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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亂·王權爭奪戰 ··· 高句麗, 帝國(帝國)의 길 잃다|신동아

現職 外交官이 쓴 韓中 5000年

內亂·王權爭奪戰 ··· 高句麗, 帝國(帝國)의 길 잃다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總領事, 政治學博士

    入力 2017-02-28 13: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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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句麗는 內憂外患 탓에 中國의 混亂이라는, 世界帝國이 될 號基(好機)를 놓친다. 519年 안장왕 卽位 後 內戰에 突入하자 突厥, 新羅, 백제가 國境을 虎視眈眈 노리는데…
    政治가 어지러우면 讖謠(讖謠)가 流行한다. 2017年 韓國에서 떠도는 ‘카더라 通信’을 보라. 朝鮮 肅宗 때 流行한 “미나리는 四철이고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노래가 讖謠, 卽 兆朕을 豫言하는 民謠의 代表的 事例다. 미나리는 仁賢王后 閔氏, 장다리는 희빈 張氏를 뜻하는데, 閔氏에게 有利한 歌詞를 볼 때 仁顯王后가 屬한 老論이 만들어 流行시켰음을 미뤄 斟酌할 수 있다.

    탁발선비족이 세운 北魏(北魏)는 宣撫制 以後 衰退하기 始作한다. 선무제는 韓華(漢化)의 君主 孝文帝와 高句麗 出身 門所皇后 사이에서 태어났다. 北魏는 睾丸(高歡)李 세운 東쪽의 北齊(北齊)와 宇文泰(宇文泰)가 세운 西쪽의 北周(北周)로 分裂했다. 國力은 北齊(550~577)가 北周(557~581)를 壓倒했으나 北齊는 指導層의 끊임없는 權力 造作 놀음과 잦은 皇權 交替로 政治가 늘 不安定했다. 北周는 讖謠를 퍼뜨려 北齊의 混亂을 부추겼다. 北周의 將軍 偉效館(韋孝寬)李 北齊 軍部의 中核 曲率狂(斛律光)을 除去하고자 北齊 수도 業性(?城)에 諜者를 심어 퍼뜨린 讖謠의 歌詞는 다음과 같다.

    ‘백승은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明月은 業性을 비추네(百升飛上天 明月照?城).’

    曲(斛)은 穀食을 計量하는 單位다. 100勝(百升)李 1曲(斛)이므로 ‘百乘’은 곧 曲率光을 뜻한다. 또한 ‘明月(明月)’李 曲率廣義 者(字)였으니, 曲率光이 北齊 皇帝 考位를 代替하리라는 暗示를 讖謠에 담은 것이다. 無能과 淫虐(淫虐)의 君主 考位는 結局 이 讖謠에 依해 쓰러졌다. 考位는 576年 曲率狂 一族을 殺害했다. 自身의 팔다리를 스스로 자른 것이다. 曲率광을 죽인 다음 해인 577年 考位는 北周 無題 愚問옹이 보낸 軍隊에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新羅의 軍事制度 黨(幢)?

    오르도스(河套)를 包含한 內몽골 居住 部族이 南下해 중원으로 移住하고, 그 빈자리를 몽골高原에 居住하는 部族이 채우는 現象은 匈奴→선비→유연→突厥→위구르→키르기스→몽골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된다.

    4世紀 末 托鉢선비가 國家의 中心을 華北(華北)으로 옮기자 몽골高原은 權力의 眞空狀態에 들어갔다. 이때 登場한 國家가 混血선비족의 柔軟(柔然)이다. 柔軟은 柔軟族을 中心으로 匈奴 발野系族, 高次 俯伏라族과 突厥 餓死나족 等이 結合된 다(多)種族 聯合國家였다. 柔軟은 4月 祝祭 傳統을 가진 托鉢선비와는 달리 10月 祭天 行事를 擧行했다. 領土는 東으로는 랴오허, 西로는 中央아시아 이르티슈 江에 이르렀다. 유연의 支配層은 투르크-몽골系로 보이나 構成員 大多數는 印度-유럽系 土蝦르인(Tocharian)으로 推定된다.

