘大統領님 바꾸겠습니다’ 하더라고요.”

    ▼ 時點이 正確히 언제죠?

    “최도술氏 이름이 公開되기 한 달쯤 前이니 9月初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宏壯한 保安이 必要한 搜査

    그는 그 뒤로는 大統領의 電話를 받은 적도 없고 따로 만난 적도 없다고 했다. 檢察은 2003年 10月15日 최도술 靑瓦臺 總務祕書官을 斡旋受財 및 政治資金法 違反 嫌疑로 拘束했다. 大選 後인 2002年 12月25日 SK그룹 손길승 會長한테 讓渡性預金證書(CD) 11億원을 받은 嫌疑였다. 檢察 搜査記錄에 따르면 崔氏는 이 CD를 釜山 地域 事業家로 盧 大統領의 高校先輩人 李某氏를 통해 洗濯한 後 여러 次例 나눠 받았다. 그中 5億원을 盧武鉉 大統領의 個人 債務辨濟에 使用했다는 게 崔氏의 陳述이다.

    ▼ 大選資金 搜査의 背景이 뭡니까.

    “政府 出帆 前 SK가 粉飾會計 問題로 搜査를 받았죠. 그 搜査過程에 흘러나왔어요. 巨額의 大選資金을 兩쪽으로 보냈다고요. 具體的인 額數까지.”

    ▼ 그걸 언제 아셨습니까.

    “總長 就任할 때 報告받았습니다.”

    ▼ 搜査팀이 報告했나요?

    “그때는 搜査팀이 없었어요. 搜査에 關與한 사람한테 이러저러한 諜報를 入手했다는 報告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을 만났어요.”

    ▼ 이인규 部長(當時 서울地檢 刑事9部長) 아닙니까.

    “特定人의 이름을 말하진 않겠습니다. 報告를 받고 나서, 이거 하려면 宏壯한 保安이 必要하다 싶었죠. 搜査對象이 한쪽은 靑瓦臺이고 다른 한쪽은 巨大 野黨 아닙니까.”

    SK 粉飾會計 搜査는 서울地檢 刑事9部의 作品이었다. 2003年 4月 人事 때 서울地檢 刑事9部는 金融調査部로 改稱됐고 이인규 檢事가 初代 部長을 맡았다. 이 檢査는 그해 8月 原州支廳長으로 發令났지만 곧이어 始作된 大檢 中央搜査部(中搜部)의 大選資金 搜査에 參與했다. 2009年 大檢 中搜部長에 就任한 李 檢査는 盧武鉉 前 大統領의 賂物收受 嫌疑를 搜査했고, 그가 自殺한 後 辭表를 냈다.

    ▼ 總長 就任 後 곧바로 內査를 始作했습니까.

    “바로는 못했죠. 就任하자마자 始作한 게 나라綜金 事件 再搜査였습니다. 이어 對北送金 特檢 搜査를 넘겨받았고, 현대그룹 祕資金 事件이 5, 6月頃에 始作됐죠. 그런 걸 하면서 한쪽 파트에서는 大選資金 內査를 始作했죠.”

    나라綜金 事件 再搜査는 將次 있을 大選資金 搜査의 序幕이었다. 大選 當時 노무현 候補의 政務特報이자 大選功臣이었던 염동연氏와 大選資金을 만졌던 核心 側近 안희정氏가 搜査對象에 包含됐기 때문이다. 廉氏는 拘束됐고 安氏는 두 次例 令狀이 棄却된 끝에 不拘束 起訴됐다.

    “그때부터 靑瓦臺와의 關係가 좋지 않을 것을 覺悟했죠. 나라종금 搜査는 바로 그쪽을 건드리는 것이었으니까. 大選資金 搜査를 하면서 그 輪廓이 드러났죠. (SK로부터 돈 받은 嫌疑로) 최도술氏를 拘束한 以後 왜 다른 企業은 搜査하지 않느냐는 輿論이 일었습니다. 全面搜査를 할지 말지 苦悶했지요. 戰爭은 充分히 準備하고 벌여야 하는데, 다른 企業들이 누구한테 얼마를 줬는지에 對해 充分한 資料가 없었거든요. 그 厖大한 搜査를 했다가 成果가 없으면 어떡하나 苦悶을 거듭하다가 擴大하기로 結論을 내렸습니다.”

