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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고 목 졸린 西北의 늑대들|新東亞

한 글字로 본 中國 간쑤省

굶주리고 목 졸린 西北의 늑대들

甘 中華의 끝

  • 글 · 寫眞 김용한 | 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6-11-03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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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쑤省은 中華(中華)의 끝이다. 天下의 境界가 끝나고 새로운 世界로 가는 길이자 冒險이 始作되는 곳. 異質的인 두 世界가 만나니 文化가 오가고 貿易의 門이 열린다. 그러나 沙漠과 高原으로 둘러싸인 極限의 生存 空間은 ‘西北의 늑대’ 목을 조른다.
    4月은 殘忍한 달이라 했던가. 지난 4月 沙漠地帶인 간쑤(甘肅)省의 空氣는 탐욕스러웠다. 젖은 手巾을 걸어두면 瞬息間에 바싹 말랐다. 조금의 濕氣도 許容하지 않았다. 바싹 마르다 못해 뻣뻣하게 굳어버린 手巾은 恰似 吸血鬼가 피 한 방울 안 남기고 빨아먹은 말라 비틀어진 屍體 같았다.

    庭園에서 노트북을 펴놓으면 금세 노트북 畵面에 ‘모래 코팅’李 입혀졌다. 每年 고비沙漠에서 일어난 黃沙는 廣闊한 大陸과 바다를 지나 韓國과 日本을 덮친다. 2000km 떨어진 韓國의 黃沙가 성가신 程度라면, 黃沙 發源地가 코앞인 간쑤省의 黃沙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모래暴風이 부는 名士山(鳴沙山)은 ‘모래가 우는 山’이란 뜻이다.

    皮膚는 거칠어지고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極度로 建造하니 마음도 荒凉해지고 生活도 疲弊해진다. 나오느니 歎息뿐이요, 느는 건 한숨뿐이다. 浪漫的인 詩를 읊으며 氣分을 轉換해보려 해도 떠오르는 詩는 간쑤省의 荒凉함을 恨歎하는 詩뿐이다.

    “오랑캐의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봄이 오지 않는 것은 봄바람이 玉門關을 못 넘기 때문이라.”



    中國에서 가는 곳마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讚辭를 늘어놓던 마르코 폴로조차 1年이나 머문 간쑤省의 聖徒 란저우(蘭州)를 “지저분한 都市”라고 짤막하게 評했다. 그때에도 간쑤省은 瘠薄하고 荒凉했으리라.



    天下의 境界가 끝나는 곳

    간쑤省의 略稱은 ‘달 감(甘)’字다. 간쑤는 城 西쪽 끄트머리의 두 地域인 간저우(甘州)와 쑤저우(肅州)를 합친 이름이다. 現在 이 地域은 장예(張掖), 주취안(酒泉)으로 불린다. 이 곳이 ‘다디단(甘) 술 같은 샘물(酒泉)’이라니. 荒凉한 沙漠으로 뒤덮인 간쑤省의 自然環境을 생각하면 逆說的인 이름이다. 하지만 죽음의 沙漠에 둘러싸여 있기에 이 地域 사람들은 물의 고마움을 잘 안다. 水質과 相關없이 물만 있다면 그 自體로 다디단 甘露水 같았으리라.

    이곳이야말로 中華(中華)의 끝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가 “兩館(陽關) 밖에 나서면 아는 이 하나 없다”며 切切하게 寞寞함을 吐露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을 悲觀하며 술에 醉했다.

    “醉해서 모래밭에 누운 兵士를 비웃지 말게. 예부터 몇 名이나 戰爭에서 돌아왔던가.”

    그러나 한 世界의 끝은 다른 世界의 始作이기도 했다. 이곳을 나선 壯健은 실크로드를 開拓했고, 現場은 天竺國에서 佛經을 求했으며, 마르코 폴로는 ‘東方見聞錄’을 남겼다. 沙漠과 高原으로 둘러싸인 간쑤省은 極度로 危險한 곳인 同時에 天下의 境界가 끝나고 새로운 世界로 가는 길이 열리며 冒險이 始作되는 곳이다. 異質的인 두 世界가 만나니 文化가 오가고 貿易의 門이 열린다.