    유연의 最高指導者는 투르크 系統이 使用한 ‘鮮于’가 아니라 몽골 系統의 ‘韓(汗)’ 稱號를 썼다. 유연의 軍事 體制는 100名을 1黨(幢)으로 編成하는 黨(幢) 制度였다. 10黨을 1軍(軍)으로 編成하고 軍에는 腸(將)을 뒀다. 유연의 十進法적 軍事編制는 몽골帝國까지 繼承된다. 新羅도 軍事制度로 黨(幢), 官職으로 角干(角干)을 뒀다. 新羅는 진흥왕(534~576) 時期 臺當(大幢)을 編成했으며, 三國統一 以後에는 高句麗人 百濟人 말갈인 等을 包含한 9書堂(誓幢)을 運營했다.

    北魏는 初期엔 柔軟에 防禦的 政策을 驅使하다가 本據地를 攻略하는 等 攻擊的 政策으로 轉換했다. 북위가 끊임없이 柔軟 遠征에 나선 理由는 物資 供給을 遮斷해 유연이 强大國으로 成長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북위의 代(對)柔軟 政策은 江南의 王朝들 및 高句麗에 對한 政策과 密接하게 關聯돼 있다.



    突厥, 柔軟을 무너뜨리다

    北魏는 柔軟 西쪽의 오손(烏孫), 高次(高車)와 同盟을 맺었다. 高句麗 東北쪽의 물길(勿吉)과도 友好 關係를 維持했다. 柔軟은 이렇듯 東西로 包圍된 狀況에서도 北魏에 激烈하게 맞섰다. 結局 柔軟에 對한 북위의 攻擊的 政策은 失敗로 끝났다. 江南의 王朝들과 東쪽의 高句麗가 北緯를 노리던 터라 柔軟 討伐에만 全力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柔軟을 멸망시킨 것은 북위가 아니라 突厥(突厥)이었다. 突厥은 鐵器 製作에 能한 不足이었다. 突厥은 柔軟에 屬했으면서도 獨自性을 維持하다가 柔軟을 무너뜨렸다.

    311年 ‘靈駕의 난’ 以後 南匈奴에 中院(華北)을 빼앗긴 한족 一部는 창장 下流 洋酒(揚州)와 中流 형주(荊州) 方面으로 南下했다. 南下한 人口는 當時 華北 全體 人口의 約 8分의 1로 90萬餘 名에 達했다.

    낭야 王氏와 進軍 史氏 等 敎人(僑人·他鄕에서 臨時로 머무는 사람)들이 朱氏(朱氏), 陸氏(陸氏), 高氏(顧氏) 等 江南 土着豪族과 함께 私馬氏를 支援해 東進(東晉)을 세웠다. 이들은 동진을 繼承한 송-第-陽-進 時代에도 中心 勢力으로 남았다.

    이 같은 江南의 歷代 王朝들은 荒蕪地 開墾에 沒頭했다. 한족의 荒蕪地 開墾으로 인해 쫓겨난 産月(山越), 파(巴), 요(?) 等 原住民은 끊임없이 亂을 일으켰으며, 一部는 한족에 同化됐다. 江南 마지막 王朝 陳(陳)의 建國은 土豪와 將軍들이 主導했는데, 이들의 源流는 江南의 原住民이다. ‘歸去來辭’의 詩人 陶淵明의 曾祖父로 東進에서 軍司令官 格인 太尉(太尉)를 지낸 道間(陶侃) 亦是 原住民인 무릉만 出身.

    私馬氏의 東進(東晉)은 前震(前秦) 覆肩衣 南下를 沮止하면서 恨文明(漢文明)을 維持·발전시키는 구실을 한 다음 劉裕(劉裕·363~422)가 세운 송(宋)에 歷史의 자리를 넘겨줬다. 東進 北部軍(北府軍) 出身 悠悠는 410年 毛用선비족 모용덕이 산둥의 廣告를 中心으로 세운 南燕(南燕), 413年 한족 初終이 泗川에 세운 燭(蜀), 417年 强族 寮長이 長安을 中心으로 세운 後進(後秦)을 滅하는 等 赫赫한 專攻을 바탕으로 420年 동진을 簒奪했다.


