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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恨의 情緖가 K컬처 이끌고 있다”|신동아

“판소리 恨의 情緖가 K컬처 이끌고 있다”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하는 ‘길에서 만나는 人文 活動家’] 世界판소리協會 만든 名唱 채수정 한국예술종합학교 敎授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4-05-1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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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는 人文學財團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길에서 만나는 人文 活動家’ 시리즈를 進行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年 11月 設立된 國內 最初 人文學 支援 財團으로 人類의 오랜 知識과 智慧를 바탕으로 삶의 根源的 물음을 새롭게 傳한다는 趣旨로 硏究 支援, 大衆 講演, 온라인 포털 等 다양한 事業을 進行하고 있다. 길에서 만나는 人文 活動家’는 地域社會나 空間을 基盤으로 人文 價値를 苦悶하고 이를 새로운 時代의 言語와 메시지로 알리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進行한다. 다섯 番째 主人公은 판소리 世界化를 일구고 있는 채수정 名唱이다. <編輯者 週>
    판소리 세계화를 일구고 있는 채수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상윤 객원기자]

    판소리 世界化를 일구고 있는 채수정 한국예술종합학교 敎授. [이상윤 客員記者]

    午後 3時에 始作된 公演이 저녁 7時에 끝나자 作品을 ‘鑑賞했다’는 느낌보다 觀覽客인 나도 ‘함께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을 程度였다. 올 初 國立中央 劇場에서 열린 채수정 完唱 판소리 ‘赤壁歌’는 個人的으로 文化的 衝擊이었다. 판소리 完唱은 소리꾼 한 名이 마당 하나 全體를 짧게는 3時間, 길게는 8時間에 걸쳐 부르는 公演이다.

    完唱 公演을 리얼타임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흔히 판소리 完唱은 마라톤에 比喩된다. 긴 時間 동안 지치지 않는 體力도 있어야 하고 많은 臺詞를 놓치지 않는 記憶力, 觀客이 지루하지 않도록 適切하게 弄談도 하는 瞬發力, 북을 치는 高手와의 疏通과 呼吸 調節力 等 여러 能力이 要求된다. 채수정 名唱 公演은 期待 그 以上이었다.

    國家無形文化財 판소리 흥보가 履修者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敎授인 채 名唱은 2022年에는 ‘世界판소리協會’를 만들어 판소리를 世界로 發身하는 일도 하고 있다. 소리하랴, 弟子 키우랴, 하루 스물네 時間이 모자랄 程度로 바삐 살고 있다는데 都大體 저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硏究室이 있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 韓國藝術綜合學校 캠퍼스로 向하면서 그런 質問에 答을 찾고 싶었다.

    판소리는 ‘通의 소리’

    硏究室 門을 노크하자 얼굴에 함박웃음을 띤 그女가 記者를 맞았다. 壁 한篇이 國樂 CD와 關聯 高서, 北과 장구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朝刊新聞에 난 記事가 떠올라 먼저 話題로 삼았다.

    光州 비엔날레를 主管하는 外國人 藝術監督이 國內 言論과 인터뷰하면서 ‘판소리처럼 누구나 警戒 없이 목소리 내는 판을 펼치겠다’고 하더군요. 아니, 外國人이 어떻게 판소리 情緖를 알고 있을까, 더군다나 美術 展示에 판소리라니 그만큼 世界化됐다는 말인지 궁금症이 일었습니다. ‘판소리’라는 말이 普通名詞가 됐나 봐요.

    “그런 인터뷰가 있었나요. 소리꾼으로서 너무 반가운 消息이네요.”



    名唱 앞에서 해도 되는 質問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意味에서 ‘판소리란 뭔가’ 하는 根源的 質問이 떠올라요. 辭典的 言語로 하면 부채를 든 소리꾼이 固守 장단에 맞춰 노래(窓), 말(아니리), 몸짓(발림)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내는 公演藝術이라고 할 수 있지요.

    “판소리란 무엇인가라니 正말 오랜만에 듣는 質問이네요(웃음). 제가 살을 좀 붙이자면 ‘판소리’ 할 때 판은 ‘씨름판’ ‘놀이판’ ‘살판’ ‘죽을 판’ ‘亂場판’ ‘먹자판’처럼 뭔가가 벌어지는 어떤 空間的 槪念인데 但只 對象化된 스테이지가 아니라 열려 있는 空間을 말합니다. 그 안에 소리가 있는 거죠. 이야기 처음부터 끝이 있는 ‘通의 소리’라는 槪念도 있습니다.”