    간쑤省 地形은 매우 特異하게 생겼다. 普通 한 領域은 中央으로부터 고르게 勢力이 퍼져 圓 또는 死角 形態를 띠게 마련이다. 그러나 간쑤省은 東南쪽에서 西北쪽으로 길고 가늘게 삐죽 튀어나왔다. 간쑤省은 왜 이처럼 獨特한 領域을 갖게 됐을까. 간쑤省 東北方에는 內몽골 高原이 있고, 西南方에는 티베트 高原이 있다. 이 地域들은 오늘날 다 같은 中國 땅인 네이멍구(內蒙古)와 칭하이(靑海)城이지만, 예전에는 몽골族과 티베트族이 强力한 勢力圈을 形成한 곳이다. 兩大 高原 사이의 골짜기인 간쑤省은 두툼한 빵 사이에 끼인 치즈 한 張과 같은 땅이었다. 그래서 司馬遷은 간쑤省을 “湖(胡, 몽골族)와 江(羌, 티베트族)이 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好戰的인 遊牧民族 사이에 끼인 가냘픈 길. 아슬아슬하게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지는 길. 幅이 좁고 긴 간쑤省은 생긴 模樣대로 ‘길’이다. 東西로는 中國과 西域을 잇고, 南北으로 몽골과 티베트를 連結하는 이 길은 ‘黃河의 西쪽에 있는 複道’라는 뜻으로 河西州랑(河西走廊)이라 불렸고, 中世 時代 世界 最高의 交易路인 실크로드였다.



    묵특선우와 乳房

    중원의 黃土 高原은 간쑤省에 이르러 沙漠이 된다. 그러나 平均海拔 4000m, 길이 2000km인 祁連(祁連)山脈의 萬年雪이 녹아 흘러내린 물은 간쑤省 군데군데 오아시스를 만들었다. 우웨이(武威), 장예, 주취안, 안시(安西), 둔황(敦煌) 等 간쑤省의 代表的인 5個 都市는 모두 오아시스를 基盤으로 發展했다. 이 都市들은 걸어서 닷새 거리마다 놓여 있어, 기나긴 간쑤省을 지날 수 있게 해줬다. 길고 긴 沙漠길에 점점이 놓인 5個의 오아시스 都市는 고달픈 나그네의 生命을 救援해주는 眞珠 목걸이였다.

    간쑤省은 西域, 中國, 티베트, 몽골 等 다양한 勢力과 接하지만, 同時에 어느 나라에서 봐도 中央으로부터 먼 邊方이었다. 廣闊한 沙漠으로 둘러싸였고 獨自的 生活이 可能한 오아시스가 있어 閉鎖的인가 하면, 活潑하게 貿易할 수 있는 開放性이 共存한다. 따라서 간쑤는 어느 한 나라가 剛해지면 그 나라에 隸屬됐고, 四方이 混亂해지면 獨立的인 小國이 됐다. 간쑤는 中央아시아 一帶의 霸權國이 어디인지 가르쳐주는 리트머스 試驗紙이자 中央아시아를 偵探하는 안테나였다.

    中國 北方에는 여러 遊牧民이 살았고, 간쑤省 一帶는 匈奴와 月池 사이 地域이었다. 當代 最强의 軍事力을 자랑하던 秦나라는 天下를 統一한 뒤 邊方으로 눈길을 돌렸다. 몽염 將軍은 30萬 大軍을 이끌고 匈奴君을 擊破한 뒤 萬里長城을 세웠다. 그러나 秦始皇이 죽으며 中國 大陸이 混亂에 빠져들 때 匈奴에선 묵특선우(冒頓單于)라는 英傑(英傑)이 登場했다. 묵특은 東으로 동호(東胡)를 멸망시키고, 西쪽의 月池(月氏)를 制壓해 北方의 敗者로 떠올랐다.

    乳房이 項羽를 물리치고 마침내 天下를 再統一했지만, 當時 中國은 오랜 戰亂으로 疲弊해진 狀態였다. 匈奴는 衰弱한 한나라 變更을 마음껏 휘저었다. 匈奴의 氣勢를 꺾기 위해 皇帝 劉邦이 親庭(親征)했으나, 天下를 統一한 乳房조차 匈奴의 40萬 大軍에 7日이나 包圍돼 北方 凍土(凍土)에서 얼어 죽을 뻔했다. 氣高萬丈한 묵특은 後날 乳房이 죽자 홀몸이 된 여태후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그대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겠다”는 淫談悖說을 버젓이 國書로 보냈다. 이런 恥辱을 겪고도 漢나라는 자그마치 90餘 年이나 힘을 기르고 나서야 匈奴를 相對할 수 있게 됐다.