    虛點 많았던 나라綜金 搜査

    ▼ 政權 初期 檢察이 與圈 核心部를 치는 搜査를 한 적이 過去에 있었나요? 狀況論理인가요?

    “狀況論理죠. 막다른 길이라 생각했거든요. 檢察搜査의 獨立, 政治的 中立을 하도 얘기하니 달 대로 달아 있었죠. 그런 車에 그런 諜報가 들어왔고 總長 就任 前부터 言論에서 나라綜金을 再搜査해야 한다고 해서 시끄러웠습니다. 그걸 안 할 수 있습니까. 就任 前 안대희 中搜部長을 불러 나라綜金 搜査記錄을 檢討해보라고 指示했습니다. 聽聞會 끝나기 前에 안 中搜部長이 報告하더군요. 搜査에 虛點이 많다고. 搜査 안 된 게 많다고.”

    ▼ 靑瓦臺에 搜査內容을 報告한 적은 없습니까.

    “없죠. 主要 事項은 法務部 長官에게 報告했지요.”

    ▼ 최도술氏 搜査 內容은 姜 長官에게 미리 報告했나요?

    “안 했습니다. 拘束하기 直前 이런 게 있어서 搜査하고 있는데, 身柄處理해야 할 것 같다고만 報告했습니다.”

    ▼ 姜 長官에게 搜査의 核心 內容은 報告하지 않았겠죠, 當然히.

    “主로 이미 搜査한 內容을 報告했지요. 向後 大略的인 搜査方向度 알려주고. 過去에도 미주알고주알 長官에게 報告하지는 않았어요. 重要한 內容은 안대희 中搜部長이 直接 長官에게 報告했습니다, 一般的인 內容은 中搜部 誇張이나 搜査企劃官이 法務部 檢察局長이나 該當 科長에게 傳達했고요.”

    ▼ 企業들의 嫌疑에 對해 充分한 證據가 確保되지 않은 狀態에서 윽박질러서 自白을 받아낸 것 아닙니까. 協助하면 善處하겠다면서.

    “윽박질렀다기보다는….”

    ▼ 안 그러면 싹 털어버린다고….

    “數十年間 되풀이돼온 잘못된 選擧風土를 고치는 데 企業들이 協助해달라, 協助하면 拘束하지 않겠다고 記者懇談會에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一部 企業에 對해서는 資料도 確保했고, 企業 內部에서 흘러나온 提報도 있었습니다. 그런 企業들을 먼저 搜査했죠. 그걸 보고 다른 企業들이 ‘우리도 늦지 않게 調査받자’고 나온 거죠. 그 過程을 一一이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어려운 搜査였죠.”

    ▼ 三星 搜査를 두고 指揮部와 搜査팀이 摩擦을 빚었다고 들었습니다.

    “摩擦 빚은 것 없습니다. 恒常 일이 끝나고 나면 그런 말이 나오죠.”

    ▼ 搜査팀에서 三星 構造調整本部에 對한 押收搜索을 建議했는데 上部에서 말렸다고 들었는데요.

    “말렸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다른 企業들도 다 (押收搜索을) 했던 게 아닙니다. LG만 크게 했지요. 三星만 봐준 것처럼 얘기하지 마십시오. 三星이 가장 큰 企業이니 돈을 줬다면 가장 많이 줬겠지만 다른 企業은 안 하고 三星만 하는 것도 問題죠.”

    ▼ 指揮部에서 反對한 거죠?

    “指揮部가 아니라 總長이겠죠. 何如間 (押收搜索을) 안 한 거는 기억나요.”

    “喝采 뒤를 操心하라”

    ▼ 當時 搜査팀 關係者가 辭表 낼 생각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말이 자꾸 굴러가다보면…남기춘(당시 大檢 中搜部 1課長)李 얘기했나. 電話로 只今 물어볼까.(웃음)”

    ▼ 當時 大統領 側近들이 “檢察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른다”고 말했다는 게 事實인가요?

    “하셨겠죠. 잘 모르겠습니다.”

    ▼ 總長께서 退任 後 大學 講演에서 밝히신 얘기입니다.

