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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 줄 모르는 韓國人, 遺傳子를 바꿔주마”|신동아

“놀 줄 모르는 韓國人, 遺傳子를 바꿔주마”

奧地 캠핑 즐기는 87歲 ‘眞짜 自然인’ 박상설

  • 김지은 │客員記者 likepoolggot@empal.com

    入力 2014-11-20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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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7歲 老人이 홀로 奧地에서 非朴을 하고, 背囊 하나 달랑 메고 海外로 캠핑을 다닌다니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우리나라 오토캠핑 創始者이자 冒險家에다 칼럼니스트, 카운슬러라니, 나이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 아닌가.
    • 最近 ‘잘 산다는 것에 對하여(부제 : 百 年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를 펴낸 박상설 氏의 獨特한 幸福論 講義.
    “놀 줄 모르는 한국인, 유전자를 바꿔주마”
    “老人들이 바뀌어야 해요. 孝道를 바랄 게 아니라 父母가 子息한테 孝道해야지. 子息들이 언제 낳아달라고 했나? 自己들이 좋아서 사랑을 나누고 그러다 보니 애가 태어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責任을 왜 子息한테 지라고 하느냔 말이지.”

    거침없는 言辯에 슬그머니 津땀이 흘렀다. 怪짜 같은 人生을 사는 사람일 거라고 어느 程度 豫想하긴 했지만 受話器 너머로 들려오는 또랑또랑 힘 있는 목소리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老人 中에서도 古參인 그가 펼치는 老人 批判論에 아직 그 人生의 折半도 살지 못한 經驗値로 敢히 맞장구치거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挑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의 獨特한 人生觀과 哲學的 談論은 好奇心을 불러일으키기에 充分했다. 한便으론 대충 숲 속 어디에선가 움幕 生活을 하며 科學的 根據가 不足한 非論理的인 이야기들을 所信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奇人의 모습도 떠올랐다. 적어도 專門 캠핑 裝備와 旅行 關聯 資料가 種類別로 갖춰진, 素朴한 展示室 같은 그의 집을 訪問하기 前까지는 그랬다.

    家族 獨立宣言

    “車는 갖고 오지 말아요. 서울서 電鐵 타면 20分인 距離를 왜 車를 타고 와?”



    이른 아침, 그를 만나려고 仁川으로 向했다. 이름은 박상설. 올해로 87歲다.

    우리네 老人의 삶은 大部分 외롭고 쓸쓸하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일을 할 만한 體力도 되지 않는다. 선뜻 알맞은 일자리를 주겠노라 나서는 곳도 없다. 누군가와 더불어 살고 싶지만 本人 意志와 相關없이 외면당하고 밀려나니 結局 選擇이 아닌 强要에 依한 홀로 서기가 始作된다. 홀로 사는 老人의 삶이 漸次 꺼져가는 촛불 模樣으로 困窮해지고 빛이 바래는 理由다.

    그런데 박상설 氏는 正反對다. 30餘 年 前, 그는 家族에게 일찌감치 獨立을 宣言했다. “우리 모두 各自의 삶을 잘 살아보자”는 게 理由였다.

    “잘 살아가자는 게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살자는 얘기는 아녜요. 생각해보세요. 長成하고 나서까지 제 父母 밑에서 獨立하지 못하는 짐승은 없거든요. 어느 程度 홀로 서기가 可能해지면 各自 삶을 開拓하며 살아가는데, 唯獨 사람만 孝道한다 어쩐다 하면서 서로에게 얽매이고 干涉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孝道라는 게 老人을 할 일 없게 만드는 거예요. 孝道해라, 孝道해라 하면서 自身이 할 일을 자꾸 子息한테 미루게 되거든요.”

    自然으로 도망가다

    그는 自己 이름으로 冊을 내고도 그 消息조차 家族에게 傳하지 않았다고 했다. 며느리가 어디선가 消息을 듣고 찾아와 知人에게 媤아버지의 冊을 膳物하고 싶다며 사인을 받아갔으니 어쩌면 消息을 영 傳하지 않은 건 아닐 수도 있겠다.