    韓武帝는 匈奴를 制壓하기 위해 多角的인 努力을 기울였다. 壯健을 大月氏에 使臣으로 派遣해 匈奴를 兩面에서 挾攻하고자 했으며, 위廳, 霍去病, 李珖 等 많은 名將을 全幅的으로 支援했다. 마침내 紀元前 121年 霍去病이 간쑤 一帶 河西州랑을 掌握하고 오늘날 몽골共和國 地域까지 匈奴를 追擊해 討伐했다.


    ‘大探險家’ 張騫

    霍去病의 河西州랑 掌握은 恨과 匈奴의 盛衰를 갈랐다. 河西州랑은 遊牧民인 匈奴가 唯一하게 農事를 지을 수 있던 地域이었고, 東西南北 여러 民族과 장사할 수 있는 貿易路였다. 또한 연지산(燕支山)은 特産物인 蓮池(紅花꽃을 原料로 한 化粧品)를 生産하고, 祁連山은 牧畜을 할 수 있던 重要한 地域이었다. 河西州랑을 빼앗긴 匈奴는 悲歎에 젖어 노래했다. “연지산을 빼앗겼으니 우리네 女子들의 고운 빛이 사라지겠구나. 祁連山을 빼앗겼으니 六畜(六畜, 말·蘇·量·닭·개·돼지)을 기를 수 없게 됐구나.”

    한무제의 匈奴 討伐 過程에서 빼놓을 수 없는 人物은 大探險家 壯健이다. 大月氏 使臣으로 派遣된 壯健은 匈奴에 10年이나 붙잡혀 있다가 가까스로 脫出해 大月氏에 到着했다. 元來 目的인 大月氏와 匈奴의 挾攻은 끌어내지 못했지만, 장건의 西域 探險은 意外의 成果를 가져다 줬다.

    壯健은 中央아시아 一帶의 여러 나라를 訪問해 各國의 外交·交易關係와 特産物 情報를 蒐集했고, 몽골 草原과 西域을 잇는 草原 실크로드, 간쑤省과 西域을 잇는 沙漠 실크로드 外에도 쓰촨-윈난-버마-印度로 가는 西南 실크로드를 探索했다. 장건의 情報 德分에 中國은 外交關係가 다양해지고 貿易路를 擴充했으며, 邊方의 重要性을 깨닫고 影響力을 擴大했다.

    軍隊 普及은 匈奴 征伐에서 매우 까다로운 問題였는데, 壯健은 실크로드 周邊의 물과 풀이 있는 地域과 普及을 얻을 수 있는 國家를 잘 把握해 大軍의 遠征을 수월하게 해줬다. 德分에 一介 宮中 警護隊長이던 壯健은 朴網後(博望侯)에 封해져 諸侯 班列에 올랐다. ‘朴網’은 ‘見聞이 넓고 널리 바라본다’는 뜻으로, 장건의 넓은 視野를 讚美하는 이름이다.

    壯健은 대원국에 汗血馬(汗血馬, 하루에 1000里를 달리고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는 傳說의 말)가 있다고 報告해 한무제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韓武帝는 말과 같은 크기의 金 彫刻像을 주고 汗血馬를 사려 했지만, 대원국은 이를 無視하고 使臣을 죽였다. 激忿한 韓武帝는 1次 遠征軍으로 數萬 名의 兵士와 6000名의 騎兵을 보냈고, 2次 遠征軍으로 6萬 兵士, 말 3萬 마리, 소 10萬 마리, 駱駝 1萬 마리를 派遣했다. 엄청난 大軍을 派遣한 데 비해 戰利品은 駿馬 10餘 마리, 말 3000마리에 不過했지만, 大規模 遠征은 意外의 效果를 가져왔다. 西쪽 가장 먼 邊方인 간쑤省은 重要한 遠征 根據地가 됐다. 數萬 兵士와 數十萬 마리의 소·말·駱駝가 오가며 장사를 하게 되자 간쑤省의 오아시스 都市들은 急激히 膨脹했다.