    “자꾸 그런 얘기 하면 제 處地가 곤란해집니다.”

    ▼ 當選祝賀金은 최도술氏가 SK에서 받은 것 하나뿐이었습니까.

    “뭐 祝賀金인지는… 何如間 大統領께 直接 ‘祝賀드립니다’ 하면서 준 건 없었죠. 못 밝혔다기보다 客觀的인 資料가 없어 못했죠. 檢察도 얼마나 밝히고 싶었겠습니까마는.”

    ▼ 권양숙 女史도 電話를 걸어 靑瓦臺에서 만나자고 했다면서요?

    “뭣 때문에 하셨는고.”

    ▼ 親姻戚 搜査와 關聯해서.

    “말씀 안 드리렵니다. 혼자된 분인데.”

    ▼ 搜査가 한창 進行 中일 때였나요?

    “親姻戚 問題는 檢察이 搜査하지 않았죠. 初期에 巨濟島에 무슨 땅이 있고…. 그런데 搜査할 만하지 못하다고 해서….”

    ▼ 노건평氏 關聯해서 말이죠?

    “예. 또 權 女史 아파트가 어떻고. 그 件은 아예 안 했어요.”

    그는 “이 얘긴 쓰지 말라”고 付託했다. 하지만 빼줄 게 있고 빼줄 수 없는 게 있다. 그의 이 證言은, 巨創하게 말하면 歷史的 記錄으로 남을 것이다. 그와 權氏에게는 未安하지만 나로선 記者의 職分에 充實할 수밖에 없다.

    ▼ 何如間 안 만나신 거죠?

    “만나자고 하기에 ‘안 가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拒絶했죠. 그런데 이런 얘기를 쓰면 그쪽에서 野俗하게 여길 겁니다. 혼자된 분인데. 그분도 總長한테 壓力을 넣으려는 게 아니라 하도 답답해서 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 大選資金 搜査가 進行되면서 大統領 側近들이 줄줄이 司法處理됐습니다. 靑瓦臺에서 아무런 얘기가 없었나요?

    “檢察에 直接 뭐라 한 건 없습니다. 法務部에 對해 섭섭해 했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왜 이런 搜査를 하느냐는 叱責이 아니라 搜査狀況이 言論에 報道되는데 왜 法務部는 가만히 있느냐고.”

    ▼ 歷代 政權에서 볼 수 없었던 關係였지요? 檢察과 靑瓦臺의 關係가.

    “正말 달랐어요. 저도 檢察에 오래 있었지만 前에 없던 關係였습니다.”

    ▼ 李明博 政府 出帆 後 노무현 政府 때 成就한 檢察의 政治的 中立性이 毁損됐다는 評價가 있습니다.

    “요즘 狀況은 잘 모르기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大選資金 搜査를 하면서 자칫 우리가 當할지 모른다는 不安感은 들지 않았나요?

    “(웃음) 不安感보다 제가 幹部들에게 이런 말은 했지요. 搜査가 成功的이니 뭐니 言論에서 하도 추켜세우기에. 喝采는 一瞬間이다, 喝采 뒤를 操心해야 한다고.”

    ▼ 大選資金 搜査의 成功要因이라면?

    “于先 搜査 意志죠. 眞實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搜査하겠다는. 그리고 搜査에 參與한 檢事들과 搜査官들의 努力이죠. 세 番째는 檢察 搜査過程에서 言論이 많이 참아주고 國民이 激勵해준 것입니다. 그게 큰 힘이 됐죠.”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말하는 ‘검찰과 정권’

    송광수 前 總長은 檢察에 對해 “長期的으로 國民의 信賴를 얻는 方案을 念頭에 두고 檢察의 使命을 다하라”고 忠告했다.

    “盧 搜査, 正當했다”

    大選資金 搜査를 主導한 大檢 中搜部는 種種 存廢 論難에 휩싸였다. 盧武鉉 前 大統領이 中搜部 搜査를 받다 自殺한 以後 論難이 한層 加熱됐다. 김준규 檢察總長은 지난 8月 人事聽聞會에서 이 問題에 對해 이른바 豫備軍式 運營方針을 밝혔다. ‘中搜部 遙遠’을 指定해 平常時엔 全國 一線 檢察廳에 配置했다가 中搜部가 直接 搜査할 必要가 있는 大型事件이 發生할 때만 召集한다는 것이다.

