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隣村記念會
追慕의 글

仁村 先生 誕辰1百周年 記念式 追念辭 (1991.10.11)

金壽煥 樞機卿 오늘 이 뜻깊은 자리에서 인촌 金性洙 先生에 對한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은 한便 송구스럽고 또 한便으로는 榮光스럽기도 합니다. 여러분 中에는 仁村 先生과 直接間接으로 깊은 關係를 가지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仁村 先生이 어떤 분이시며 이 世上에서 어떤 일을 하시다 가셨는 지를 昭詳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런 분들 앞에서 제가 仁村 先生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 겨레, 우리나라를 위해 어떤 훌륭한 일을 하셨고 또한 그분의 生涯가 歷史的으로 어떤 意味를 가지는 지를 말 하는 것은 외람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仁村 先生이 살아계실 때 先生을 만나 본 일이 없으며 直接的으로 어떤 關係를 가져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國民의 한 사람으로서 日帝下와 解放後 混亂期를 살아오며 間接的으로 接했던 이 나라의 많은 指導者들 中에서 인촌 金性洙 先生의 存在를 斟酌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제가 敢히 이 자리에 나온 까닭은, 仁村 先生에 關해 많은 사람으로부터 들은 바와 여러 資料를 통해 살펴본 것들을 綜合해 보면, 그 분의 生涯는 오늘의 우리가 사람의 龜鑑으로 삼기에 足할만큼 자랑스럽고 보람찬 것이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仁村 先生은 우리 겨레가 日帝의 迫害 아래서 呻吟할 때 敎育 産業 言論을 통해 民族의 力量을 키워 獨立의 길을 여는데 獻身하셨고 解放後에는 建國事業에 盡力하신 卓越한 政治指導者라는 事實은 國民들이 一般的으로 알고 있는 常識입니다. 先生은 敎育救國의 信念으로 中央學校와 고려대학교를 設立하여 수많은 人材를 키워 낸 先驅的 敎育者이며, 또 京城紡織을 創立하여 日帝下의 民族資本 育成에 獻身한 民族經濟의 土臺를 닦은 經營人이기도 합니다. 이뿐 아니라 先生은 동아일보를 創刊하여 民衆의 獨立意志를 鼓吹한 言論의 先覺者로서 敎育 産業 言論의 立體的 構成을 통해 民族力量의 伸張을 꾀하고 窮極的으로는 이를 民族의 自主獨立으로 連結하려 했습니다. 이와 같은 多邊的이고 複合的인 仁村 先生의 面貌를 玄民 유진오 博士는 <경륜가>라 表現한 바 있습니다. 仁村 先生의 平生의 同伴者로서 仁村 先生의 事業을 幕後에서 繼續 도왔던 현민의 말이므로 傾聽할만한 무게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현민의 <경륜가>란 말은 仁村 先生의 事業과 治績이 敎育 産業 言論等 多方面에 걸쳐 있으면서도 이를 相互 聯關하여 民族力量의 伸張과 自主獨立이라는 같은 目標에 모아지기 때문에 結局은 民族의 將來를 設計하고 經營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같은 經綸家로서의 仁村 先生은 한마디로 愛國愛族을 平生의 業으로 한 志士이고 信義를 生活信條로 삼았던 眼目과 識見을 갖춘 義人이었습니다. <獨立自强> <公先私後> <信義一貫> <淡泊明志> 라는 그의 座右銘들을 仔細히 헤아려보면 그가 平生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던가를 斟酌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仁村 先生을 民族敎育을 唱導한 큰 敎育者로, 或은 民族企業을 創業한 큰 企業人으로, 또는 동아일보의 抗日言論을 主導한 큰 言論人으로, 或은 解放後 建國의 礎石을 놓은 큰 政治家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表現이 仁村 先生의 참모습을 그리기에는 適切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仁村 先生은 무엇보다도 모든 類型의 사람을 한품에 包容하는 마음의 主人公 巨人이었습니다. 누구나 그 그늘에 가서 쉴 수 있는 巨木이었습니다. 先生은 中央學校와 고려대학교를 設立 運營했지만 人氣있는 敎師나 有名한 學者는 아닙니다. 또 京城紡織을 設立한 것은 事實이나 大財閥의 企業家도 아닙니다. 동아일보를 創刊했어도 待機者가 아니며 解放後 한민당의 産婆였으나 大政治家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德望있는 敎師나 有名敎授가 隣村이 經營하는 學校에서 많이 나오고 훌륭한 技術者나 産業役軍이 仁村 先生의 企業에서 나오고 日帝의 暴壓에 對抗하고 民衆의 참길잡이가 되는 待機者가 隣村의 新聞社에서 쏟아져 나오고 仁村 先生이 創黨한 政黨에서 나라의 棟梁이 될만한 大政治家가 나왔습니다. 仁村 先生이야말로 한 時代를 이끌어온 各界의 훌륭한 일꾼을 數없이 輩出한 指導者의 産婆요, 民族史의 山實果 같은 存在입니다.

