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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史 : 네이버 知識百科

  • 南北國時代 新羅의 學者, 文章家, 官僚. [要約] 최치원 南北國時代 新羅의 學者, 文章家, 官僚이다. 黨을 中心으로 한 國際 秩序를 認定하면서도 新羅의 固有性과 土着性을 알리려고 하였다. 特히, 사람에 道가 있고 사람은 나라의 差異가 없다고 主張하여, 人間 中心의 普遍性과 그에 따른 多樣性을 强調하여 新羅의 世界化를 이끌었다. 다만, 生存 當時 新羅가 衰退하여 政治 理念과 思想은 新羅 社會에서 實現되지 못하고, 以後 高麗 國家의 體制 整備에 影響을 미쳤다. 그의 文章은 東아시아 文書의 形式을 그대로 反映한 것이어서 朝鮮時代에도 特別히 注目을 받았다. [家計 및 成長 背景] 최치원(崔致遠)의 正確한 死亡 時期는 알 수 없지만, 857年(헌안왕 1)에 태어나 908年(孝恭王 12) 以後까지 活動하였다. 최견일(崔肩逸)의 아들이자 僧侶 賢俊(賢俊[賢儁, 賢雋, 玄準])의 동생으로, 최인연(崔仁?[崔彦?]) · 최서원(崔棲遠(崔栖遠))과는 4寸 乃至 6寸의 兄弟 사이였다. 최견일은 861年(景文王 2)...

  • 慶尙北道 경주시 文武大王面에 있는 南北國時代 統一新羅 第30代 文武王의 陵. 王陵·水中陵. 私的. [開設] 1967年 史跡으로 指定되었다. ‘大王巖(大王岩)’이라고도 불린다. 海邊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다. [內容] 文武王은 백제와 高句麗를 平定하고 唐나라의 勢力을 몰아내어 三國統一을 完遂한 뛰어난 君主(君主)이다. 이와 같이 偉大한 業績을 남긴 文武王이 在位 21年만인 681年에 昇遐하자, 遺言에 따라 東海에 葬禮를 지냈다. 그의 遺言은 佛敎法式에 따라 化粧한 뒤 東海에 묻으면 龍이 되어 東海로 侵入하는 倭寇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化粧한 遺骨을 東海의 入口에 있는 큰 바위 위에 葬事지냈으므로 이 바위를 大王巖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이 陵은 海邊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自然바위이다. 南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둘레에는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間隔을 두고 配置되어 있어 마치 護石처럼 보인다....

  • 慶尙北道 경주시에 있는 三國時代 新羅 時期의 돌무지덧널무덤. 積石木槨墳. 世界文化遺産. [開設] 天馬塚(天馬塚)은 慶尙北道 경주시 황남동에 造成한 고분공원[大陵苑] 안 西北쪽에 位置하고 있고, 황남동 第155胡粉으로 管理되어 왔다. 當時 政府의 慶州綜合開發計劃에 依據 황남동 第98號 古墳의 內部를 公開하여 觀光資源으로 活用한다는 計劃을 樹立하였다. 第98號墳은 韓國 최대형 古墳이므로, 이를 發掘하기 위해서는 이 古墳보다 小型의 古墳을 發掘하여 經驗과 情報를 얻은 後, 제98호분을 本格的으로 發掘한다는 方針을 세워 제155호분을 먼저 發掘하게 되었다. 1973年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調査團에 依해 發掘調査를 實施하였다. 그러나 第155號墳 天馬塚度 大型에 屬하는 古墳이고, 當時까지 發掘調査된 古墳 가운데 가장 規模가 크고 거의 緩刑에 가까운 古墳이어서 新羅의 王陵級 大型古墳에 關한 새로운 情報를 많이 提供하였다. 古墳이 所在한 곳은 慶州盆地 內의 거의...