    宋 前 總長은 中搜部 死守論者였다. 그는 2004年 6月 法務部와 與圈에서 大檢 中搜部 廢止를 推進하자 “내 목을 쳐라”며 맞섰다. 人事 直後 轉入檢事 申告式 자리에서였다. 그의 强力한 抵抗에 結局 中搜部 廢止 論議는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와 關聯해 그는 “中搜部 位相도 時代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며 5年 前보다 柔軟한 視角을 드러냈다.

    “特殊部는 金融 分野 專門家를 迎入해 더 專門性을 갖춰야 합니다. 하지만 中搜部는 大型非理가 發生하지 않을 境遇 그 機能이 弱化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當場 없애는 건 곤란하죠.”

    그는 特殊部 搜査의 問題點도 指摘했다.

    “저는 特殊通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特殊部가 뭘 잘못하는지 알아요. 特殊部에 갇혀 있으면 몰라요. 搜査에 빠진 사람은 그 길로만 가는 겁니다. 옆에서 누가 잘못 가고 있다고 말해줘야죠.”

    ▼ 그런 點에서 지난番 盧 前 大統領을 죽음에 이르게 한 搜査는 問題가 있지 않았나요?

    “別로 없었다고 봅니다.”

    ▼ 搜査의 正當性이 아니라 搜査方式 말입니다.

    “前職 大統領 搜査를 안 하면 모르지만, 한다면 確實한 證據를 찾기 위해 그 돈을 使用한 사람들을 어찌 調査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子息들도 調査할 수밖에요. 다만 決定을 빨리 못한 게 問題입니다. 前職 國家元首에 關한 事案인데 왜 빨리 決定하지 않고 不安定한 狀態에 둡니까. 그건 決定 라인에 있던 사람의 잘못이죠. 搜査팀에서는 여러 番 建議했습니다. 그러면 總長이 決心해야죠. 그걸 안 하니 當事者가 繼續 不安한 處地일 수밖에 없었죠.”

    ▼ 拘束令狀이 棄却될 可能性 때문에 時間을 끌었다는 視角도 있습니다. 盧 前 大統領이 박연차氏한테 直接 돈을 要請하거나 받은 事實을 强力히 否認하는 狀態에서 證據라고는 朴氏의 陳述밖에 없었다는 거죠.

    “搜査內容은 全혀 모릅니다. 다만 言論報道에 따르면 搜査는 벌써 다 돼 있었습니다. 그럼 빨리 結論을 내렸어야죠. 그리고 그 程度의 搜査는 必要했습니다. (子息들이 居住한) 美國 집에 對한 搜査를 놓고 말이 많은데, 집 寫眞을 찍은 것은 檢察이 아니라 放送입니다. 豪華住宅이니 뭐니 해서. 그런데 이게 問題가 되니까 檢察에 對해서만 뭐라 하더군요. 檢察이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 檢察이 그런 걸 調査하니 言論이 取材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檢事가 調査를 안 해야 합니까. 돈을 받았다면 가장 큰 疑問이 어디에 쓰였는지 아닙니까. 當然하죠. …모르겠어요. 搜査內容을 잘 모르니. 檢察 搜査 歷史에서 하나의 敎訓이 된 事件이죠.”

    “正말 酷毒하게 監察했다”

    그는 2005年 4月 任期 2年을 마치고 拍手 속에 檢察을 떠났다. 政權과 그토록 對立하면서도 任期를 ‘無事히’ 마침으로써 檢察 歷史에 새로운 里程標를 세웠다는 評價가 나왔다.

    “檢察 改革의 核心은 搜査 獨立과 政治的 中立 아닙니까. 그걸 이룬 거죠. 國民도 그 結果를 相當히 信賴했다는 데 對해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檢察의 子正(自淨)機能을 强化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正말 酷毒하게 監察했죠. 懲戒委員會 回附 件數가 過去 10年 동안 이뤄진 것보다 많았으니까요. 檢察總長이 아니라 監察總長이라는 소리를 들을 程度였죠.

