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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니, 그女를 付託해|신동아

엄마, 아니, 그女를 付託해

  • 강유정│映畫評論家 noxkang@hanmail.net

    入力 2009-02-03 1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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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부터 엄마였던 女子는 없다. 어느 女子에게나 꽃다운 젊음과 뜨거운 사랑에 對한 欲望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世上에서 가장 아름답고 崇高한 單語로 꼽히는 ‘엄마’는 女子이기를 抛棄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적잖은 映畫가 엄마도 女子임을 操心스럽게, 때론 破格的으로 이야기했다.
    엄마, 아니, 그녀를 부탁해

    ‘인어공주’

    신경숙의 小說 ‘엄마를 付託해’는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그린다. 1990年代 末 갑자기 닥쳐온 IMF 金融危機라는 찬바람을 ‘아버지’와 ‘家族’ 되돌아보기가 막아주었다면 全世界的 大恐慌의 칼바람을 견뎌낼 溫氣는 ‘엄마’로부터 始作되는 듯싶다. 小說 ‘엄마를 付託해’에 登場하는 어머니는 우리가 記憶하는 엄마의 典型을 보여준다. 嚴密히 말하자면, 우리가 記憶하고 싶어하는 엄마의 理想型이 提示되어 있다. 子息을 위해서라면 精神的 肉體的 苦痛을 감추고 自身의 現在를 擔保 잡히는 어머니. 뜨거운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려가며 새벽밥을 짓는 어머니. 無知하지만 단단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 모습은 冊 表紙의 點描畫처럼 하나하나 記憶 속에서 復元된다.

    신경숙의 ‘엄마를 付託해’가 지닌 獨特함은 엄마가 사라졌다는 事實에 있다. 엄마가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엄마라는 人物은 누군가의 記憶에 依해 再生된다. 記憶은 片鱗이다. 조각이기 때문에 完璧한 한 人間을 完成하기보다 人間의 한 側面을 再構成해 낼 수밖에 없다. 첫째딸의 視線에서, 아들의 視線에서, 엄마는 各其 다른 人物로 造型된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世上 누구라도 보는 사람, 그리고 보는 角度에 따라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神奇한 것은 이렇게 各其 다른 視角에서 再構成된 사람이 누구누구라는 固有名詞를 지닌 한 女子가 아니라 ‘엄마’라는 普通名詞의 一般型으로 다가온다는 事實이다. 女性은 個人이지만 엄마는 普通名詞다. 엄마는 그렇게 普通名詞로 記憶되고 살아가고, 사라져간다.

    엄마, 아니, 그녀를 부탁해

    ‘맘마미아’

    ‘엄마답지 못하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欲望이나 欲心, 感情의 喜怒哀樂을 지닌 한 人間이기보다 聖스러운 機能的 存在로 쉽게 合意된다. 이 合意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엄마답지 못하다’를 넘어서, ‘人間답지 못하다’는 非難까지 한다. 이를테면 엄마가 子息을 버렸다거나 엄마가 外道를 했을 때나 엄마가 子息의 未來보다 自身의 일이나 欲望에 充實했을 때 말이다. 그렇다면 果然 엄마는 어떤 存在일까? 엄마라는 普通名詞를 벗겨낸 後 남아 있는 女子는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미켈란젤로의 彫刻像 ‘피에타’는 十字架에서 내려진 그리스道를 안고 있는 마리아를 造型하고 있다. 무릎 위에 앙상하게 마른 아들을 걸쳐놓은 마리아의 表情에는 깊은 슬픔이 고여 있다. 한 가지 特異한 點은 十字架에 못 박혔던 예수의 나이 서른셋, 그런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마치 同甲내기처럼 젊어 보인다는 것이다. 觀客들은 미켈란젤로에게 물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너무,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것이 아니요?” 이에 미켈란젤로는 對答했다. “貞淑한 女人은 더디 늙는 法이오.”



    여기서 말하는 貞淑한 女人이란 곧 어머니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는 貞淑하다’는 條件 命題가 아니라 必要充分 命題다. 貞淑한 女人이 어머니고 어머니는 무릇 貞淑해야 하는 셈이다. 이런 어머니 모습의 代表的인 例가 ‘舍廊房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엄마’다. ‘鷄卵 飯饌’이라는 귀여운 투정으로 記憶되는 ‘舍廊房 손님과 어머니’는 일찍이 寡婦가 된 한 女人과 죽은 男便의 親舊였던 한 男子의 至高至順한 사랑을 그린 作品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至高至順’이라는 修飾語다.

