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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致遠의 ‘玄妙한 道’는 언제 찾을까?|신동아

崔致遠의 ‘玄妙한 道’는 언제 찾을까?

  • 이기동| 성균관대 幼學東洋學과 敎授 kdyi0208@naver.com

    入力 2012-04-19 1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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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의 ‘현묘한 도’는 언제 찾을까?

    최치원 肖像.

    눈이 녹으면 무엇이 될까? 이 물음에는 두 가지 答이 있다. 물이 된다는 것과 봄이 된다는 것, 그것이다. 물이 된다는 것은 現象을 말하는 것이고, 봄이 된다는 것은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흐름을 아는 사람은 눈이 녹을 때 봄을 準備하지만, 現象만을 아는 사람은 봄 準備를 하지 못한다. 봄 準備를 하지 못한 사람은 봄이 왔을 때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므로 흐름을 알고 未來에 對備할 수 있는 智慧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重要하다.

    그런데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經驗을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눈이 녹을 때 봄이 왔고, 그全 해에도 눈이 녹을 때 봄이 왔으며, 그 輾轉 해에도 눈이 녹으면 봄이 왔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온다. 이처럼 歲月은 四季節이 끝없이 循環하며 進行한다는 것을 우리는 經驗을 통해 알고 있다.

    四季節을 끌고 가는 두 힘은 더위와 추위다. 봄은 더위가 끌고 가는 季節이고, 가을은 추위가 끌고 가는 季節이다. 그러므로 嚴密히 말하면 四季節은 더위가 끌고 가는 봄과 추위가 끌고 가는 가을뿐이다. 여름이란 봄에서 가을로 바뀌는 轉換期일 뿐이고, 겨울이란 가을에서 봄으로 가는 轉換期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른의 나이를 물을 때 “春秋(春秋)가 얼마입니까”하고 묻기만 하면 된다. 굳이 “春夏秋冬이 얼마입니까”라고 물을 必要는 없다.

    사이클을 가지고 循環하는 것이 四季節뿐만은 아니다. 모든 進行은 사이클을 가지고, 波形을 이루며 進行한다. 화살이나 銃알처럼 直線으로 바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事實은 波形을 이루며 날아간다.

    歷史의 進行도 그렇다. 人類의 歷史도 四季節처럼 循環을 하며 進行한다. 그런데 歷史의 進行은 사이클의 範圍가 크다. 500年 單位로 進行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歷史의 사이클을 經驗할 수 없다. 歷史의 봄이 올 때는 봄을 對備해야 하고, 가을이 올 때는 가을을 對備해야 하지만, 사람은 歷史의 흐름을 經驗할 수 없다는 데 問題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歷史의 흐름을 알 수 있는 方法이 있다. 記錄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의 經驗을 통해서다. 歷史學의 重要한 意味는 여기에 있다. 歷史學의 目的은 過去에 있었던 事件을 把握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孔子는 “옛것을 익혀 다가올 未來를 알아야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고 했다. ‘論語’ 위정편에 나온다. 스승은 오늘날 말로는 ‘리더’다. 리더는 未來의 時代를 豫測할 수 있어야 한다.

    歷史의 사이클 모르는 人間

    歷史는 悠悠히 흐르는 江물처럼,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進行한다. 그 흐름은 하나이기 때문에 過去의 흐름을 알면 未來의 흐름을 알 수 있다. 歷史的 事實은 江물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일정할 수 없다. 過去에 일어난 歷史的 事實은 알 수 있어도, 未來에 일어날 歷史的 事實을 豫測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歷史的 事實의 밑바닥에 흐르는 歷史의 흐름 그 自體는 하나이기 때문에 過去의 흐름을 알면 未來의 흐름을 알 수 있다. 리더는 이런 흐름을 살펴야 한다.

    歷史의 흐름을 끌고 가는 두 힘은 몸과 마음이다. 이 두 要素가 歷史를 끌고 가는 牽引車다. 歷史는 몸을 重視하는 時代와 마음을 重視하는 時代가 번갈아가며 進行된다. 只今 世上은 西歐 文化가 中心이 되어 있는 時代이고, 마음보다 몸을 더 重視하는 時代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몸짱’ ‘얼짱’ 等의 말은 쓰면서, ‘마음짱’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몸은 物質이고, 몸에 가장 必要한 것이 돈이므로, 只今은 物質主義 時代이고 資本主義 時代다.