  • 新羅時代의 身分制度. [開設] 이 制度는 骨品(骨品), 卽 個人의 血統(血統)의 높고 낮음에 따라 政治的인 出世는 勿論, 婚姻, 家屋의 規模, 衣服의 빛깔, 牛馬車(牛馬車)의 裝飾에 이르기까지 社會生活 全般에 걸쳐 여러 가지 特權과 制約이 加해졌다. 世襲的인 性格이나 制度 自體의 嚴格性으로 보아, 흔히 印度(印度)의 카스트制度(Caste制度)와 比較되고 있다. 新羅의 國家形成期에 만들어지기 始作해 6世紀 初는 이미 法制化되었으며, 新羅의 三國統一을 거쳐 滅亡에 이를 때까지 約 400年 동안 거의 變함없이 新羅社會를 規制하는 重要한 根本으로서 技能, 作用하였다. [成立背景] 이 制度는 新羅의 國家成長過程에서 생긴 歷史的 産物이었다. 卽, 新羅는 聯盟王國(聯盟王國)에서 貴族國家로 바뀌어가고 있던 時期에 征服, 倂合된 各地의 크고 작은 城邑國家(城邑國家) 또는 聯盟王國의 支配層을 王卿(王京)인 慶州(慶州)에 이주시키고 이들을 中央의 支配體制 속에 편입시켰다. 이때 이들 勢力의...

  • 645年(寶藏王 4) 高句麗가 唐나라 軍隊와 安市城에서 벌인 攻防戰. [歷史的 背景] 644年 唐나라 太宗(太宗)은 相當한 反對輿論을 무릅쓰고 高句麗 侵攻을 決心했다. 이를 위해 緻密한 計劃을 세워 軍糧·船舶·各種 攻城具(攻城具) 等을 準備하는 한便, 少數의 兵力을 派遣해 高句麗 邊境地帶의 形勢를 偵探했다. 이어 연개소문(淵蓋蘇文)李 영류왕과 大臣들을 殺害하고 執權했으므로 聲討하지 않을 수 없다는 口實을 내세워 高句麗 侵攻을 實踐에 옮겼다. [經過] 645年 4月 1日 이세적(李世勣)李 이끄는 당군의 先鋒은 會員眞(懷遠鎭: 只今의 狂녕 附近) 쪽으로 進軍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通情眞(通定鎭: 只今의 臣民 附近)에서 遼河(遼河)를 건너 高句麗 侵攻을 開始하였다. 그들은 高句麗의 防禦體系를 혼란시키기 위해 神聖(新城: 只今의 무筍 倍管山城)·建安城(建安城: 只今의 개평) 等 여러 城을 同時에 攻擊했으나, 이 計劃이 失敗하자 全君을 집결시켜 4月 15日부터 蓋牟城(蓋牟城: 무筍...

  • 612年(嬰陽王 23) 7月, 高句麗와 隋나라의 戰爭에서 벌어진 主要 戰鬪의 하나. [要約] 薩水大捷(薩水大捷)은 612年(嬰陽王 23) 7月, 高句麗와 隋나라의 戰爭에서 벌어진 主要 戰鬪의 하나이다. 612年 7月 24日에 乙支文德이 指揮한 高句麗軍이 于仲文과 宇文述 等이 指揮한 隋나라軍을 薩水에서 크게 擊破한 戰鬪였다. 살수는 只今의 淸川江이다. [內容] 612年 高句麗와 隋나라의 戰爭에서 展開된 主要 戰鬪의 하나이다. 高句麗 側의 指揮官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고, 隋나라 側의 指揮官은 于仲文(于仲文)과 宇文述(宇文述) 等이었다. 612年 7月 撒水(薩水)에서 戰鬪하였는데, 살수는 只今의 淸川江(淸川江)이다. 612年 隋나라의 煬帝(煬帝)는 113萬의 大規模 軍隊를 動員해 高句麗를 攻擊하였다. 陸軍은 40個의 部隊로 編成하였는데, 各 部隊를 軍(軍)이라고 하였다. 于仲文과 宇文述 等은 40個의 郡 中에서 9軍을 指揮하였다. 9軍의 兵力 數는 30萬 5千 名이었다. 于仲文과 宇文述의...

