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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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陵 (李陵: ? ~ 紀元前 74年 )은 中國 傳한 無題 (武帝) 때의 人物로, 傳한 匈奴 의 軍人이다.

匈奴에 맞서 싸우다 [ 編輯 ]

農書 (?西) 胎生으로, 伊陵의 할아버지인 李珖(李廣)은 問題(文帝) · 經濟(景帝) · 無題(武帝) 3代에 걸쳐 出仕하였으며 悲運을 맞은 武裝으로 알려져 있는 人物이다. 아버지 이당호(李當戶)는 無題의 銃身이었던 한언(韓?)을 두들겨 패는 剛直한 面을 지닌 선비였다. 이당호는 伊陵이 태어나기 몇 달 前에 死亡했고, 伊陵은 이당호의 遺腹子로 태어났다.

젊은 時節부터 理事長群 李廣利 (李廣利)와 함께 匈奴 와의 戰爭에 參加하여 여러 次例 功을 세웠다.

賤한(天漢) 2年(紀元前 99年) 祈禱위(騎都尉)로 任命된 伊陵은 無題의 名으로 當時 匈奴와 對峙 中이던 理事長群(貳師將軍) 李廣利 (李廣利)의 軍을 支援하기 위해 5千 步兵을 거느리고 出陣하였다. 그러나 그가 合流하기도 前에 匈奴 선우가 거느리는 匈奴 本隊 3萬 名과 遭遇했고, 兩側은 戰鬪에 들어갔다. 伊陵의 軍은 死者와도 같이 匈奴에 맞서 奮戰하며 여섯 倍가 넘는 相對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여드레에 걸쳐 激戰을 이어갔고, 匈奴群 1萬 名이 이 戰鬪에서 죽었다. 伊陵은 自身의 奮戰을 部下 進步落(陳步樂)을 보내어 武帝에게 報告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伊陵의 軍도 화살이 다하고 칼은 다 부러져서 더 싸움을 持續할 수 없는 狀況이 되었고, 結局 伊陵은 匈奴에 降伏하고 말았다.

伊陵이 匈奴에 降伏하였다는 報告를 들은 武帝는 激怒하여 앞서 勝戰譜를 傳하고 郎中(郞中)으로 任命되어 있던 進步락을 問責했고, 進步落은 自決했다. 한 朝廷의 다른 臣僚들度 無題의 憤怒에 迎合해 伊陵이 處罰받아 마땅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속에서 오직 太史令 司馬遷 (司馬遷)만이 伊陵이 我軍의 여섯 갑절에 達하는 匈奴의 大兵力에 맞서 奮戰했던 것과 그의 無辜함을 들어 伊陵을 辯護했고, 武帝는 그가 李廣利를 誹謗했다는 理由만으로 司馬遷을 下獄시켜 버렸다. 司馬遷은 얼마 뒤 宮刑(宮刑)에 處해졌다.

匈奴의 우교왕으로써 [ 編輯 ]

敵이라고는 하지만 匈奴의 大兵力을 相對로 熾烈한 奮戰을 벌였던 伊陵의 軍事的 才能과 그 人格을 높이 샀던 저諸侯 鮮于 는 伊陵에게 自身의 部下가 될 것을 勸하였는데, 伊陵은 拒絶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武帝는 自身의 處分을 後悔하고 伊陵의 남은 部下에게 褒賞을 주었고, 공손오(公孫敖)에게 命하여 伊陵을 맞아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 計劃은 失敗하였다. 도리어 공손오는 匈奴 捕虜로부터 '李 將軍(李將軍)'李 匈奴에 恨의 軍事 戰略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듣고 武帝에게 報告했고, 武帝는 다시금 激怒하여 伊陵의 妻子를 비롯해 할머니 ·어머니 · 伊陵의 兄과 그 兄의 家族 및 四寸동생 이우(李禹, 移監李敢의 아들) 一家를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 事件으로 農書 땅에서는 李氏 姓 가진 것 [1] 을 부끄러워할 程度였다고 한다. 그러나 實際로 匈奴 捕虜가 말한 '李 將軍'이란 伊陵보다 먼저 匈奴에 歸順했던 韓人 李曙(李?)라는 將軍을 가리킨 것이었다. 伊陵은 두 番이나 名譽를 毁損당했다.

韓의 獅子로부터 이를 들은 伊陵은 一族의 抑鬱한 죽음을 恨歎하였고, 그 以西를 直接 죽였다. 이 때문에 臺알지(大閼氏: 저諸侯 선우의 어머니)는 憤怒해 伊陵을 죽여 버리려고 했지만, 저諸侯 선우는 伊陵을 北쪽 땅에 숨기게 했고, 臺遏止가 죽은 뒤에 伊陵은 匈奴 내지로 돌아와서 後에 저諸侯 선우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그 사이에서 아들을 두었다. 그는 선우로부터 匈奴의 우교왕(右校王)으로 任命되었고, 紀元前 74年에 죽었다.

伊陵의 아들 [ 編輯 ]

伊陵과 저諸侯 선우의 딸 사이에서 때어난 아들은 浩瀚野 鮮于 의 治世에 誤字度位를 誤字선우 로 擁立해 浩瀚野 선우에 맞서 叛亂을 일으켰으나 失敗하고 처형당했다.

各州 [ 編輯 ]

  1. 이것이 伊陵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