    “亂 言論 媒體에 칼럼도 連載하고, e메일로 自體 消息紙도 發送하니 굳이 따로 消息을 傳하지 않아도 서로가 잘 살아간다는 것 程度는 알 수 있잖아요.”

    그는 自身과 家族의 關係를 ‘實驗家庭’이라 불렀다. 서로의 삶에 對해 어떠한 干涉도 하지 않고 100% 各自의 生活을 保障하는 方式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고 幸福하게 할 수 있는지에 對한 나름의 確信에서 始作한 일이란다.

    하지만 그에게도 고달픈 時節이 있었다. 서울대 機械工學科를 다닌 그는 卒業하자마자 6·25戰爭이 勃發해 軍에 入隊해야 했다. 高學歷者가 많지 않던 時節이라 그는 士兵이 아닌 將校로, 大邱의 陸軍本部로 發令이 났다. 하지만 家族의 生死는 알 길이 없었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가 部隊 앞에서 나를 찾는다는 피켓을 들고 서 계시더라고요. 다행스럽게도 家族 모두 無事히 避難을 내려왔더군요. 그때부터 제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父母님에 女同生 다섯, 누님 한 분이 계셨죠. 스물일곱에 結婚해 아들딸까지 생기니 서른 살엔 扶養家族이 자그마치 11名으로 늘었습니다. 當時 그 많은 食口를 먹여 살리려면 깡牌가 되던가 도둑놈이 되던가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난 이도저도 싫어 副業까지 해가며 지겹도록 일만 했어요. 率直히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모두가 못 먹고 못살던 時節, 아무리 能力 좋은 家長이라 해도 戰爭 끝에 11名의 食口를 돌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앞만 보고 달리던 그는 어디서라도 숨筒 틔울 구멍을 찾고 싶어 自然을 찾았다.

    “다른 사람은 힘이 들 때 도망가느라고 술 마시고 엉뚱한 짓들을 하고 그랬는데, 난 술이라곤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거든요. 茶房에도 안 다녔어요. 性格에도 안 맞고, 좋지도 않았던 거죠. 그런데 땅에 씨 뿌려서 싹 틔우고 키우는 재미는 아주 좋더라고요. 그래서 自然으로 도망가는 길을 擇했어요. 남들 술 마시고 다방 가는 돈으로 난 加平郡에 땅을 샀어요. 한 坪에 5원인가 할 땐데, 30萬 坪을 산 게지. 도망가려고. 아마 우리나라 老人네 中 내가 第一 運이 좋을 거예요.”

    그 땅이 近 50年 歲月 동안 그가 運營 中인 週末農場의 始作이었다. 그리고 그는 自身이 家長으로서의 義務를 다했다고 생각될 즈음 家族에게 自身이 생각하던 ‘實驗家庭’의 모델을 만들자고 提案한 것이다.

    걸으면 낫는 病

    그가 살아온 얘기를 술술 풀어놓는 사이, 가스레인지 위 酒煎子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었다. 캠핑할 때 즐겨 마시는 方式이라며 손잡이 달린 캠핑用 커피盞에 커피 티백을 걸쳐놓고 김이 뽀얗게 올라오는 물을 따라 黑沙糖과 함께 건넸다.

    “이게 내가 野外에서 커피 마시는 方式이에요. 이렇게 물을 부어도 커피가 今方 우러나진 않아요. 오랫동안 천천히 얘기하라고 그러는 거겠지. 천천히 우러난 커피를 黑沙糖이랑 같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어요.”

    그가 勸하는 대로 달달하고 구수한 黑沙糖 한 알을 입안에 까 넣은 다음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고 近似한 맛이었다. 아, 요즘처럼 쌀쌀한 늦가을 숲 속에서 이런 커피 한 盞 마시면 世上 근심걱정 다 잊은 듯 幸福해지겠다 싶었다. 그가 冊 한 卷에 걸쳐 펼쳐놓은 自然禮讚論에 한결 가까워진 듯한 氣分이 들었다.

    “난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工大를 나와 오랫동안 엔지니어로 일했고, 그런 쪽엔 재주도 없었거든요. 學校나 職場 다닐 때 쓴 글이라고 해봤자 論文이며 公文, 報告書 같은 것들이었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내가 自然에서 뒹구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 싶더라고요. 自然을 벗 삼아 살아온 德分에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으니 그 얘기도 해줘야 할 거 같았어요. 그래서 自然과 만난 이야기를 한 10年 동안 꾸준히 써내려 가다보니 그게 冊이 됐어요.