    선비족의 北方, 한족의 南方

    송은 書翰(西漢) 宰相 溯河의 子孫으로 알려진 소도성의 第(齊)에, 祭는 同族 소연(蕭衍)의 量(梁)에 멸망당해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宋, 제, 양 王朝에는 宋나라 問題와 凉나라 無題 等 英明한 皇帝도 있기는 했지만, 度를 넘은 淫亂(淫亂)과 骨肉相爭 等 問題를 일으킨 指導者가 많았다.

    凉나라 武帝는 初盤 治世가 대단히 좋았으나 後半期로 가면서 頹落했다. 貧富隔差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皇族과 貴族에게 敵愾心을 품은 百姓이 늘어갔다. 北齊의 前身인 同位(東魏) 實權者 高澄에게 對抗해 叛亂을 일으켰다가 高징이 보낸 毛用小宗(慕容紹宗)에게 敗한 끝에 凉나라로 亡命한 후경이 無題에 對抗해 叛亂을 일으키자 수도 健康 附近에서만 10餘萬 名이 同調할 程度였다.

    邵氏(蕭氏) 皇族이 서로를 牽制하는 틈을 타 健康性을 陷落한 後頸은 武帝를 幽閉했다. 後頸은 한(漢)을 세웠으나 광둥에서 蜂起한 진패선에게 滅亡당했다. 진패선은 557年 自身이 擁立한 經濟로부터 煽揚을 받아 陳(陳)을 세웠다.



    大混亂의 끝이 보이다

    東進-宋-第-陽-陣으로 이어진 江南의 王朝들은 門閥 貴族社會였으며 北朝에 비해 經濟力은 월등했으나 政治體制의 效率性이 떨어졌다. 江南, 華北 間 軍事力 隔差는 人口의 差異에서도 비롯했으나, 선비족이 支配하는 北方과 한족이 主力을 이룬 南方 肝 組織力과 戰鬪力 差異가 根本的인 原因이었다. 脆弱한 軍事力에도 江南 王朝들이 相當 期間 維持된 데는 유연과 突厥, 高句麗 같은 北方 國家가 北緯, 北齊, 北周 等 華北 王朝의 背後를 威脅했기 때문이다.

    華北을 統一한 托鉢선비는 支配 民族인 선비족과 被支配 民族인 한족 間 葛藤을 解消해야 했다. 北燕(北燕) 出身 풍太后(馮太后)의 支援을 받아 卽位한 孝文帝 탁발굉은 政治體制의 安定을 위해 선비족의 韓華(漢化)를 推進했다. ?

    孝文帝는 493年 풍太后의 干涉도 避할 兼 首都를 산시省 北部 平成(다퉁)에서 뤄양으로 옮겼다. 그는 朝廷에서 선비語를 使用하는 것을 禁하고, 號·韓 모든 家門의 格을 定하는 姓族上程(姓族詳定) 措置를 取했다. 皇族의 姓 ‘托鉢’도 한족 式(式)인 ‘怨(元)’으로 바꾸었다.

    孝文帝의 韓貨 政策은 托鉢선비가 悲劇의 運命을 맞는 것으로 끝났다. 뤄양으로 首都를 옮긴 지 2年 만인 495年 선비족 貴族 목胎의 叛亂이 일어났다. 524年에는 北緯 最初의 根據地인 內몽골 성락(後五下午터)에 位置한 옥야진(沃野鎭) 所屬 兵士 擺落한發陵의 主動으로 이른바 ‘六鎭의 亂’李 일어났다. 六鎭은 內몽골을 東西로 가로지르는 옥야진, 무천진(武川鎭), 회삭진(懷朔鎭), 무명진(撫冥鎭), 유현진(柔玄鎭), 회황진(懷荒鎭)을 말한다.