    ‘通의 소리’라 함은 뭘까요.

    “이른바 스토리텔링이죠. 例를 들어 심청이 태어나면서부터 試鍊을 겪고 印塘水에 몸을 던지고 나중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하는 이런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이 있는 스토리가 桶으로 構成돼 있다는 겁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重要한 건 ‘소리’죠. 우리가 노래라고 할 때는 人間의 목소리로 歌詞를 부르는 것을 말하잖아요. 판소리의 소리는 훨씬 더 넓어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甚至於 鬼神 소리까지 있어요. 例를 들어 春香歌에서 李도령을 그리는 춘향이가 獄中에서 來日 죽게 생겼는데 鬼神들이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있어요. 이런 소리도 내야 하니 소리꾼이 表現해야 하는 소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發聲에서 머리나 가슴을 안 쓰고 丹田에서 밀고 나오는 呼吸으로 하기 때문에 洞窟 속에서도, 瀑布水 밑에서도 소리를 하는 겁니다. 自然에서 硏磨해 得音의 소리를 얻어내는 게 판소리의 魅力이죠.”

    내친김에 판소리의 歷史까지 거슬러 물었다.

    “판소리를 指稱하는 名稱은 文獻에 따라 소리, 窓, 타령 等等 다양하게 나와요. 우리가 只今 부르는 ‘판소리’라는 名稱은 20世紀에 들어와 本格的으로 使用되기 始作했습니다. 언제 成立했는지에 對해서는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17世紀 中·後半 庶民層을 中心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通說입니다.

    主로 湖南 地域을 中心으로 發生했다고 보는 視角이 있지만 全國的으로 퍼져 있었다고 보는 說이 맞아 보여요. 全羅道圈에서 東便制니 西便制니 하는 장르가 나오고 六字배기, 巫俗音樂 씻김굿도 있고 名唱도 많이 나오긴 했지만 競技도·충청도·경상남도·경상북도에도 다 名唱이 있었습니다. 소리도 그 地域만의 패턴이 있어요.

    이를테면 忠淸道 판소리는 若干 덤덤하게 부르는데 말 自體가 그렇잖아요. 판소리에서는 소리꾼뿐 아니라 소리를 제대로 듣는 ‘귀名唱’도 重要한데 이런 분들은 咸鏡道에 많았대요. ‘南道에서 소리를 배워 咸鏡道 가서 소리를 닦았다’는 말도 있었으니까요. 어떻든 朝鮮半島 全體가 판소리의 나라였습니다.”

    트로트 烈風이 놓치고 있는 것

    그는 소리꾼이기도 하지만 판소리를 硏究하는 學者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韓國音樂科에서 工夫해 最初의 판소리 音樂學 博士가 됐을 뿐 아니라 古典文學人 판소리 社說을 硏究해 경희대 國文科에서 碩士學位를 받기도 했다. 內功 깊은 國文學者들이 스승(人間文化財 박송희)을 찾아와 소리를 배우는 것을 보면서 文學으로서의 판소리에 對한 工夫 欲心이 發動했다고 한다.

    東便制, 西便制가 워낙 有名해서 湖南 地域만 蕃盛했을 거라는 先入見이 있어요.

    “理論家들이 整理하면서 地域的으로 나누고 스타일을 틀 안에 넣다 보니 나온 槪念이라고 할 수 있죠.”

    판소리를 따로 鑑賞할 機會가 적다 보니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工夫부터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요.

    “옛날 판소리는 淫談悖說, 社會諷刺, 貪官汚吏 批判도 많았어요. 사람들이 自然發生的으로 모이면 북을 치고 하면서 演劇처럼 뮤지컬처럼 한 거예요. 앞서 言及하신 光州 비엔날레 藝術監督님은 그런 點에서 판소리의 開放性을 제대로 理解하고 계신 거죠.

    판소리는 19世紀에 隆盛하는데 그前까지 正말 庶民들의 娛樂이었어요. 그러던 것이 兩班들도 즐기는 文化가 된 거죠. 王 앞에서 부르는 ‘御前 광대’도 登場하니까요. 이러다 보니 이야기가 嚴肅해지고 士大夫들이 좋아하는 儒敎的 內容이 들어가면서 變形됩니다. 大院君도 판소리를 좋아했어요.”

