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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歲 年下 아내에게 ‘心쿵’ 하는 ‘돌부처’|新東亞

11歲 年下 아내에게 ‘心쿵’ 하는 ‘돌부처’

‘應팔’ 최택 實際 모델 이창호 9段이 사는 法

  • 이혜민 記者 | behappy@donga.com

    入力 2016-01-22 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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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사랑 아내, 5살·2살 딸과 알콩달콩
    • 최택보다 더한 ‘配慮남’
    • 어수룩해도 ‘스트레스 다스리기’ 達人
    • 갤러그, 엑스리온 實際 1人者
    tvN 드라마 ‘應答하라 1988’(以下 應八)은 숱한 話題를 남겼다. 個性 滿點의 登場人物들 中 特히 注目을 받은 이가 國寶級 바둑棋士 최택(박보검 分)이다. 應八의 人氣가 더해갈수록 劇中 최택의 實際 모델인 이창호(41) 9段에 對한 關心도 높아졌다.
    2005年 이창호 9段이 ‘不滅의 5連勝’을 거둔 ‘상하이 大捷’李 應八에서 再現되자 熱氣는 더 뜨거워졌다. 드라마 막바지에는 최택이 女主人公 성덕선의 未來 男便감으로 豫想되면서 덩달아 이창호 9段의 ‘러브 스토리’도 새삼 話題가 됐다. 최택과 이창호 국수(國手, 바둑 等에서 그 實力이 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사람. 韓國에서는 한 番이라도 頂上에 선 프로들에게 국수 稱號를 줌)는 果然 얼마나 닮았을까.
    최택. 1971年生. ‘바둑界의 돌부처’. 11歲 때 프로에 入團해 13歲에 世界 最年少 타이틀을 따내고 15歲에 스승을 꺾은 以後 應八의 背景인 1988年 現在까지 랭킹 1位를 지키며 中國, 日本 高手들을 壓倒하고 있다.



    ‘心臟어택’ 像男子

    하지만 서울 쌍문동(應八의 主舞臺) 골목길 同甲내기 親舊들인 정환, 鮮于, 桐龍, 덕선은 ‘바둑 新’을 ‘等神’ 取扱한다. 洞네 사람들도 택이를 누구나 챙겨줘야 할 ‘희동이’(쌍문동을 舞臺로 한 漫畫 ‘둘리’의 아기 캐릭터)로 여긴다. 골목 金銀房 ‘鳳凰當’ 외동아들 택이는 어릴 적 엄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移徙 왔고 아버지의 極盡한 보살핌을 받는다.
    택이는 約束 場所도 못 찾고, 말數도 적고,욕도 못하고 뒷북도 잘 치고, 돈도 잘 빌려준다. 신발 끈도 못 묶고, 携帶用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못 넣고, 요거트 뚜껑을 못 열어 끙끙댄다. 라면도 못 끓이고, 蹴球도 못한다. 極度의 스트레스로 睡眠劑를 먹어야 겨우? 잠이 든다. ?
    하지만 최택은 첫사랑 덕선이 德分에 ‘像男子’로 變身한다. 택이는 덕선이 없는 자리에서 親舊들에게 “나 덕선이 좋은데”라며 무심한 듯 堂堂하게 公表하는가 하면 親舊와 對話하다 짝사랑하는 덕선이를 떠올리며 “(덕선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愛情 攻勢도 積極的이다. 有功 硏修院에 몰래 들어가 蹴球를 하다 警備員에게 들킨 쌍문동 親舊들. 다리를 다친 덕선이를 王子님이 公主 안듯 가뿐히 안고 運動場을 疾走하는 이가 擇이다. 덕선이가 男子親舊에게 바람맞은 事實을 알고는 生涯 처음으로 大國을 抛棄한 채 콘서트場으로 달려가 추위에 떠는 덕선에게 自身의 外套를 건네곤 씽긋 웃는다. 이런 택이를 보며 ‘心臟어택’(‘心臟’과 ‘attack’의 合成語로 반했다는 뜻)韓 女人네가 한둘이 아니다.
    이창호. 이 국수는 1975年 全北 全州 중앙동에서 이時計店(李時計店)을 運營하는 李在龍· 채수희 夫婦의 三兄弟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옛날 滿洲에서 時計修理 技術을 익힌 이 국수의 할아버지 故(故) 이화춘 氏가 光復 直前 故鄕에 돌아와 時計店을 열었고, 그의 4남1女 中 셋째아들 李在龍 氏가 家業을 이었다.