    六鎭의 진민(鎭民)은 元來 ①職業으로는 軍人 ②社會的으로는 貴族 ③種族的으로는 선비라는 特性을 갖고 있었다. 진민은 洛陽 遷都 30年이 지난 後 북위 朝廷으로부터 버림받아 賤民化됐다. 兵站 中心線이 北部 內몽골 戰線에서 南部 화이허(淮河) 戰線으로 轉換되면서 이들에 對한 處遇가 나날이 나빠졌다.

    진민의 叛亂이 六鎭 全體로 擴散돼 北緯 全域이 混亂에 빠졌다. 한족을 어떻게 統治할지를 두고 일어난 內部 葛藤은 托鉢선비가 세운 帝國(北緯)의 分裂이라는 逆流를 부르며, 華北을 混亂으로 몰고 갔으나 이 混亂은 새 共同體인 浩瀚體制(胡漢體制)로의 轉換 過程이었으며, 1月號에 紹介한 ‘靈駕의 난’과 같은 阿修羅場은 아니었다.



    高句麗의 實技

    北周와 수·唐을 創業하는 무천진 軍閥의 싹이 이즈음 돋아났다. 온갖 나라 이름이 登場하는, 中國 歷史上 손꼽히게 혼란스러웠던 時代가 저물기 始作한 것이다. 무천진 진민 中에는 北周를 세우는 우문氏(宇文氏), 수(隋)를 세우는 步六呂氏(普六茹氏), 黨(唐)을 세우는 대야氏(大野氏)가 包含돼 있었다. 이들이 數·黨 支配階層인 관롱集團(關?集團)을 形成한다.

    六鎭 叛亂軍은 산시의 移住匈奴(爾朱匈奴) 首長 이주영(爾朱榮)李 이끄는 北緯 官軍과 북위군을 支援한 유연군에 敗北했다. 519~559年 40年 동안 華北에서는 北緯 皇室 禁軍의 蘭(519), 六鎭의 亂(524), 막절염생의 난(527), 갈영의 亂과 하음虐殺(528), 桐·西魏 分列(535), 北周·北齊 間 戰爭 等 極度의 混亂이 되풀이됐다.



    中國의 混亂이라는 號機(好機)에 高句麗가 랴오시와 허베이(幼主와 冀州) 地域으로 進出하지 못한 것은 高句麗 또한 안장왕-안원왕-양원왕 時代(519~559)의 混亂期였기 때문이다. 이 時期 高句麗가 華北 情勢에 거의 影響을 미치지 못한 것의 結果가 隋나라의 高句麗 侵攻이다.

    회삭진 出身으로 한때 下陸魂(賀六渾)으로 불린 睾丸(496~547)은 처음에는 이주영을 받들었으나 곧 허베이의 中心 業性에서 自立하고, 관둥(허베이, 산둥 地方을 意味)의 한족 豪族들과 聯合하는 데 成功했다. 하음虐殺(이주영이 북위의 實力者 好太后와 한족 代身 等을 黃河에 水葬시킨 事件) 以後 한족 豪族 모두 이주氏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睾丸은 531年 軍事基地 진양으로부터 追擊해 온 이주조의 軍隊를 業性 近郊에서 擊破한 後 業城에 丞相部를 設置했으며, 효무제를 怨讐(元脩)로 推戴했다. 睾丸과 사이가 나빠진 怨讐는 535年 長安의 宇文泰에게 逃亡쳤다. 睾丸은 怨讐를 追擊했으나 잡지 못하자 원先見(효정제)을 擁立했다. 이로써 同位(535~550)가 成立됐다. 宇文泰는 怨讐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毒殺하고, 원보거를 擁立해 西魏(535~556)를 세웠다. 桐·西魏는 各其 北齊와 北周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快刀亂麻(快刀亂麻)의 主人公인 고양이 同位를 빼앗아 세운 北齊는 선비족과 한족, 돌궐족 等이 뒤섞인 나라였다. 曲率氏(斛律氏)는 北齊 軍部에 크나큰 影響力을 갖고 있었다. 曲率廣義 아버지 大將軍 曲率金(斛律金)李 漢語(漢語)로 飜譯한 突厥 노래 ‘칙륵가(勅勒歌)’를 紹介한다.