    御殿 광대라고 하니 옛날 西洋 오페라처럼 貴族 앞에서 노래하는 소리꾼이 그려지네요.

    “맞아요. 下層이었던 판소리 광대들이 身分 上昇을 합니다. 그게 모티베이션이 돼서 熾烈한 競爭과 修鍊이 始作돼 流派도 생기는데 한便에서는 表現의 自由를 잃어버린 側面도 있어요. 가루지기타령, 裵裨將傳 이런 것들은 男女相悅之詞라고 해서 아예 없어져 버렸죠.”

    日帝 때는 어땠나요.

    “그 時代가 참 아이러니인데요. 西洋 文物이 들어와 綠陰이 始作되면서 名唱들이 스탠드 마이크 앞에서 소리를 해요. 그게 只今 音源으로 保存돼 있어서 硏究하고 指導가 可能해졌습니다. 日帝 때 임방울 先生 ‘쑥대머리’ 音盤은 當時에도 10萬 張이 넘게 팔렸다고 해요.”

    그는 판소리가 日帝强占期와 光復을 거치며 原形을 잃어버린 것이 第一 안타깝다고 했다.

    “光復 後에는 名唱들이 越北度 많이 했어요. ‘烈士가’를 지으신 박동실 名唱을 비롯해 오태석, 정남희 等 弟子들을 키우던 先生님들이 다 올라가 버리면서 脈이 끊어졌죠. 제가 1980年 무렵 소리를 始作했는데 ‘妓生 되려고 하느냐’ 소리를 대놓고 들었을 程度로 偏見이 甚했어요. 저도 어릴 적엔 피아노를 치고 合唱團을 하다가 國樂高等學校 入學하면서 始作했어요. 元來는 伽倻琴을 하려고 했는데 先生님이 ‘너는 판소리해라’ 하셔서 進路를 바꿨습니다. 어느 날 안숙선 先生님이 學校에 오셔서 農夫가 民謠를 가르쳐주신 적이 있는데 너무 感動해서 只今까지도 좋은 소리를 만나면 그때 그 느낌이 되살아나요.”

    그는 국악고 2學年 때 스승 박송희를 만나 스승이 世上을 떠나는 2017年까지 30年 넘게 師事했다. 그러던 中 2011年 임방울國樂制에서 大統領賞을 받으며 名唱 班列에 올랐다. 國內와 美國 日本 英國 프랑스 브라질 等 海外에서도 ‘興甫歌’ ‘赤壁歌’를 隨時로 完唱했다.

    2007년 임방울국악제에 출전해 대상을 수상하던 당시의 채수정 명창.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2007年 임방울國樂祭에 出戰해 大賞을 受賞하던 當時의 채수정 名唱. [전영한 동아일보 記者]

    進度가 故鄕이고 집안 雰圍氣가 판소리를 日常으로 했다고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姑母들이 珍島아리랑, 판소리, 六字배기를 즐겨 부르며 노는 文化에서 자랐죠. 姑母들이 特히 소리를 잘했는데 家族들이 모이면 完唱 發表會가 열릴 程度였습니다.

    제가 大學校 들어갈 때는 마당놀이가 생기면서 판소리 創作 붐이 일어나는데 ‘國樂歌謠’라는 이름으로 室內樂團이 생기고 現代化하려는 試圖도 있었지만 原形을 잃어버리는 副作用도 있었죠. 原形을 더 살릴 수 있었다면 레퍼토리도 더 많아지고 豐富해졌을 텐데….”

    그는 自身에 對한 자랑보다 國樂界 全般에 對한 걱정이 많았다.

    요즘 젊은이들이 판소리를 비롯해 現代化된 國樂을 만들고 즐기는 것은 반가운 일로 보이는데요.

    “속事情은 좀 달라요. 人口 減少에 따른 것도 있지만 판소리에 올인하는 親舊가 많이 줄었어요. 트로트 붐이 일면서 그쪽으로 많이 가기도 하고요. 판소리로 大成할 수 있는 親舊들이 자꾸 外部에서 콜이 오니까 그쪽으로 가버려요.