    記者를 사랑한 記事

    이창호는 全北 優良兒選拔大會에서 1等을 했을 程度로 健康했다. 計算이 빨랐고 어릴 때는 줄곧 空冊에 數字만 썼다. 1부터 100까지 쓰고 나면 또다시 1부터 100까지 오로지 數字만 다시 쓰는 式이었다. 固執도 셌다. 幼稚園에 가기 前, 時計店 밖에 나가서 놀겠다는 걸 “너무 늦어 안 된다”고 하자 時計店 琉璃門으로 그야말로 ‘突進’해 通過했다. 琉璃 破片에 動脈을 다쳤고, 只今도 왼쪽 팔목에 흉터가 남아 있다.
    게임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學校에 入學하지 않은 아들들을 데리고 娛樂室에 자주 갔고, 兄弟는 自然스럽게 게임에 興味를 갖게 됐다. 特히 갤러그와 엑스리온을 좋아했는데, 銅錢 하나만 있으면 1時間이 넘도록 게임하며 記錄을 更新, 또 更新했다. 다른 아이들이 게임을 못할 地境이 되자 娛樂室 社長은 이들 兄弟가 나타나면 돈을 쥐여주고 돌려보냈다.





    이 국수가 바둑 世界에 들어선 건 1981年. 할아버지가 親舊들과 바둑을 두다 孫子가 바둑에 關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後 自轉車 뒷자리에 孫子를 태우고 起源에 데리고 다녔다. 처음에는 튕겨먹기(알까기), 烏木으로 始作했고 바둑을 배운 지 2年 만에 해태倍 全國 어린이바둑大會에 나가서 16强에 올라 奬勵賞을 탔다. 9歲에 1984年 當代 最高의 勝負師 조훈현 9段의 내弟子(內弟子)가 됐다. 프로 入團은 1986年.
    이창호의 放은 連喜洞 兆 9段 自宅의 2層에 마련됐다. 全州의 집에서도 혼자 자지 못한 아이는 조훈현 9段의 老父母와 함께 잤다. 나중에 혼자 자게 된 뒤에도 불을 켜고 門을 열어둔 채 잠이 들었다. 조 9段의 夫人 정미화 氏가 “7年 동안 2層으로 올라가는 窓戶의 발소리가 울리는 것을 한 番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할 만큼 아이는 操心性이 많았다.
    이창호는 1989年 最年少로 國內 타이틀을 爭取했고, 1992年엔 最年少 世界 타이틀 獲得의 新記錄을 세웠다. 以後 世界 6代 棋戰을 制霸하는 슈퍼 그랜드슬램을 達成했다. 國內外 通算 타이틀 獲得 140回, 賞金으로만 100億 원 넘게 벌었다.
    이창호 9段의 첫사랑은 只今의 아내인 것으로 推定된다. 11歲 年下인 이도윤 氏와는 프로棋士와 사이버오로(인터넷 바둑專門 사이트) 記者로 만났다. 2008年 늦여름 삼성화재杯 32强戰 때다. 大會가 끝나고 서울로 가는 車 안에서 이 記者가 李 9段의 解說을 듣고 觀戰記를 썼는데, 李 9段이 그렇게까지 해주는 境遇는 드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가을 太白山 大國 때 頂上을 함께 오르며 親해졌다고 傳해진다. 2年 熱愛 끝에 2010年 10月 兩家 父母와 親知들만 모시고 儉素하게 結婚式을 올린 夫婦는 5歲, 2歲 두 딸을 키운다.?