    그 다음에 內部 結束을 위해 職員들과 對話를 많이 했어요. 檢察은 二元組織입니다. 그 境界를 없애려 努力했습니다. 하루에 대여섯 番씩 一線 職員들에게 不時에 電話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檢察에 對한 國民의 不信을 조금이라도 씻는 데 寄與한 것에 對해 보람을 느낍니다.”

    ▼ 檢察의 政治的 中立과 搜査 獨立性 確保가 參與政府의 治績이라는 評價도 있는데요.

    “그리 볼 수도 있겠죠.”

    ▼ 盧 大統領도 就任 後 權力機關들과 距離를 두겠다고 公言하지 않았습니까.

    “歷代 政府와는 分明히 差異가 있었죠. 이番 政府는 잘 모르겠고.”

    ▼ 노무현 政權이 寄與한 點이 있다는 거죠?

    “있지요. 初期부터 搜査對象이 되다보니 檢察과 좋은 關係가 되기 어려운 面도 있었고요.”

    檢察總長 任期制는 노태우 政府에서 始作됐다. 하지만 任期 2年을 채운 總長은 많지 않다. 最近의 境遇만 보더라도 그렇다. 김대중 政府 以後 只今까지 檢察總長을 지낸 사람은 모두 9名. 그中 任期를 채운 사람은 박순용·송광수·정상명氏 세 사람밖에 없다. 김대중 政府에서는 김태정·신승남·이명재氏가, 노무현 政府에서는 김각영·김종빈氏가, 李明博 政府에서는 임채진氏가 이런저런 理由로 中途에 물러났다.

    “不拘束 搜査하면 되지”

    송광수氏의 뒤를 이어 總長에 오른 김종빈氏는 千正培 法務部 長官의 搜査指揮權 行使에 對한 反撥로 辭職해 話題가 됐다. ‘6·25는 統一戰爭’이라는 發言으로 物議를 빚은 강정구 敎授에 對한 身柄處理를 둘러싼 對立이었다. 檢察이 拘束 方針을 세우자 千 長官은 “不拘束 搜査하라”고 總長에 對한 搜査指揮權을 行使했다. 金 總長은 이를 受容한 뒤 辭退했다.

    宋 前 總長은 이에 對해 批判的 見解를 밝혔다.

    ▼ 宋 總長께서 그런 일을 當했다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拘束事案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程度의 發言과 冊은 大韓民國에 널려 있습니다. 敎授들 中에는 그보다 甚한 말 하는 사람도 많아요.”

    ▼ 當時 保守論客들 中에도 宋 總長님처럼 말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檢察도, 말이 짐이 된 것 같아요. 한番 말이 나오다보니. 그리고 長官이 指揮權 行使할 事案도 아닙니다. 뭘 그걸 가지고. 그렇다고 나가기는 왜 나갑니까. 不拘束 搜査하면 되지. 나갈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人品이 좋아요. 總長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못 지켰는데 그대로 있으면 後輩들이 辱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後輩들이 辱할 事案도 아닙니다. 그리고 指揮權 行使를 拒否하고 나가면 모르지만 拒否도 안 하고 나가는 게 어디 있습니까. 總長은 나가더라도 價値 있게 나가야죠. 그 程度로 자리를 버리기엔 아깝죠.”

    “나갈 거면 빨리 나갔어야”

    그는 임채진 前 檢察總長의 辭退에 對해서는 호되게 批判했다.

    “나갈 거면 좀 더 빨리 나갔어야죠.”

    ▼ 곧바로 나가면 搜査하는 데 支障을 주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盧武鉉 前 大統領이) 돌아가신 다음에 바로 나가든지, 아니면 끝까지 있든지. 中間에 그런 건 粥도 밥도 아니죠. 임 總長 性格이 그래요. 苦悶을 많이 하죠. (盧 前 大統領) 拘束도 苦悶하다가 타이밍을 놓친 겁니다. 前職 怨讐가 搜査를 받다 自殺했으면 그때 바로 나갔어야죠. 檢察 責任이 있든 없든. 後輩들은 徹底히 搜査하게 하고. 檢察을 위해서라도 나가야 합니다.”

    ▼ 責任感 次元에서 말이죠?