    한족과 異民族의 同居

    東洋과 西域의 中繼地인 간쑤가 成長하면서 交易은 더욱 活潑해졌다. 玉門關(玉門關)이란 이름은 야릇한 想像을 불러일으키지만, 事實 文字 그대로 ‘西域의 玉이 들어오는 關門’이었다. 서역의 玉, 아라비아의 香料, 로마의 琉璃 그릇, 中國의 緋緞이 玉門關을 오갔다. 간쑤를 거쳐 들어온 千里馬가 간쑤의 象徵이 되면서 西域은 想像할 수 없는 貴한 物件이 잔뜩 있는 곳이라는 로망이 생겼다. 葡萄, 石榴, 깨, 후추, 오이, 마늘 等 外來 作物과 琵琶, 하프 等 西域 文物이 간쑤를 通해 들어왔다.

    한무제가 疆埸을 넓히고 匈奴가 弱해지긴 했어도 遊牧民族의 底力은 만만치 않았다. 간쑤에서 漢나라와 遊牧民의 힘겨루기는 繼續됐다. 그 結果 西凉(西凉)의 軍人들은 豐富한 實戰 經驗과 極限 環境에서 살아남은 强靭함으로 한나라 精銳 兵力이 됐다. 머나먼 邊方이라 中央의 統制가 弱해지면 西凉의 軍人들은 쉽게 獨立 軍閥이 될 수 있었다. 童濯, 馬등, 마초, 한手 等이 西凉을 根據地로 活躍한 軍閥들이다.

    이들 軍閥은 한족과 異民族이 어울려 살던 간쑤省의 特徵을 잘 보여준다. 동탁은 農事를 짓고 있을 때 强族 무리가 찾아오자, 그자리에서 밭을 갈던 소를 잡아 待接했다. 이에 感動한 强族은 童濯에서 家畜 1000마리를 膳物했다. 또한 西凉 태수 마等의 아버지 마평은 집이 가난해 아내를 얻지 못하자 强族 女子를 아내로 맞아 마等을 낳았으니, 마等은 한족과 强族의 混血兒다. 마等의 아들 마초가 曹操를 相對로 두 次例나 大規模로 擧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집안 環境 德分에 强族, 저족(?族, 티베트系 遊牧民) 等 遊牧民의 習俗과 文化를 깊이 理解했기 때문이리라. 西凉을 掌握하려면 한족뿐만 아니라 現地 遊牧民族들 亦是 잘 理解하고 包攝할 수 있어야 했다.

    西凉 軍閥의 힘은 대단했다. 後漢 末 實權을 쥔 동탁은 18로 諸侯 聯合軍이 모두 달려들었어도 끝내 버텨냈고, 當代 第一의 軍略家 曹操는 마초에게 여러 番 危機에 몰리자 “마초, 저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서 묻힐 땅이 없겠구나” 하고 歎息할 程度였다.  


    諸葛亮의 恨, 泣斬馬謖의 땅

    諸葛亮이 出師表를 던지고 北伐에 나섰을 때, 간쑤는 核心的 作戰 地域이었다. 北伐의 窮極的인 目標는 長安과 洛陽을 차지해 中原을 制壓하는 것이었지만, 鏃이 형주를 잃은 後 落陽으로 갈 方法은 없었다. 長安은 天下第一 防禦城인 데다 西凉의 조진과 형주의 司馬懿가 兩쪽에서 補佐했다. 諸葛亮은 一旦 西凉부터 차지해 한 날개를 꺾어버리고 長安을 攻掠해 중원의 목줄기를 죄어가는 戰略을 세웠다.

    마침 魏나라와 西凉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位는 西凉을 軍事 據點과 物資 基地로만 봤고, 西凉人에 對한 處遇도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諸葛亮이 위에 不滿이 많은 西凉人을 包攝하면서 迅速하게 進軍하자 千壽 태수 마준은 現地 百姓을 못 믿고 逃亡쳤다. 諸葛亮의 첫 北伐은 ‘임팩트’가 컸다. 天壽, 南岸, 安定의 3軍(郡)李 呼應하며 중원의 肝膽이 서늘해졌다.

    諸葛亮의 軍隊는 家庭(街亭)에 이르렀다. 家庭은 南岸, 天水, 安定 中心에 있으며 農書, 長安, 西凉을 連結하는 戰略的 要衝地였다. 이 길목 하나만 차지하면 위의 大軍을 쉽게 防禦하는 한便, 觸軍은 數十 갈래 長安 攻略 루트가 생겨 勝機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家庭 防禦의 責任者 마속은 큰 失手를 저지른다. 마속은 諸葛亮이 信賴하던 有望株로 나름대로 뛰어난 人材였지만, 兵法書를 어설프게 읽고선 길목을 지키지 않고 山 위에 映彩를 지었다. 위의 盲腸 장합은 老鍊했다. 마속을 直接 치지 않고 山 周圍를 包圍하고 普及을 끊자 마속軍은 飢餓와 渴症으로 自滅했다.