    ‘똑딱이 軍靴’ 誕生 祕話

    要約을 끝냈으니 디테일로 들어가 보자. 于先 두 사람의 共通點. 지난해 12月 29日 第17期 맥심커피杯 立身最强戰 開幕式 날 이창호 국수는 “최택 6段이 이창호 9段과 닮았다고 생각하느냐”는 質問에 “최택은 잘생긴 美少年이라 드라마를 보는 분들이 저 때문에 感情移入이 안 될까봐 걱정”이라면서도 “語訥한 게 좀 닮지 않았나?”라고 反問했다.
    이 국수의 동생 영호 氏는 “應팔 製作陣이 상하이 大捷뿐 아니라 自己가 關心없는 部分에 對해서는 全혀 神經 쓰지 않는 兄의 모습을 놀랍도록 잘 再現했다. 兄의 똑딱이 軍靴 逸話가 떠올랐다”며 웃었다.
    이 국수는 프로棋士로서는 最初로 合法的인 兵役 惠澤을 받았다. 그의 才能을 아낀 國會議員 105名이 後援會를 組織해 프로棋士의 兵役 惠澤 請願書를 만들었고, 이를 契機로 바둑이 兵役 惠澤을 받을 수 있는 藝術, 스포츠의 한 種目으로 進一步했다. 이 국수는 1995年 3月 文化體育部 長官과 面談한 後 4週의 軍事訓鍊을 받고 3年間 公益勤務要員으로 服務했다. ‘스포츠서울’의 ‘鄭溶鎭의 바둑手帖’은 다음과 같은 逸話를 紹介했다.

    抱腹絶倒할 에피소드 하나. 虎狼이 助敎의 集合命令이 떨어지자 小隊員들이 번개 같은? ‘肥馬(飛馬) 行馬’로 달려 練兵場에 集合한다. 그런데 이창호 訓兵은 內務班에서 軍靴(워커) 끈을 못 매 쩔쩔매고 있다. “이창호 訓兵! 여기서 뭐 하나? 社會에서 신발 끈도 한番 안 매봤나?” 記錄計時員 같은 ‘助敎’의 秒읽기 督促에 이미 울相이 돼버린 우리의 이창호 訓兵. “…한番도…전…운동화만 신어봐서….” 이창호 9段이 運動靴만 신어봤다는 말은 事實이다. 그것도 끈 달린 運動靴가 아닌 찍찍이 運動靴만…. 조훈현 9段의 夫人 정미화 女史의 證言이 이를 立證한다. “내弟子로 받고 1~2年間은 손수 沐浴을 시켰다. 머리를 혼자 못 감는 것은 勿論 洗手조차 제 손으로 제대로 못했다. 初等學校 低學年이긴 하지만 그 나이면 누구나 세면 程度는 할 줄 아는데, 窓戶는 本家에서 그렇게 愛之重之 키웠던 듯했다. 運動靴 끈이 한番 풀어지면 며칠이고 풀린 채로 지렁이 매달고 다니듯 신고 다녔다. 그래서 아예 끈을 묶을 必要 없는 찍찍이 신발을 사 신겼다. 元體 無感覺, 無神經한 아이였다. 그러나 바둑에 對한 熱情만큼은 執拗해 고래 심줄보다 끈질겼다.” 그래서 어찌 됐을까. 생각다 못한 助敎가 軍靴에 ‘똑딱단추’를 달아주는 아이디어를 내기에 이르렀다.