仁村先生의 또다른 特徵은 <평범의 비범="">이랄까, 每事를 平凡속에서 構想하고 이를 謙虛하고 성실하게 實踐하는데 있습니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恒常 謙讓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뒷자리에 앉아서 남의 功勞를 드높여 주는 것이 仁村 先生의 局量이요 經綸이었습니다. <공선사후> <신의일관> <담박명지>等 仁村 先生의 座右銘이 모두 이같은 <평범의 비범="">을 잘 表現해 주고 있습니다.

仁村 先生의 周邊에는 恒時 나라 안의 재주있고 德望높은 人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先輩도 있고 親舊들도 있고 後輩나 弟子들도 모였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仁村 先生의 愛國 愛族의 마음에 依支하고 그의 指導를 받고자 했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을 갖다 바치고 재주있는 사람은 재주를 바쳐 仁村 先生과 함께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의 福祉를 위해 獻身할 것을 自請했습니다. 이것이 다 仁村 先生의 人品과 德望에 起因한 것입니다. 또한 仁村 先生이 人材를 아끼고 人材를 키우는 것이 부지런한 遠征과 같다 함은 너무나 有名한 이야기입니다.

仁村 先生은 天性이 人物에 對한 대단한 欲心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仁村 先生의 도움으로 工夫한 분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지만 하나같이 드러내 놓고 도와준 것이 아니라 隱然中 도와준 것입니다. 받는 사람의 自尊心에 對한 配慮라 하겠지만 그보다는 恒常 뒷전에서 일하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공을 돌리는 그의 天賦的인 謙讓의 人品탓이라 생각됩니다. 仁村 先生에게 도움을 받은 분들이 後에 그의 周圍에서 仁村 先生의 事業에 主動的으로 參與하여 그 事業이 크게 繁昌했음을 보면 그의 人材를 아끼고 사랑하는 本意가 무엇인지를 斟酌할 수 있습니다.

신의일館의 座右銘의 實體를 우리는 先生의 生涯 到處에서 發見합니다. 先生은 한番 사귄 사람들과는 大槪의 境遇 平生의 지우로 섬기고 살았습니다. 경방의 이강현이 잠깐 失手로 巨金의 會社公金을 축냈을 때 責任을 묻지 않고 繼續 함께 일하게 했다는 逸話는 仁村 先生의 人間에 對한 信賴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夢陽 呂運亨이 解放後 建準을 거쳐 共産黨에 휩쓸렸을 때에도 雪山 張德秀를 시켜 끝까지 說得케하고 그가 언젠가는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동아일보 創刊 劈頭 雪山이 左翼들의 威脅으로 困境에 處했을 때 美國留學을 보내고 남아있던 家族들을 돌본 일도 隣村의 깊이를 斟酌케 하는 좋은 보기라 하겠습니다. 雪山이 歸國後 보성전문에 奉職하다가 解放後 한민당에서 活動하며 仁村先生을 도왔던 일은 인촌과 雪山의 神의, 나아가 隣村의 끝없는 신의일館의 깊이를 엿보게 합니다.