    몸 中心의 時代에 나타나는 가장 큰 特徵은 熾烈한 競爭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物質的 價値를 追求하기 위해 無限 競爭을 한다. 物質文明의 發達은 競爭할 때보다 더 빠른 때가 없다. 그래서 只今은 物質文明이 極度로 發達했고, 그 때문에 物質이 豐富해졌다. 그러나 競爭이 너무 熾烈해지면 精神的으로 여러 問題가 생겨난다. 競爭이 熾烈해질수록 사람들에게는 親舊 槪念이 사라진다. 親舊도 競爭者일 뿐이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많은 親舊가 겉으로는 祝賀를 하지만 속으로는 배 아파한다. 나에게 나쁜 일이 있을 때 겉으로는 慰勞하지만, 속으로는 기뻐한다. 親舊들의 말도 잘 새겨보면 나를 詛呪하는 것 같은 內容이 들어 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차츰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 사람과 어울리기보다는 개하고 노는 사람이 자꾸 늘어난다.

    몸을 重視하는 時代, 마음을 重視하는 時代

    美國의 한 病院에서 ‘누가 患者를 看病하는 게 가장 效果的일까’하는 調査를 했다. 흥미로운 結果가 나왔다. 家族이 看護하는 境遇도 아니고, 專門 看病人이 看護하는 境遇도 아니었다. 개 한 마리씩 붙여주는 것이 가장 效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보다 개에게서 더 많은 慰勞를 받는다는, 사람보다 개가 더 좋은 時代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싫어진다면 사람을 配慮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弄談처럼 말한다. ‘幸福이란 남의 不幸을 보는 것’이라고, 그리고 ‘不幸이란 남의 幸福을 보는 것’이라고. 이러한 마음으로는 經營이 제대로 될 수 없다. 남이야 不幸하든 말든 相關할 것이 없다. 오직 나의 利益만 챙기면 된다. 오늘날 美國에서 始作된 金融危機의 根本 理由도 여기에 있다. 競爭해서 이기는 것, 거기에 사람의 目標價 集中된다면 사람들은 人間關係를 圓滿히 維持할 수 없다. 사람들은 親舊를 사귀거나 戀愛를 할 때도 競爭的이다. A라는 親舊를 사귀다가도 B라는 親舊를 사귀는 것이 더 유리해지면 서슴지 않고 A를 버리고 B와 사귄다. 이는 企業과 企業, 國家와 國家 間에도 例外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戀愛를 하고 있어도 외롭다. 나도 그를 바꿀 수 있지만, 그도 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외롭고 不安한 마음은 結婚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예부터 몸보다 마음을 더 重視하고 끊임없이 마음을 챙겨온 民族이 있다. 바로 우리 民族이다. 韓國人들은 싸울 때 “네가 人間이냐” “제발 人間 좀 되어라” 하고 꾸짖기도 한다. 西洋人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큰일이 난다. 그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거울을 꺼내 얼굴을 確認하고는 “내가 너에게 원숭이로 보이는가?”하고 深刻하게 反撥한다. 侮辱感을 견디지 못해 銃알을 날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韓國人들이 이 말을 할 때는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韓國人들은 人間의 마음을 重視한다. 그래서 韓國人들은 人間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人間으로 여기지 않는다. 人間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人間이 아니라 짐승이다. 사람이 짐승처럼 살 수는 없다. 그래서 人間으로 살기를 懇切히 바란다. 5000年 前부터 우리는 人間이 되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어두운 洞窟에 들어가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을 먹으며 人間의 마음을 되찾아 참된 人間이 되어서 나오는 것이다. 眞짜 곰이 洞窟에 들어가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곰은 짐승처럼 되어버린 人間을 말한다. 범이 失敗하고 곰이 成功했다는 것은 洞窟에서 사람의 마음을 챙기기 위해서 곰처럼 진득한 끈氣가 必要함을 말하는 것이다.

    韓國人들은 끊임없이 洞窟에서 人間의 마음을 챙겼다. 三國時代와 高麗時代 때는 佛敎라는 洞窟에서 人間의 마음을 챙겼고, 朝鮮時代 때는 儒敎라는 洞窟에서 人間의 마음을 챙겼다. 洞窟에서 되찾은 마음은 모두가 다 함께 가지고 있는 ‘한마음’이다. 韓國人은 예부터 한마음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한마음은 남을 나처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다. 그 影響으로 韓國人에게는 아직도 따뜻한 마음이 남아 있다. 이 따뜻한 마음이 韓國의 映畫나 드라마에 녹아 있다. 韓國人들은 따뜻한 마음 때문에 過去에 熾烈하게 競爭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競爭이 重視되던 時節에 韓國人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只今은 狀況이 달라졌다. 사람들의 차가워진 마음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된 只今, 韓國의 드라마에 나오는 主人公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면 얼어붙은 마음이 녹는다. 어떤 外國의 自閉症 患者는 드라마 ‘大長今’을 일흔 番 본 뒤에 自閉症이 나았다는 報道도 있었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한류 붐을 일으키는 根本 理由다. 이 한류 붐은 映畫나 드라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韓國人의 노래와 춤에도 나타난다. 韓國人의 노래와 춤에는 ‘한마음’李 녹아 있다. 韓國人들은 한마음으로 어울리기 좋아한다.