    勅勒川 陰山下 (突厥江 陰散 아래)   

    天似穹廬 籠蓋四野 (하늘은 마치 天幕처럼 四方의 들판을 덮고)     

    天蒼蒼 野茫茫 (하늘은 짙푸르고 들판은 가없이 넓네) 

    風吹草低 見牛羊 (바람 불어 풀이 눕는데, 아아 멀리 소떼, 羊떼가 보이네)



    世界帝國 唐의 뿌리

    북위의 實力者 이주영은 산시(觀衆) 叛亂 鎭壓을 위해 一族 이주천광을 派遣했는데, 무천진 出身 하발악(賀拔岳)이 이주천광의 部長으로 산시에 赴任했다. 北周를 세우는 宇文泰(505~556)를 비롯한 무천진 出身 將校들은 大部分 하발악을 따라 從軍했다. 하발악이 睾丸의 使嗾를 받은 厚膜陳列(侯莫陳悅)에게 암살당한 後 同僚 將軍들의 推戴를 받은 宇文泰는 스스로 새 秩序를 만들어내기로 決心했다.

    宇文泰는 위武帝(魏武帝) 曹操를 凌駕하는 人物이다. 그가 胎動시킨 浩瀚體制(胡漢體制)가 世界帝國 黨(唐)을 탄생시키고, 中國 文化의 東아시아火를 可能하게 했기 때문이다. 西魏의 實權을 掌握한 宇文泰는 小作 等 한족 儒學者를 登用해 行政制度를 一新했다. 宇文泰는 543年 同位軍과의 뤄양 北邙山 戰鬪에서 敗北한 後 同位에 비해 턱없이 不足한 선비족 兵力을 補充하려면 한족 壯丁을 徵集할 수밖에 없다고 判斷했다. 그는 8주국(柱國) 12大將軍(大將軍) 아래에 醫東部(儀同府)를 두어 한족 章程 徵集을 擔當하게 했다. 선비족 高級將校들이 한족 下級將校와 兵士를 指揮하는 體制였다.



    突厥, 모술로 進出하다

    이렇듯 鉏위에서 始作해 北周와 隋나라를 거쳐 完成된 府兵制는 土地를 基盤으로 했으며, 우리의 할아버지 나라들에도 큰 影響을 미쳤다. 唐나라가 高句麗와의 戰爭에서 敗北하는 等 大規模 戰爭에서 連거푸 졌음에도 國力을 回復한 裏面에 府兵制가 있었다.

    宇文泰는 이(吏), 號(戶), 예(禮), 兵(兵), 刑(刑), 공(工)의 6部制를 만들었다. 이 6副題는 韓國과 베트남 等 東아시아 國家에 傳播돼 1300年 넘게 持續됐다. 宇文泰는 선비족 姓氏 回復 措置도 施行했다. 漢族性(漢族姓)을 元來의 선비性(鮮卑姓)으로 還元한 것이다. 宇文泰는 이 같은 措置를 통해 觀衆의 社會 秩序를 改編해 우문氏에 충성하는 貴族集團을 만들어냈다.

    宇文泰는 軍事 側面에서도 뛰어났다. 兵力이 相對的으로 작은 軍隊를 갖고 同位의 攻勢를 잘 막아냈다. 江南의 羊(梁)으로부터 파촉과 한手(漢水) 北部 商羊(襄陽)을 빼앗았으며, 傀儡國 後涼(後梁)을 세우는 等 西魏의 國力을 크게 신장시켰다.

