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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年 ‘將軍들의 理髮師’ 장희선 氏 “요즘 將軍들 業務 더 빡빡해진 듯” : 비즈N

50年 ‘將軍들의 理髮師’ 장희선 氏 “요즘 將軍들 業務 더 빡빡해진 듯”

손효주記者

入力 2020-01-10 20:55 修正 2020-01-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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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 理髮師’ 장희선 氏가 지난해 末 隱退 直前 서울 용산 國防部 내 將軍理髮所에서 손에 익은 가위와 빗을 들고 포즈를 取했다. 그는 지난해 12月 31日 50年 동안 해오던 將軍 理髮師 職에서 隱退했다. 國防日報 提供
장희선 氏(68)는 ‘將軍의 理髮師’였다. 陸軍本部 將軍 理髮所에서 ‘꼬마 補助’로 일을 배운 뒤 50年 가까이 ‘별’들의 머리를 만졌다. 小銃 든 軍人을 처음 보고 뒷걸음치던 16歲 少年은 웬만한 軍人보다 더 오래 軍 生活을 한 老人이 되고서야 軍을 떠났다. 지난해 12月 31日, 손에 익은 가위를 놓고 國防部 門을 나서는데 “平生 살던 집을 떠나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고 했다.

張 氏가 軍에 처음 발을 들인 건 1968年. 全南 谷城에서 上京해 먹여주고 재워줄 곳을 찾던 그의 눈에 들어왔던 일자리가 當時 서울 용산 陸軍本部의 將軍理髮所 見習生 자리였다. 龍山驛 電報대에 붙은 求人 傳單을 떼어 들고 찾아간 陸軍本部 入口엔 小銃을 맨 憲兵이 버티고 있었다. 武裝한 軍人을 처음 본 시골 少年은 몸을 떨었다. 서슬 퍼런 軍部 政權 時節이었다.

將軍들 머리를 감겨주고 理髮所 淸掃를 하던 見習生은 몇 年 뒤 陸軍本部 將軍 理髮師가 됐다. 以後 國防部 將軍理髮所로 옮겼다.

‘50年 將軍 理髮師’ 張 氏가 지켜본 軍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7日 만난 張 氏는 “70, 80年代 將軍들은 딱딱했다”고 記憶을 되짚었다. 理髮所에 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將軍의 理髮 豫約은 1人當 1時間으로 잡았는데, 그 1時間이 沈默의 時間이었다. 沈默이 바로 將軍의 體統이었다. 그 時節 權威의 象徵이던 將軍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나이가 어려 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當時 全般的인 雰圍氣가 嚴格했다”고 말했다. 當時엔 理髮所에 올 때 副官을 包含한 遂行 人員을 帶同해 威勢를 드러내는 將星도 種種 있었다.

將軍들이 아침에 理髮所를 찾을 때는 緊張한 表情이 많았다. 權威主義 그 自體이던 軍의 斷面을 보여주듯 將軍들은 上官 보고 전 通過儀禮처럼 理髮所를 찾아 드라이를 했다. 포마드를 발라 머리카락 한 가닥 삐져나오지 않게 매만진 뒤에야 報告에 들어갔다. 손에 포마드 마를 날이 없었다. 張 氏는 “每日 아침 드라이를 하러 오는 將軍도 있었다. 하루에 많게는 드라이 손님 10名을 받고 나면 津이 빠졌다”고 回想했다.

그는 “每日 아침 理髮所를 채우던 將軍들이 어느 날 한 名도 얼굴을 보이지 않아 놀란 적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將軍 理髮師와 補助 職員들이 “간밤에 亂離가 났다더라”고 수군댔다. 1979年 12·12쿠데타(新軍部 勢力의 軍事 叛亂)였다.

“우리가 다 退勤한 밤에 일어난 일이니 仔細한 事情을 알 수 없었지. 雰圍氣가 싸늘했다는 것 程度만 기억나요. 나중에 TV를 보고야 12·12 事態라는 걸 알았지.”

1993年 文民政府가 들어선 뒤 張 氏는 君의 變化를 體感했다. 于先 ‘報告用 머리’를 하러 오는 將軍이 줄었다. 그는 “只今은 특별한 行事가 있을 때를 除外하곤 드라이를 하러 오는 將軍은 없다”고 말했다.