    난 아직도 美辭麗句 같은 건 붙일 줄 몰라요. 그렇게 쓰려고도 해봤는데 그러니까 자꾸 幼稚해지고 글이 造作되더라고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 主語와 述語만 넣고 나머지 形容詞와 副詞는 自然을 끼워 넣는 거라고 생각하며 씁니다. 잘 쓰려고 애쓰면 엉뚱한 얘기가 나오거든요.”

    글을 잘 쓸 줄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는 2001年 ‘東亞日報’가 主管한 鬪病文學賞에서 優秀賞을 受賞한 文筆家다. 10年째 ‘羅針盤’이라는 칼럼 形式의 消息紙도 e메일로 連載 中이다. ‘羅針盤’은 그가 運營하는 캠프나비(campnabe)라는 同好會 會員에게 뿌려지고, 그가 살아가는 方式에 魅了된 知人들에게도 보내진다. 한 言論 媒體엔 ‘박상설의 自然 속으로’라는 題目으로 固定 칼럼도 連載한다.

    그가 이처럼 本格的으로 自然禮讚論을 펼치는 캠핑族이 된 건 27年 前 그의 人生을 바꿔놓은 커다란 事件을 만나면서부터다. 建設교통부를 거쳐 한 建設業體의 重役으로 일하던 그는 61歲 되던 해, 갑작스러운 病魔로 쓰러져 기나긴 鬪病生活을 始作했다. 3年 동안이나 病名을 알지 못해 病院을 轉轉하던 그는 及其也 美國으로까지 건너가서야 ‘腦幹動脈梗塞’ 判定을 받았다고 했다. 手術조차 不可能한 狀態였던 그에게 내려진 處方은 아스피린과 運動 두 가지였다.

    “病院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더라고요. 아, 이제 죽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죽기 前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平素 하고 싶었던 걸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혼자 外國 구경을 갔습니다. 때마침 88서울올림픽이 끝난 뒤라 우리나라에도 海外旅行 바람이 불었거든요. 그때도 旅館이나 호텔엔 묵지 않고 캠핑을 했습니다. 空港에 到着하자마자 勇敢하게 車부터 빌렸죠.”

    背囊旅行에 텐트 치고 生活할 거면서 왜 車를 빌렸느냐고 물었더니, 그럼 텐트까지 든 그 무거운 背囊을 메고 어떻게 걸어 다니느냐고 되묻는다. 듣고 보니 그렇다. 自然이 좋아 自然을 찾아간 것이지 딱히 사서 苦生을 하러 간 것도 아닌데 괜한 先入觀 때문에 그의 旅行에 멋대로 蛇足을 붙이고 있었다.

    “그래도 첫날부터 죽을 苦生이었죠. 그런데 異常하게 안 죽더라고요. 分明 醫師는 1年을 못 산다고 했는데 자꾸 症勢가 好轉되는 겁니다. 그래서 알았죠. 아, 내 病은 걸으면 되는 病이구나. 勿論 只今도 어지럽고 힘이 들 때가 있어요. 完治가 안 되는 病이거든요. 그런데도 몸은 아프기 前보다 더 健康해졌어요.”

    살림의 高手, 旅行의 達人

    그는 여느 캠핑族이 즐겨 먹는 인스턴트식품이나 桶조림 飮食엔 關心이 없다. 캠핑 다닐 때도 株式은 누룽지와 洋파 두 가지 程度이고, 平素 食事도 直接 만든 飮食으로 最大限 簡素하게 먹는다. 健康을 위해 이것저것 過하게 챙겨먹는 게 되레 더 해롭다는 게 持論. 김치며 食醯도 直接 담가 먹는단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도 絶對 허투루 하는 法이 없다. 툭하면 캠핑을 떠나는 自由人의 집인데도 어지간한 똑순이 主婦가 아니고선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정갈하다. 書齋에 가지런히 꽂힌 冊이며 차곡차곡 分類돼 쌓인 資料들, 싱크臺에 조르르 올려진 그릇과 컵은 如干 야무진 살림 솜씨가 아님을 보여준다. 房 한쪽에 줄을 세워둔 背囊은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當場 出發할 수 있도록 必要한 裝備를 캠핑 種類別로 채워둔 것들이다.