  • 高句麗 · 百濟 · 新羅의 세 나라가 正立하였던 韓國史의 한 時期. [要約] 三國時代는 高句麗 · 百濟 · 新羅의 세 나라가 正立하였던 韓國史의 한 時期이다. 南北國時代, 後三國時代, 高麗時代, 朝鮮時代처럼 韓國史 속의 主要 國家를 中心으로 한 時代 區分 用語이다. 三國이 古代 國家의 體制를 完備해 간 4世紀 以後부터 新羅의 三國統一까지를 의미하는 것이 一般的이지만, 三國의 國家 形成부터 三國時代에 包含시키기도 한다. [意味] 三國時代는 高句麗, 백제, 新羅의 세 나라가 定立(鼎立)하였던 韓國史의 한 時期를 의미한다. 南北國時代, 後三國時代, 高麗時代, 朝鮮時代처럼 韓國史 속의 主要 國家를 中心으로 한 時代 區分 用語의 하나로 使用되고 있다. 現傳 歷史서 中에서 三國을 하나의 時代로 區分한 것은 高麗 前期 金富軾(金富軾, 1075~1151)의 『三國史記(三國史記)』(1145)가 가장 이르다. 金富軾은 『三國史記』를 통해 考慮보다 앞선 王朝를 三國으로 提示하고, 그의 歷史를 紀傳體...

  • 三國時代 新羅의 三國統一에 中樞的인 役割을 擔當한 長壽. [要約文] 金庾信은 三國時代 新羅의 三國統一에 中樞的인 役割을 擔當한 將帥이다. 595年(眞平王 17)에 태어나 673年(文武王 13)에 死亡했다. 新羅에 投降한 伽倻王族의 後孫으로, 眞骨 貴族 出身이다. 15歲에 畫廊이 되어 郎徒를 이끌고 高句麗·백제와의 戰鬪와 貴族層의 叛亂 鎭壓에서 功을 세워 重要 人物로 成長했다. 누이와 結婚한 金春秋가 태종무열왕에 卽位하면서 政治的 位相이 더 높아졌다. 660年 正月에 貴族會議의 首腦인 上大等이 되었고, 三國統一 戰爭 過程에서 新羅를 이끄는 中樞的 구실을 했다. 死後에 興德王이 興舞大王으로 追封했다. [開設] 曾祖父는 532年(法興王 19) 新羅에 投降한 金官伽倻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武力(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曾祖父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眞興王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 三國時代 新羅의 第29代(在位: 654~661) 王. [要約] 태종무열왕은 三國時代 新羅의 第29代 王이다. 在位 期間은 654~661年이다. 이름은 金春秋로 진덕여왕 事後 臣下들의 推戴로 卽位하여 新羅 中隊王室을 열었다. 卽位 前부터 高句麗와 唐나라 사이를 直接 오가며 卓越한 外交力量을 보여주었고, 金庾信과 聯合하여 新貴族勢力을 形成하여 보다 强化된 王權 中心의 執權體制를 確立했다. 以後 親堂外交를 통해 唐나라를 後援勢力으로 삼고 高句麗와 백제를 攻略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三國統一이라는 大業의 土臺를 마련한 後 在位한 지 8年 만에 死亡했다. 諡號는 武列이고 廟號는 太宗이다. [開設] 在位 654∼661. 性은 金氏. 이름은 춘추(春秋). 眞智王의 孫子로 伊飡(伊飡) 용춘(龍春 또는 龍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眞平王의 딸이다. 비는 文明否認(文明夫人)으로, 角粲(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卽 金庾信(金庾信)의 누이同生 문희(文姬)이다. [生涯 및...