“將軍들 머리 스타일도 자연스러워졌고 딱딱한 雰圍氣도 사라졌어요. 遂行 人員과 함께 理髮所를 찾는 將軍도 이제는 없어요.”

張 氏에 따르면 2000年代 以後 將軍理髮所는 國防部 第1理髮所에서 第2理髮所로 看板을 바꿔 달았다. 代身 領官級 以下 將校 및 公務員 等을 對象으로 한 理髮所人 第2理髮所가 제1이발소가 됐다. 이런 變化 亦是 權威主義 脫皮를 위한 軍의 努力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풀이된다.

理髮師와 거의 對話를 하지 않던 將軍들이 말이 많아진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張 氏는 “내 나이가 將星들과 비슷해져 便安해진 理由도 있겠지만, 過去처럼 理髮所에서 입을 닫고 있는 將軍은 別로 없다”며 “이제는 小小한 對話가 곧잘 오간다”고 했다. 張 氏에게 准將 時節부터 大將, 國防部 長官에 이르기까지 줄곧 머리를 맡겼던 前職 長官들 中에는 長官職을 내려놓거나 靑瓦臺에 들어간 뒤에도 種種 連絡해 安否를 묻는 人物도 있었다.

張 氏가 50年間의 將軍 理髮師 生活을 마치고 隱退하던 날 그의 단골 顧客인 鄭景斗 國防部 長官은 張 氏와 그의 아내를 長官室로 招待해 歡談을 나누고 感謝狀을 授與했다. 國防部 長官이 理髮師를 直接 챙기는 것은 過去엔 보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感謝狀엔 “國防部 職員 福祉 向上에 寄與한 功이 크다”는 內容과 함께 “有能한 安保, 튼튼한 國防에 이바지했다”는 文句가 담겼다.

張 氏는 最近 將軍들 모습에 對해 “예전엔 食事 後 또는 理髮 後에 將棋, 바둑을 두거나 하면서 餘裕 있어 보였는데 요즘은 머리를 자르다 말고 中途에 나가는 일도 흔하다”며 “將軍들 業務 環境이 더 빡빡해진 것 같다”고 했다. 特히 大陸間彈道미사일(ICBM)을 發射하는 等 北韓의 挑發이 集中됐던 2016年과 2017年엔 이런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가 머리를 만져준 國防部 長官만 25名 안팎. 將軍 數는 헤아릴 수 없다.

“나에게 머리를 맡겨준 모든 將軍들이 고맙지요. 갈 곳 없던 나를 거둬주고 키워준 國防部에 무엇보다 感謝해야죠. 軍에서 50年 넘게 惠澤을 받았으니 軍에서 쌓은 實力으로 周邊 老人들 머리를 理髮해주는 奉仕活動을 하며 살려고 합니다.”

▼“상경 渦中에 52年間 生離別… 어머니-女同生 꼭 찾아야죠”▼

장희선 氏가 50年 넘게 찾고 있는 어머니 김태순 氏와 女同生 喜子 氏의 옛 모습. 이 寫眞은 어머니 金 氏가 1964年 아들 張 氏에게 쓴 便紙에 同封해 보낸 것이다. 장희선 氏 提供


▷장희선 氏는 인터뷰 末尾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와 女同生을 꼭 찾고 싶다는 말이었다. 1968年 그는 서울로 돈 벌러 간다며 먼저 故鄕을 떠난 어머니와 女同生을 찾겠다며 서울行 汽車를 탔다. 當時 어머니는 哭聲에 있던 張 氏에게 “곧 데리러 가겠다”며 보낸 便紙에 住所 代身 ‘東大門에서’라는 글句만 남겼다. “東大門에 가면 大門에 서 있는 어머니를 바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 보니 여기도 東大門, 自己도 東大門 四方八方이 다 東大門인 겁니다.” 그는 “理髮師 일을 하며 어느 瞬間 抛棄하고 살았는데 뒤늦게라도 꼭 어머니와 女同生을 찾고 싶다”며 울먹였다. 張 氏는 過去 어머니가 보내온 寫眞을 記者에게 보내며 “어머니가 살아계실지 모르겠지만 꼭 찾아 달라”고 當付했다.

손효주 記者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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