    ‘왼손이 모르게 하라’

    정미화 氏가 1998年 韓國棋院 ‘바둑가이드’에 쓴 ‘이창호 論-이창호의 내弟子 時節 Ⅱ’에는 이창호가 최택처럼 ‘길치’인 데다 復棋(復棋)를 할 때도 어수룩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連喜洞 우리 집에서 이화여대 附屬 初等學校까지는 버스 다섯 停車場 距離였다. 처음엔 낯설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이 엎어지면 코 닿을 코스를 지나쳐 헤매기 일쑤였다. 그것은 바둑板 밖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問題랄 것도 없었다. 정작 深刻한 問題는 ‘全州 바둑神童’ 소리를 듣는 창호가 自己가 둔 그날 낮의 바둑을 제대로 復棋 못할 때가 種種 있다는 事實이다. 이 대목에서는 曺薰鉉 9段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얘가 分明 내 스타일이 아닌 것만은 自明한데, 이거 내가 잘못 봤나? 아직도 그이는 창호가 復棋를 제대로 못한 것을 ‘미스터리’로 여긴다. 하긴 창호와 切親한 김성룡 5段의 얘기를 들어보면 世界 넘버원이 된 只今도 헤맬 때가 있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최택은 中國에서 大國하면 親舊들의 付託으로 中國 술을 사오고, 親舊들과 저녁에 피자를 같이 먹기로 約束해놓고 늦게 到着하자 親舊들이 各自 집에서 먹을 수 있도록 피자 여러 판을 사온다. 親舊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 속 깊은 親舊다.
    이창호 9段은 어떨까. 사이버오로 손종수 常務는 “李 9段은 돈이 안 되는 行事라 하더라도 韓國棋院의 處地를 생각해서 參席해야 할 行事라면 꼭 나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2, 3年 前인가. 프로와 아마추어 7, 8名이 같이 밥을 먹는 자리가 있었어요. 밥 먹고 자리를 옮겨 술 한盞을 더 하게 됐죠. 當時 한 사람이 일 때문에 늦어져 술자리에 왔는데 밥을 못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들은 李 9段이 슬며시 일어나더니 便宜店에 가서 도시락과 국을 데워 왔더라고요. 別로 親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도 그런 好意를 베푸니 다들 멋있다고 했죠.”



    아내 李氏도 李 9段의 配慮가 좀 지나칠 때가 있다고 귀띔했다.
    “親舊들 만날 때도 다른 사람의 意見에만 맞춰요. ‘이젠 自己 意見을 어느 程度 내야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데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집에서도 그래요. 戀愛 2年, 結婚 後 5年이란 時間을 함께해왔는데도 男便은 한결같아요. 첫째를 妊娠해서 입덧으로 메스꺼워할 때는 제가 冷藏庫 門을 한 番도 안 열게 해주고 飮食物 쓰레기도 버려줬죠. 愛情表現을 잘하는 건 아닌데 늘 저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配慮心은 善行으로 이어진다. 이창호·이도윤 夫婦는 첫딸(이소정)의 돌잔치를 여는 代身 寄附金을 모아 傳達하는 ‘寄附 돌잔치’를 벌였다. 現在 나눔첫돌잔치 홈페이지에는 ‘이소정의 이름으로 185萬 원의 나눔이 모아졌고, 아프리카 말리 等 低開發國의 食水 改善 事業에 쓰일 豫定입니다. 여러분의 關心과 사랑 感謝드립니다’는 感謝 글이 남아 있다. 동생 영호 氏는 “兄이 내가 이런 말 한 걸 알면 싫어할 텐데…”라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刑의 哲學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입니다. ‘有名한 사람이 좋은 일 하면 다른 사람들도 同參해서 같이 따라오지 않겠냐’며 善行을 알리라고 해도 兄은 그렇게 안 해요. 兄이 오래前부터 좋은 일을 많이 한 걸로 압니다.”