    家庭을 잃자 乘勝長驅하던 諸葛亮의 北伐은 어이없게 물거품이 됐다. 애初에 物量 面에서 蜀은 위의 相對가 못 됐다. 蜀은 豫想치 못한 速度로 위를 치고 連달아 虛를 찔러야 西凉과 長安을 ‘接受’할 수 있었다. 간쑤와 산시(陝西), 두 地域을 確固하게 掌握해야 胃와 붙어볼 만했다. 그 前에 奇襲이 失敗한다면 消耗戰이 되고, 壓倒的인 物量을 자랑하는 위가 勝利할 수밖에 없었다.

    판勢를 뒤집을 뻔한 北伐이 失敗하자 諸葛亮은 울면서 아끼던 마속의 목을 쳤다(泣斬馬謖). 쓰촨과 산시를 連結하는 戰略的 要衝地인 간쑤는 諸葛亮의 希望이자 絶望이었다.



    ‘삼장法師’ 現場의 眞面目

    外國 文物 傳播에서 宗敎를 빼놓을 수 없다. 간쑤는 中國에 佛敎와의 因緣을 맺어준 길이다. 간쑤를 통해 佛敎는 東아시아로 퍼질 수 있었고, 現場과 慧超는 舊法旅行(求法旅行)을 할 수 있었다.

    삼장法師 現場은 小說 ‘西遊記’ 德分에 친숙하다. 作品 속에서 現場은 매우 德望이 높은 高僧으로 나오지만, 정작 讀者에게는 와 닿지 않는다. 豬八戒 말만 믿고 孫悟空을 꾸짖으며 내쫓기도 했으니 지혜롭지도 않고, 싸우는 孫悟空과 豬八戒를 제대로 仲裁하지도 못하고, 危機에 빠지면 “얘들아, 이걸 어쩌면 좋으니” 하며 울기만 하니 無能해 보이기도 한다. 每番 妖怪에게 拉致돼 孫悟空 等 弟子가 求하러 가야 하는 ‘民弊 덩어리’다.

    ‘西遊記’는 主人公 孫悟空을 띄워주기 위해 現場을 깎아내렸다. 實際 現場은 萬能의 天才다. 現場의 別號인 삼장法師(三藏法師)는 부처의 가르침인 警長(經藏), 그 註釋을 모은 論藏(論藏), 敎團의 生活規則과 戒律을 모은 律藏(律藏) 3가지에 모두 通達한 자라는 뜻이다. 現場은 젊은 나이에 ‘石門(釋門)의 千里馬’라는 讚辭를 받을 程度로 뛰어난 有望株였다. 닷새 동안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沙漠을 橫斷해 ‘生存술 專門家’ 베어 그릴스 못지않은 生存力을 誇示했고, 온갖 逆境을 이겨내며 中國에서 印度까지 往復한 大冒險가다. 더욱이 語學의 天才여서, 人道에서 蒐集한 佛經 75部 1335卷을 飜譯했다. 現場의 ‘大唐西域記’는 中世 中央아시아와 印度의 政治外交, 社會, 文化 全般에 걸친 빼어난 報告書다.

    ‘西遊記’에서는 現場은 당태종으로부터 局社(國師)로 認定받고 歡送을 받으며 佛經을 救하러 印度로 떠난다. 中國 안에서는 아무 일 없이 平穩하게 旅行했지만, 國境 밖을 나서자마자 온갖 奇奇妙妙한 事件을 만난다.

    實際 歷史는 正反對다. 28歲 靑年 現場은 當時 佛敎界의 有望株이긴 했지만, 큰 影響力은 없었고, 唐太宗을 만난 적도 없다. 中國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기 위해 孑孑單身으로 指名手配를 避하며 移動하다가 沙漠에서 죽을 뻔했다. 오히려 中國을 벗어나자 外國에서 온 高僧으로 待接받으며 比較的 수월하게 旅行할 수 있었다.

