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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다! 허장강이, 도금봉이”|新東亞

“보고싶다! 허장강이, 도금봉이”

나의 韓國映畫 遍歷期

  • 이계진 < 프리랜스="" 아나운서="">

    入力 2005-04-22 15: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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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正말이지 映畫가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날 地境이었다. 막 黑白 映畫가 컬러로 넘어가던 우리의 中高等學校 時節, 그때 보았던 그 映畫들이 마치 배고픈 날 어렵사리 얻어 먹은 맛있는 飮食처럼 머리에,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다.
    ‘허장강 先生, 도금봉 女史’라든지 ‘허장강 氏, 도금봉 氏’ 같은 表現은 只今 이 글을 쓰는 氣分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우리끼리 부르던 대로 ‘허장강이’와 ‘도금봉이’라고 해야 오히려 걸맞을 듯 하다.

    ‘韓國 映畫’ 하면 먼저 그 時節의 助演 俳優들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그들이 있어 映畫가 더욱 재미있었고, 助演이 主演 俳優들과 엇비슷하게 빛나던 時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決코 美男·美女가 아니면서도 個性 演技가 一品인 名俳優가 많았던 時節이다.

    原州에서 보낸 學窓 時節, 우리의 꿈은 映畫를 ‘맘대로’ 볼 수 있는 나이가 빨리 왔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 걸림돌이 于先 ‘學生 身分’이었다. 빨리 卒業하고 映畫를 실컷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學生 觀覽 不可’는 말할 것도 없이 ‘中學生 以上 觀覽可’도 자유롭게 볼 수 없었고 父母를 따라 간다는 것도 想像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映畫 구경은 늘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오직 學校長이 許諾한 團體觀覽만이 唯一한 機會였지만 그조차도 주머니에 돈이 없어 못 가던 때였다. 勿論 참을性 不足한 親舊들은 停學을 覺悟하고 ‘빠꼼이 짓’을 하기도 했지만.

    어서 卒業해서 劇場 구경(그 時節에는 映畫 구경을 그렇게 表現했다) 좀 실컷 했으면 하는 것이 所願이던 때, 한 親舊는 卒業式이 끝나자마자 바로 劇場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2㎝쯤 길어진 머리에 校服을 입고 있었지만 ‘臨檢席’李 全혀 무섭지 않은 첫 ‘解放의 날’이었다. 두 다리 쭉 뻗고 드러눕다시피 한 채 같은 映畫를 보고 또 봤을 것이다. 痛快무비의 自由다.

    當時만 해도 西部劇이 流行이었기 때문에 내가 처음 본 우리 映畫가 무엇이었는지는 確實치 않다. 아마도 ‘나는 告發한다’였던 것 같다. 김칠성이라는 유들유들한 俳優가 얼마나 겁나고 미웠던지 그가 銃에 맞아 쓰러질 때 熱狂한 우리는 劇場이 떠나갈 程度로 拍手를 쳤다. 反共 敎育이 徹底하던 時節의 當然한 反應이었다.



    學校長이 許諾한 團體觀覽은 그런 反共物과 愛國물이 단골이었다. 가끔 文藝物이 있었고, 校長 先生님께 氣分 좋은 일이 있을 때면 僥倖 西部劇이나 娛樂物을 볼 수도 있었다. 劇場에 손님이 안 들 境遇 水準 높은(?) 映畫도 가끔 團體學生을 動員하는 境遇가 있었으니 그런 보너스가 주어질 때면 우리의 喊聲이 하늘을 찌르곤 했다.

    登下校길에 우리는 집으로 곧장 가는 길을 버리고 ‘시공관’ ‘文化劇場’ ‘原州 劇場’ ‘軍人 劇場’이 있는 길을 巡禮하곤 했는데 이는 劇場 看板을 주욱 보기 위함이었다. 황정순과 석금성을 區分하기 어려울 程度로 엉성한 看板이었지만 그 映畫의 스토리를 想像하기가 如干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김지미는 저 映畫에서 果然 누구와 結婚할까’ 等等.

    본 映畫보다 재미있던 豫告篇

    그런 想像이 可能한 것은 反共映畫를 볼 때 失手로(?) 틀어준 豫告篇이 우리를 誘惑했기 때문이다. 正말 豫告篇은 우리에게 본(本) 映畫에 맞먹는 즐거움이었다. 아니다, 決코 合法的으로는 볼 수 없는 映畫를 짜깁기로 보여주는 特別 보너스였으니 어떤 때는 本映畫보다 더 재미있었다.

    김지미와 최무룡이 막 抱擁하려는 場面이나 조석근의 험상궂은 얼굴이 조미령을(최은희였던가, 어쨌든 예쁜 女俳優를) 마구 威脅하는 場面을 보면서, 우린 죽어도 그 映畫를 꼭 보고야 말겠다는 어림없는 決心을 했다. 結局 團體觀覽도 안되고 정학당할 勇氣도 없으니 그저 설레는 맘을 달래려 劇場 看板이나 쳐다볼 수밖에.

    正말이지 映畫가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날 地境이었다. 막 黑白 映畫가 컬러로 넘어가고 있던 우리의 中高等學校 時節, 그때 본 그 映畫들이 마치 배고프던 時節에 먹던 맛있는 飮食처럼 머리에, 가슴에 남아 있다.

    엉성하기 짝이 없던 沈淸傳을 보며 우리는 눈물을 철철 흘렸다. ‘엉성하다’는 것은 沈봉사가 스님에게 供養米 三百石을 施主하기로 約束하는 場面의 뒷山에는 高壓線 送電塔이 우뚝 서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아무려면 어떠랴, 우린 그저 심청이 때문에 울었으니.

    “오늘 성춘향 보러간다!”