    수많은 廣告 出演 提議 退字

    劇中 최택은 남에게 付託하는 것을 極度로 싫어하는 人物로 그려진다. 그러던 최택이 親舊 아버지가 應急室로 실려가자 自身의 팬인 病院長에게 電話해 善處를 付託한다. 이런 대목도 李 9段의 面貌와 겹친다. 영호 氏는 “兄이 自身을 위해 남에게 付託하는 건 極度로 싫어하지만, 自己가 付託해 누군가를 돕는 狀況이라면 分明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했다.
    2011年 李 9段의 自敍傳 ‘이창호의 부득探勝(不得探勝)’이 發刊됐을 때의 일이다. 손종수 常務는 한국기원 關係者와 함께 “放送社의 主要 뉴스 時間에 인터뷰 提案이 들어왔으니 出演하면 冊 弘報가 잘될 것”이라고 說得했지만 李 9段은 끝끝내 應하지 않았다.
    “李 9段은 團體戰 優勝 功勞로 시드(豫選을 거치지 않고 本選에 出戰하게 해주는 것)를 주면 斜陽합니다. 自己는 그걸 받을 資格이 없다는 거죠. 優勝 賞金을 n分의 1로 받을 수 있는데도 그런 部分에 對해서는 斷乎합니다. 그 많은 廣告 提議를 拒絶한 것도 自己만의 原則이 있어서 그랬을 겁니다.”
    時間을 正確히 맞춰 大局場에 나타나는 것도 최택과 이창호 9段의 닮은 點이다. 영호 氏는 “相對가 年長者일 境遇 大局場에 늦게 나가면 後輩로서 禮儀에 어긋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勝負師로서 最高의 컨디션으로 調節하기 위해 그런 習性은 서로 尊重해줘야 한다”고 說明했다. 영호 氏는 自身의 冊 ‘나의 兄, 이창호’에 이렇게 썼다.? ?

    窓戶 兄도 예전에는 10分쯤 미리 가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어느 程度 이름이 알려지고 난 後부터는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記者들의 인터뷰 試圖 等으로, 일찍 到着한 時間만큼 受難을 겪었다. 結局 여기서 쌓인 疲勞가 大國에 惡影響을 미치고 兄은 컨디션 調節을 위해 일부러 正確한 時間을 지키게 된 것이다.

    최택은 와이셔츠 단추를 모두 채우고 바둑을 둔다. 최택이 희동이에서 바둑의 神으로 變身하는 건 正裝을 입고 바둑을 둘 때다. 영호 氏는 이 部分은 兄의 스타일과 다르다고 했다.
    “처음 世界大會에 出戰했을 때 말고는 10年 넘게 넥타이를 안 맨 것으로 記憶합니다. 저와 中國 日程을 함께한 1998年부터 只今까지 한 番도 넥타이 맨 걸 본 적이 없어요. 목이 갑갑한 것을 무척 싫어했거든요. 禮儀를 지키면서도 大國에 支障을 주지 않는 服裝이 무엇이냐를 놓고 가끔 論難이 있었는데, 兄은 ‘노타이 正裝’李 適正線이라고 判斷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최택과 이창호는 어떤 點이 다를까. 지난해 12月 立身最强戰 開幕式 때 “최택 6段은 異性에게 아주 積極的인데 이창호 9段은 어땠냐”는 質問에 李 9段은 “그게 나와 아주 다른 點”이라고 答했다. 아내 이도윤 氏에게 같은 質問을 건네자 “그런 것도 같다”며 말을 아꼈다.



    안으로 눌러 참는 사람

    바둑 工夫하는 스타일도 다르다. 최택은 棋譜를 보며 工夫하다 새벽에 잠드는 境遇가 많다. 한番 앉았다 하면 일어날 줄 모른다. 이런 페이스를 持續하다간 바둑을 오래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程度다. 이창호 9段은 새벽까지 工夫하진 않는다. 최택처럼 每日같이 起源에 나가지도 않는다. 다음은 ‘나의 兄, 이창호’의 한 대목.

    只今은 내(이창호)가 工夫하던 時節과 많은 差異가 있는 것 같다. 내가 10代 初盤에 工夫에 熱中했을 때 一週日에 세 番 程度 起源에 나가 實戰 練習을 했고, 그 外에는 혼자 집에서 3, 4 時間 工夫했던 것으로 記憶한다. 하지만 요즘은 競爭이 너무 熾烈해서 大部分의 아이들이 하루 10時間 가까이 工夫하는 것으로 안다.

