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變하는 것과 變하지 않는 것들|新東亞

變하는 것과 變하지 않는 것들

  • 정수복│社會學者·作家

    入力 2012-08-22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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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液體 近代性’의 時代에 살아남으려면 大勢의 흐름에 맞게 스스로를 변화시킬 準備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서 ‘柔軟性’이 가장 重要한 人間的ㆍ組織的 資質이 되었다. 물처럼 흘러야지 섬처럼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파리 5具의 뤽상부르 公園.

    對象과 너무 가까이 있으면 客觀的 描寫가 不可能하다. 對象과 일정한 距離를 維持할 때 그 形態와 質感을 있는 그대로 敍述할 수 있다.

    그런데 10年 만에 파리에서 돌아왔는데도 몇 個月이 지나지 않아 나와 서울의 風景 사이 距離가 漸次 좁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혼잡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던 場所에 가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나는 當然해지는 風景들을 다시 낯설게 보기 爲해 눈앞의 서울과 일부러 距離를 둔다. 서울에 살면서 파리 사람의 눈을 維持하려고 해본다. 그래서 프랑스 學者들이 쓴 冊들을 꺼내 읽고 圖書館에 가서 ‘르몽드’ 新聞을 찾아 읽고 인터넷으로 ‘프랑스 퀼튀르’ 라디오 放送을 連結해서 듣는다.

    中年의 社會學者가 서울을 바라보는 視線에는 어떤 偏見이 들어 있을까? 거기에 유럽 中心主義 時刻은 없을까? 20世紀에 韓國人은 스스로를 周邊部로 認識하고 中心部로 생각되는 美國과 유럽을 模倣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엘리트層일수록 英語나 프랑스語, 獨逸語를 驅使하며 先進國을 보기로 삼아 우리 社會를 이렇게 고쳐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제 日本, 韓國, 東南아시아에 이어 中國 經濟의 飛躍的 成長에 힘입어 西歐 中心主義的 偏見이 많이 줄어든 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아직도 西歐人의 視角으로 非西歐 社會의 文化를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慣習的 思考가 다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런 偏見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다른 한便으로는 西歐文明은 衰退하는 物質文明이고 東아시아文明은 떠오르는 精神文明이라면서 21世紀는 아시아的 價値와 文化가 世界를 引導해야 한다는 我田引水 格 ‘옥시덴탈리즘’도 警戒하고 있다. 西歐人들이 非西歐 社會를 偏見을 갖고 보는 것도 問題이지만 非西歐人들이 西歐文化를 또 다른 方式으로 單純化하고 歪曲해 바라보는 것도 問題다. 西로는 서로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自身과 相對方을 偏見 없이 바라보려는 努力을 끊임없이 기울여야 한다.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 變한다. 外國에서 6個月만 살다 돌아와도 物情을 모르는 村사람이 되는 듯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의 社會를 ‘液體 近代性’의 社會라고 定義하면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繼續 變하는 狀況을 觀察했다. 그런 液體 近代性의 時代에 살아남으려면 大勢의 흐름을 注視하면서 언제든지 거기에 알맞게 스스로를 변화시킬 準備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外部의 變化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킬 可能性을 뜻하는 ‘柔軟性’이 가장 重要한 人間的·組織的 資質이 되었다. 물처럼 흘러야지 섬처럼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는 今方 時代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評價를 받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變한다고 하지만 變하지 않은 것도 있다. 外形上의 變化에도 不拘하고 持續되는 慣習, 慣行, ‘文化的 文法’이 있다. 겉모습은 變했지만 속마음은 變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울의 風景 가운데는 새롭게 登場한 것도 있지만 變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있고, 變形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이 連載物은 그런 風景들을 아무 順序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보려는 하나의 작은 試圖다.

    風景#36 서울의 變化 한 世紀

    19世紀 末, 20世紀 初 開化期에 朝鮮을 訪問한 프랑스 사람들은 朝鮮의 風景을 어떤 視線으로 바라보았을까? 1888年 末 朝鮮을 訪問했던 프랑스 民俗學者 샤를 바라는 ‘朝鮮紀行’(1892)에서 다음과 같이 서울을 描寫했다.

    “언뜻 보아서는, 甚至於 서울에 이르기까지 韓國의 都市들만큼 悲慘하고 凄凉하고 가난해 보이는 都市들은 없는 것 같다.”