    勿論 제 立場에서는 텔레비전에서 弟子들 보면 반갑고 그 弟子들이 판소리 語法으로 노래를 부르니까 판소리를 알리는 效果는 分明히 있어서 반갑습니다. 다만, 저는 先生이다 보니 正말 大名唱이 될 수 있는 學生들이 너무 빨리 才能을 소진해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죠. 새로움을 向해 가는 건 當然하긴 한데 元來의 씨앗은 누가 지킬 것인지 이런 생각을 하죠.

    판소리 같은 無形文化財는 保有者들이 돌아가시면 다 없어져요. 소리는 입에서 입으로, 呼吸에서 呼吸으로, 무릎과 무릎을 맞대며 이어져야 하는데 말이죠. 저희들은 ‘先生님 침을 먹고 소리를 배운다’고 했어요. 20年 以上씩 侍奉을 하면서 道를 닦듯이 音(音)으로 世上을 얻는다는 自負心이 있었어요. 이른바 得音을 하는 名唱이 繼續 나와야 판소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소리꾼이자 이론가이기도 한 채수정 명창이 펴낸 해설서들. [허문명 기자]

    소리꾼이자 理論家이기도 한 채수정 名唱이 펴낸 解說書들. [허문명 記者]

    외롭고 힘든 得音의 境地

    得音의 境地라는 건 누가 判斷합니까.

    “어려운 質問입니다. 소리꾼 한 사람의 삶을 60年, 70年으로 잡으면 스승에게 20年 배우고 10年을 혼자 篤工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時間은 弟子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판소리를 알리는 거예요.

    어떻든 得音의 境地란 것이 30年 工夫를 해도 될까 말까인데 요즘 사람들이 어떻게 30年을 學習하겠습니까? 强要할 수도 없고요. 저는 事實 엄청난 딜레마에 빠져 있어요.”

    말을 쏟아내던 그가 暫時 한숨을 쉬며 멈추더니 이어갔다.

    “得音의 境地라는 게 참 어렵습니다. 큰스님께 ‘得道하셨습니까?’ 묻는 거나 똑같아요. 어떻든 質問에 答을 하자면 ‘그 境地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說明이 必要합니다.

    “그 境地가 뭔지는 잘 모르는데 아주 微細하게 찾아가지는 地點은 보이거든요.”

    消化할 수 있는 音域이 높아지는 건가요.

    “自己가 表現하고 싶은 소리를 다 낼 수 있는 警지죠. 높은 소리, 낮은 소리, 큰 소리, 작은 소리를 自由自在로 내면서 歌詞가 담고 있는 뜻을 理解하는 것을 넘어서 가슴으로 받아서 부르는 警지죠. 판소리는 1人劇이잖아요. 男子, 女子, 老人부터 아기 목소리도 내야 할 때가 있고 職業도 다양합니다. ‘赤壁歌’ 登場人物들은 軍人 아닙니까. 거기다 鬼神 소리까지 내야 한다고 했죠. 이 모든 걸 내가 表現하고 싶은 대로 할 때 得音했다고 할 수 있겠죠. 事實 모든 藝術 領域이 類型이든 無形이든 得音의 境地로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거죠.”

    흔히 得音이라고 하면 瀑布水 밑에서 修鍊하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得音을 위해 목이 쉬어 터지는 過程이 必要합니다. 저희가 山에서 修鍊하는 ‘100日 工夫’를 하는데 목을 破壞하고 그 기운을 얻기 위한 거예요. 瀑布水에서 或은 洞窟 속에서 온 精神을 쏟아서, 목이 쉰 狀態에서 繼續 노래를 하다 보면 힘만 들어가고 소리가 안 나오는데 그때 功力이 붙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瞬間 배 속에 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소리가 나요. 그렇게 해야 되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 修鍊을 못 해요.”

    例를 들어 마리아 칼라스는 得音한 사람입니까.

    “허리를 丹田에 밀어갖고 하는 通聲 發聲이 宏壯히 잘돼 있어요. 저도 마리아 칼라스, 파바로티 소리 좋아합니다. 또 멜러니 사프카의 ‘The Saddest Thing’ 너무 좋아합니다(웃음). 得音이란 게 이처럼 판소리꾼만의 境地는 아닙니다. 다만 4時間 5時間 6時間 8時間 繼續 부른다는 게 特異한 거죠.”