    或是 記憶하는가? 崔恩喜가 延期했던 옥희 어머니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쪽 찐 머리에 端正한 韓服차림의 옥희 엄마는 오늘날 우리 感覺에 依하면 여섯 살 딸을 두었다는 點에서 三十代 中後半을 聯想케 한다. 하지만 옥희 엄마는 不過 二十代 初盤의 어린 女子다. 철없는 나이에 媤집와 아이를 낳고 사랑을 다 알기도 前에 男便을 잃은 女性이다. 옆房에 貰 든 先生과는 鷄卵을 媒介로 感情의 交流가 있지만 事實上 戀愛 事件이라고 꼽을 만한 것은 없다. 옥희 엄마는 男便을 잃은 寡婦이기에 貞節을 지켜야 하고, 더욱이 男便과 알고 지내던 男子와의 사랑은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視角으로 바라보면, 옥희 엄마의 貞節은 아름답기보다 未練에 가깝다. 하지만 이 作品이 小說로 쓰여지고 映畫로 만들어졌을 當時, 옥희 엄마는 韓國籍 女性의 典型으로 받아들여졌다. 自身의 欲望을 옥희 엄마라는 이름에 가둔 女子, 그 女子가 바로 ‘엄마’이기 때문이다. 옥희 엄마의 欲望은 밤새 흐느껴 연주하는 風琴 소리에 녹아 있다. 風琴을 연주하며 우는 그 瞬間에만 옥희 엄마는 自身의 女性性을 許諾한다. 映畫에서는 옥희 엄마의 本名이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옥희 엄마는 옥희의 엄마여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 아니, 그녀를 부탁해

    ‘舍廊房 選手와 어머니’

    ‘欲望’이라는 單語와 ‘어머니’

    最近에 ‘舍廊房 選手와 어머니’같은 코믹패러디物이 開封한 것은 아마 隔世之感의 表現일 것이다. 小說家 박형서가 ‘舍廊房 손님과 어머니의 淫亂性 硏究’ 같은 才致 있는 短篇을 써낸 것도 같은 脈絡에 놓여 있다. ‘엄마’라는 普通名詞에 欲望을 묻어버리기에 二十代 初盤의 그女는 너무 아름답고 아직 젊다. 그럼에도 옥희 엄마는 淸純하고 精潔한 사랑의 化身(化身)으로 記憶되고 있다. 歲月이 變해도 ‘엄마’의 欲望은 쉽게 許諾되지 않기 때문이다.

    ‘欲望이라는 말과 어머니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어린 時節 父母의 섹스를 통해 ‘나’가 孕胎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衝擊은 엄마에 對한 背信感을 隨伴한다. 親舊들과 남몰래 빌려 보고 돌려 본 動映像 속에서나 벌어지던 行爲를 ‘우리 엄마’가 했다는 事實을 首肯할 수 없기 때문이다. 精潔하고 純正한 엄마가 普通名詞를 벗고 텔레비전이나 스크린에서 보았던 그 女子들 中 하나로 다가올 때 우리는 一種의 世界의 破滅을 맛본다. 우리는 ‘엄마’에게서 ‘欲望’을 보기 願치 않는다. 하지만 정작 엄마인 그女들이 自身의 欲望을 去勢하는 데 쉽게 同意할 수 있을까? 女子 누구누구, 人間 누구누구라는 呼稱을 떼어버리는 것에 그렇게 毅然할 수만 있을까? 때로 엄마의 欲望을 들여다볼 때 ‘衝擊’李 뒤따라오는 것은 우리가 그女들을 人間이라기보다 機能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들면 苟且한 欲望이 消盡될까?’

    오정희의 小說 ‘옛우물’을 보면, 45番째 生日을 맞은 女性이 登場한다. 女子는 거울을 바라보며 이제는 죽고 없는 옛 愛人을 생각하기도 하고, 堂上官 3名에 바보 8名이 태어났다는 堂上官집을 오가기도 한다. 男便이 便을 본 뒤 물을 내리지 않은 便器 속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똥, 女子는 그 똥이 너무도 낯설고 서글프다고 느낀다.