    ‘구름이 흘러가도’ 亦是 우리를 밑도 끝도 없이 울린 映畫다. 兒役 俳優들이 누구였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代身 助演이던 조미령이 어찌나 좋던지 答狀도 없는 팬레터를 꽤 보내던 親舊들이 기억난다. 그 映畫를 團體 觀覽할 때 나는 집에 갈 생각도 않고 두 番 세 番을 連續으로 보았다. ‘學生들 다 나가!’라고 고함칠 때는 化粧室에 숨어 있다가 大韓뉴스 할 때쯤 다시 숨어들어 오는 것이었다.

    또 한便의 잊을 수 없는 映畫는 ‘상록수’다. 한창 人氣 上終價였던 崔恩喜와 신영균이 主演이었고 허장강이 洞네 靑年으로 나왔지 아마. ‘동혁’李 타고 오는 버스를 기다리던 ‘영신’은 車가 끊기자 居處로 돌아와 新聞紙로 깨끗이 塗褙한 房에서 혼자 쓸쓸해 한다. ‘동혁’은 왜 오지 않는가. 그 때 그 먼길을 걸어 車費를 아껴서 산 鐘을 들고 신영균이 나타난다. 우리는 또 냅다 拍手를 치며 동혁의 멋진 出現에 感激했다. 女學生들이 훌쩍이는 소리도 間間이 들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는 拍手 部隊였다. ‘醫師 安重根’李 伊藤博文을 向해 六穴砲를 쏘았을 때는 起立拍手를 쳤고, 黃海나 장동휘, 박노식이 敵陣을 突破하거나 一帶 몇으로 敵들을 때려눕힐 때는 喊聲과 함께 拍手를 쳤다. 特히 그 세 배우는 한창 힘 자랑을 하고 흉내내기를 좋아하던 그 時期의 우리들에게 偶像이었으니 周邊에는 黃海처럼 兩眉間을 내천(川)字로 찡그리고 다니는 아이도 많았다.

    그런 우리를 잘 ‘利用’했던 映畫 가운데는 ‘獨立協會와 靑年 李承晩’이라는 映畫도 있다. 아마도 自由黨의 支援을 받은 選擧用이 아니었나 하는 疑心이 只今에서야 드는 그런 映畫다. 그땐 但只 映畫를 본다는 事實만으로도 氣絶 直前까지 갈 程度로 좋았으니까. 그리고 只今은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한 ‘地平線은 말이 없다’ ‘아카시아 꽃잎 필 때’ ‘오부자’ ‘훌쭉이 뚱뚱이 論山 訓鍊所에 가다’ ‘빨간 마후라’…

    아, 그렇다! 團體觀覽한 映畫 가운데 우리의 애肝腸을 가장 많이 태운 映畫가 있다. ‘성춘향’이다. 올 컬러 시네마스코프(!)인 ‘성춘향’은 똑같은 時期에 만들어진 ‘春香傳’과 對決해서 壓勝을 거둔 것으로 記憶하는데, ‘春香傳’은 김지미 主演에 홍성기 監督이었고 ‘성춘향’은 崔恩喜 主演에 신상옥 監督이었던 것 같다.

    그 映畫가 우리 고장 原州에 들어왔는데 재미있다고 所聞은 亂離지요, 劇場은 連日 滿員謝禮지요, 上映은 繼續 延長이지요…. 50% 割引되는 우리 學生들에게는 좀처럼 機會가 오지 않았다.

    終禮時間이면 눈치 빠른 ‘빠꼼이’들이 ‘오늘 성춘향 보러 간다!’는 헛所聞을 여러 番 퍼트리기는 했지만, 結局 모두들 이제나 저제나 先生님 입만 쳐다보다가 겨우 終映 며칠 前에야 團體로 보게 된 것이었다. 김희갑度 人氣였고, 허장강度 人氣였고, 도금봉도 따라서 人氣였다. 김진규와 최은희는 勿論이거니와.

    김승호, 이예춘 같은 名俳優들이 버티고 서 있고 移民, 김석훈 같은 美男 俳優에 아직도 健在한 남궁원 같은 俳優가 사랑 받던 바로 그 時節. 不良한 사운드트랙과 臺詞가 鬼神소리처럼 울던 映畫館에 앉아 小便 지린내와 먼지를 大型 扇風機 바람으로 뒤섞어 마시면서도 마냥 幸福하던 그 때 그 時節.

    아직 나는 ‘共同警備區域JSA’를 보지 못했다. ‘편지’ ‘8月의 크리스마스’ ‘接續’ ‘넘버3’ ‘아름다운 時節’ ‘江原道의 힘’ ‘反則王’ ‘注油所 襲擊 事件’ ‘쉬리’等은 모두 비디오 테이프로 보아야 했다. 이젠 臨檢席이나 生活指導敎師를 무서워할 必要도 없고 주머니에 돈도 있지만, 줄서서 劇場票 사기가 어려운 職業에다가 豫約 文化에 익숙지 못한 性格까지 겹쳐 映畫館에 가는 일이 드물다. 勿論 時間 없다는 핑계는 當然한 것이 돼버렸고.

    多채널TV며 몰려오는 外貨에 치여 死境을 헤매던 우리 映畫가 다시 活氣를 띠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拍手라도 치고 싶다. 뭐니뭐니 해도 映畫는 大型스크린에서 봐야 맛이 나는 法이다.

    새삼 그 옛날 映畫들이 못 견디게 그립다. 새로운 映畫에 對한 사랑도 좋지만, 그 時節 그렇게 보고 싶던 촌스러운 映畫들을 다시 볼 機會도 가졌으면 좋겠다. 허장강이, 도금봉이, 문정숙이, 박노식이, 黃海…. 그 얼굴들 좀 다시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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