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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사라진 時代 기다림의 價値|新東亞

정여울의 冊갈피 속 마음旅行

기다림이 사라진 時代 기다림의 價値

  • 정여울 | 文學評論家 suburbs@daum.net

    入力 2016-03-25 09: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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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다림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

    人間은 自己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不安이나 憤怒 같은 否定的 感情을 먼저 느낀다. ‘마음대로 되지가 않네, 거 참 氣分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異常하지 않은가.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自身의 意志와 感性을 시험당한다.
    모든 게 마음대로 술술 풀리는 일은 드물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턱없이 많다. 우리는 그 ‘마음대로 되지 않는 狀況’ 속에서 우리의 才能과 人格을 시험당한다. ‘그 試驗에 應할 것인지 말 것인지’조차 事實은 自發的 選擇의 問題다. 이 어쩔 수 없는 時間을 견디는 힘을 가리키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라는 말을 가만히 한 글字 한 글字 發音해보면 先祖들은 기다림을 매우 所重하고 아름답게 여겼음을 느낀다. 작게는 인터넷 速度가 느려 짜증이 치밀어오를 때부터, 크게는 重要한 試驗 結果 發表를 앞두고 가슴 졸이는 日까지, 좀처럼 기다림을 좋아하지 않는 現代人에게도, 기다림이라는 單語의 울림은 如前히 魅惑的이다.
    돌이켜보면 人生은 기다림의 博物館이다. 人生의 모든 決定的 轉換點에 ‘기다림’이라는 마음의 停車場이 자리잡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기까지의 기다림, 걸음마를 떼고 옹알이를 할 때까지의 기다림, 그 아기가 어엿한 成人이 돼 한 사람의 몫을 하기까지의 기다림, 그가 사랑을 찾고 職業을 찾고 人生의 眞正한 召命을 찾을 때까지의 기다림. 이렇듯 삶의 뼈대가 되는 原初的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日常을 構成하는 매우 具體的이고 생생한 기다림들이 人生의 피와 살을 이룬다. 信號燈이 바뀔 때까지, 버스나 地下鐵이 오기까지, 健康檢診 結果가 나오기까지, 銀行窓口에서 내 番號를 부를 때까지, 軍隊 간 戀人이 돌아올 때까지, 말없이 떠난 그 모든 因緣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기다린다. 어떤 기다림도 없는 곳엔 삶의 溫氣가 存在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모든 기다림을 멈추는 瞬間, 삶은 끝나니까. ?
    기다림은 어쩔 수 없이 苦痛스럽다. 기다림의 智慧를 말하는 사람들은 기다림의 苦痛을 다른 무엇으로 昇華한 이들이다. 文明의 發展은 기다림의 不可避한 苦痛을 緩和하거나 없애는 쪽으로 이뤄져왔다. 携帶電話와 컴퓨터를 비롯한 온갖 文明의 便宜가 삶을 ‘高速化’하는 동안 우리는 漸漸 기다림에 脆弱한 身體로 變化해왔다. ‘와이파이가 느리다’고 짜증을 내고, 잠깐의 기다림을 참지 못해 携帶電話로 게임을 한다.
    무엇보다도 人生의 흐름 自體를 기다리는 能力을 잃어버렸다. 最短 時間에 成果를 내야 한다며 長期的 眼目에서 時間과 人力도 投資하지 않으려 하고, 스펙이나 效率性이라는 잣대로 ‘發展의 速度’를 評價한다. 映畫의 展開가 조금만 느려도, 小說에서 ‘事件’李 조금만 늦게 일어나도, 사람들은 채널을 돌리거나, 冊張을 덮는다. ‘기다린다는 것’의 著者는 이 ‘기다림의 不可能性’이 우리 삶을 荒廢化한다고 指摘한다. 기다림의 意味와 價値를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잃어버린 불씨를 되찾는 것이 아닐까.