    “예. 그러면 國民이 辱 안 합니다. 저놈아, 사나이다, 以來 생각하죠. (辭表를) 返戾했다고 안 나가는 건 뭡니까. 그럴 거면 왜 냅니까. 出勤을 안 하면 되죠. 집에 있으면 (辭表가) 受理되는 겁니다.”

    ▼ 李明博 政府 出帆 後 一連의 査正搜査에 對해 偏頗·報復 搜査 疑惑이 提起되는가 하면 地域偏重 人事 是非, 一部 公安事件과 人事에 對한 長官과 總長의 葛藤, 最近엔 盧武鉉 前 大統領의 죽음과 總長 候補者의 落馬 等 惡材가 잇따랐습니다. 危機의 檢察에 對해 忠告를 하신다면.

    “무엇보다 國民의 信賴를 얻어야죠. 一時的으로 보지 말고 長期的으로 國民의 信賴를 얻는 方案을 念頭에 두고 檢察의 使命을 다해야 합니다. 檢察의 基本 使命이 뭐냐. 搜査 잘해서 實體的 眞實을 밝히는 겁니다. 또 搜査過程에 있을지 모를 司法警察官이나 檢事의 人權侵害를 防止해야 합니다. 只今 犯罪手法이 엄청나게 發展하고 있습니다. 내가 辯護士를 해보니 證券이나 金融 쪽은 工夫하지 않으면 못 따라가겠더라고요. 檢察도 工夫를 해야 합니다. 專門性을 갖춰 高度의 犯罪를 밝혀내야 합니다.”

    宋 前 總長은 생각보다는 疏脫하고 權威的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對話 途中 엘리트主義者의 風貌가 언뜻 비치긴 했지만 自慢心보다는 自負心으로 理解될 만했다. 그 程度의 自負心은 서슬 퍼런 政權 初期 現職 大統領의 ‘呼出’을 拒絶하는 배짱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가질 만한 것이었다.

    송광수와 爆彈酒

    송광수 前 檢察總長과 얘기하다보면 생김새에서도 느껴지지만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하기 싫은 일은 絶對 하지 않을 性格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講壇은 爆彈酒에 얽힌 逸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알다시피 爆彈酒는 過去 檢察文化의 한 象徵이었다. 그런데 그는 술을 잘 못한다. 特히 爆彈酒는 그에게 死藥과 같다.

    法務部 檢察課長 時節 서울高 同窓 모임에서 爆彈酒가 돌았다. 次例가 되자 그가 일어나 “이거 꼭 비워야 합니까” 물었다. 座長이 “비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何如間 비우면 되지요?” 하면서 돌아서서 自身의 몸에 술을 들이부었다. “비웠습니다” 하면서. 當然히 옷이 다 젖었다. 그 다음부터 그에게 술盞이 돌아오지 않은 건 勿論이다.

    “그때 내가 두 盞인가 석 盞인가 마신 狀態였다. 그 以上은 致死量이다. 그런데 자꾸 勸하기에 몸에 들이부었다. 시원했다.(웃음)”

    高校 3年 先輩인 韓國日報 고(故) 장강재 會長과의 술자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檢察 先輩와 함께한 자리였다. 얼음盞에 위스키를 부어 마시는 이른바 ‘온 더 록’을 즐기는 張 會長이 위스키를 가득 따라 돌렸다. “못한다는데도 자꾸 勸해 첫 盞은 받아 마셨다. 그때 分明히 ‘두 番째 盞은 안 마시겠다’고 했고 張 會長도 ‘當身 줄 술도 없어’ 했다. 밖에 나가 吐하고 왔는데 30分쯤 지나 또 勸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버렸다. 다음날 先輩한테 雰圍氣 망쳤다고 엄청 깨졌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日 똑똑하게 잘하면 되지 술 못 먹는다고 나를 뭐 어쩌겠나.”

    이런 일도 있었다. 亦是 檢察 先輩와 함께 한 자리였는데 술을 사는 사람이 ‘이것만 먹고 안 먹는다’ 하면서도 자꾸 술을 시켰다. 洋酒가 세 甁째 들어오자 그가 말했다.

    “局長님, 正말 이것만 마시면 안 마십니까.”

    “그렇다”라는 答辯을 듣자마자 그는 “그럼 내가 다 마시겠다” 하면서 그대로 半 甁假量을 비웠다. 그러고는 “이제 갑시다” 하고 일어섰다. 술자리는 跛行으로 끝났다.