    勿論 李 9段의 工夫가 새벽까지 이어지는 境遇도 있었다. 特히 大局을 앞두고는 그랬다. 영호 氏는 “冊床 위에 놓인 바둑板, 어지럽게 놓인 돌들, 그 옆 寢臺 위에 疲困을 못 이기고 쓰러진 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들을 조심스럽게 주워담는데 괜스레 가슴이 뜨거워졌다. 每番 힘든 勝負를 펼쳐야 하는 兄이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고, 한便으로는 쉽지 않은 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默默히 걸어가는 모습이 자랑스럽게도 느껴졌다”고 썼다. ?
    趣味도 좀 다르다. 최택은 담배와 술을 하지만 李 9段은 술만 조금 마신다. 최택처럼 睡眠劑를 먹어야 잠드는 것도 아니다. 최택은 스스로 “공 좀 찬다”고 하는데 親舊 桐룡이는 “(工夫 못하는) 덕선이 서울대 가는 소리하고 있네”라고 비웃는다. 李 9段은 運動을 잘했다. 初等學校 2學年 때는 씨름王이었고 以後 卓球, 테니스, 골프를 즐겼다. 요즘 趣味는 登山.


    응팔이 放映된 後 손종수 常務와 만난 이창호 9段은 “최택은 어린 時節 親舊가 많은데 그런 點이 부럽다”고 했다.
    “李 9段은 바둑에만 沒頭하느라 바둑 親舊 外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元來도 寡默하지만 自己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勝負를 겨뤄 이기고 그걸 背戾하다 보니 漸漸 안으로 눌러 참고, 말을 안 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습니다.”



    棄權敗는 멋있지 않다

    최택과 이창호의 가장 큰 差異點은 ‘棄權牌’에 있지 않을까. 최택은 男子親舊와 콘서트를 보러 간다며 들떠 있던 덕선이가 바람맞자 對局 途中 棄權하고 덕선이에게 달려간다. 視聽者들은 “自身의 커리어보다 사랑을 擇한 멋진 택이”이라며 치켜세웠다.
    바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行動이 얼마나 프로답지 못한 것인지 안다. 이도윤 氏는 “이런 行動은 全혀 멋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면서 “조치훈 師範님은 交通事故를 當하고도 對局을 치렀을 만큼 프로棋士에게 對局은 어겨서는 안 될 所重한 約束”이라고 했다.
    이창호 9段은 現在 韓國 랭킹 32位(1月 基準)다. 손종수 常務는 李 9段이 家庭에서 安穩함을 얻으며 더 成長할 것이라고 期待했다. “普通은 한番 成績이 내려오면 上昇하기 어려운데 李 9段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回復하고 있다”고 診斷했다.
    李 9段의 삶을 ‘復棋’하면서 아홉 살짜리의 意思를 尊重해 電柱에서 서울로 올려 보낸 父母의 ‘믿음’이 이 국수를 키워낸 原動力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국수가 바둑이라는 넓은 바다에서 航海를 繼續하길 바라며 그에게 아내 道允 氏의 말을 傳한다.
    “1人者가 뒤처진다는 건 큰 스트레스일 거예요. 하지만 그건 프로棋士가 견뎌야 할 몫입니다. 그리고 물러난다고 해서 絶對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當然한 順理인 거죠. 저희 新郞은 分明 나이가 들어도 勝負를 겨룰 사람이니 지는 것에 무뎌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時間을 지혜롭게 잘 넘기면 分明 더 큰 걸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 큰 것이 1人者를 말하는 건 아니고, 뭔가 더 넓고 큰 깨달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 글을 쓰기 위해 이창호 9段과 여러 次例 인터뷰를 試圖했지만 이 국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 이도윤 氏, 10餘 年間 이 국수의 中國 遠征길에 同行한 동생 영호 氏, 應八 製作팀에게 바둑 助言을 해준 손종수 사이버오로 常務에게서 그에 關한 얘기를 들었다. 또 영호 氏와 손 常務의 冊 ‘바둑板 위에 世上을 그리는 사람 나의 兄, 이창호’, ‘班常의 CEO 이창호 스토리-避할 수 없다면 즐겨라’도 參考해 이 국수의 젊은 날을 服朞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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