    “놀 줄 모르는 한국인, 유전자를 바꿔주마”

    10月 慶南 居昌中央高等學校에서 招請 講演에 나선 박상설 氏.

    “只今 當場이라도 美國 背囊旅行을 갈 수 있어요. 저 가방에 必要한 걸 다 整理해서 넣어놓았거든요. 이番 가을엔 講院 鐵原郡 山골에만 세 番 다녀왔습니다. 기러기가 보고 싶어서요. 기러기 壽命이 200年 가까이 된다고 하니 내가 본 기러기들 中엔 러시아 大文豪 톨스토이가 보았던 기러기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훌쩍 캠핑을 떠날 때면 그는 오롯이 혼자다. 젊고 나이 듦을 떠나 차가운 空氣 속에 홀로 있는 것이 쓸쓸하고 외로울 法도 한데 그는 그런 孤獨을 즐기는 게 좋아 나홀로 캠핑族이 됐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캠핑 가면 힘들다 疲困하다 하는데 왜 그런 줄 아세요? 놀 줄 모르니까 그런 겁니다. 車에다 짐 잔뜩 싣고 家族 全部 데려가서 三겹살 굽고 演技 피우며 노는 게 캠핑인 줄 잘못 알고 있다, 이 말입니다. 비싼 裝備만 競爭的으로 갖춰놓고 옆집이 가니 나도 가야 되는 게 캠핑인 줄 생각하잖아요. 登山도 마찬가집니다. 여럿이 무리 지어 가서는 山 밑에서 빈대떡에 막걸리 마시며 同僚들 險談하고 家族 뒷얘기하는 게 登山이더란 말입니다. 眞짜 캠핑을 즐기고픈 거라면 우르르 떼 지어 車를 세워놓고 고기 구울 게 아니라 호젓한 自然을 벗 삼아 冊을 읽어야지요.”

    그에게 人文學은 사람을 잘 놀 줄 알게 만드는 ‘文化’의 根幹이자 自然과 사람, 文化를 잇는 重要한 架橋다.

    “文化가 代물림되는 걸 文化決定論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엔 過去 살롱 文化라는 게 있었어요. 50歲 넘은 貴婦人들은 市內에 혼자 나가지 않고 어린 處女들과 반드시 同行했는데, 恒常 人文學 冊을 갖고 다녔답니다. 살롱에 앉아 自身이 읽은 冊의 主題를 發表하고, 討論을 하는 거죠. 그들은 그런 살롱 文化를 통해 高級 文化를 代물림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안타깝게도 그런 게 없어요.

    高級 文化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을 疏外시키는 密室 文化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外國에선 캠핑族度 텐트 안에서 조용히 冊 보고 自然을 즐기거든요. 本來 캠핑이란 것이 우리처럼 이렇게 소란스럽게 지지고 볶고 하는 게 아닌데 우리에겐 그 文化가 잘못 傳達된 겁니다.”

    “놀 줄 모르는 한국인, 유전자를 바꿔주마”

    캠핑을 떠날 때면 박상설 氏는 오롯이 혼자만의 孤獨을 즐긴다.

    그는 自身이 생각하는 文化決定論을 說明하려고 지리心理學을 例로 들었다.

    “過去 우리나라 사람들은 山을 잘 넘지 못했습니다. 山에만 가면 虎狼이가 나온다, 鬼神이 나온다 그랬으니까요. 遊牧民 社會가 아닌 農耕社會이다보니 面 單位만 벗어나도 큰일이 나는 줄 알았죠. 自己가 사는 洞네를 벗어나면 ‘換腸했다’고 했을 程度였으니까요. 그렇게 한 地域 안에서만 갇혀 살던 遺傳子가 아직도 우리 몸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登山을 즐기는 것, 自己가 사는 집을 벗어나 텐트를 치고 自然을 즐기는 것에 서툰 겁니다. 보고 배운 게 없으니까요. 나는 그런 遺傳子를 바꾸는 作業을 하는 中입니다.”