    2. 기다리게 하는 者가 이긴다?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은 焦燥하다. ‘기다리는 쪽’과 ‘기다림을 當하는 쪽’ 中 하나를 選擇하라면,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쪽’보다는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길 바랄 것이다. 기다림은 權力을 發生시킨다. 기다리는 쪽은 敗北하기 十常이다. 기다리게 만드는 쪽이 關係의 열쇠를 쥐고 있다.
    시바 료타로의 ‘미야모토 무사시’는 ‘기다림의 權力’을 생생하게 그린다.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의 幹流지마 決鬪에서 勝利한 쪽은 相對를 기다리게 해 그 마음을 바작바작 타들어가게 한 쪽이었다. 무사시는 일부러 約束 時間을 어김으로써 기다림에 지쳐 잔뜩 緊張한 고지로가 더 以上 처음의 緊張 狀態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게 했다. “勝負는 한瞬間에 決定 났다. (…) 고지로는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에 지친 그는 차마 끝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 이것이 무사시의 戰略이었다.” 무사시는 戰鬪에서 勝利한 것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心理戰에서 勝利한 것이다.
    相對方에게 權力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은 相對를 기다리게 한다. 連絡을 기다리며 줄다리기를 하고, 約束 時間에 일부러 늦어 相對를 勞心焦思하게 한다. 록스타 믹 再擧는 이 같은 ‘기다림의 心理戰’을 自身의 콘서트에 適用해 公演이 始作되기도 前에 觀客을 初주검으로 만들었다. 믹 재거가 이끈 롤링스톤스 公演에서는 한 時間 넘게 觀客을 기다리게 하는 일이 茶飯事였다. 그는 觀客이 幻想的인 公演을 기다리다 못해 거의 瀕死 狀態에 이를 때까지, 泰然自若하게 트레일러 속에서 카나페를 먹으며 마리화나를 피우고 샴페인을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觀客을 ‘光跡인 기다림’의 恍惚境과 極度의 스트레스 狀態로 밀어 넣은 後에야 롤링스톤스는 啓示처럼 나타나 奇跡처럼 公演을 마치고 煙氣처럼 사라져버렸다. 크리스토퍼 앤더슨은 ‘믹 재거의 眞實’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다리게 하는 그의 技術은 一流였다. 언제까지 질질 끌면 觀客의 期待가 最高潮에 達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演奏가 始作되기 前부터 觀衆이 恍惚 狀態에 빠져 있는 것이 普通이었다.”
    하지만 ‘기다린다는 것’의 著者가 바람직하게 여기는 기다림은 이렇듯 相對를 向한 攻擊的 心理戰이 아니다. 그가 ‘기다림의 技術’로 推薦하는 것은 焦燥함을 參考, 不安感을 이겨내고, 때가 무르익기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 온힘을 다해 기다리되 結果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떠들썩한 天地’라는 作品에는 ‘때를 기른다’는 表現이 나온다. “때를 기른다. 깊은 傷處도 圓熟한 주름으로 바꾸는 때라는 것을….”



    3. 기다림 없는 기다림을 위하여

    깊은 傷處를 圓熟한 주름으로 바꾸는 기다림. 方今 칼에 베인 傷處는 끔찍하게 아프고 시리지만, 時間이 오래 흘러 傷處가 아물면 그곳엔 ‘圓熟한 주름’처럼 자연스러운 時間의 痕跡이 아로새겨진다. 깊게 베인 傷處가 나도 모르는 사이 넉넉한 주름으로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아이를 기르는 엄마의 마음, 患者가 낫기를 바라는 意思의 마음, 弟子가 깨닫기를 바라는 스승의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時間의 野俗한 흐름을 견디게 만드는 기다림, 삶에 對한 사랑을 抛棄하지 않게 해주는 기다림은 마음속에 ‘빈 空間’을 만듦으로써 可能해진다. 무언가가 언제든지 찾아와도 내 삶에 깃들 수 있도록, 내 안에 빈 空間을 만들어놓아야 한다.
    著者는 기다림의 圓熟한 境地로서 癡呆 患者를 보살피는 도우미들의 기다림 中 ‘牌稱 케어(patching care)’를 例로 든다. 牌稱 케어는 처음부터 完璧한 設計圖를 가지고 計劃的으로 癡呆 患者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뜯어진 部分을 應急處置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癡呆 患者는 自身의 深刻한 狀況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에 그가 狀況을 받아들일 때까지 조용히 待機하며, 조금씩 患者의 不便함을 解消하는 데 滿足한다. ?
    牌稱 케어에는 位階秩序가 없다. 統制도 計劃도 ‘누가 더 잘해냈다’는 稱讚도 없다. 그저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보살핌만이 있을 뿐이다. 患者를 재촉하거나 劫迫하는 일 없이 患者와 그 周邊의 狀況이 어느 程度 安定을 찾아가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牌稱 케어를 우리 삶에도 適用해보면 어떨까. 癡呆 患者를 向해 사람들은 ‘病이 낫기’를 敢히 期待하지 못한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기를 期待할 수도 없다. 그저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그 마음이 덜 고통스럽기를 期待할 뿐이다.
    이렇듯 마음을 비울 때야말로 眞正한 기다림이 可能한 것 아닐까. “누구도 自身을 내세우거나, 억지로 統制하려는 詩도 없이 그저 時間의 힘이라고 할 만한 或은 자리의 힘이라고 할 만한 것에 모든 것을 맡기기”, 이러한 態度야말로 牌稱 케어의 本質이다. 기다림 없는 기다림, 卽 ‘더 나아질 것이라는 期待’에 對한 기다림 없는, 純粹하고 無目的的인 기다림이야말로 ‘빨리빨리’ 시스템에서 우리를 暫時나마 解放시킬 靈魂의 非常口日 것이다.
    ‘난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이젠 더 以上 기다릴 수 없어’, 이런 式으로 마음의 限界를 定하지 않는 것이 眞正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偶然을 겨냥하지 않는다. 아무런 豫感과 前兆도 없는 곳에 스스로를 열어두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그 ‘熱淋’ 속에 眞正한 기다림이 있다. 기다림 없는 기다림은 華麗하거나 멋져 보이지 않는다. 언뜻 매우 受動的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은 설렘이 사랑으로 바뀔 때까지, 봄의 새싹이 가을의 結實이 되기까지, 天地分揀을 못하던 아기가 어느새 智慧와 熱情으로 가득한 成人으로 자라기까지, 기다리는 일의 所重함을 ‘人生의 一部’로 堂堂히 記入할 줄 안다. 기다림은 人生에서 不必要한 時間, 쓸데없는 時間이 아니라 人生을 더욱 燦爛하고 濃艶하게 만드는 偉大한 英긂의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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