이같은 全國의 人材들이 인촌에게 모였던 것은 그에게서는 地方色이나 地域 差別意識이 全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의 周邊에 모였던 송진우 장덕수 현상윤 최두선 조병옥 서상일 장택상 유진오 等 當代의 人物들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全國 人材의 總網羅였습니다. 그는 區別이나 差別도 없이 能力있는 人材를 찾았으며 適材適所에의 起用으로 저마다가 갖고 있는 뜻과 能力을 마음껏 發揮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仁村 先生은 내면적으로는 어떤 人物이었을까요? 한마디로 그는 담박名紙의 無欲한 天性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仁村先生 스스로도 <옆에 있어서="" 일개="" 조언자가="" 되기를="" 좋아하되="" 직접="" 그="" 局에="" 당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바가="" 아닙니다="">라 말한 것처럼 그는 恒常 믿는 사람에게 일을 밑기고 自身은 뒷전에 물러서서 이들을 돕는 것으로 職分을 삼았습니다. 中央學校 보성전문 東亞日報 경방 또는 한민당을 始作은 自身이 했지만 運營은 남에게 맡겼습니다. 間或 直接 運營一線에 나서기도 한 일이 있으나 이는 새 사람을 모시기 위한 暫定的 期限에 局限되어 있었습니다.

이같은 仁村 先生의 無欲武士의 天性的 人品은 禁慾에 가까운 私生活과 民族을 向한 奉仕精神 愛國精神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當代에 富豪 소리를 듣는 臺經營人이면서도 私生活은 一般 庶民들의 窮乏에 比肩할 만큼 儉約과 節制와 克己를 닦았습니다. 日帝末期 온 國民들이 食糧難을 겪을 때 그亦是 點心을 거르는 일이 자주 있었으며, 새로 再生한 洋服에 기운 구두를 신는 等 겉으로는 볼품없는 村老와 같았습니다. <자신에게 후한="" 자가="" 남에게="" 후할="" 수="" 없다="">는 先代의 遺訓을 몸소 實踐한 것입니다.

仁村 先生의 人間的인 偉大한 모습은 바로 이같은 克己와 謙讓의 實踐으로 世人들에게 模範을 보이고 담박과 명지로써 天下의 人材들의 마음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結集된 힘으로 民族經綸의 大長程에 나섰기 때문에 그의 學校, 그의 企業, 그의 言論, 그의 政治는 民衆 속에 뿌리를 내린 大役事로 成長할 수 있었습니다. 老子의 道德經에 있는 大國下流란 말은 큰 나라는 上流가 아니라 下流란 뜻이며 大者宜爲下란 큰 人物은 恒常 아랫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랫자리란 謙讓과 담박의 天稟이 없고서는 凡人이 흉내내기 어려운 높고 깊은 境地의 자리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福音 12張24節)고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仁村 先生은 이땅에 和解와 和平과 和合의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自身은 땅에 떨어져 죽은 그 한알의 밀씨입니다.

이제 仁村 先生 誕辰 1百周年을 맞아 이렇듯이 自身을 낮추고 自身을 죽여 한알의 밀알이 되다시피하신 先生이 더욱 그립고 우러러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社會는 我執과 獨善과 利己主義로 하여 社會共同體의 解體危機를 맞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先生은 우리 社會가 志向해야 할 價値와 德目의 스승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執權欲에 눈이 어두워 國利民福을 忘却한 政治集團이나 政治人들에게, 利潤追求의 極大化라는 迷妄에 빠져 公益과 民生을 外面한 企業과 企業人들에게, 또 豐饒의 虛像에 매달려 浪費와 放蕩에 빠진 國民들에게, 共同體的 사람을 外面하고 個人的 安逸이나 利己主義에 빠진 知識人들에게 우리는 先生의 謙讓과 담박과 名紙의 말씀을 들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탄스러운 政治人 企業人 知識人 國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自身입니다. 우리 自身이 바로 오늘의 社會를 어지럽히고 希望의 未來를 가로막는 張本人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自身과 우리 社會는 참으로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속까지 썩어 있습니다. 治癒될 希望이 있습니까? 우리는 眞正 우리 잘못을 뉘우쳐야 합니다. 우리는 變化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仁村 先生의 誕辰1百周年을 맞이하여 그분의 精神과 遺德을 참으로 기리는 길은 우리도 그 분이 몸소 實踐함으로써 보여주신 <공선사후> <신의일관> <담박명지>를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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