    眞짜 캠핑은 이런 것

    그는 60歲 때 카운슬러 資格證을 땄고, 64歲에 히피가 됐으며, 77歲엔 킬리만자로를 登攀했다. 美國 西部 沙漠과 引渡의 타르 沙漠, 로키산맥과 알래스카를 홀로 旅行하면서 거지들과 同行하기도 하고, 無作定 히피와 어울려 그들의 旅行길에 同參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가 쓴 글의 一部다.

    한瞬間에 일어난 일이다. 샌프란시스코 中心街를 나는 背囊을 메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눈에 보아도 自由奔放한 히피風의 젊은이들을 가득 태운 낡은 버스 한 臺가 信號待機에 멈춰 섰다. 瞬間 나는 버스 門을 마구 두들겨 올라탔다. 히피들이 一齊히 高喊을 지르며 拍手로 나를 맞았다. 나는 히피가 됐다. 헐거운 대낮에 나의 身分이 바뀌었다. 그네들은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探險旅行을 하는 自由人들이었다. 바로 이거야!! 나는 무릎을 쳤다.

    이 漫畫 같은 해프닝은 眞짜 漫畫였다. 낡아빠진 漫畫 같은 스쿨버스를 旅行버스로 改造한 것이다. 探險 旅行을 專門으로 하는 Green tortoise adventure travel Bus 다. 버스 안의 椅子를 모두 걷어내고 매트리스를 깔았다. 매트리스를 들어 올리면 그 밑에 旅行者의 짐을 保管할 수 있도록 空間 裝置가 되어 있다. 짐 倉庫다. 식기, 버너, 炊事道具와 食卓 等은 버스 지붕 위에 캐리어 安全裝置로 단단히 묶여 있다.

    얼마 前 그는 우리나라에서 留學하는 外國人 學生들의 캠프에 講師로 招待됐다. 콘도를 빌려 行事를 進行할 테니 와 달라는 얘기에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若干의 謝禮費를 準備했다는 말에 그것도 必要 없다고 했다. 代身 自身의 週末農場에서 캠핑하며 먹고 자고 自然을 함께 느끼며 얘기하자는 게 受諾 條件이었다.

    “사람은 苦生을 하고 魂이 나봐야 敎育이 되는 건데, 便安하고 뜨뜻한 곳에 앉아서 무슨 自然을 배우고 느끼겠어요. 내 農場에 오면 자는 것에도 돈 안 들고 먹는 것에도 얼마 들지 않는 代身 물소리를 듣고 別途 보면서 카시오페아 자리가 어디 있고 北斗七星이 어디 있는지 얘기할 수 있는데 말이죠.”

    慶南 居昌中央高等學校에서 그에게 講演을 請했을 때도 그는 無酌定 學校 마당에 텐트 치는 일부터 했다. 講演을 請한 先生님들은 唐慌했지만 아이들은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늦은 밤까지 텐트를 떠나지 않았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大韓民國을 통틀어 그만큼 신나게 잘 노는 사람도 드물다는 데 同意할 것이다. 그가 運營하는 江原 洪川郡의 週末農場엔 平凡한 會社員부터 學生, 最高經營者(CEO), 外國人까지 언제나 그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를 人生 멘토 삼아 카운슬링을 付託하는 이도 적지 않다.

    때론 家族이나 同僚들끼리 農莊에 가면 캠핑을 할 수 있다는 말 한마디만 듣고 無酌定 찾아오는 이도 있다. 한 끼 밥값 2000원 程度면 밭에서 기른 有機農 菜蔬로 배불리 食事를 마칠 수 있고, 溪谷의 물소리를 들으며 山길을 걷고 밤하늘에 총총 박힌 別途 볼 수 있다. 그러다 하룻밤을 그와 보내고 나면 어느새 캠핑의 魅力에 푹 빠지거나, 스스로 자그마한 週末農場을 마련하기 위해 터전을 잡기도 한다. 서로 영 消息을 傳하지 않고 산다는 그의 孫子도 그를 따라 週末農場을 마련했다. 그는 이를 새로운 文化의 代물림, 遺傳子의 變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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