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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文獻 속 ‘밥床’]고사리 꺾은 뜻은 - 京鄕新聞
孤影 飮食文化硏究者

“국숫집 主人이 칡국수를 큰 待接으로 하나 내왔다. 또한 山골짜기에서 먹을 만한 맛이었다(店主餉以葛粉麵一大椀. 亦峽中佳味也).”

1822年 陰曆 3月16日부터 7月28日까지, 오늘날의 平安南道 地域에서 任務를 遂行한 暗行御史 舶來兼(1780~1842)은 暗行의 記錄 <서수일機(西繡日記)>를 남겼다.

그 記錄 3月25日(陰曆)字의 한 줄이 위와 같다. 朝鮮 後期 平壤과 같은 大都市로 가는 길목에는 국숫집이 있었다. 그때는 大槪 칡 澱粉 또는 메밀가루를 반죽해 눌러 事理를 뽑았다. 初겨울에 갈무리한 메밀을 한 철 먹고, 메밀이 떨어지면 山野에 至賤인 칡을 캐 澱粉을 받았다. 밀가루는 귀하디貴翰 資源이었다. 보리도 다 먹고 벼 나오기는 먼 즈음, 韓半島의 밀은 주린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作物이었다. 하지만 朝鮮 八道, 多數 百姓의 국수까지 堪當할 만큼 나지는 않았다.

뜻밖의 澱粉, 事理도 있다. 굶주림을 避해 北韓을 떠난 이들은 ‘느릅쟁이’를 記憶한다.

느릅쟁이란 느릅나무 澱粉이다. 北韓 料理團體의 代表 格인 朝鮮料理協會 웹페이지에 따르면 “느릅쟁이는 느릅나무뿌리를 캐여 껍질을 벗긴 다음 바싹 말리워 가루낸것”이다. 類例없는 소리가 아니다. 文獻 속의 ‘유근피(楡根皮)’, 곧 느릅나무 뿌리 澱粉, ‘楡白皮(楡白皮)’, 곧 느릅나무 껍질 澱粉이다. 둘 다 朝鮮時代에 藥用과 食用으로 널리 쓰였다.

다시 朝鮮料理協會에 따르면 “느릅쟁이국수는 강냉이가루에 느릅쟁이를 섞어 국수사리를 만들고 동치미무우와 고기꾸미를 얹은 다음 국수양념醬을 쳐서” 낸다. 그 맛은 “차분하면서도 질기고 구수”하다고 한다(이상 原文의 表記 그대로 引用한다). 이런 經驗이 參考가 됐으리라. 數百年 前 아메리카 大陸에서 건너온 감자의 澱粉은 韓半島에서 금세 舍利의 原材料라는 役割을 찾았다. 고구마 전분도 그 뒤를 잇는다.

그러고 보니 歷史學을 연 歷史서 <詐欺(史記)>는 伯夷(伯夷)와 宿題(叔齊)의 이야기를 記錄했다.

參考로 中國의 門戶 루쉰(魯迅)은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詐欺>의 ‘伯夷列傳’을 中國 歷史上 名門으로 치켜세운 바 있다. 伯夷와 宿題는 周나라 武王의 商나라 征伐을 의롭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周나라의 穀食을 拒否하고 山에 숨어 살며 “고사리를 캐 먹다(采薇而食之)”가 죽었다. 나물만 먹었다고? 아닐 테다. 고사리 뿌리에도 澱粉이 가득했으니 또한 救荒에 要緊했다.

나물로 먹는 고사리는 캐지(采) 않는다. 꺾는다. 캤다면 뿌리 찧어, 澱粉 받아, 국수를 누르거나 수제비를 뜯거나 옹심이를 빚어 먹었다는 말일 테다. 勿論 ‘채(采)’에는 ‘採取’의 뜻이 있다. ‘米(薇)’는 고사리가 아니라 野生 콩을 가리킨다는 풀이가 있다. 漢文 文法과 生物種 同情(同定·Biological Identification)을 여기서 이루 다 따질 수 있겠는가. 아득한 古代로부터 오늘날까지, 뱃속에 풀漆하기가 單 한瞬間도 만만찮았음을 떠올릴 뿐이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孤影 飮食文化硏究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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