  • 南北國時代 統一新羅의 第56代(在位:927~935) 王. [要約文] 敬順王은 南北國時代 統一新羅의 第56代 王이다. 在位 期間은 927~935年이며. 新羅의 마지막 王으로서 나라를 高麗 太祖에게 바쳤다. 弓裔와 甄萱이 勢力을 다투던 경명왕 때부터 경애왕 臺에 이르러 考慮와의 友好關係를 强化하자 甄萱이 이를 牽制하고자 新羅를 侵攻하여 景哀王을 殺害하고 敬順王을 擁立했다. 敬順王은 亂暴한 甄萱의 保護國보다는 王建에게 投降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935年 國家를 考慮에 넘길 것을 決意하고 國書를 보냈다. 王建은 新羅를 慶州로 고쳐 그의 食邑으로 주고 慶州의 事審官으로 삼았다. 978年에 昇遐했다. [開設] 在位 927∼935. 新羅의 마지막 王으로서 나라를 高麗 太祖에게 바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性은 金氏, 이름은 部(傅)이며, 문성왕(文聖王)의 後孫이다. 할아버지는 의흥大王(懿興大王)으로 追封된 管○(官○, 或은 實虹·乍慶)이며, 아버지는 新興大王(神興大王)으로 追封된...

  • 고조선의 第1代(在位:BCE.2333~BCE.1122) 王. [要約] 檀君은 初期國家時代 古朝鮮의 第1代 王이다. 在位 期間은 BCE.2333年부터 BCE.1122年까지이며 檀君王儉·單웅天王이라고도 한다. 천제인 桓因의 孫子이며, 桓雄의 아들로, 西紀前 2333年 阿斯達에 都邑을 定하고 檀君朝鮮을 開國하였다. 以後 나라를 다스리다 1908歲에 神仙이 되었다고 한다. 檀君에 關한 最初의 記錄은 高麗時代의 스님 一然이 쓴 『三國遺事』이다. 朝鮮時代 세종대왕이 檀君을 古朝鮮의 始祖로 理解하여 平壤에 祠堂을 짓고 高句麗 始祖 東明王과 함께 모신 以後로 檀君은 韓民族의 名實相符한 始祖가 되었다. [開設] 檀君(壇君) · 檀君王儉(壇君王儉) · 段웅天王(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天帝(天帝)인 桓因(桓因)의 孫子이며, 桓雄(桓雄)의 아들로 西紀前 2333年 阿斯達(阿斯達)에 都邑을 定하고 檀君朝鮮을 開國하였다. 古朝鮮과 檀君에 關한 最初의 記錄은 中國의 『魏書(魏書)』와 우리 나라의 『고기(古記)...

  • 889年(진성여왕 3) 新羅의 沙伐州(沙伐州 : 只今의 慶尙北道 喪主)에서 元宗·애盧가 일으킨 農民 蜂起. [開設] 新羅는 中臺의 全盛期를 지나 下待로 접어들면서 政治 · 社會的인 矛盾이 深化되어 갔다. 王位 繼承을 둘러싼 中央 眞骨 貴族 間의 잦은 政爭(政爭)으로 中央 政府의 地方 統制力이 弱化되었으며, 管(官)이나 貴族 및 寺院의 土地 兼倂 擴大로 一般 農民들은 漸次 土地로부터 遊離되어 갔다. 國家 經濟의 基盤인 農民層이 分解된 反面, 奢侈와 享樂의 風潮로 中央 政府의 財政 需要는 漸漸 늘어만 갔다. 眞聖女王 代에는 이러한 矛盾이 極度로 深化되었음에도 根本的인 改革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889年 地方의 州 · 軍에서 稅金을 바치지 않아 國庫가 텅 비고 財政이 窮乏하게 되자, 中央 政府는 獅子를 派遣해 오히려 租稅를 督促하였다. 이러한 租稅 負擔은 被支配層인 一般 農民에게 그대로 轉嫁되었으며, 이에 抵抗하는 農民 蜂起가 全國的으로 일어났다. 代表的인 農民 蜂起가 바로...