    45番째 生日을 맞은 이 女子는 自身의 女性性과 訣別하고 있다. 그女가 訣別하는 女性性은 젖꼭지에 매달리는 아이를 뿌리치고 愛人을 만나러 달려가는 熱情이며, 거즈 위로 범벅이 된 젖과 피를 보면서도 欲望에 몸이 뜨거워지던 젊음이다. 마흔다섯, 肺經이 가까워진 그女는 몸으로 부딪치는 欲望과 熱情이 아닌 다른 것을 發見하게 된다. 옛이야기에 傳해져 오는 金빛잉어의 傳說처럼 그렇게 도도히 遺傳되는 生命力을 말이다.

    閉經期 그리고 肺經 以後의 女性, 그리고 그들의 欲望은 젊은 女性의 것과 조금 다르게 描寫된다. ‘마더’라는 作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作品은 예순 살이 넘은 女性이 男便과 死別 後 겪는 激情的인 肉體的 사랑을 그리고 있다. 딸이 좋아하는 男子의 몸에 반하게 된 엄마, 그女의 欲望은 ‘엄마’라는 이름과 함께 二重의 團束을 받게 된다. 結局 그女는 男子에게도 딸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길을 떠나게 된다.

    ‘마더’에 登場하는 엄마는 당혹스러운 어머니다. 우리의 記憶 속에 엄마는 欲望도 欲心도 蒸溜된 存在를 뜻했다. 그런데 映畫 ‘마더’의 엄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엄마에 對한 先入觀을 違反한다. 그女는 딸의 愛人 대런을 誘惑하고 欲望을 呼訴한다. 同年輩의 늙은 男子 부르스가 그女를 誘惑하지만 그女에게 그는 自身이 늙었음을 비추는 醜惡한 거울에 不過하다. 映畫는 엄마라는 呼稱에 女性을 끌어들이고 欲望을 휘젓는다.

    그런데 왜 何必 딸의 愛人과 同寢하는 엄마였을까. ‘정사’ ‘나의 아름다운 洗濯所’로 잘 알려진 시나리오 作家 하니프 쿠레이詩에게 性慾이란 存在論的 質問과도 같다. 實狀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全혀 想像할 수 없다. 아마도 나이 예순쯤 되면 只今 나를 괴롭히는 이 苟且한 欲望이 고요하게 消盡되지 않을까 豫測할 뿐. ‘나이가 들면 怯이 없어지고 어려운 일도 잘 堪當해낼 것 같은데’라는 대런의 말처럼 젊음이 想像하는 老年은 無私無欲의 고요다. 하지만 果然 늙는다고 해서, 나이를 三十 살쯤 더 먹는다 해서 世上이 그토록 만만해질까.

    엄마에게는 欲望이 許容될 수 없다. 누구나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지만 그것은 數學처럼 原理原則日 뿐이다. 父母의 섹스는 머리로는 理解되지만, 決코 目睹하고 싶지 않은 祕密이다. ‘마더’의 엄마는 딸이 가진 慣習的 期待를 모두 저버린다. 엄마에게도 欲望이 있지만 社會는 쉽게 許諾하지 않는다.

    엄마, 아니, 그녀를 부탁해

    ‘마더’

    한便 그리스 悲劇을 닮은 映畫 ‘페드라’는 ‘어머니’라는 이름에 正面으로 挑戰하는 作品이다. 페드라라는 女人은 大富豪와 結婚한다. 男子에게는 成長한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처음 새어머니와 아들의 立場으로 마주친다. 語塞하던 두 사람이 漸漸 가까워지면서 問題가 發生한다. 그들은 어머니와 아들이 아니라 나이가 많은 한 女人과 젊은 男子로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法律上으로 보았을 때 페드라와 그의 關係는 近親相姦이다. 엄마와 사랑을 나누는 아들이라는 槪念은 生物學的 母子 關係를 떠나 不快하고 危險해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은 結局 서로의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페드라는 男子 앞에서 欲望을 버린 엄마가 아니라 그를 탐하는 女子이길 選擇했기 때문이다.