    個國 初期 唐나라는 몸을 추슬러야 하는 段階였다. 黨은 貴重한 勞動力이자 兵力인 人口의 移動을 徹底히 統制했다. 게다가 간쑤 周邊은 吐蕃·突厥과 對立하는 相當한 緊張이 감돌고 있어 國境 밖으로 나가는 것은 더더욱 許容되지 않았다.



    唐 西域 攻略 도운 求法旅行

    現場은 同僚 僧侶들과 함께 天竺에 가서 佛經을 얻어오겠다는 歎願書를 올렸지만, 朝廷에서는 出國禁止 立場을 固守했다. 모든 이가 抛棄했을 때, 現場만큼은 意志를 꺾지 않았다. 現場은 나라에서 안 보내준다면 몰래 나가겠다며 密出國을 計劃했다. 現場은 不法(佛法)을 위해서 不法(不法)을 恣行하는 것을 꺼리지 않을 만큼 大膽한 사내였다.

    現場은 一旦 西凉에서 한 달 程度 머물면서 佛經을 說法했다. 西凉에는 西域 商人이 많아 說法을 하면서 돈도 벌고 西域에 對한 情報도 얻고 書役어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法. 現場이 印度 旅行을 꾀한다는 所聞을 들은 西凉 태수 이대량은 現場에게 “長安으로 돌아가라”고 命令했다.

    하지만 간쑤엔 佛敎가 처음으로 들어온 곳답게 佛心이 깊은 사람이 많았다. 現場의 天竺行을 도와주는 간쑤人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西凉의 高僧 慧違法社는 現場에게 길잡이를 붙여줬고, 果州의 鄕里 二槍은 現場의 指名手配書를 찢었으며, 玉門關의 警備大將들도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줘 現場의 逃亡을 도왔다.

    國境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고비는 幕下硯滴 沙漠 橫斷이었다. 幕下戀敵은 現場의 表現대로 “하늘에 나는 새가 없고, 땅에 달리는 짐승도 없는(上無飛鳥 下無走獸)” 죽음의 沙漠이었다. “四方天地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내 그림자 하나뿐(顧影唯一)”이었다. 失手로 물을 沙漠에 엎지르자 現場은 “千里 길에 써야 할 밑천이 하루아침에 바닥났다”며 깊은 絶望感에 빠졌다. 沙漠의 날씨와 環境은 變化無雙했다.

    “밤만 되면 온갖 도깨비와 妖怪들이 횃불을 치켜들어 그 燦爛하기가 밤하늘에 無數히 떠 있는 별과 같고, 한낮이면 사나운 暴風이 모래를 휩쓸어 올려 소나기 퍼붓듯 휘몰아쳤다.”

    極端的인 疲勞와 배고픔, 渴症, 緊張으로 瞥眼間 한 무리의 軍隊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等 幻覺症勢에 시달렸다. 이 모든 것은 妖怪와 魔鬼의 장난으로 여겨졌다. 하늘의 뜻인지 現場은 奇跡的으로 沙漠을 橫斷해 無事히 中國 밖으로 나왔다. 現場은 中央아시아를 거쳐 印度로 가면서 많은 나라와 사람을 만났다. 現場이 冒險하며 겪은 酷毒하고 異質的인 環境, 全혀 다른 文化를 가진 나라와 사람들이 자아내는 幻想的인 雰圍氣는 ‘西遊記’의 모티프가 됐다.

    現場의 가장 큰 貢獻은 佛經 飜譯·解釋 作業이지만, 唐나라가 國力을 떨치는 데에도 間接的으로 貢獻했다. 장건의 情報가 한무제의 匈奴·대완 遠征과 실크로드 開拓을 도왔듯, 現場의 ‘大唐西域記’는 당태종의 西域 攻掠을 도왔다. 現場의 舊法旅行은 ‘壯健度 傳하지 못하고, 班固와 司馬遷도 記錄을 남기지 못한’ 큰 偉業이었다.


    康熙帝의 ‘最後 討伐’

    唐나라 末期부터 간쑤엔 오랫동안 中國의 支配力이 미치지 못했다. 周邊 民族들이 跋扈하며 티베트의 吐蕃, 탕구트의 西夏, 몽골族의 元나라가 간쑤를 차지했다. 帝國의 影響力이 弱해졌을 때에는 土着 豪族들이 거의 獨立的으로 간쑤를 支配했다. 特히 9世紀 中葉에서 11世紀 初는 黨帝國이 崩壞하고 五代十國(五代十國)이 일어났으며, 宋나라가 中國을 統一한 後에도 요·금·원·서하·토번 等 수많은 遊牧民族이 角逐을 벌인 波瀾의 時代였다. 이 時期 둔황에서는 土着 豪族인 張氏와 조氏, 두 家門의 小王國이 微妙한 勢力 均衡을 잘 活用해서 200年 동안 살아남았다.