    1890年代 韓國을 訪問했던 英國의 女性 地理學者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코리아와 그 이웃나라들’(1897)에서 自身이 觀察한 바를 이렇게 描寫했다.

    “길들은 좁고 더러우며 개川은 液體와 固體 쓰레기를 끌어안고 있는 悲慘한 곳에 韓國人들은 산다. 그러한 곳에 짚으로 지붕을 엮고 진흙으로 壁을 쌓아올렸으며, 窓門이라고는 없는 낮은 오두幕들이 있을 뿐인데 집들 사이에 더러운 개들과 折半 또는 全部 벌거벗은 어린이들이 먼지와 흙을 뒤집어쓴 채 뛰어논다.”

    샤를 바라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다시 살아나 서울을 訪問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한 世紀가 지난 오늘날 서울 風景은 그야말로 桑田碧海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30, 40年 동안에 새롭게 造成된 江南은 말할 것도 없고 開化期에 西洋人들이 訪問했던 江北 地域의 變化도 100年 前의 모습과 比較하면 眩氣症이 날 程度다. 서울의 下水道는 깨끗하게 整備되었고 道路는 잘 鋪裝되어 먼지가 나지 않으며 草家집은 다 없어지고 高層 아파트 團地들이 들어섰다. 鍾路의 삼성생명 빌딩, 새로 지은 市廳 建物, 자하 하디드가 設計해 東大門運動場 자리에 새로 들어서는 巨大한 衣類商家, 이태원의 龍山區廳 廳舍, 한남동의 一身企業 建物 等은 世界 어느 都市의 現代式 建物과 比較해도 外形上 아무런 遜色이 없다.

    風景#37 단조로운 自動車 色相

    1980年代 初 파리에서 留學生活을 始作하면서 내가 받은 印象은 ‘多樣性’이라는 말로 要約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를 굴러다니는 自動車의 種類와 色깔도 다양했다. 1990年代 中盤 타이베이, 마닐라, 방콕 等 東南아시아 나라들의 首都를 旅行했을 때도 距離에 다양한 外製 自動車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神奇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外國 自動車 輸入이 自由化되면서 서울 거리에도 벤츠, 아우디, BMW, 미니, 푸조, 볼보, 피아트, 도요타, 포드 等 高價의 外製 乘用車들이 굴러다닌다.

    거리의 建物과 더불어 道路 위를 달리는 自動車들도 都市의 雰圍氣에 影響을 미친다. 서울과 파리의 거리 雰圍氣가 다른 理由 中 하나는 自動車의 色相이다. 파리 거리에는 빨강, 草綠, 파랑 等 밝은 色相의 自動車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서울에는 검은色과 灰色 自動車가 主潮를 이룬다. 가끔 밝은 色 自動車도 보이지만 全般的으로 自動車의 色相이 무겁다. 무거운 自動車 色깔은 한자리 하는 男子들의 洋服 色깔이나 마찬가지로 韓國의 劃一的 權威主義의 象徵일 수도 있다. 검은色 外製 乘用車는 “나 이런 사람이니까 잘 모셔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日常의 모든 行爲는 自己를 表現하기 위한 手段이기도 하다. 무슨 色의 옷을 입을 것인지와 마찬가지로 무슨 色의 自動車를 탈 것인지도 自己 演出의 한 方法이다. 衣裳에서 다양한 個性이 드러나듯 自動車의 色相도 좀 더 밝고 다양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風景#38 네일케어, 매니큐어

    며칠 前 江南 新世界百貨店 10層 食堂街에 저녁 食事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어디에선가 津한 아세톤 냄새가 풍겼다. 아이스크림 商店 앞에 있는 네일케어센터에서 젊은 女性들이 손을 내밀고 있는 顧客들의 손을 마사지하고 손톱을 整理하고 매니큐어를 漆해주고 있었다. 몇 달 前 홍대 앞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琉璃窓을 통해 본 특별한 場面이 떠올랐다. 顧客들이 椅子에 앉아 있는데 발치에 젊은 女性들이 쭈그리고 앉아 발을 마사지하면서 발톱에 매니큐어를 漆해주고 있었다. 女性들의 손톱, 발톱 整理는 매우 隱密한 私的 空間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나의 通念을 깨는 場面이었다. 그런 일들이 商品化되어 돈을 주고받는 서비스業으로 繁昌한 것도 그렇지만 過去 密室에서 이뤄지던 일들이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開放 空間의 日常的 風景이 된 것도 興味롭다.

