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립 氏는 1971年 윤필용 監聽事件은 1973年 이른바 ‘윤필용 事件’의 前哨戰이고, 1979年 10·26事態의 間接的 原因이 됐다고 分析한다. 이 事件으로 김재규 將軍은 朴正熙 大統領에게 怨恨을 품게 됐고, 이어 1973年 ‘윤필용 事件’으로 優秀한 人材들이 軍을 떠나면서 權力 周邊에 空白이 생겼고, 그 자리를 김재규 祕書室長이 차지하면서 朴正熙 時代가 幕을 내리게 됐다는 것이다.
軍 關係者들의 말을 綜合해보면, 保安司令官과 首警司令官 두 强者가 부딪친 1970年代 初盤에는 保安司와 首警司의 位相이 엇비슷했고, 靑瓦臺 近衛部隊로 어느 쪽이 더 힘이 센지를 比較해보기 일쑤였다고 한다. 누군가 숙이지 않으면 힘겨루기가 進行되기 마련이었다. 윤필용 監聽事件度 이 延長線에 있다. 1993年 9月 16日子 東亞日報 5面 ‘軍 어제와 오늘 保安司서 首警司令官 電話 盜聽 김재규 윤필용 監視 問題化’ 記事를 보면 當時의 急迫한 狀況이 김충립 氏의 描寫와 비슷하다.
“(監聽事件 發覺) 死後에 이 事件을 連絡받은 김형노 少領은 急히 憲兵隊로 갔다. 무엇보다도 錄音 테이프를 回收해내는 것이 急先務였다. 윤필용 首警司令官의 電話線에 盜聽裝置를 붙여 錄音해온 테이프들. 그것을 들켰으니 情報活動能力을 재심사받아야 할 만한 失手였다. 뿐만 아니라 尹? 首警司令官과 김재규 保安司令官의 파워게임에서 雷管과도 같은 證據物이 될 게 틀림없었다. (…) 70年代 初는 그(김재규)가 朴正熙 權力에 對한 軍部 內 挑戰勢力을 監視하는 保安司令官으로 자리를 굳혔을 때였다. 그러다가 尹 司令官 盜聽事件이 터진 것이다. 힘겨루기도 武力動員이 아닌 바에야 머리싸움이다. 相對方에 꼬투리를 잡힌 쪽이 窮地로 몰리게 마련이다. 首警司 側에 盜聽物證을 잡힌 保安部隊는 危機를 느꼈다. (…) 保安部隊 將校들은 속으로 이런 無理數를 쓰는 保安司 本部가 野俗했다.”
45年 歲月 흘러도 ‘스트레스’
김충립 氏는 當時 監聽作業을 遂行한 現場 責任者로서 이 過程을 詳細하게 記錄했다.? ‘신동아’는 當時 두 强者의 힘겨루기 속에서 犧牲羊이 된 保安司 김형노 少領과 어렵게 連絡이 닿았지만 “그때 일은 묻어두자. 記憶하고 싶지도 않고, 거기에 對해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는 答辯을 들었다. 윤필용 수경司令官 祕書室長 정봉화 少領은 連絡이 닿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情 少領은 監聽事件 以後인 1973年 ‘윤필용 事件’ 當時 김충립 氏가 直接 화곡동 自宅에서 西氷庫로 連行했다고 한다. ?
“當時 화곡동 自宅에 車를 세워두고 鄭 少領을 기다렸다가 그를 앞자리 助手席에 앉혔다. 周邊 사람들에게 鄭 少領이 연행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는 上官(윤필용)을 깍듯이 모시는 참軍人이었다. 윤필용 事件 自體가 謀陷이었으니 얼마나 抑鬱할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김충립 氏)
정봉화 氏는 윤필용 事件 以後 强制 豫編됐고, 朴泰俊 포스코 設立者가 작은 事業體를 마련해줘 只今까지 浦項에서 事業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형노 氏는 “現在 정봉화 氏는 交通事故와 手術 等으로 心身이 허약한 狀態”라며 “監聽事件을 다시 꺼내면 그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45年 前 監聽事件은 只今까지도 首警司, 保安司 要員들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