    저도 眞짜 놀랐습니다. 歌詞를 외우기도 힘들 텐데 어떻게 可能한가요.

    “말하듯이 하니까요. 事實 그게 元來 소리의 本質이죠. 오페라는 ‘말하듯이’가 아니죠. 性惡하시는 先生님들 말을 들으면 오히려 聲帶를 傷하게 한다고 해요.”

    ‘귀名唱’이 오면 판이 확 산다

    판소리라는 게 春香歌, 沈淸歌, 赤壁歌, 水宮歌 等 열두 마당이 딱 定해져 있잖아요. 어찌보면 繼續 똑같은 노래의 反復인데.

    “제 아이가 저한테 ‘엄마는 맨날 興甫歌만 한다’고 놀려요. 제가 흥보가 履修者인데 박록주, 박송희 저 3臺로 이어져 그 똑같은 노래를 30年 동안 부르니까 딸이 只今 스물아홉 살인데 배 속에서부터 듣던 興甫歌를 只今까지도 듣는 거거든요. 하지만 부를 때마다 다릅니다. ‘귀名唱’들은 ‘채수정이 昨年 소리 다르고 올해 소리 다르다’ 이러세요.”

    ‘귀名唱’이란 單語가 참 좋습니다. 觀客을 主人公으로 만들어버려요.

    “소리꾼들의 呼吸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듣는 사람들이에요. 클래식의 境遇에도 마니아들은 마리아 칼라스가 살이 쪘을 때와 빠졌을 때 소리가 다르다는 걸 안다고 하잖아요. 金姸兒 選手가 銀盤 위에서 스핀을 몇 番 했냐, 점프를 얼마만큼 아름답게 했냐를 두고 完成度 點數를 주잖아요. 판소리는 觀客과 合이 돼서 네 感情 내 感情이 마구 섞이는 公演입니다. 귀 밝은 귀名唱들이 오시면 판이 확 살아요.

    판소리도 시김새라고 해서 여러 表現이 있는데 귀名唱들은 그런 거를 잘 따라가면서 같이 應援해 줍니다. 잘되면 ‘얼씨구’ ‘좋구나’ 추임새를 그 자리에서 넣어주는 式으로요. 이걸 視覺的으로 表現해 본다면 내가 只今 ‘빨강’까지 가야 하는데 붉은 핑크밖에 가지 못하는 狀況에서 ‘얼씨구 얼씨구’ 應援을 해주면서 막 저를 ‘빨강’까지 끌고 올라가는 거죠. 그래서 같은 興甫歌라고 해도 觀客이 다르기 때문에 每番 달라요.

    제가 어렸을 때는 鍾路에 全國에서 모인 귀名唱들이 북을 치고 노는 ‘北 房’이란 게 있었어요. 그분들 中에는 20年, 30年 판소리를 들어 名唱들 個人事까지 꿰는 분들이 계시죠. 이런 분들 앞에서 몇 時間씩 소리를 하면 ‘人生 더 살아보아야 제대로 허겄다, 설움을 더 느껴야 혀’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人種 뛰어넘어 韓服 입고 판소리하는 날 꿈꿔

    판소리的 想像力을 人生에 比喩한다면?

    “또 어려운 質問이네요(웃음). 판소리 歌詞는 옛날 건데 事實 제 가슴속에는 다 現在 이야기예요. 춘향이, 興夫, 심청이, 赤壁歌의 曹操 이야기가 다 옛날이야기이지만 只今 내가 살고 있는 삶에 다 存在하는 캐릭터니까요.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고 權力 다툼도 있고 다양한 人間 群像의 삶이 들어 있어요. 赤壁歌만 해도 生과 死를 넘나드는 가장 스펙터클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赤壁歌 中 ‘새타령’을 特히 좋아하는데, 적벽강에서 죽은 百萬 軍事가 曹操를 怨望하는 새가 돼서 그 恨을 뿜어내는 대목이죠. ‘山川은 險峻하고 樹木은 叢雜하여…’로 始作해 중모리장단으로 쭉 부르는데 病을 고쳐주고 싶어 하는 새, 가난을 克服하려고 하는 새 等 새마다 다 스토리가 있어요. 그걸 表現하면서 부르면 마치 제가 적벽강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赤壁歌는 中國의 ‘三國志’를 바탕으로 한 건데 이걸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唯一합니다. 中國에도 없어요. 저는 판소리가 大韓民國뿐 아니라 人類 全體가 갖는 普遍的 情緖와 價値를 담고 있다고 봐요.