    2003年 9月4日 姜 長官과 宋 總長은 麾下 幹部들을 데리고 京畿道 果川의 한 食堂에서 이른바 ‘補身湯 會同’을 했다. 다음날 新聞들은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나와 팔짱 낀 모습을 寫眞과 함께 크게 報道했다. 當時 일에 對해 그는 이렇게 回想했다.

    “盞술을 많이 먹고 爆彈酒를 돌렸다. 나는 盞술을 좀 마셔서 爆彈酒는 한 盞인가 두 盞 했다. 姜 長官은 석 盞쯤 마셨고.”

    그날 밤 두 사람은 무슨 얘기를 했을까.

    “뭐, 잘해보자는 거였지. 姜 長官이 사람이 착하다. 女子 몸으로 先輩들이 득실거리고 大統領이 改革하라고 하는 檢査 集團 속에서 여러 가지로 괴롭고 葛藤이 많았을 거다. 우리가 理解를 많이 한 篇이다.”


    大選資金 搜査와 ‘박연차 게이트’

    2009年 盧武鉉 前 大統領을 죽음으로 이끈 ‘박연차 게이트’ 搜査는 2003年 大選資金 搜査의 後續篇이었다. 박연차氏는 前篇과 後篇 모두에 出演했다. 바뀐 게 있다면 前篇에서는 助演이었던 反面 後篇에서는 主演이었다는 것. 나는 當時의 檢察 搜査記錄을 훑어보다가 안희정氏 部分에 이르러 새삼 戰慄을 느꼈다. 2003年 12月14日 大檢 中搜部는 안희정氏를 拘束했다. 大選 當時 出處 不明의 不法資金 5億9000萬원과 창신纖維 會長 강금원氏로부터 4億5000萬원, 썬앤문 그룹 會長 문병욱氏에게 1億원 等 모두 11億4000萬원의 不法 政治資金을 받은 嫌疑였다. 姜氏와 文氏는 모두 盧 前 大統領의 오랜 後援者였다.

    安氏는 檢察에서 태광實業 會長 박연차氏로부터 2億5000萬원을 받은 事實을 털어놓았다. 5000萬원은 大選 前 自身이 設立한 오아시스워터(週) 運營資金으로, 2億원은 大選 後 政治資金으로 받았다. 다음은 2004年 2月2日 안희정氏의 檢察陳述 內容 中 一部다.

    ▼ 被疑者는 慶南 김해시 所在 신발製造業體인 태광實業(週)을 運營하는 박연차를 알고 있는가요?

    “예. 박연차 會長님은 盧武鉉 大統領과 오래前부터 親分關係를 維持해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1999年 初旬 제가 장수천에서 生産되는 生水를 販賣하는 오아시스워터(株)를 設立하면서 運營資金이 不足하다고 했더니, 盧 大統領께서 저에게 ‘박연차 會長을 만나 資金支援을 付託해보라’고 하여… 이때 人事를 드리고 처음 알게 되었으며….”

    ▼ 被疑者가 박연차로부터 그 後에도 돈을 받은 事實이 있는가요?

    “예. 2003年 3月 初旬 19時頃 서울 장충동 所在 新羅호텔 中食堂에서 박연차 會長을 만나 2億원을 100萬원 手票 200張으로 받은 事實이 있습니다.”

    ▼ 2億원을 받게 된 經緯는 어떤가요?

    “參與政府 出帆 後였는데, 박연차 會長으로부터 連絡을 받고 만나서 食事하는 자리에서 朴 會長님이 저에게 앞으로 政治를 하는 데 使用하라면서 2億원을 주어서 받았습니다.”

    大選資金 搜査로 ‘國民檢事’ 稱號를 얻은 안대희 中搜部長은 當時 搜査結果를 發表하면서 現職 大統領과 關聯된 部分에 對해 이렇게 말했다.

    “이番 搜査의 焦點은 大統領 側近이지만 大統領이 관여된 部分도 있다. 하지만 大統領은 國家元首이고 禮遇를 해야 한다고 본다. 只今은 大統領에 對한 調査를 하지 않는 것이 妥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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