    많은 映畫 觀客이 記憶하듯 ‘페드라’는 破局으로 결말지어진다. 아들은 어머니이자 戀人인 ‘페드라’의 이름을 외치며 自動車를 過速으로 몰아 바다로 沈沒한다. 自身을 보듬어줄 따뜻한 子宮으로 그女를 받아들여야 했던 男子에게 남은 것은 巨大한 管을 닮은 乘用車다. 엄마의 欲望, ‘페드라’는 그 欲望의 危險性을 말해주려 한다.

    엄마, 아니, 그녀를 부탁해

    엄마도 한때 젊은 女子였음을 보여주는 映畫 ‘인어공주’.

    엄마가 사라지는 瞬間

    박흥식 監督의 ‘인어공주’는 無識한 때밀이 아줌마가 된 ‘엄마’의 處女 時節로 時間 旅行을 떠나는 딸의 이야기다. 映畫는 이런 聯想으로 始作된다. 저렇게 우걱우걱 때 밀던 손으로 밥을 비벼먹는 엄마에게도 젊음과 純情이 있었을까? 전도연은 ‘인어공주’에서 過去로 時間旅行을 떠난 ‘딸’과 젊었던 ‘어머니’, 1人2役을 해낸다. 過去 속에 再構成된 ‘엄마’는 새로 돋아난 새筍처럼 軟弱하고 갓 태어난 椒蘭처럼 따뜻하다. 두껍고 거칠기만 한 엄마의 皮膚 속에도, 한때는 洞네 郵遞夫를 사랑하던 淳朴한 處女의 보드라운 女性性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커다란 人形을 벗겨내면 작은 人形이 드러나는 러시아 傳統 人形 마트로슈카처럼 映畫 ‘인어공주’는 그렇게 엄마의 外皮를 벗겨 女子를 끌어낸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작은 女子는 사랑에 울고 웃는 現在의 ‘나’와 똑같은 女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도연의 1人2役이라는 設定은 그런 點에서 눈에 띈다. 나와 너무 다른 엄마가 結局 나와 똑같다는 首肯을 이끌어내니 말이다.

    박흥식 監督의 두 番째 作品 ‘사랑해, 말순氏’도 그런 點에서 초라하지만 애틋한 ‘엄마’를 그린다고 할 수 있다. 映畫 ‘사랑해, 말순氏’는 1970年代 末과 1980年代 初를 背景으로 삼고 있다. ‘사랑해, 말순氏’는 記憶의 서랍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1980年代의 追憶을 하나 둘 꺼내 보인다. 거리를 빼곡히 메웠던 에로映畫 포스터, ‘아모레 아줌마’, 看護助務士 學院에 다니던 언니들, 中東에 일하러 갔다던 앞집 아저씨까지.

    追憶의 急所를 喚起하는 映畫의 言語는 또 하나의 事件을 言及한다. 바로 ‘幸運의 便紙’. 한때 全國을 휩쓸었던 疫病과 같은 幸運의 便紙가 이 映畫의 話者인 아들 匡護에게도 傳達되는 것이다. 匡護는 만만한 對象들을 골라 便紙를 주지만, 그들은 答狀을 쓰지 않고 버린다. 豫想했다시피 不幸은 豫言처럼 實現돼 便紙를 받은 엄마는 病에 걸려 죽고 만다. ‘사랑해, 말순氏’는 化粧品 訪問販賣員이 活躍하던 當時 ‘워킹 맘’들을 追憶하고 있다. 눈썹을 다 밀어버리고 위가 아프다면서 消化劑만 먹는 엄마에게, 少年은 미련하다고 손사래 친다.

    映畫에서 가장 記憶에 남는 場面은 學校에서 돌아온 少年이 나뭇잎을 떼며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죽지 않았다’를 점치는 場面이다. 匡護가 나뭇잎을 다 떼고 골목길을 돌아봤을 때 不吉한 豫感은 노란色 조등(弔燈)으로 實現되어 있다. 이제 少年은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밥을 짓는다. 痛駁을 주고 핀잔할 수 있었던 엄마가 사라지자 엄마의 몫은 고스란히 少年에게 돌아온다. “未安해, 엄마”, 結局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內面을 斟酌해볼 料量도 못해본 그냥 엄마다. 엄마는 그렇게 準備되지 않은 瞬間 사라지니 말이다.