    迎鼓, 同盟, 八關會 … 신바람 韓國人

    최치원의 ‘현묘한 도’는 언제 찾을까?

    한마음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韓國人의 신바람은 K-POP 烈風을 낳았다.

    옛날 扶餘에서는 가을에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祭祀 지내고, 連日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迎鼓(迎鼓)’라는 모임을 가졌고, 高句麗에서는 10月에 ‘同盟(東盟)’이라는 모임을 가졌다. 首都의 東쪽에 있는 큰 洞窟에 모여 祭祀를 지내고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했다. 同盟은 高麗의 ‘八關會(八關會)’로 繼承되었다.

    한마음을 回復해 모두가 하나 되고 싶은 韓國人의 念願이 最近 잘 發揮된 例가 2002年 韓日 월드컵 때의 應援戰이었다. 韓國의 勝利를 念願하는 붉은 惡魔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韓國人들은 신바람이 난다.

    最近 부는 K-POP 烈風도 같은 脈絡으로 理解할 수 있다. 韓國 歌手들이 함께 모여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에는 獨特한 것이 있다. 그들의 춤動作은 單純한 몸의 動作이 아니다. 그들의 몸動作에는 한마음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신바람이 있다. 온 世界가 그들에게 熱狂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류 붐이 이는 現象은 따뜻한 마음의 時代가 오고 있다는 信號彈이다. 눈이 녹는 것을 보면 봄이 온다는 事實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한류 붐이 이는 것은 想像을 超越하는 巨大한 事件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過去에는 想像도 할 수 없었다. 이를 보면 이제 人類의 歷史가 大轉換點을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스링크의 트랙을 달리는 스케이트 選手들은 一直線으로 된 트랙을 달릴 때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리지만, 코너에 進入해 回轉할 때는 速度를 줄이고 操心한다. 一直線을 달릴 때는 順位가 別로 바뀌지 않지만, 回戰 區間에서는 많은 變化가 일어난다. 一等이 넘어져 꼴찌가 되기도 하고, 꼴찌가 매끄럽게 回轉해 一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回戰 區間은 危機이면서 同時에 機會이기도 한 區間이다. 選手들은 이 機會를 살리기 위해 매우 操心한다.

    歷史의 轉換點을 通過하는 境遇에도 마찬가지다. 몸을 重視하던 時代에서 마음을 重視하는 時代로의 轉換點에 들어와 있는 只今은 混亂한 時期다. 이 混亂의 時期를 잘 通過하기 위해서는 매우 操心해야 한다. 萬若 操心하지 않고 過去의 成功 方式대로 疾走하다가는 敗亡하기 十常이다. 速度를 늦추고 마음을 챙기는 일에 最善을 다할 때만 成功的인 未來가 保障된다. 마음을 챙기기 위해 競爭速度를 늦추면 當場은 다른 競爭者들에게 뒤처질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날아오는 非難의 화살을 避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챙기는 일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當場의 뒤처짐은 많이 뛰기 위한 개구리의 움츠림 같은 것이고, 藥을 먹은 뒤에 나타나는 어지럼症 같은 것이다. 그것은 참아야 한다. 威力은 轉換期를 通過한 뒤에 나타난다.

    예부터 韓國人들은 마음을 챙기는 일에 卓越한 能力을 發揮해왔다. 元曉 大師의 화쟁思想(和諍思想)과 一心二門(一心二門)의 法文은 不法의 眞髓를 다했고, 退溪 先生의 거경사상(居敬思想·恭敬하면 마음의 欲心이 적어지고, 理致에 밝아져 星學(聖學)의 道(道)를 배울 수 있다는 理論)과 四端七情論(四端七情論)은 性理學의 問題點들을 解決했다. 이제 韓國人들은 이런 能力을 다시 發揮해야 할 機會가 왔다. 이런 機會를 흘려보낼 수는 없다.