    오늘날 世界가 하나 되면서 파리와 밀라노,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서울에 同時間帶 패션이 流行하고 있다. 그런 過程에서 유럽과 美國, 라틴아메리카와 東아시아 女性 모두에게 適用되는 아름다움의 基準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건 섹시하고 挑戰的으로 보이는 女性像이다. 그런 에로틱 전사형 美人이 되기 위한 必須 條件의 하나가 매니큐어다. 1990年代 ‘나는 冶한 女子가 좋다’라는 冊을 쓴 한 大學 敎授가 自己에게 가장 에로틱한 女性의 部位는 길게 기르고 빨간色 매니큐어를 漆한 손톱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제 自己 外貌에 조금이라도 神經을 쓰는 女性들은 손톱을 손질하고 매니큐어를 바르는 일을 日常化하고 있다.

    보통의 파리 사람들 가운데 깨끗하게 維持된 손에 매니큐어를 漆한 손톱을 가진 女性은 그리 많지 않다. 有閑階級 마담을 除外하고는 파리지엔 大部分은 職場과 집안일에 二重으로 시달리느라 손톱 整理에 쓸 時間이 別로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서울에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漆한 아름다운 손이 넘친다.

    風景#39 거리의 입맞춤

    1950年 로베르 드와노(Robert Doisnaud)가 찍은 ‘파리 市廳 앞에서의 입맞춤’ 이라는 題目의 寫眞은 파리의 報道에서 젊은 男女가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지그시 눈을 감고 있고 男子의 오른손이 女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女子의 고개는 男子의 어깨를 向해 왼쪽 뒤로 若干 기울어져 있다. 멀리 파리 市廳이 多少 稀微하게 보이고 키스 中인 젊은 戀人들 周邊 印度에는 步行者들이 걸어가고 있고 車道에는 自動車들이 보인다.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當時 파리의 雰圍氣는 事實 그 程度로 자유롭지는 않았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寫眞은 演出된 場面을 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1968年 5月運動은 性解放을 가져왔고 1980年代 留學 時節 나는 파리의 거리에서 男女가 抱擁을 하고 입을 맞추는 場面을 심심치 않게 보고 다녔다. 當時 그런 場面들은 나에게 語塞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2000年代 10年을 파리에서 보낼 때는 버스 停車場, 길거리 한 구석, 公園 벤치, 地下鐵 안에서 입을 맞추는 戀人들의 모습이 그저 日常의 한 風景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오늘날 서울 거리에서, 地下鐵에서, 버스에서 껴안고 입 맞추는 젊은 戀人들을 보게 된다. 파리에서는 1968年이라는 搖亂한 社會運動 後에 1970年代와 1980年代에 걸쳐 性解放의 물결이 일어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大體로 1988年 서울올림픽 以後 조용하게 性革命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郊外의 그 수많은 모텔과 호텔은 그런 革命을 위한 最小限의 設備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젊은이들은 그런 隱密한 場所가 아닌 地下鐵, 버스 等 大衆交通 手段과 길거리에서 抱擁을 하고 입을 맞춘다. 젊은 世代는 陰地가 아닌 陽地에서 自由롭게 愛情表現을 하기 始作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對해서 뭐라고 말하는 어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 뒤를 따라가고 있다. 서울은 이제 파리와 마찬가지로 公共場所에서 자유로운 私的 愛情 表現이 可能한 匿名의 空間이 되었다.

    風景#40 소공동 壁 廣告

    1970年代 末 을지로에서 광교 쪽으로 나가는 四거리의 오른쪽 길에 서 있던 建物의 길고 넓은 壁에는 金弘道의 秋收하는 風景 그림이 크게 擴大되어 붙어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뿌듯하고 便해지는 느낌을 갖곤 했다. 그것이 藝術의 힘이리라. 평화롭고 諧謔이 느껴지는 金弘道의 그 그림은 어느 날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現代的이지만 세련되지 못한 디자인 그림이 들어섰다. 옛 그림이 사라지고 그 近方에 새로운 建物이 여럿 들어서 全體的인 거리 雰圍氣가 달라졌다. 그나마 길 건너便의 오래된 韓國電力 建物이 버티고 있어서 그 場所의 正體性을 艱辛히 維持하고 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서울 鍾路區 신문로 서울歷史博物館 앞의 옛 戰車와 어느 家族.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 바뀐다. 그래도 變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發見하면 나도 모르게 安堵의 한숨이 나온다. 江北 中心部에서 江南으로 가려면 市廳 앞 廣場을 지나 소공동 거리를 지나 3號 터널을 通過하게 된다. 이 길을 지나갈 때면 내 눈에 익숙한 廣告板이 눈에 들어온다. 市廳 앞을 지나 소공동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플라자호텔이 있고 왼쪽에는 조선호텔이 옛날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나를 더욱 반갑게 하는 것은 조선호텔을 지나 韓國銀行에 到達하기 前에 길 오른쪽 建物의 넓은 壁에 붙어 있는, 現代式 電光板이 아닌 在來式 廣告板이다. 1980年代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시아나航空 廣告板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옛날의 廣告文句도 그대로 使用하고 있다. 그 文句 밑에는 航空社 女乘務員이 아름답게 微笑 짓는 모습이 있다. 아마도 모델이 된 乘務員은 그동안 몇 番에 걸쳐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微笑를 띠고 있는 女乘務員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風景#41 모나미 볼펜