    宇文泰는 534年 北齊와 유연의 侵略을 防備하고자 突厥의 首長 富民(土門) 可汗과 提携했으며 柔軟은 아나櫃 可汗과 그의 三寸 婆羅門의 衝突로 크게 弱化됐다. 550年頃 西魏-突厥 聯合軍이 유연군을 擊破했으며 아나궤를 自殺로 몰아넣었다. 나라를 잃은 2萬餘 유연인은 6世紀 中葉 아랄해와 카스피해를 거쳐 남러시아 平原으로 進出해 이란系, 투르크系 不足을 糾合해 아바르(Avar)를 세웠다. 아바르는 코카서스로 進出했으며 게르만系와 슬라브系 不足을 統合해 多民族 聯合國家로 再誕生했다. 아바르는 592年, 619年, 626年 3次例에 걸쳐 單獨 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함께 비잔틴 帝國의 首都 콘스탄티노플을 攻掠했다. 아바르의 全盛期는 592年 바얀 街恨이 베오그라드를 占領한 後 남진해 콘스탄티노플 入口에 進入했을 때다.

    564年 西魏를 繼承한 北周는 突厥과 함께 同位를 繼承한 北齊를 攻擊해 軍事 要衝地 진양을 掠奪했다. 富民의 아들 無限(木汗) 街韓銀 사산조 페르시아와 聯合해 타지키스탄 바다흐샨 高原의 에프탈(백훈)을 멸망시키는 等 中央아시아 方面으로 進出했다. 無限 時代에 突厥은 랴오허~아랄해를 領土로 하는 유라시아 最强國이 됐다. 572年 擧行된 無限의 葬禮式에는 北周, 北齊, 티베트, 비잔틴, 아바르, 거란, 高句麗 等 東·西 여러 나라 使節이 弔問했다. 無限의 뒤를 이은 타파르(他鉢) 街恨이 北齊와 北周를 ‘효성스러운 두 아들’이라고 稱할 만큼 突厥은 全盛期를 이어갔다.


    닮은꼴 우문호, 시진핑

    突厥은 타파르 加한 以後 同族相殘 끝에 582年 톈산을 境界로 桐·西로 分裂했다. 西突厥 一部는 舒川(西遷)해 7世紀 볼가 江 流域을 中心으로 유대敎를 國敎로 하는 하자르(Khazar)를 세웠다. 하자르는 사라센 帝國의 北進을 沮止해 基督敎 世界를 지켜냈다. 652年 하자르軍이 카스피 海 沿岸 다르反드 戰鬪에서 사라센君을 擊破했으며 722~737年에는 하자르 騎兵隊가 다르反드 關門을 突破해 사라센 領土로 쳐들어가 모술(이라크 北部)과 디야르바키르(터키 南東部)까지 進擊했다. ?

    宇文泰의 조카 우문호는 宇文泰로부터 政權을 引受받은 지 2個月 後인 557年 西魏 控除(恭帝)가 宇文泰의 아들이자 四寸동생인 우문각에게 禪位하게 해 北周를 開局했다. 우문호는 16年間 執權하면서 1代 우문각, 2代 우문육 等의 皇帝를 세운 同時에 폐살(廢殺)韓 第1의 權力者였다.

    우문호는 572年 無題 愚問翁에게 除去당할 때까지 독고신, 乙不歸, 步六戾蟲(隋나라 問題 良犬의 아버지) 等 俶裝(宿將·늙고 功勞가 많은 長壽)을 殺害하는 等 權力을 自身에게 집중시켰다. 宇文泰가 構築한 集團指導體制로는 國家의 持續的 發展이 不可能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中國 國家主席 시진핑이 權力 集中을 試圖하는 理由도 우문호의 前例와 비슷하다. 美國, 日本과의 對決에서 中國이 힘을 發揮하려면 權力集中이 必要하다는 事實을 깨우친 것이다.

    우문호는 突厥과 聯合해 北齊를 攻擊했으나 失敗했다. 愚問翁은 이를 機會로 삼아 親衛 쿠데타를 일으켜 우문호를 殺害하고 親庭을 始作했다. 576年 愚問옹이 指揮하는 北周軍이 要衝地 晉陽으로 쳐들어갔다. 北齊 皇帝 考位는 寵妃(寵妃) 風蘇聯을 옆에 끼고 督戰했으나 晉孃은 陷落됐다. 北周가 퍼뜨린 讖謠에 속아 曲率狂 一族을 殺害한 後課였다.