  • 忠淸南道 공주시 宋山里 古墳群 內에 있는 三國時代 百濟 第25代 武寧王과 王妃의 陵. 私的. [開設] 武寧王陵은 忠淸南道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에 位置하며 1963年 1月 21日 史跡으로 指定된 송산리古墳群에 包含되어 있다. 송산리古墳群은 百濟의 돌房무덤[橫穴式石室墳]李 主宗을 이루는데, 이 古墳群에는 當時 中國 量(梁)나라 支配階層 무덤의 形式을 그대로 模倣하여 築造한 甓돌무덤[塼築墳]으로서 武寧王陵과 함께 第6號 甓돌무덤이 있다. 武寧王陵은 發掘調査 結果, 무덤 안에서 무덤의 主人公을 알려주는 墓誌石(墓誌石)이 發見됨으로써 百濟 第25代 武寧王(在位 501∼523)의 무덤이라는 事實이 밝혀졌다. [內容] 武寧王陵은 송산리 第6號 甓돌무덤 北쪽의 나지막한 丘陵地帶에 位置한다. 日帝强占期인 1930年代에 송산리古墳群이 調査되면서 武寧王陵이 第6號 甓돌무덤의 現武陵(玄武陵)으로 認識되어 처음에는 王陵으로 注目되지 않았다. 따라서 王陵으로 發見된 것도 매우...

  • 統一新羅時代, 788年(元聖王 4)부터 施行된 관인 選拔 制度. [要約] 讀書三品科(讀書三品科)는 統一新羅時代 788年(元聖王 4)부터 施行된 관인 選拔 制度이다. 讀書出身科(讀書出身科)라고도 부르며, 儒敎 敎育 機關인 國學과 일정한 關聯性이 있는 制度로 여겨진다. 旣存에 官印을 뽑을 때 畫廊도 活動에서 特出한 사람이나 활쏘기와 같은 재주가 있는 사람을 選拔하였으나, 讀書三品科를 施行함으로써 試驗을 통해 한學籍 素養을 갖춘 人物을 管理로 選拔하게 되었다. 우리 歷史上 最初의 科擧制 乃至 過去의 始原的 形態로 理解되고 있으나, 新羅 骨品制 社會에서 주된 管理 登用 方法으로 施行되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內容] 統一新羅 下代의 棺인 選拔 方式으로, 讀書出身科(讀書出身科)라고도 하며, 元聖王이 처음 始作하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三國史記(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10 元聖王 4年(788) 봄兆에 이 制度가 記錄되어 있는데, 그 內容은 다음과 같다. "『春秋左氏傳...

  • 三國時代 新羅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出土된 禁制 管. [開設] 新羅古墳에서는 公式的으로 5點의 金管이 出土되었고, 國家에서 押收한 盜掘된 金冠 1點을 合하면 모두 6點의 金管이 現存한다. 금판을 오리고 붙여 만든 것이며, 아래쪽에 둥근 冠테[臺輪]가 있고 그 위로 5個의 세움裝飾[立飾]을 附着한 것이다. 세움裝飾은 나뭇가지模樣과 사슴뿔模樣이다. 金冠의 表面에는 翡翠(翡翠) 곱은玉[曲玉]과 금판을 둥글게 오려 만든 달개[瓔珞]가 많이 달려 있다. [淵源 및 變遷] 新羅金冠의 淵源에 對해서는 시베리아 遊牧 民族이 新羅로 移住하면서 傳해졌다고 보는 見解와 新羅人들이 自體的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는 見解가 있다. 前者는 新羅 金冠의 나뭇가지模樣과 사슴뿔模樣 裝飾이 시베리아 샤먼(shaman)李 着用했던 官과 類似하다는 點에 根據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베리아 샤먼이 썼던 官과 新羅 金冠 사이의 時間·空間的 틈이 너무나 큰 것이 問題이다. 그 때문에 新羅人들이 北方의 黃金文化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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