    大型書店에 附屬된 文房具 코너에 가보면 便利한 道具가 많이 나와 있다. 스티커 포스트잇, 螢光펜, 書類 分類함, 스테이플러, 그리고 色깔과 굵기가 다른 다양한 種類의 筆記道具가 櫛比하게 展示돼 있다. 거의 모든 것이 다 새로운 것들이지만 그곳에서 變치 않고 남아 있는 모나미 볼펜을 發見했다. 1960年代에 내가 쓰던 모나미 볼펜과 똑같이 볼펜의 몸통은 흰色이고 볼펜의 아래쪽과 볼펜心을 움직이는 스위치 部分은 검은色이다. 볼펜의 몸통 위에는 ‘Monami 153 0.7’이라는 검은色 글字와 數字가 박혀 있다. 가난했던 時節에는 몽당鉛筆을 모나미 볼펜의 몸통에 끼워 쓰기도 했다. 모나미는 프랑스語로 내 親舊란 뜻인데 佛語로 表記하자면 ‘mon’과 ‘ami’를 띄어 써야 한다. 아마도 모나미는 내가 가장 처음 接한 프랑스語 語彙日 것이다. 文房具에는 내가 初等學校 때 쓰던 文化鉛筆度 그대로 있다. 그런데 鉛筆 몸통에 漆한 色相과 디자인은 달라져 있다.

    風景#42 孝의 價値

    프랑스의 모든 學校와 官公署 建物 入口에는 ‘自由, 平等, 博愛’라는 프랑스 革命의 理念이 새겨져 있다. 1930年代와 1970年代 韓國의 學校 敎室 뒷面에는 忠(忠)과 孝(孝)라는 글字가 적힌 額子가 걸려 있었다. 1990年代 어느 大學 總長은 孝(孝)라는 價値를 世界로 輸出하자는 主張을 펴기도 했다. 2012年 7月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데 “孝(孝)를 바탕으로 倫理經營을 實踐하는 企業”이라는 어느 企業의 廣告 文句가 보였다. 며칠 後 택시를 타고 가는데 거리의 작은 公園 入口에 ‘孝(孝)公園’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윗돌이 보였다.

    自由, 平等, 博愛가 血緣과 遲延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適用되는 普遍的 價値라면 孝는 血緣으로 맺어진 自己 父母에 對한 家族主義的 義務다. 孝를 根本價値로 내세우는 社會에서 윗사람은 但只 君臨하고 指示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랫사람을 보살피고 慈愛를 베푼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上下關係가 前提되어 있다. 따뜻한 情은 있을지 모르지만 孝를 내세운 關係는 本質的으로 不平等하고 부자유스러운 關係다.

    1392年 朝鮮이 開國하면서 佛敎를 버리고 儒敎를 國家의 統治哲學으로 삼은 以後 孝라는 價値는 거의 7世紀 동안 韓國人의 家族生活을 支配하고 社會生活을 規制했다. 오늘날 家族關係에서만 보자면 孝라는 價値의 規制力은 相當히 느슨해진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돈 벌어오는 機械로 轉落했고, 그 權威가 땅에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前이다.