    明나라는 元나라를 몰아내고 中國을 다시 統一했지만 간쑤省에 對한 影響力은 前만 못했다. 明代의 간쑤 領域은 西部 끝의 玉門關에서 中部의 嘉峪關으로 크게 줄었고, 둔황 防禦에 몽골族 一派를 活用하는 等 支配力이 顯著히 줄었다. 더욱이 투르판이 侵入해 掠奪을 일삼자 1524年 名은 嘉峪關을 閉鎖하고 東西 交通을 遮斷하는 鎖國政策을 펼쳤다. 그럼에도 투르판의 동진을 막지 못해 간쑤省은 16~18世紀 ‘투르판 支配機’를 맞았다. 淸나라 康熙帝가 宿敵 몽골의 準가르를 討伐하는 過程에서 간쑤를 席卷하고 住民을 이주시키며 中國의 간쑤省 支配는 비로소 安定됐다. 異民族에게 威脅받던 간쑤는 結局 異民族인 滿洲族 皇帝에 依해 安定을 찾았다.

    간쑤省은 뜨겁고 乾燥한 烈士(熱沙)의 땅이다. 사람이 살기에 酷毒한 날씨이지만, 그 德分에 간쑤의 멜론, 수박 等 과일은 달콤하기로 有名하다. 뜨겁고 乾燥한 날씨가 과일의 水分을 날려 糖度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간쑤의 날씨는 意外의 所得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그 副産物 中에선 文化도 빼놓을 수 없다. 中國의 3代 石窟 中 하나인 둔황 莫高窟 亦是 酷毒한 環境이 피워낸 꽃이다. 둔황은 中央아시아로 가는 북도(北道)와 印度로 가는 南道(南道)가 만나는 곳으로, 中國을 오가는 모든 旅行者는 이곳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둔황을 넘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沙漠 타클라마칸을 지나야 한다.


    “西北風을 마신다(喝西北風)”

    僧侶 낙준은 商人, 旅行者들의 不安, 恐怖를 잘 利用했다. 낙준은 石窟을 아름답게 꾸며 부처님께 奉獻하면 安全한 旅行을 할 수 있다고 宣傳했다. 極度의 恐怖心 앞에서 限없이 弱해지고 지푸라기 같은 希望이라도 붙들고 싶은 게 人間이다. 數百 年 동안 많은 이가 莫高窟에 石窟寺院을 지어 奉獻했다. 그 結果 735個의 洞窟, 1萬3600餘 坪의 壁畫, 2415個의 彩色 彫刻像을 가진 莫高窟이 誕生했다.

    둔황 莫高窟은 石窟寺院으로만 끝나지 않고 文書保管所 機能도 했다. 이것 또한 간쑤의 날씨가 가져온 또 하나의 膳物이다. 一般的으로 文化財는 오랜 歲月을 거치며 濕期, 곰팡이 等으로 損傷되기 쉽다. 그러나 乾燥한 간쑤에서는 文化財가 잘 썩지 않아 모래에 묻힌 文化財가 모래를 털기만 해도 元來의 姿態를 자랑한다. 中國 內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文書들이 간쑤에서는 무더기로 出土된다.

    特히 莫高窟의 第17號 洞窟은 ‘文書가 묻힌 洞窟’이라는 뜻으로 장경동(藏經洞)이란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出土된 4萬餘 建議 文書는 ‘둔황文書’로 불리며, 中世史 硏究에 매우 重要한 史料가 됐다. 이 文書들만을 硏究하는 ‘둔황學’이라는 學問이 따로 생길 程度다.

    이처럼 간쑤는 다디단 과일과 華麗한 文化를 지녔지만, 그곳에서의 生活은 고달프고 劣惡하다. 中國語로 ‘西北風을 마신다(喝西北風)’는 말은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린다’ ‘苦生한다’는 뜻이다.