    옛날에는 初喪집에 가서도 窓을 했잖아요. 그냥 우는 게 아니라 (實際로 판소리를 하며) 아이고 아이고 어쩌고 가셨어요? 이제 가면 언제 와요? 올 날이나 일러주소. 이렇게 말이죠. 그게 판소리죠.”

    소리를 하면 慰勞가 되나요.

    “너무너무 힐링이 되죠. 속에 있는 걸 쏟아내니까.”

    憂鬱症에도 좋겠는데요(웃음).

    “實際로 憂鬱症 治療받은 사람 많아요. 사람들하고 疏通하고 自己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수 있고. 요즘 같은 季節에 登山 가서 山꼭대기에 올라 (다시 판소리로) 이 山 저 山 꽃이 피니 分明 곧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만 世上事 쓸쓸하더라~ 이러면서 내 感情을 自然에 表現해 보세요. 속이 뻥 뚫릴걸요.”

    世界판소리協會는 어떻게 만들게 된 건가요.

    “판소리가 世上과 疏通하는 어떤 채널이 있어야 되겠다 생각하던 次에 ‘世界跆拳道聯盟’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跆拳道도 모여서 하는데 판소리도 모여서 하자, 그것도 世界를 겨냥해서! 이런 생각이 든 거죠.

    只今 全 世界 世宗學堂에 韓國語 붐이 일고 있잖아요. 베트남 같은 境遇 第2外國語가 韓國語예요. 저도 가보았는데 너무들 좋아하는 거예요. 樂器가 必要 없죠. 서울문화財團 支援을 받아서 敎材도 만들었어요. 이걸 가지고 海外에 가서 敎育하고 이 사람들이 韓國에 와서 같이 ‘世界판소리 總蹶起(웃음)’ 하는 ‘월드판소리 페스티벌’을 하고 싶어요. 黑人 白人이 다 모여서 韓服 입고 판소리 부르는 날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너무 幸福합니다.”

    弟子 中에 카메룬界 프랑스人 麻浦 로르 氏가 있던데요.

    “올해 4學年이 됐네요. 1984年生인데 프랑스에서 碩士까지 마치고 韓國에 와 다시 新入生이 됐어요. 三星電子 프랑스 知事에 다녔는데 韓國語를 배우려고 찾아간 한국문화원에서 春香歌 ‘쑥대머리’ 公演을 보고 꽂혀서 人生을 바꿨대요.”

    판소리에 담긴 恨의 情緖를 外國人들이 理解할까요.

    “平生 소리꾼으로 판소리 工夫를 하다 보니 恨의 情緖란 게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 國境을 超越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삶에서 解決되지 않은 슬픔, 問題를 解決하려고 努力하는 過程의 무거움, 人間의 普遍的인 喜怒哀樂, 生老病死의 苦痛은 나라와 國籍을 不問하고 모든 人間이 갖고 있는 恨의 情緖더라고요. 그렇다 보니 家事를 너무 잘 理解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親切이야말로 宗敎’라고 했지요. 公演에서도 느꼈지만 宏壯히 따뜻한 에너지가 느껴졌어요. 판소리가 주는 에너지입니까.

    “판소리 하나하나가 人文學 敎科書입니다. 그걸 感情에 실어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의 에너지가 없어서는 안 되죠. 이 대목에서 스승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박송희 先生님은 삶의 그늘을 바라봐 주시는 분이셨어요. 人間文化財였지만 너무 가난했고 힘들게 사셨어요. 하지만 참敎育者셨습니다. 公演場에 가면 警備 아저씨, 衣裳室 食堂 아줌마부터 먼저 챙기는, 남을 配慮하시고 謙遜하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 먼저 多價가신 어른이셨어요. 저는 스승님으로부터 至極한 사랑을 받으며 工夫했습니다. 판소리와 삶이 하나였던 분이었어요. 제가 只今까지 판소리를 하는 힘은 스승님에게서 나온 겁니다. 저한테 모든 걸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에 그 恩德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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