    그럼에도 孝라는 價値를 代身할 自由와 平等이라는 價値는 充分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파리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平等한 聖人으로 待遇한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아직도 나이 差異가 人間關係를 上下關係로 만든다. 勿論 匿名의 사람들 사이에는 그럴 수 없지만 持續的인 關係가 만들어지면 나이를 基準으로 자연스럽게 上下關係가 形成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權威는 弱해졌지만 兄님의 權威는 如前하다. 中國이 G2로 浮上하면서 儒敎의 長點을 再評價하려는 知的 運動이 活潑하다. 그러나 儒敎의 根本이라는 孝의 價値 안에 들어 있는 垂直的 人間關係를 淸算하는 새로운 價値를 提示하지 않는다면 儒敎的 價値의 復元은 權威主義的 價値로의 回歸로 끝날 수 있다.

    風景#43 에너지 節約 救護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大都市일수록 口號와 廣告가 많다. 서울 거리를 걷다보면 華麗하게 번쩍이는 廣告들, 地下鐵 連結通路와 客車 안, 거리의 電光板에서 TV 畵面을 거쳐 컴퓨터 畵面에 이르기까지 到處에 廣告 이미지와 廣告文句가 亂舞한다.

    最近에 ‘어쩌다가 社會學者가 되어’라는 題目의 指摘 自敍傳을 펴낸 美國 보스턴대의 社會學者 피터 버거는 1970年代 自動車를 타고 蘇聯,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東獨 等 東유럽 社會를 돌아보고 난 다음 西유럽 國家들을 巡訪했다. 그는 두 社會를 比較하면서 東유럽 共産圈 社會에는 公的 場所에서 政治的 口號가 많이 보였는데 西유럽 資本主義 社會에 들어오니 到處에 商品廣告가 널려 있다고 말했다.

    파리의 거리에도 商品廣告는 到處에 있지만 政府 施策을 宣傳하는 口號는 찾아볼 수 없다. 例外的인 것은 가끔씩 오래된 建物의 壁에 붙어 있는 녹슨 洋鐵板들이다. 여기에는 英國에 亡命해 있던 드골 將軍이 1941年 “戰鬪에는 졌지만 戰爭에 진 것은 아니다”라며 프랑스人들에게 抗毒(抗獨) 레지스탕스 運動에 參與하기를 勸誘한 演說文이 적혀 있다.

    1987年 民主化 以前 權威主義 時代에는 우리 社會에도 反共과 經濟成長이라는 이데올로기를 宣傳하는 標語가 많았다. “北傀 挑發 못 막으면 自由 없는 奴隸된다”“증산, 輸出, 建設” 等의 標語가 그 보기들이다. 하지만 只今은 서울이라는 空間의 구석구석에 商品廣告가 浸透해 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 成形外科에 到着하기 몇 秒 前에 그 成形外科를 廣告하는 소리가 나오고 버거킹 앞에서는 그 食堂 廣告가 나온다. 高層建物 屋上의 廣告塔, 射距離 建物 壁의 電光板, 택시 뒷座席 앞의 畵面 廣告에 이르기까지 눈길이 닿는 곳 모두가 廣告의 空間이 되고 있다.

    그런데 며칠 前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이런 案內文句를 보았다. “政府 施策으로 圖書館 室內 溫度를 攝氏 26度 以上으로 維持하고 있습니다. 諒解바랍니다.” 油價 引上과 여름철 에어컨 果刀使用으로 電力浪費가 甚하다고 判斷한 政府가 公共機關을 통해 에너지 節約의 模範을 보이기로 한 模樣이다. 事實 原電 建設을 反對하기 前에 에너지 節約運動부터 벌여야 한다. 圖書館을 나와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거리의 電氣施設 保護 箱子 表紙에 이런 口號가 쓰여 있다. “電氣는 國産이지만 燃料는 收入입니다.” 버스 停車場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運轉技士 오른쪽 위에는 이런 標語가 적혀 있었다. “亂暴運轉 燃費 低下, 配慮運轉 燃費 向上”

    風景#44 아파트 場터

    파리 이곳저곳의 대로 中央에 있는 빈 空間에는 水曜日과 土曜日에 定期的으로 場이 열린다. 16具의 프레지當 윌슨 거리, 14具의 에드가 키네 距離가 代表的이다. 場이 열리는 날 아침에 그곳에 가보면 파리 바깥의 일 드 프랑스 地方과 노르망디 地方에서 트럭으로 物件을 싣고 온 商人들이 길 兩쪽으로 죽 늘어서 긴 商街를 만든다. 21世紀 파리에 남아 있는 19世紀의 風景이다.