    엄마, ‘孤獨한 解決士’

    박흥식 監督이 ‘엄마’라는 이름을 애틋하게 그려내고 있다면 ‘家族의 誕生’이나 ‘맘마미아’는 엄마의 欲望을 훨씬 立體的으로 또 樂天的으로 그려낸 作品이다. ‘家族의 誕生’에는 有婦男과 바람을 피우는, 理解할 수 없는 欲望에 휘둘려 사는 ‘엄마’가 登場한다. 딸을 延期한 공효진은 이 엄마의 철없음에 혀를 내두른다. ‘엄마라면 적어도 딸 앞에서 그런 모습은 보여선 안 되는 것 아닌가’ 歎息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映畫 막바지에 딸은 그렇게 不協和音을 일으키며 살 수밖에 없었던 한 女子를 首肯하게 된다. 그女는 엄마이기 以前에 착하고 예쁜 女子였다는 것을 말이다.

    엄마, 아니, 그녀를 부탁해

    ‘사랑해, 말순氏’

    2008年 旋風的인 人氣를 모은 ‘맘마미아’는 엄마의 放蕩했던 젊은 날을 認定하는 딸의 드라마다. 結婚을 앞둔 딸은 自身의 親아버지를 찾고 싶어한다. 映畫를 코미디로 이끄는 힘은 엄마조차 딸의 生物學的 아버지가 누구인지 確信하지 못하는 點이다. “그 무렵 세 사람과 만났고, 그들 모두와 섹스를 나눴어. 말하자면 언제쯤 排卵이 돼서 누구의 精子와 修正되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라고 告白하는 것이다.

    ‘맘마미아’나 ‘家族의 誕生’에 登場하는 ‘엄마’는 20臺를 衝動的으로 보낸 女性들이다. 그러니까 充分히 젊음에도 不拘하고 自身의 欲望을 눌러야만 했던 ‘舍廊房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엄마’와는 全혀 다른 엄마다.

    엄마, 아니, 그녀를 부탁해

    ‘맘마미아’

    興味로운 아이러니가 있다. 나의 ‘엄마’조차 엄마와 關聯된 映畫를 보면 自己 自身이 아니라 自身을 낳아준 엄마를 떠올린다는 點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一種의 象徵이다. ‘歸鄕’이라는 題目의 스페인 映畫에는 ‘엄마’가 一種의 解決士이자 審判官으로 登場한다. 그女는 法이 解決하지 못하는 不義를 엄마라는 이름으로 解決한다. ‘돌로레스 클레이븐’의 ‘엄마’ 亦是 마찬가지다.

    우리는 間或 映畫에서 子息을 버리고 自身의 삶을 찾아간 그女들을 본다. ‘아무도 모른다’의 철없는 엄마는 아이 넷을 버려두고 집을 나가고, ‘우리들의 幸福한 時間’의 엄마는 “나도 좀 살자”며 子息을 外面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類의 엄마를 ‘엄마’의 正義에서 지우고 싶어한다. 엄마는 永遠한 解決士이며 安息處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當爲다.

    엄마, 아니, 그녀를 부탁해
    강유정

    1975年 서울 出生

    고려대 國語敎育科 卒業, 同 大學院 碩·博士(國文學)

    동아일보 新春文藝 入選(映畫評論), 조선일보 新春文藝 當選(文學評論), 경향신문 新春文藝 當選(文學評論)

    現 高麗大·韓國藝術綜合學校 講師


    하지만 엄마 自身을 돌아보았을 때 그女는 卵子 500個를 가지고 태어난 女子임에 분명하다. 種子돈 꺼내 쓰듯 卵子 500個를 消盡해버리고 나면, 女子는 사라지고 오롯이 엄마만 남는다. 엄마의 欲望, 內緣男을 만나기 위해 보채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고 젖이 흐르는 가슴에 거즈를 대고 집을 나서는 女子, 아이에게 睡眠劑 탄 粉乳를 먹이고 男子에게 向하는 女子, 그 女子와 엄마 사이에는 어떤 間隙이 있는 것일까? “엄마를 付託해”, 어쩌면 엄마는 永遠한 解決士이지만 永遠히 孤獨한 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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