    羅濟 同盟의 漢江 進出

    考位는 敗北한 軍隊를 버려두고 타이항(太行)山脈을 넘어 業性으로 逃走했으나 生捕돼 처형당했다. 北齊 儒城(다링허 流域 所在) 星州 고보녕은 나라가 滅亡했는데도 投降을 拒否했다. 北周軍이 고보녕의 軍隊를 攻擊했으나 랴오시(遼西) 배산 戰鬪에서 高普녕을 支援한 溫達의 高句麗軍에 敗退했다. 平原王의 사위 溫達은 當時 高句麗에 復屬된 지 얼마 안 된 유목不足 出身으로 把握된다.

    高句麗와 友好關係를 維持한 유연이 突厥에 밀려 弱化하면서 高句麗의 西쪽 國境線(랴오허-시라무렌 江 方面)에 緊張이 高調됐다. 高句麗의 內定 混亂이 이어졌으며 突厥의 東進으로 因해 高句麗의 軍事力이 西北方에 集中된 틈을 타 新羅는 洛東江 牛眼의 伽倻를 攻擊하고 난 다음 백제와 함께 高句麗 領土이던 漢江 流域을 占領했다.

    新羅는 漢江 流域으로 進出하는 過程에서 가야 遺民을 忠州와 丹陽 等 南漢江 流域으로 社民(徙民·支配集團이 被支配集團의 住居地를 强制로 옮기는 것)시켜 戰鬪 및 補給 部隊로 利用했다. 眞興王은 金거칠부(金居柒夫)에게 軍士를 줘 東海岸을 따라 北進해 咸鏡道 元山과 咸興, 興南 一帶 高句麗의 10餘 個 軍을 빼앗았으며, 568年 蓋馬高原으로 넘어가는 黃草嶺과 마운령에 척경비(拓境碑)를 세웠다.

    高句麗는 519年 안장왕 卽位 以後 國內城, 平壤城 勢力 間 葛藤이 激化돼 內戰에 突入했으며 突厥과 新羅, 백제는 高句麗의 國境을 虎視眈眈 노렸다. 531年 안장왕이 弑害되고 그의 아우 안원왕이 卽位했다. 안원왕度 545年 벌어진 追求(?君), 細君(細君) 勢力 間 王權爭奪戰 渦中에 殺害됐다. 王權爭奪戰에서 勝利한 追求 勢力은 양원왕을 卽位시키고, 細君 勢力 2000餘 名을 處刑했다. 양원왕 時代에도 高句麗는 內憂外患에 시달렸다.

    北齊 문선제 高揚은 552年 양원왕에게 使臣을 보내 戰爭 때 高句麗로 흘러들어간 有連繫(柔然係) 住民을 送還하라고 壓迫했는데, 양원왕은 抵抗 한番 제대로 못하고 유연인 5000餘 名을 돌려줬다. 高句麗는 553年 新羅, 백제 간 管山城 戰鬪 以後 新羅와 백제가 서로 싸우는 틈을 利用해 主力을 西部 國境에 集中하면서 突厥의 侵攻에 對應했다. 管山城 戰鬪 2年 前인 551年 양원왕은 將軍 고흘(高紇)을 派遣해 시라무렌 江 流域으로 侵攻한 突厥君을 물리치고 1000餘 名을 斬首했으나 以後 突厥은 더욱 强盛해져 555年頃 거란을 包含한 시라무렌 江 流域 遊牧 不足 모두를 合倂했다.



    백범흠

    ● 1962年 慶北 醴泉 出生
    ● 연세대 新聞放送學科 卒業, 政治學博士
    ● 駐中國大使館 總領事
    ● 現 駐프랑크푸르트總領事館 總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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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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