    邊方 간쑤의 잦은 戰爭은 狀況을 더욱 惡化시켰다. 日本 史學者 니시무라 겐油는 둔황 6香의 文書를 檢討한 뒤, 모든 章程(壯丁) 中 約 70%가 兵役 服務者였을 것으로 推定했다. 간쑤省에서 널리 읽힌 詩를 보면 民草들의 苦楚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16歲에 附逆을 하고, 20歲에 不甁에 充當된다. (…) 將軍은 말 위에서 죽고, 兵士는 땅의 軍營에서 죽는다. 피는 널리 荒野에 흐르고, 白骨은 邊境에 있다.”

    兵役에 從事하지 않아도 生活은 窮乏했다.

    “貧窮한 村사람 (…) 只今 夫婦가 되어, 夫人은 방아 찧는 일을 하고, 男便은 날품팔이 일을 한다. 黃昏 무렵 집에 들어오면 쌀도 없고 땔나무도 없다.”

    아무리 國法이 至嚴하다지만 이토록 險한 땅에 兵士를 보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朝廷에서는 死刑囚나 非行 靑少年을 간쑤 地域 病死로 派遣했다. 不良少年이 제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結局은 어린 少年이다. 邊方의 沙漠까지 끌려와 모래 섞인 ‘짬밥’을 먹는 心情은  “14, 15歲에 戰場에 나가, 손에 長槍을 들고 머리를 떨궈 눈물을 흘리고 後悔하며 배를 채운다”는 詩에 잘 드러난다.

    마초가 曹操를 急襲해 거의 죽일 뻔했을 때, 補給品을 管理하던 敎委 整備는 소와 말을 西凉軍에게 풀었다. 가난한 西凉 兵士들이 소와 말을 한 마리라도 챙기려고 亂離가 난 틈을 타 曹操는 危機를 艱辛히 벗어났다. 個個人의 戰鬪力은 剛하지만 烏合之卒 같던 鉏兩軍의 限界를 보여주는 한便 가난했던 간쑤의 一面을 보여준다.



    아프리카 不法 金 採取

    中國人은 北方人을 가리켜 “東北의 虎狼이, 西北의 늑대”라고 말한다. 늑대는 虎狼이의 威風은 없어도 酷毒한 環境에서도 살아남는 强靭한 生存力을 가졌다. 그렇다면 오늘날 간쑤人의 삶은 어떨까. 간쑤省의 面積은 45萬4000km²로 南韓의 4.5倍나 되지만, 70%가 沙漠과 高原地帶다. 人口는 2600餘萬 名. 2015年 간쑤省의 1人當 名目 GDP는 4201달러로 中國에서 가장 낮다.

    가난한 만큼 많은 간쑤人이 外地로 나가 일한다. 行動半徑이 넓은 ‘늑대’답게 아프리카에까지 가서 不法으로 일하는 사람도 많다. 가나 政府는 不法 金 採取 協議로 2012年 101名, 2013年 124名의 中國人을 逮捕했다. 2005年부터 中國人들이 가나에서 不法 金 採掘을 始作해 2013年 當時에는 5萬餘 名의 中國人이 數千 個의 金鑛을 開發하고 있었고, 이들 大部分은 간쑤人이었다. 中國人답게 통도 커서 가나의 年間 金 採掘量 98t의 4分의 1에 達하는 24t의 金을 採掘했다. 많은 中國人이 不法 入國해서 無差別로 開發하는 바람에 河川이 汚染되고 環境이 破壞됐으며, 組織暴力輩와 結託하는 바람에 治安까지 惡化돼 가나의 골칫거리가 됐다.

    간쑤省에서 ‘가난 脫出’은 至上課題다. 간쑤人들은 一帶一路(一帶一路) 바람을 타고 21世紀 新(新)실크로드의 中心地가 돼 物流와 觀光業 等 서비스業이 活性化하기를 期待한다. 그러나 그 未來가 썩 밝아 보이진 않는다. 瘡瘍쉬(長楊恕) 란저우臺 中央아시아硏究所長은 이렇게 斷言했다.

    “간쑤省은 西쪽으로는 腎臟(新疆)보다 못하고, 東쪽으로는 산시(陝西)보다 못한 條件을  갖고 있어 黃金地帶를 建設하는 것은 不可能하다.”

    西北의 늑대는 앞으로도 相當한 時間 동안 惡戰苦鬪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金 龍 한

    ● 1976年 서울 出生
    ●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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