    서울에도 定期的인 場이 선다. 긴 대로가 아니라 아파트 團地 空터에 선다. 시골場을 聯想시키는 아파트 團地의 定期 市場에는 天幕을 친 가게가 늘어선다. 그런데 서울 아파트 團地에 선 市場에선 파리의 거리 市場 같은 活氣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一旦 서울 아파트 團地의 定期 市場 顧客이 아파트 團地의 住民으로 限定되기 때문이다.

    파리의 거리 市場에는 그 洞네 사람만이 아니라 멀리서 自動車를 타고 오는 사람도 있다. 市場에 따라 差異가 있지만 파리 西쪽 16具에 사는 사람도 값싸고 싱싱한 菜蔬와 과일을 救하러 파리 東쪽 12具의 바스티유에서 열리는 市場으로 場을 보러 가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이 多樣한 商品을 購買하는 市場에는 언제나 活氣가 넘친다.

    두 市場의 活氣의 程度가 다른 또 하나의 理由는 서울의 아파트 但只 市場에서 販賣되는 商品들이 단조로운 데 있다. 파리의 거리 市場에서는 과일, 꽃, 肉類, 치즈, 牛乳, 葡萄酒, 꽃, 옷, 신발, 香料, 올리브油, 生鮮, 骨董品, 冊, 그림, 옷, 액세서리, 手藝品 等 生活에 必要한 갖가지 商品이 去來되는 反面 서울의 아파트 團地 內 市場에서는 먹고사는 데 必要한 農畜産物이 거의 全部다. 나머지 商品들을 사려면 마트나 百貨店으로 가야 한다. 파리의 市場에서는 日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삶의 藝術’을 느낄 수 있는 反面 축 늘어진 서울의 定期 市場에서는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風景#45 東十字閣의 銃彈 자국

    한 都市의 正體性은 언제나 變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場所들이 있기에 維持된다. 古宮은 빠르게 變하는 서울을 傳統 있는 서울로 認識하게 만드는 重要한 場所 가운데 하나다. 世宗大路 뒤쪽 北岳山 아래 자리 잡은 景福宮은 오랜 工事 期間을 거쳐 日帝에 依해 毁損된 本來의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그 近處를 지나가다 보면 1970年代 大學生 時節 景福宮의 同門인 建春門 앞에 있던 프랑스文化院에 映畫를 보러 다니던 時節이 생각난다.

    그때는 景福宮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望樓 같은 建物 하나를 그냥 無心코 쳐다보며 지나다녔다. 나중에 알고 보니 東十字閣이라고 하는 그 建物은 景福宮 담牆 東南쪽 모퉁이에 設置되어 있던 望樓였는데 周邊에 길이 나면서 景福宮과 分離되어 車輛의 물결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얼마 前에 그 近處를 지나가다가 옛 생각을 하면서 그 建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돌階段 사이로 풀잎이 자라있고 望樓를 이루는 돌에는 銃彈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6·25戰爭 때 거리 交戰의 痕跡인 듯하다. 이제 歲月이 흘러 그 市街戰을 記憶하는 사람은 없지만 傷處 난 돌은 그 痕跡을 歷歷히 간직하고 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정수복

    연세대 政治外交學科

    프랑스 파리 ‘社會과학고等硏究員’ EHESS(社會學博士)

    크리스찬 아카데미 企劃硏究室腸

    社會運動硏究所 所長

    프랑스 파리 ‘社會과학고等硏究員’ 客員敎授

    韓國文化社會學會 理事(現)

    著書: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完全한 休息’ ‘韓國人의 文化的 文法’ ‘市民意識과 市民參與’ 等


    파리 센 江가에서 멀지 않은 생제르맹 데 프레 거리에는 國防部 建物이 있다. 언덕 위에 威容을 자랑하며 서 있는 서울의 國防部 建物과 달리 다른 建物들과 水平으로 키를 맞추어 大路邊에 서 있는 建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建物 出入口 이마에 붙어 있는 建物의 이름이다. 거기에는 ‘國防部(Ministere de Defense Nationale)’가 아니라 ‘戰爭部(Ministere de Guerre)’라는, 第1次 世界大戰 以前의 部署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建物 外壁에도 銃彈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1870年 파리코뮌 때 政府軍과 市民軍이 벌인 戰鬪의 痕跡일 수도 있고, 第2次 世界大戰 終戰 무렵 獨逸軍과 레지스탕스 市民軍 사이에 벌어졌던 戰鬪의 痕跡일 수도 있다. 서울이나 파리나 어느 한구석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는 지나간 날의 痕跡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記憶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奔走하게 쫓기는 都市 生活의 特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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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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