    機會는 準備하는 者에게만 오고, 붙잡는 者에게만 온다. 아무리 좋은 機會가 오더라도 붙잡지 않으면 그 機會는 떠나가고 만다. 눈이 녹는 것을 보고 봄이 온다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봄 準備를 하지 않는다면 봄이 온다는 事實을 모르는 사람과 差異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只今 마음의 時代를 맞이할 準備를 하고 있는지 深刻하게 한番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의 現實은 매우 부끄럽다. 社會 各界各層이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다. 政治人들은 與野로 나뉘어 泥田鬪狗를 繼續하고 있다. 都大體 希望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學者들이나 先生들은 제 役割을 하고 있을까? 學者들은 各自의 學問 領域에 安住한 채 現實的인 問題에는 外面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人文學의 危機’라고 외치는 것은 自己들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窮餘之策에서 나온 말이다. 先生들은 自己들의 存在 理由가 學生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學生들은 또 얼마나 學生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지, 이 時代의 父母들은 父母의 役割을 다하고 있는지, 子女들은 子女 된 道理를 다하고 있는지….

    孔子는 齊나라 경공이 政治에 對해서 물어왔을 때 “임금은 임금답고 臣下는 臣下다우며, 父母는 父母답고, 子女는 子女답게 되는 것(君君臣臣父父子子)”이라고 答했다. ‘論語’ 顔淵篇에서다.

    君君臣臣父父子子

    4·11 總選거 結果를 놓고 解釋이 紛紛하지만, 結局 政治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잘못된 나라를 제대로 된 나라로 바꾸는 것이 政治다. 바른 나라란 國家 構成員들이 各各 제 役割을 할 때 찾아온다. 그런데 只今 우리나라의 構成員들은 제대로 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그런대로 꾸려가고 있는 것은 企業人들과 文化藝術人들 德分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西歐의 理論을 盲目的으로 追從하지 않았다. 그들은 韓國人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것이 그들의 成功祕訣이다. 우리는 이러한 事實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只今 우리나라에 나타나 있는 病弊 中 가장 큰 病弊는 精神分裂症 現象으로 생각된다. 個人의 삶이 安定을 維持하기 위해서는 精神이 튼튼해야 하듯이, 나라의 安定이 제대로 維持되기 위해서도 그 國民들의 精神이 하나로 모아져 튼튼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그러나 只今은 그렇지 못하다. 個人은 個人臺로 價値觀의 混亂 때문에 精神的 安定을 찾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憂鬱症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自殺率이 經濟協力開發機構(OECD) 國家 中 1位를 차지할 程度로 深刻하다. 國家 單位로 보더라도, 다양한 價値觀이 衝突해 平穩할 날이 없다. 自由民主主義와 社會主義가 부딪치고, 左派와 右派가 衝突하며, 各種 宗敎團體들이 亂立해 敎勢 擴張을 위한 總力戰을 펼치기 때문에 國民은 精神 차리기 어렵다. 只今 우리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마음으로 뭉치던 우리의 傳統을 빨리 回復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모든 國民을 한마음으로 包容할 수 있는 ‘玄妙한 道’가 있었다. 그 玄妙한 度를 風流라 부르기도 했다. 그 內容을 海運 崔致遠 先生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에 玄妙한 道가 있으니, 이를 風流라 한다. 이 風流가 모든 사람을 敎化시키는 源泉이다. 그 內容은 船社(仙史)에 仔細히 記錄되어 있다. 이 玄妙한 道는 유불도 三敎를 다 包含할 수 있다. 이 玄妙한 度를 가지면 모든 生命體에 두루 接하여 그들을 올바른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 집에 들어와 父母에게 孝道하고, 밖에 나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孔子의 가르침이고, 無爲自然의 狀態로 悠悠히 살며 말없는 가르침을 行하는 것은 老子의 가르침이며, 惡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만을 받들어 行하는 것은 釋迦牟尼의 가르침이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三國史記’ 卷4 ‘신라본기’ 眞興王 37年條에 나온다.

    최치원의 ‘현묘한 도’는 언제 찾을까?
    이기동

    1952年 慶北 淸道 出生

    성균관대 東洋哲學과 學·碩士

    日本 쓰꾸바대 哲學博士

    前 韓國日本思想史學會長

    現 同人文化院長

    2007年 韓國人 最初 四書三經 講說 完譯

    著書: ‘곰이 成功하는 나라’ 外 多數


    우리의 玄妙한 道가 유불도 三敎를 包含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유불도 三敎만을 包含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의 狀況에서 보면 오늘날 모든 가르침을 다 包含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玄妙한 度를 빨리 回復해야 한다. 이 玄妙한 道는 우리의 遺傳子 속에 녹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되찾을 수 있다. 이 度를 되찾기만 하면 오늘날 亂立하고 있는 여러 價値觀을 하나로 融合하여 우리 社會를 안정시킬 수 있고, 나아가 온 世界를 안정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찾아온 機會를 붙잡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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